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일 : 누가 임신을 아름답다 했던가
전혜진 지음 / 구픽 / 201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애들이 안 태어나서 국가적인 큰 문제면, 좀 더 본질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거 아냐!"

지원은 씩씩거리며 걸었다. 정환은 손에 짐을 든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뒤따라갔다.

정말, 재주는 곰이 넘고 뭐는 엉뚱한 놈이 챙긴다고.

임신을 하는 것도, 앞으로 수많은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여자인데, 죄다 엉뚱한 것들이 화를 내고, 생색을 내고, 탁상공론을 세워 가며 개인 정보를 요구하고 난리야.

 

"아주 떼로 삽질하고 자빠졌어!"    p.93

 

은주, 지원, 재희, 선경은 20년을 꾸준히 친구로 지내고 있다. 그들이 서로 알게 된 것이 무려 지난 세기의 일이니, 굉장하다면 굉장한 인연이다. 이들은 넷 중에 가장 늦게 결혼을 하게 된 은주의 결혼식장에서 만난다. 형사인 지원은 임신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얼마 전 젊은 여자만 노리는 퍽치기 사건을 해결해 경위로 승진을 앞두고 있었고, 꿈꾸던 강력계로 갈 수 있는 기회까지 생긴 참이었다. 임신을 간절히 바라는 선경은 난임 치료 중이었다. 열심히 일하다 회사에서 쓰러져 첫 아이를 유산한 것이 5년 전, 겨우 성공해서 심장 소리를 들었던 둘째 아이를 또다시 잃은 것이 3년 전이었다. 프리랜서 작가인 재희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남성 난임 검사까지 받아가며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남편 때문에 인공수정 시술을 시작하려던 참이다. 성공한 1인 기업가인 은주는 자신의 나이가 많다는 것에 대한 부담과 회사 운영 사이에서 고민이 많다.

만 나이로 서른다섯만 넘으면 노산이라고, 늙어서 애 낳으면 애가 머리가 나빠진다고들 말하고, 요즘 젊은 사람들이 애를 안 낳아서 큰일이라며,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애를 낳아야 한다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은 무심코 말한다. 사실 그 노산의 기준은, 아직 한참 일할 나이이고, 여자들은 국가를 위해 아이를 낳아 줄 생산 자원이 아니라 자기 일이 있고, 자기 인생이 있는 하나의 인격체라는 걸 그들은 왜 모를까. 고용불안, 불황과 저성장, 환경오염.. 이런 사회 문제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아이를 낳을 결심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시대에, 아이를 낳는다는 건 대체 어떤 의미일까. 이 험난한 세상에 아이를 낳아도 되는 것일까. 혹시, 굉장히 무책임한 일인 것은 아닐까. 이 작품은 사전조사를 바탕으로 한 팩트를 기반으로 한 소설이지만, 마치 르포르타주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리얼하게 현실을 페이지 위로 불러온다.

 

정말 이런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큰일이라고, 아이가 태어나는 게 행복이라고 말할 뿐. 하다못해 몸이 아플 때에도, 임신 기간 내내 현대 의학에 외면당한 것처럼 약도, 파스 한 장도 마음 놓고 쓸 수 없다는 것을. 아이가 희망이 라고 말하면서, 그 아이를 임신한 여자는 사회로부터 반쪽짜리 취급을 당하며 멸시당한다는 것을. 몸이 무겁고 지켜야 할 존재가 있는 약자가 되어 버려, 손쉽게 공격 대상이 된다는 것을.

"... 이런 것들을 다들 안다면, 그래도 임신을 할까요?"    p.413~414

 

승진을 앞두고 예상치 않았던 임신을 하게 된 지원은 강력계에 대한 꿈은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팀 일에서도 배제되어 지구대로 옮기게 된다. 인공수정 시술을 시작한 재희는 난소 과자극 증후군으로 고통을 받는다. 선경은 여러 번 시험관을 시도한 끝에 마침내쌍둥이를 임신하게 되고, 회사에서는 눈치를 받다 결국 쫓겨나듯이 그만두게 된다. 은주도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하게 되는데,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면서 지금의 사업들을 건사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각자의 상황과 생각들은 모두 다르지만, 모두에게 임신이라는 경험이 삶을 크게 바꿀 거라는 건 자명한 현실이다. 이렇게 여자들이 돈 축나고, 몸 축나고, 경력까지 틀어질 걸 각오하면서 임신을 하고 있는데.. 여자들이 아이를 안 낳아서 나라가 당장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떠들어 대면서, 대체 나라에서 임신한 여자들에게 해 주는 게 뭘까. 작가는 출산율 저하로 인한 인구 감소가 이슈가 되는 한국에서 임신한 여성들이 어떤 수난에 처해 있는지 실제 두 아이의 엄마이자 워킹맘의 입장에서 사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마치 나의 이야기인 듯, 내 친구의 이야기인 듯 공감하고, 이해하고, 같이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출산율 저하로 인한 인구 감소가 어쩌고를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 임신한 여성들이 어떤 수난을 겪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임신을 하게 되면 갑자기 약자가 되어 버린다. 몸이 아프고, 뱃속에는 지켜야 할 태아가 존재하게 되니까. 그 상태로 집 밖으로 나서면, 사회는 임산부를 투명인간 취급하거나 오히려 윽박지르고 멸시한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이야기, 하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만 하는 그런 이야기이다. 임신과 출산을 아직 겪어 보지 못한 미혼 여성들에게,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겪어 보지 못할 남성들이 꼭 읽어 봤으면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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