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산문집
김소연 지음 / 마음의숲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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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을 선물로 받는 게 더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꽃이라든가, 초콜릿이라든가, 연필 같은 것. 남지 않는 것들. 그걸 영영 간직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되는 것들. 그런 선물이라야 주고받는 마음이 홀가분했다. 사물에 사연이 쌓여가서 추억이 사물보다 더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는 풍경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그 시절의 나는 여렸던 것임이 틀림없다. 실은 선물에 대한 부담이라기보다 나 자신의 여림에 대한 불만 쪽에 더 가까운 심사였을 것이다.   p.22

<마음 사전> <한글자 사전>으로 마음을 이루는 낱말 하나하나를 자신만의 시적 언어로 정의했던 김소연 시인의 신작 신문집이다. 시인은 기존의 산문집과 다르게 경험한 것들만 쓰겠다는 다짐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상을 자세히, 섬세한 시선으로 적어보고자 시작했고 오직 직접 만났거나 겪었던 일들만을 글로 옮겼다고 하니 더 기대가 되었다. 생각하는 바와 주장하는 바가 아닌, 다만 실제로 경험한 일들만을 글로 쓰는 산문집은 어떤 느낌일까.

 

'나를 뺀 세상의 전부'라는 의미심장한 제목부터 마음에 와 닿았던 책이다. 시인은 '나를 뺀 세상의 전부, 내가 만난 모든 접촉면이 내가 받은 영향이며, 나의 입장이자 나의 사유'라고 말했다. 누구나 타인과 관계를 맺어 가면서 살 수 밖에 없고,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씩 변화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에 따라 성향도 달라지고, 취미와 생활 환경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환경이 달라지는 것에도 우리는 영향을 받고, 소소한 일상의 작은 것 하나도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모르는 동네의 골목을 구석구석 누빌 때 내가 누구인지를 잠깐 잊고 있었다. 얼마나 바빴는지, 당장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안중에 없었다. 매일, 하릴없이 산책이나 하면서 들꽃이나 꺾으면서 빵이나 사먹으면서, 길거리에서 서성이면서 살아왔던 것만 같았다. 집에 돌아와 유리병에 수돗물을 담아 쑥부쟁이를 꽂았다. 비좁은 마음속에 자그마한 자리가 생겨났다.   p.195

 

함께 시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서 온 문자 한 통, 지인의 개인전 오프닝 행사에서 만난 다섯 살 아이의 말 한마디, 소설을 읽고, 시를 읽으며 소개하는 문장과 단상, 친구와 나누던 꿈 얘기, 압력밥솥에서 밥이 익기를 기다리며 들리는 소리,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 어린 시절 비밀기지였던 다락방에 대한 추억 등등... 소소하다면 소소하고, 특별하다면 특별할 수도 있지만, 누구의 일상에서나 쉽게 마주칠 법한 시인의 하루하루가 이어진다. 단어에 대한 예민하고 특별한 감각이 있는 저자라서 그런지, 문장들이 하나하나 콕콕 가슴에 와서 박힌다. 갈수록 개인주의가 너무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리는 삭막한 세상에서, 누군가와 더불어 산다는 것에 대한 사유가 뭉클하고, 따뜻했다.

모든 글들이 다 좋았지만, 특히나 와 닿았던 것은 저자가 읽는 책들에 대한 사유였다. 소설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러하겠지만, 완벽하게 일상의 삶을 잊어 버리고 잠시 나마 허구의 세상에서 살 수 있다는 점이 독서의 목적이자 가치일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잠자코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의 심연에 불쑥 물컹한 손을 집어넣었다가 뺀다.' 라고. 그렇게 '소설을 읽는다는 자의식을 놓고, 그냥 그 세계에 들어가 잠시 동안 무언가가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인물이 되면서' 소설을 읽었다고. 그리하여 '잠에서 깨어난 듯 책을 덮고 났을 때에 나를 둘러싼 방 한 칸이 낯설어질 만큼 그 세계에서 살다 나온다'라고 말이다.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행간의 여백에 담겨 있는 무엇까지 완벽하게 김소연 시인만이 쓸 수 있는 표현과 정서로 빼곡한 페이지들이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살아가므로 완성되어간다'는 문장을 호흡 하나까지 모두 이해하고 싶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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