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 하버드 법대, 젊은 법조인이 그린 법정 실화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1992년 루이지애나, 싱글맘의 외동아들이었던 여섯 살 제러미 길로리는 유치원에서 돌아와 비비총을 들고는 친구들 집으로 간다. 친구인 조이와 준은 아빠와 낚시를 하러 호수로 간 상태였고, 그 집에 세 들어 살던 스물여섯 살 리키 조지프 랭글리가 문을 열어 준다. 그리고.. 소아 성애자였던 리키에 의해 제러미는 살해 당한다.

 

나는 그 남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지금까지 10년도 넘는 세월을 끌고 있다. 내가 전혀 몰랐을 수도 있는 그 이야기에는 조금씩 다르게 진술된 사실들이 산재해 있었다. 나는 저 자백 테이프에 해당하는 녹취록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다. 그의 또 다른 자백 녹취록도 읽었다. 내가 쓴 글보다 그가 한 말을 더 잘 알 정도였다....이 테이프 때문에 나는 내가 믿고 있던 모든 것을 반추해보게 되었다. 법뿐만 아니라 내 가족과 내 과거에 대해서도 재고해야 했다. 차라리 그 테이프를 보지 않았더라면. 내 삶이 보다 단순하던 그 이전 시절에 머물렀더라면.   p.23

 

저자인 알렉산드리아는 하버드 법대 재학 당시 여름방학 동안 루이지애나의 한 로펌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막 재심을 끝낸 남자의 자백 동영상을 보게 된다. 9년 전에 사형을 선고 받았지만, 이번에는 배심원들이 그에게 종신형을 주었다. 그때 그녀가 그 테이프에 등장한 남자의 얼굴을 보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설명하는 그 남자 목소리를 듣지 않았더라면.. 이 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로펌에서 테이프를 본 그날 이후로 12년이 흘렀다. 그가 살해한 아이는 이미 죽었고, 그 남자는 이미 살인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뒤처리는 벌써 전부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테이프 때문에 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것을 반추해보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20여 년에 걸쳐 진행된 리키 랭클리의 재판 과정을 10여 년 동안 추적하고 정리했다. 이 책은 90년대 미국에서 실제 벌어졌던 아동 성범죄와 법정 공방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은 리키의 이야기와 저자인 알렉산드리아의 이야기로 교차 진행되고 있다. 저자의 과거 이야기는 리키 랭글리가 제러미 길로리를 죽이기 9년 전, 그가 아직 열여덟 살이고 그녀가 다섯 살일 때부터 시작된다. 평범한 어린 시절의 추억들처럼 보였던 이야기를 따라 가다 보면 우리는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녀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로부터 지속적으로 성적 학대를 당했던 것이다. 그 끔찍한 일은 그녀와 그녀의 어린 동생들에게 몇 년간 지속되었고, 이후 부모님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녀의 부모는 모든 걸 알고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그렇게 하는 게 과연 옳았을까?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들은 말을 할아버지에게 절대로 발설하지 않았고, 어떤 식으로도, 뭔가 잘못됐다는 표시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 대신 더 이상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집에서 주무시고 가라고 청하지 않았다. 그렇게 학대는 어느 누구도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끝나버렸다. 그녀의 부모님은 기억을 마치 법률 사본처럼 조심스럽게 정리해 버렸다. 

 

 

그 말뜻을 알아차리는 순간부터 나는 사형제도에 반감이 생겼다. 나는 죽음이 두려웠다. 죽음이 언니를 앗아 갔으니까. 오빠가 죽을까 봐 어른들이 두려워했으니까. 나는 죽음에 관한 악몽을 꾸니까. 어머니의 책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헌법이 희망의 문서라고 나는 그때 벌써 알고 있었다. 어떻게 내가 사랑하는 법이 죽음을 언도할 수 있단 말인가? 법률 서적에 나오는 이유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 모든 것이 시작된 지점은 두려움이었다. 그때 그 순간부터 나는 언제나 사형제를 반대해왔다.   p.161~162

이 책은 과거에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한 책이다. 동시에 과거의 일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그 끔찍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알렉산드리아는 어른이 되어 법을 공부하게 된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사형제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는 일을 어째서 잔인하다고,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지, 그걸 알고 싶어서 법대에 진학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사형 반대 로펌에 지원했고, 사형수 변호만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서 방학 동안 인턴으로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한 남자의 자백 영상을 보게 된다. 아이들을 추행하던 이야기를 하는 그를 보며 그녀는 생각한다. 나는 화면 속 저 남자를 구제하는 일을 돕겠다고 이곳으로 왔다. 저런 남자를 돕겠다고. 그녀는 스크린 속 남자를 보며,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자신을 만지던 손길을 다시 느낀다. 과연 과거에 그녀에게 일어난 일로부터 그녀의 이상과 실제가 별개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녀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곳에 일하러 온 명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스크린 속 그 남자, 리키가 죽기를 바랐다.

알렉산드리아는 리키의 모습에게서 할아버지를 보았다. 그녀는 이해하고 싶었다. 그녀는 제러미의 엄마 로렐라이의 행적을 추적하고, 제러미의 묘소와 리키 부모의 묘소를 찾아가고, 리키를 면회하고, 그의 재판을 직접 취재한다. 리키의 첫 재판 후 10년 뒤, 그가 받은 사형 선고가 뒤집힌다. 게다가 증인으로 등장한 죽은 제러미의 엄마는 리키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말한다. 과연 리키는 나쁜 사람, 즉 죄 없는 아이를 잔인하게 살해한 악당인가? 아니면 평생 악마와 싸워온, 자기 자신과 싸워온, 결국 그 싸움 때문에 정신병자가 되어 한 아이를 비극적으로 죽게 만든 사람인가? 알렉산드리아는 이해하고 싶었다. 이해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을 취재하고, 이 책을 쓰게 되었고, 이제는 당시 배심원의 평결이 달리 보인다고 말한다. 그 평결은 법리적으로는 진실이 아니지만, 삶에서는 진실일 수 있는 어떤 것을 알려준다고. 리키는 책임이 있지만 또 동시에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배심원들에게 주어진 법에는 이런 중간 지점이 자리할 틈이 없지만, 그들이 그 틈을 만들었다고. 법 안에 새 공간을 열어서 그때까지 없던 범주를 만들어냈다고.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기록의 힘이 너무나 생생한 대목들이 있다. 실제 일어난 일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사실이 상상을 초월하는 대목들이 있다.

 

이 책은 이 시대의 가장 참혹한 사실을,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그럼에도 우아하고 인간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실제 있었던 기록을 바탕으로 그려진 범죄 논픽션이지만, 법의 세계에 속해 있는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이야기'라는 방식이다. 딱딱한 법률이 아니라, 마치 소설처럼,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과거에 등 돌리는 대신, 과거에서 도망가는 대신, 오히려 손을 내밀고 과거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대단한 작품이다. 여타의 범죄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작품들과는 차원이 다른 서사를 보여주고 있는, 정말 뛰어나고 완성도 높은 책이다. 논픽션으로서 감동적이고, 문학적으로도 아름답고 비범한 작품이다. 사실이 상상을 초월하는 세상, 우리는 이런 책을 읽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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