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카의 장갑
오가와 이토 지음, 히라사와 마리코 그림,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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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마이제공화국에는 슬픈 노래가 없습니다.

내용이 슬프더라도 웃으면서 부릅니다. 그것이 루프마이제공화국의 정신입니다.

바깥은 어두워지고 있는데 집 안은 축제 분위기. 마치 철 지난 하지 축제처럼 떠들썩합니다. 마리카의 탄생이 그만큼 멋진 일이라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희망으로 가득한 빛나는 미래를 상상하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p.41

<츠바키 문구점>의 오가와 이토가 라트비아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오가와 이토는 라트비아 여행 일기 에세이를 출간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발트 3국 중 하나인 이 나라를 나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라트비아는 미지의 나라일텐데, 오가와 이토는 이 나라를 다녀와서 루프마이제공화국이라는 가상의 나라를 만들고 이야기를 써냈다. 이곳 사람들은 음식이나 수공예품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연 신앙도 아직 남아 있으며, 과거의 생활양식을 지켜나가고 문화를 소중히 여긴다. 오가와 이토는 전작들에서도 소소한 이야기로 뭉클한 기적을 보여줬던 작가인지라, 그녀가 왜 라트비아라는 나라에 매혹되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잊고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간직할 줄 아는 작가이니 말이다.

이야기는 마리카가 태어난 어느 추운 겨울 아침에서 시작한다. 마리카가 태어난 날 아침, 할머니는 곧바로 작은 엄지 장갑을 뜨기 시작한다. 루프마이제공화국의 겨울은 몹시 추워서 엄지장갑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화려한 색깔의 아름다운 엄지장갑을 끼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렇게 털실로 뜬 엄지장갑과 함께 평생을 한다. 태어날 때 받은 엄지장갑이 작아지면, 손 크기에 맞춰 또 다른 엄지장갑을 뜨고,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해서도 장갑을 뜨고, 특별한 소망을 담아 장갑을 뜨기도 한다. 이들에게 엄지장갑은 방한용품이고, 축제 때 사람들을 화려하게 꾸며주는 특별한 장신구이기도 하다. 게다가 여자들이 시집갈 때는 큰 궤짝에 엄지장갑을 가득 채워 혼수로 가져간다고 하고, 여성이 청혼한 남성에게 선물하는 수락의 대답도 역시 장갑이라고. 결혼식용 장갑이 신랑 손에 꼭 맞으면 결혼 생활이 순탄하다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니, 이들에게 장갑이 어느 정도의 의미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마당 너머로는 아름다운 자작나무 숲이 펼쳐집니다. 그 너머에 치유의 땅이 있습니다. 치유의 땅은 정령들이 사는 신성한 숲입니다. 조금 더 걸어가면 작은 강이 흐르고, 강을 따라가면 호수가 나옵니다.

가진 것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것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지만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p.101

이 작품은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오빠들의 축복 속에서 태어난 마리카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건강한 아이로 성장해, 첫사랑을 만나고, 한 남자와 사랑을 나누게 되어 결혼을 하고, 결혼한 지 5년 만에 국가적 불운을 겪게 된다. 루프마이제공화국이 얼음제국에 무력으로 병합되어, 나라를 빼앗기게 되면서 수많은 역경을 겪게 되고, 남편이 강제 연행되면서 그와 생이별을 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간다는 점이다. 선량한 마음으로 전통을 지키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라 루프마이제공화국 사람들답게, 그들은 힘든 때일수록 더 활짝 웃는다. 운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은 없고, 슬퍼한다고 해서 나아질 것도 없으니 말이다. 루프마이제공화국 사람들은 그렇게 서로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살아간다. 마리카가 일흔 살 되던 해에 기나긴 겨울의 시대가 끝나고, 루프마이제공화국은 독립을 되찾아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미소가 잘 어울리는, 경건하고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박한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동화처럼 읽힌다. 오가와 이토의 라트비아 여행에 동행한 일러스트레이터 히라사와 마리코의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삽화들도 이야기와 잘 어울려서 다정하고 아름다운 여정을 완성하고 있다. 수제로 만든 흑빵과 소박한 식탁, 숲과 호수에 둘러싸인 곳들의 풍경, 대대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엄지장갑과 함께하는 이야기는 추운 겨울 시린 마음에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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