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아메리카나 1~2 - 전2권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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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아메리카나'라는 단어와 비시 생각에 박장대소하며 신이 나서 네 번째 음절을 길게 늘여 발음했다. 비시는 그들보다 한 학년 아래의 여학생이었는데 여행차 잠깐 미국에 갔다 오더니 갑자기 요루바어를 못 알아듣는 척하고 모든 영어 단어에 흐릇한 r을 덧붙여 발음하는 등 이상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근데 기니카, 난 지금 네 입장이 될 수만 있다면 정말 뭐든 할 것 같아." 프리예가 말했다. "네가 왜 가기 싫어하는지 모르겠어. 언제든 돌아오면 되잖아."    -1, p.115

이페멜루는 나이지리아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십삼 년이 된 어느 날, 나이지리아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현지에 있는 가족들은 미국 생활이 그녀를 돌이킬 수 없게 바꿔 놓았을 거라고 생각해 돌아와서 적응할 수 있겠느냐, 미국 시민권이 있으니 언제든 돌아갈 거라고 생각한다. 미국에 있는 동료나 지인들은 그녀가 미국에서 십오 년이나 살았는데, 다시 나이지리아로 돌아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녀와 삼 년 동안 함께했던 남자친구 블레인 역시 그녀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놀라고,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사실 그녀에겐 이유랄 게 없었다. 그저 켜켜이 쌓여 왔던 불만이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마침내 그녀를 움직였던 것뿐이다. 그렇다면 대체 미국에서의 무엇이 그녀의 삶을 다시 나이지리아로 향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녀는 익명으로 <인종 단상 혹은 (과거에는 니그로로 알려졌던) 미국인 흑인들에 대한 비미국인 흑인의 여러 가지 생각>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인종 문제는 완전히 과대 포장되어 있다는 걸 흑인들은 깨달아야 한다. 이제는 계층 문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문제만이 중요하다. 드레드록 머리를 한 미국인 백인 남자라고 해서 전부 다 흑인 편은 아니다. 등등 특유의 독설과 유머를 혼합해 그녀가 실제로 미국에서 겪어 온 인종 차별의 순간들을 매우 현실적이고도 발랄하게 표현해 왔다. 한편 중학생 때 처음 만나 사랑을 키웠던 그녀의 첫사랑 오빈제는 이제 결혼해서 처자식이 있었다. 그녀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 버린 뒤로, 그들이 서로 연락하지 않은 지도 수년이 흘렀다. 이페멜루는 나이지리아로 돌아가기로 했다는 소식을 오빈제에게 이메일로 알리고 계속 연락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야기는 이페멜루와 오빈제가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역경을 겪고, 변화하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한 성장 소설의 배경에는 나이지리아와 미국의 정치 경제, 인종, 종교, 이민, 페미니즘, 계급 갈등 등 수많은 사회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알렉사와 다른 손님들, 어쩌면 조지나조차도 누군가가 전쟁으로부터, 또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가난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억압적인 무기력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욕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오빈제 같은 사람들, 즉 유복하게 자랐지만 불만에 빠져 있고 태어날 때부터 고국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도록 길들여진, 진정한 삶은 그 다른 곳에 있다고 영구불변하게 확신하는 사람들이 단지 떠나기 위해 - 그중 어느 누구도 굶주리거나 강간당하거나 마을이 불타지 않았지만 그저 선택의 가능성과 확실성에 목말라서 - 위험한 일, 불법적인 일을 하기로 결심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2, p.87

‘아디치에, 소설읽기온라인 서포터즈로 만나게 된 두 번째 작품이다. 지난 번에 읽었던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응고지 아다치에의 데뷔작으로 2003년 작이었고, 이번에 읽은 <아메리카나>는 그로부터 10년 뒤에 쓰여진 2013년 작품이다. 그녀가 작가로서 그 기간 동안 얼마나 놀라운 성장을 했는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라, 읽으면서 내내 감탄했다. 사실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좋은 작품이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술술 잘 읽히는 작품은 아니었기에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그에 비해 <아메리카나>는 첫 장부터 시선을 확 사로잡는 문장과 사유들이 인상적이었고,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이라는 다소 예상 가능한 플롯으로 쓰여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강렬하게 현실을 그려내고 있어 지금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 동시대성이 피부로 고스란히 와 닿았던 것 같다.

특히 이 작품은 2015년 민음사 모던클래식을 통해 출간되었는데, 이번에 젊은 포토그래퍼 김강희와 콜라보레이션한 표지로 번역 편집 전반을 다듬어 출간되었기에 이번 기회에 만나 보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선명한 색상 대비의 인상적인 표지는 책을 읽기도 전부터 이미지로 작품의 분위기와 이야기를 전달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솔직하고 톡톡 튀는 묘사로 미국 인종주의의 민낯을 보여주고,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을 발랄한 페미니즘으로 꼬집고 있는 이 작품이야 말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묵직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소설 자체는 전혀 어둡거나 무겁게 느껴지지 않도록, 시종일관 경쾌하게 풀어나가는 방식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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