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호의 죄 - 범죄적 예술과 살인의 동기들
리처드 바인 지음, 박지선 옮김 / 서울셀렉션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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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작고 행복한 공동체였다.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그랬다. 젊은 남녀가 어울려 하루 종일 작업실에서 일하고 20블록 떨어진 가장 가까운 식료품점까지 떼 지어 갔다가 누군가의 로프트에서 맥주를 마시고 마리화나를 피우며 파티를 벌였다. 그 뒤 머드 클럽이나 터널로 가서 밤늦게까지 유흥을 즐겼다.   p.53

뉴욕의 소호, 몇 블록에 걸쳐 프라다 플래그십 스토어를 비롯한 명품 브랜드의 매장이 밀집해 있어 흔히 뉴욕 패션의 메카라 부르는 곳이다. 하지만 본래 소호는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예술의 거리로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대공황 이후 도산과 폐업으로 황폐해진 소호 거리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아틀리에를 만들기 시작했고, 감각 있는 젊은 예술가들의 갤러리와 개성 넘치는 숍이 속속 생겨나 예술의 거리로 거듭났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소호가 세계 예술계의 중심이었던 시절에 벌어진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소호의 이름난 미술품 컬렉터 어맨다 올리버가 처참하게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그녀의 남편 필립 올리버는 거실 의자에서 피범벅이 돼 죽어 있는 아내를 발견하자마자 가까운 경찰서로 가서 얼빠진 상태로 자수한다. "제가 아내를 죽였어요." 끔찍한 살인 사건의 최초 발견자가 배우자일 경우, 자연스레 용의자가 되는 것이 수순이다. 그런데 남편이 자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좀처럼 범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울프심 증후군이라는 치매성 뇌질환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필립의 개인 변호사는 사립 탐정 호건을 고용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고, 부부의 지인이자 탐정의 친구인 미술품 딜러 잭이 함께 용의자들을 추적해나간다. 

 

"퍽이나 감동적이군요. 하지만 너무 뻔해요." 호건은 지루하고 짜증 난 표정이었다. "난 주로 아내가 버스에 치이는 상상을 하죠."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를 떠도는 듯했다. "다들 배우자의 죽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덫에서 멋있고 깔끔하게 빠져나오는 상상을 하는 거죠. 그런데 결혼에는 교묘한 데가 있어요. 한번 빠져들면 절대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p.107

이 작품의 작가는 세계적 미술 매거진 《아트 인 아메리카》 편집장으로 일평생 예술계에 몸담아 온 리처드 바인이다. 그는 자신의 소설 데뷔작에서 일평생 예술계를 누비며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고스란히 그리고 있다. 소호의 전성기를 구가한 예술가들과 그 주변인들의 삶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용의자를 추적하는 것이 주요 플롯이지만 일반적인 범죄 소설의 분위기와는 꽤 다르다. '광기와 공허함에 사로잡힌 예술'이라는 것은 직접 그것을 경험하거나 주변에서 체험해보지 않는 한 머릿속 상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리처드 바인은 실제 그 바닥에 수십 년을 있었던 경험으로 매우 색다른 범죄 소설을 탄생시켰다. 뉴욕 미술계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는 '본격 예술 스릴러'라는 칭호가 다소 이상하면서도 그럴듯 하다고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누가, 왜 그녀를 죽였는가? 용의자는 여기저기 널려 있다. 남편의 젊은 내연녀와 이혼 당한 전 부인, 그리고 의문의 남자와 자백한 남편까지... 잭슨 폴록과 앤디 워홀의 작품만큼 세련되고 화려해 보이는 예술가 집단의 어둡고 은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소호의 갤러리와 미술관, 뉴욕의 힙한 레스토랑과 바, 아트페어와 페스티벌, 페티시로 점철된 퍼포먼스 등 뉴욕의 내로라하는 명소와 현장을 누비는 묘사도 인상적이었고, 고급 문화로 인식되어온 현대 미술의 저급하면서도 경박한 단면을 통렬하게 꼬집고, 그 추악한 이면을 보여주는 것도 이 작품 만이 주는 매력일 것이다. 물론 펄프픽션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단정한 느낌이고, 후반부의 충격적인 결말에 이르기까지 다소의 지루함을 견뎌야 하긴 하지만,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뉴욕 미술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색다른 범죄 소설이 궁금하다면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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