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명화 한 편을 감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10초나 30? 아니면 꼬박 2? 중요한 화가의 전시회에는 300점을 거는 것이 표준이 되어 있는데, 그러면 그런 곳에서는 좋은 그림 한 점을 감상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일까? 그림 한 점에 2분을 쓴다면 300점을 모두 보기까지 열 시간이 걸린다(점심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화장실에 가는 시간은 셈에 넣지 않았다). 마티스나 마그리트나 드가의 전시회에 가서 열 시간 동안 그림을 본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세요. 나는 그런 적이 없다.    p.116

줄리언 반스의 첫 예술 에세이집이다. 그는 1989,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제리코의 그림 한 점을 두고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2013년까지 25년간 반스는 <현대 화가>, <런던 리뷰 오브 북스>, 〈가디언〉 등 다양한 예술, 문학 잡지에 예술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 이 책은 그 중에 제리코에서 들라크루아, 마네, 세잔을 거쳐 마그리트와 올든버그, 하워드 호지킨까지 낭만주의부터 현대 미술을 아우르는 17편의 이야기를 선별해 엮었다. 시중에 그림 읽기와 관련된 가벼운 에세이들이 워낙 많기도 하고, 소설가가 읽어주는 그림 안내서라고 하니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에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깊이 있고, 놀라울 정도로 전문적인 책이라 '아주 사적인' 미술 비평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수준 높은 책이었다.

 

인물 사진을 많이 그렸던 드가하면 발레를 주제로 한 그림들이 먼저 떠오른다. 대개 리허설이나 공연이 끝난 직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여성 발레리나들의 그림들은 누구나 하나쯤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런데 당시에 드가를 가리켜 "여자의 은밀한 모양을 품위 없게 그리는 일에 주력하는 화가"라는 주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여자들을 싫어했으며, 그들을 경멸하는 그림을 그렸다는 건데 아름다운 발레리나들의 모습을 그렸던 화가가 여성을 혐오한다는 혹독한 오해를 받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외에도 보나르는 한 여인의 그림을 385점이나 그려 지독한 사랑의 상징이 되었고, 세잔은 모델에게 사과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호통 치다 화가 나면 붓을 내팽개치고 화실을 뛰쳐나갔다고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미술에서 단 하나 중요한 건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브라크의 말이다. "색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 눈이 있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과 언어가 서로 얼마나 무관한지 안다." 나아가 그는 "어떤 것을 정의하는 일은 그것을 정의로 대체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전기를 쓰는 일은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았던 인생을 전기로 대체하는 일이며 잘해야 난감한 일일 뿐이지만, 브라크의 도덕적 진실을 접할 수 있는 한 그런대로 괜찮으리라.    p.304

줄리언 반스. 소설뿐 아니라, 음악과 요리,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깊이 있는 평론을 써온 걸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 출간된 에세이만 해도 벌써 네 번째 책이니 말이다. 최근에 읽었던 그의 요리 에세이도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어려서 요리를 배울 기회가 충분치 않았던 줄리언 반스가 중년이 되어 뒤늦게 낯선 영역이던 부엌에 들어서서요리를 책으로 배우며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까칠한 부엌의 현학자가 투덜거리는 말들이 너무 공감이 되어 재미있게 읽었었다. 백 권이 넘는 요리책을 사 모으며 요리 경험과 교훈을 쌓아나가는 와중에 모호한 요리책에는 혹독한 독설을 퍼붓곤 했는데, 그 모든 것들이 그냥 투덜거림이 아니라 핵심을 찌르는 위트라서 인상적이었다.

 

이번에 만난 미술 에세이 역시 어느 책에서도 말해주지 않았던 지극히 사소한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그의 독창적인 시선과 소설가다운 탁월한 상상력, 문화 전반의 깊은 지식을 토대로 풀어내고 있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미술사학자의 책도, 예술가의 책도 아닌, 그저 예술을 감상하는 비전문가의 글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소설가라는 사실이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 상상력으로 완전히 다른 창조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 말이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그림을 두고 작품의 배경이 된 사건과 그림이 탄생할 때까지의 과정, 그리고 화가의 삶과 다른 이들의 감상까지 조사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소설가 특유의 상상력을 가동해 한 편의 드라마로 엮어내고 있다. 사실 에세이라고 하기엔 내용들이 조금 어렵고, 낯선 배경 지식들이 익숙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홀린듯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것이 줄리언 반스의 힘이 아닐까 싶다. 소설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특별한 그림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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