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프란츠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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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날벌레들이 날아다니다 죽었습니다. 온종일 비가 내렸어요.

바람 한 점 없이 아주 뜨듯한 빗줄기가 수직으로 내리긋는 야릇한 비였고, 시클라멘을 짓이겨 놓으면서 풀 위로 쏟아지는 기세가 꺾일 줄 모르더군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새들만은 추적추적 내리는 이 비가 불편하지 않은지 날아다녔어요.

새들은 오솔길을 따라서, 수풀 속에서, 여름이 선사한 무성한 초목 아래서, 얕은 나뭇가지에서 여전히 지저귑니다.    p.44~45

어둠 속에서 귓가에 하얀 머리칼 몇 올뿐인 삐쩍 마른 한 늙은 남자가 문을 밀고 무대로 등장한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는 낡은 피아노로 다가간다. 어둠과 시간에 묻혀 거의 보이지 않는 연로한 그 남자는 피아노를 연주한다. 그리고 내레이터가 등장해 인물을 소개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1860년 미국의 한 사제로, 그의 이름은 시미언 피즈 체니이다. 19세기 가톨릭 사제이며 최초로 새소리를 기보한 음악가인 그는 실존 인물이기도 하다. 노 사제는 오래 전 죽은 아내를 아직도 목 놓아 부르는 중이다. 그의 아내는 딸 로즈먼드를 낳고 해산 직후 침대에서 죽었다. 사별한 아내를 잊지 못한 채 은둔하여 살았던 그는 아내가 사랑했던 사제관 정원의 모든 사물이 내는 소리를 기보하는 것으로 아내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승화시키고자 한다.

음악과 언어가 결속된 독자적 작품 세계를 구축한 파스칼 키냐르의 신작이다. 17세기,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이자 작곡자인 생트 콜롱브의 이야기를 그렸던 <세상의 모든 아침>과 쌍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나 이번 작품은 희곡 형식으로 쓰여 더욱 흥미롭다. 등장인물은 내레이터와 사제 시미언, 그리고 딸 로즈먼드, 이렇게 세 명뿐이다. 널찍한 무대 역시 최소한의 소도구만 놓여 있어 고요하고 느리게 움직이며 전개된다. 주인공 시미언 피즈 체니는 정원에서 지저귀는 온갖 새들의 노랫소리뿐만 아니라 물 떨어지는 소리, 옷깃에 이는 바람 소리 등 생명이 없는 사물의 소리까지 음악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무대는 캄캄하다. 칠흑 같은 어둠이다.

날마다 찾아오는 밤은 얼마나 야릇한 실체인가!

얼마나 기이한 질료가 자연에 배어들며 세상을 집어 삼키는가!

공간의 맨끝을 뚫어지게 바라보면, 낮이 끝나며 시작되는 어둠에는 끝이 없는 듯하다.

매년 겨울이 시작되면 밤이 더욱 깊어질까 두려워진다. 결코 끝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다.   p.73

어느 날 시미언은 딸인 로즈먼드를 불러 집을 떠나라고 말한다. 이유를 묻는 딸에게 그는 말한다. 더 이상 널 보고 싶지 않아서라. 라고. 아버지가 딸을 내쫓는 이유는 바로 오래 전 죽은 아내 때문이다. 딸의 나이가 이제 곧 스물여덟이 되었고, 아내는 스물넷에 죽었던 것이다. 게다가 딸은 점점 더 엄마를 닮아 갔고, 살아 있는 딸을 보는 것이, 딸이 나이 먹어 가는 걸 보는 것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한 여인을 사랑하는 것과 딸을 사랑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말하는 그의 말을 온전히 다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의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만큼은 알 수 있었다. 28년 전 죽은 아내 때문에 딸을 쫓아내는 아빠라니. 그 절대적인 사랑, 유통 기한 없는 사랑, 설명할 수 없는 사랑...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돌아온 딸은 아빠에게 말한다. 엄마에 대한 사랑이 너무 지나쳤다고. 그런 딸에게 아빠는 말한다.

"비밀을 하나 말해 줄까, 딸아.

사랑엔 결코 지나침이 있을 수 없단다."

 

파스칼 키냐르는 대대로 언어학자와 음악가들을 배출한 집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5개 국어를 습득하고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면서 자라났다. 이러한 배경은 바이올리니스트·첼리스트·오페라 작곡가라는 다양한 이력으로 이어졌으며, 일관되게 그의 작품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이번 신작 역시 그가 평생에 걸쳐 몰두했던 생의 근원과 기원의 음악이라는 주제를 한 무명 사제 음악가의 삶을 통해 풀어낸 작품으로, 출간 즉시 도빌 시의 <책과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시미언 피즈 체니는 미국 뉴욕주 제너시오의 사제관 정원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기보한 최초의 음악가이다. 극 중에서도 나오지만 실제로 그가 생전 그토록 출간하려 애썼으며, 사후에 자비 출간된 책이 바로 '야생 숲의 노트'이다. 그가 기보하는 새소리, 바람 소리, 갈대나 사물이 내는 소리 등은 '자연의 음악', '음악 이전의 음악'이다. 파스칼 키냐르는 이러한 이야기를 정제된 시적 언어로 놀랍도록 아름답고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상실과 외로움, 고통과 침묵, 평화와 고요의 순간이 마치 음악처럼 들리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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