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렉트릭 스테이트
시몬 스톨렌하그 지음, 이유진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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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일이 언제 시작되었던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평범한 여가 활동처럼 시작되었을 것이다. 텔레비전처럼. 사람들은 가끔 텔레비전을 보았고 가끔은 뉴로캐스터를 쓰고 앉아 있었다. 나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뭔가 괴상해지기 시작한 건 1996년 대규모 업데이트 이후였다. 모드 6 말이다.    p.49

미국의 모하비 사막, 옅은 안개 속에서 회갈색 먼지 층을 걸어가는 10대 소녀와 소형 로봇이 있다. 때는 1997년 봄, 몰락한 첨단기술의 잔해가 나뒹굴고, 드론과 함선이 방치되어 있는 어두운 세상이다. 대부분의 디스토피아 작품들이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비해, 이 작품은 옛 향수를 자극하는 과거의 미국을 무대로 하는 대체역사 SF이다.

책의 첫 페이지부터 모드 6이라는 뉴로캐스터 기기의 광고가 등장했는데, 이야기가 시작하면 여기저기 뉴로캐스터를 쓴 채 널브러진 시체들이 즐비하다. 7년 넘게 치뤄진 거대한 전쟁은 드론 조종사들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그 과정에서 불운하게 십자포화에 희생당한 민간인들과 전쟁 중에 사산된 연방군 조종사의 자식들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 작품은 TV를 대체하게 된 가상현실 기술이 서서히 일상을 앗아가는 섬뜩한 세계를 거의 실사처럼 느껴지는 생생한 일러스트로 구현해냈다. 그리하여 어떤 그래픽 노블과도 다른, 이전까지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SF가 탄생했다. <인피니티 워>, <엔드 게임>, <윈터 솔저> 등 어벤저스 시리즈를 제작한 루소 형제와 각본가들이 판권을 사들여 영화화를 진행 중이기도 하다.

전혀 다른 상황에서 봤더라면 나는 그것들을 아주 좋아했을 것이다. 편안하고 느긋하게 이 거리를 산책하며 매료되었을 것이다. 어떤 역겨움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열광적이고 기분 좋은 역겨움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모든 것이 거꾸로였다. 우리가 바로 저 매력적인 생장물, 광인들이었다. 건강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픈 영혼들이었다. 이제 우리 뒤에 안전한 일상은, 되돌아갈 정상 지대는 없었으며 유일한 길은 앞으로만 나 있었다.   p.101

이야기의 화자인 10대 소녀는 조손 가정에서 자라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위탁 부모에게 보내졌는데, 그로 인해 동생과 강제로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위탁모의 코뼈를 부러뜨리는 등 폭력적인 행동으로 엇나간 성장기를 보낸다. 이후 친구 어맨다와의 이별, 위탁 부모의 죽음 등을 겪었는데, 기괴하게 변한 거대 드론과 뉴로캐스터를 쓴 채 방황하는 사람들로 보여지는 황폐화된 사회의 풍경이 소녀의 불안한 심리를 고스란히 시각화해서 보여주고 있다.

만약 인간의 지능이 뇌세포 수억 개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난다면, 뇌세포를 수억 개 더 연결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 결과는 머릿속 이미지들이 실제로 보이는 세상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믿기 어려운 황폐화된 도시였다. 뉴로닉스 공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영혼 없는 좀비 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셸. 정신 차려. 그건 꿈이었어. 게임일 뿐이었다고. 짐과 바버라 덕에 이제야 나도 깨달았어. 너랑 나는 그냥 놀이를 했던 거야. 그리고 괜찮아. 어차피 그런 척한 것뿐이잖아."

그런데, 만약 꿈이 현실이 된다면 어떨까. 게임 속 가상현실이 실재가 된다면 말이다. 황량한 거리, 송두리째 파괴된 도시, 도로에 방치된 몰락한 첨단기술의 쓰레기들.. 디스토피아적 분위기를 극대화시켜 보여주고 있는 놀라운 일러스트들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완성된 영화처럼 느껴진다. 그래픽 노블 보다 텍스트의 비중이 확실히 높고 밀도가 있으며, 일러스트의 완성도와 퀄리티가 뛰어난 아트북이지만, 디스토피아 SF 소설로서도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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