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 이야기 세트 - 전4권
김은성 지음 / 애니북스 / 201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엄마들은 종종 딸에게 말한다. 나처럼 살지 말라고. 또 엄마들은 종종 쓸쓸하게 체념하듯 중얼거린다. 이것도 다 내 팔자지. 그리고 엄마들은 삶이 유난히 고단하고 팍팍한 날이면 또 말한다. 엄마는 괜찮다고.

 

올해로 일흔 둘이 되신 나의 엄마는 가족들이 모두 뜯어 말리는 결혼을 했다고 한다. 아빠는 엄마보다 나이가 열 여섯 살 많았고, 이혼 후 딸 둘을 키우고 있었다. 게다가 오랜 시간 직업 군인으로 일을 하신 탓에 다정다감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셨고, 명문대를 졸업하시고 남다른 프라이드가 있었던 분이라 비슷한 수준이 아니면 좀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엄마는 사람 좋아하고, 이웃이든 친지든 뭔가 퍼주는 걸 즐겨 했고, 남편의 강압적이고 까다로운 성격을 다 받아주면서도 절대 기죽지 않고 할말 다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죽고 못사는 사랑에 빠져 결혼한 것도 아니었고, 선을 보고 의례적인 몇 번의 만남 후 결혼을 한 것이니 그 이후의 시간들은 커다란 반전 없이 누구나 예상할 법한 스토리로 이어진다. 남아선호사상이 뿌리 깊게 남아 있던 시절이라 아들을 낳지 못한 며느리는 구박덩어리였고, 덩달아 딸이라는 이유로 나와 내 동생도 할머니의 눈치만 보며 단 한 번도 사랑을 받지 못했다.

엄마는 대체 그런 결혼을 왜 했던 것일까. 한때 황혼 이혼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도 있었는데, 엄마는 아빠가 먼저 세상을 떠나시기 전까지 곁에 계셨다. 대체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제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바보 같았고, 미련했던 엄마의 삶에 여전히 화가 난다. 가끔 엄마가 지난 시절을 후회하는 투로 말을 하거나, 당시의 선택이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말을 꺼내면, 나는 더 듣지도 않고 말했다. 어쨌든 엄마가 선택한 거니까, 그건 엄마가 책임져야지. 엄마 인생이니까. 생각해 보면 나는 늘 이런 딸이었다. 엄마가 여자로, 아내로, 사람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려고 할 때면 차가워졌다. 엄마의 슬픔, 엄마의 서러움, 엄마의 회한 이런 것들을 감당하기가 무서워 선을 긋고, 뒤 돌아섰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나는 이렇게 나이를 먹고도 왜 여전히 이렇게 철부지 딸인 걸까.

 

리뷰를 쓰면서 책의 내용과 상관없는 개인적인 이야기로 왜 이렇게 긴 서두를 시작했느냐 하면,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엄마의 이야기게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은 것이 너무도 미안했기 때문이다. 엄마의 인생을 조금 더 들여다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고, 속상했다. 바로 김은성 작가의 만화 <내 어머니 이야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렇지 않을까. 이 책을 읽고 나면 나의 엄마가 생각나고, 엄마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엄마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좋은 책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계속 독자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책 속 이야기를 통해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이 책의 이야기가 끝이 난 뒤에도, 끊임없이 우리 엄마도 거쳐 왔을 한국의 근 현대 백 년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힘들었던 그 시절을, 여자로, 아내로, 며느리로, 엄마로 살아온 나의 엄마를 생각한다.

 

새집에 다시 고양이가 살기 시작한 것처럼 엄마와 나도 다시 힘을 내서 살아보기로 했다. 이제 엄마는 엄마 일, 나는 내 일을 하면 된다. 엄마는 1927년생으로 80년의 삶을 되짚어보고 있고, 나는 그런 엄마를 만화로 그리기 시작했다. 엄마의 고향은 물장수로 유명한 함경남도 북청이다.

 

마흔에 처음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딸이 꼬박 십 년을 바쳐 그린 어머니의 삶이 바로 전 4권으로 된 만화 <내 어머니 이야기>이다. 저자는 십 년에 걸쳐 어머니의 이야기를 녹취하여 이 만화를 그렸는데, 모든 대사와 내레이션에 구술자인 어머니의 입말을 최대한 살렸다고 한다. 저자의 사십대와 어머니의 팔십대가 오롯하게 담긴 이 책은 사실 절판된 지 3년 만에 이번에 재출간이 되었다. 김영하 작가가 알뜰신잡이라는 방송에서 사라지지 말아야 하는 책으로 강력 추천한 덕분이다. 방송의 힘은 참 대단한 것이, 이렇게 사라진 책을 복간하기도 하고, 나온 지 한참 된 구간을 몇 천부씩 증쇄하게 만들기도 하고, 출간되었을 때는 거의 빛을 보지 못했던 책을 갑작스레 베스트셀러로 만들기도 한다. 나 역시 책을 많이 읽는다고 자부하는 독자였지만, 만화까지 챙겨보는 편은 아니었던 터라 김영하 작가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작품이 세상에 있다는 것도 몰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새삼 감사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놀라운 작품이 절판되어 세상에서 묻힌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손실이겠는가.

이 책은 일제 강점기의 함경도 북청을 배경으로, 당시의 생활상과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야기이다. 어머니의 유년 시절부터 시작해 원치 않은 혼인과 소소한 집안사 등이 이어지고, 6.25전쟁으로 인해 피난민 시절을 거쳐 70년대 말 서울에 올라온 뒤의 가족사가 현재 대학생이 된 딸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지극히 평범한 개인의 삶 전체를 그리고 있기에, 엄청나게 극적인 사건이나, 화려한 클라이막스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갈등 관계나 놀라운 전개를 보여주는 스토리는 아니다. 하지만 투박한 그림체와 구수하고 맛깔나는 사투리로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한 명 한 명, 개개인의 소소한 일상들이 모여서 거대한 역사가 된다는 것을 놀랍도록 재미있게 들려 주고 있다. 교과서에나 봤던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읽어도, 생생하게 와 닿고 실재한 삶으로 체험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야기였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견디고 살아내 우리를 키워 낸 세상 모든 엄마들의 이야기가 이 책 속에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910년대에서 시작해, 40년대, 50년대를 거쳐 7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는 우리의 역사 중 가장 격동의 시기를 통과하는 매우 평범한 한 여성의 생애를 그리고 있으니 말이다. 김영하 작가가 말한 것처럼, 세상에는 사라져서는 안 되는 책들이 있다. 이러한 책을 만나게 해 준 작가님의 추천이 눈물 나게 고마운 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