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병동
가키야 미우 지음, 송경원 옮김 / 왼쪽주머니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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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들린다. 이 청진기에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멍하게 서 있는 나를 기다리다 지친 마리에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청진기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다. 환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의사라니. 그런 말은 두 번 다시 못 하도록 해 주겠어.   p.40

호스피스 병동의 여의사 루미코는 환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무신경한 의사로 유명하다. 말기 암 환자와 환자 가족의 컴플레인이 일상이지만, 지적을 당해도 속으로는 대체 그게 왜 잘못인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니 심각하다. 물론 스스로도 어휘력이 부족하다는 점도 자각하고 있었고, 에두른 표현이나 미묘한 뉘앙스에는 옛날부터 자신이 없었던 그녀이다. 그래서 늘 환자와 보호자에게 사과하고, 혼자 고민한다. 나 혼자만 이렇게 둔감한 걸까. 다른 의사는 전부 환자의 마음을 정확히 읽는 걸까. 병원에서 근무한 지 곧 10년이고, 밥 먹을 시간도 변변히 챙기지 못하며 열심히 하고 있지만 어쩐지 자신이 없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루미코는 화단에서 청진기 하나를 발견한다. 그런데 이 청진기를 환자의 몸에 대면, 환자의 마음 속 목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에는 환청인가 싶었는데, 환자와 대화를 해보니 진짜 환자의 속마음이 청진기를 통해 들렸던 거였다. 게다가 청진기를 통해 과거로 돌아갈 수 된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들이 가장 돌아가고 싶었던, 가장 후회되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다시 살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인가. 물론 그 시간 속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실제 현실에서는 5분 정도의 시간만 지날 뿐이다. 마치 잠깐의 최면 체험이나 시간 여행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말이다. 과연 루미코는 이 특별한 청진기를 통해서 환자의 마음 속 말을 듣고, 그들에게 더 이상 눈치 없다는 컴플레인을 듣지 않게 될까? 그리고 후회의 순간으로 돌아간 그들은 어떤 선택을 바꾸고, 그로 인해 무엇이 달라지게 될까?

나는 대체 가족에게 뭐였단 말인가? 돈 벌어다 주는 기계? 고작 그뿐이야?

, 얼마나 허무한 인생인가. 만약 인생을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면 맹세코 야근은 안 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안 한다. 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싶었다. 상사가 싫은 소리를 하든 말든, 꼬박꼬박 휴가를 챙겨서 아이들과 수영장에 가거나 여행을 가고 싶었다. 주말에는 집 근처 공원에서 놀기도 하고, <도라에몽>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도 데려가고 싶었다.   p.151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시한부 환자는 네 명이다. 유명한 여배우의 딸로 태어났지만 더없이 평범한 외모였던 사토코는 엄마처럼 화려하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연예계 생활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엄마는 딸의 데뷔를 반대해왔고, 그 꿈이 계속 마음에 남아 엄마를 원망했던 사토코는 과거로 돌아가 연예계에 데뷔한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일해 온 휴가 게이치는 죽음을 앞둔 자신 앞에서 돈 걱정만 하는 아내와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 자녀들이 서운하다. 그래서 그는 과거로 돌아가 회사에만 매여 있던 시간을 아이들과 아내를 위해 쓰면서 자신이 미처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된다. 그리고 40대 중반이 되도록 결혼 안 한 딸을 두고 눈감을 수 없는 칠십 대 엄마와 어린 시절 친구에게 혼자 도둑질한 죄를 뒤집어쓰게 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사십 대 남자의 사연도 있다. 이들은 루미코의 청진기를 통해서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되고 자신의 후회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지금까지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올 것이다. 특히나 갑작스럽게 나에게 내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면 말이다. 이렇게 빨리 죽을 거라는 걸 알았다면, 그때 그러지 않았을 텐데.. 살면서 지나쳐왔던 그 모든 선택과 행동에 대한 후회가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 앞만 보고 달리느라 정작 곁에 있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아쉬움, 함께 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갔던 인연과 소식이 멀어진 어린 시절의 친구에 대한 기억 등등 '만약'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떨까. 죽어가는 사람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는 이야기지만 마냥 어둡고, 무겁게만 풀어가지 않아 좋았던 작품이다. 설정은 판타지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부분들을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점도 가키야 미우만의 장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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