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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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외부인은 경비원을 거쳐야만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있거든요. 분명 별일 아닐 거예요.” 마치 이 세상에 나쁜 일은 일어난 적이 없다는 투였다. 케이트의 아빠가 말했을 법한, 어리석지만 선의에서 비롯된 단언이었다. 하지만 케이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는 여자를 본 순간부터 누군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은 늘 그런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늘 최악의 결론을 도출한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 결론이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p.23

런던에 사는 케이트는 보스톤에 사는 육촌 코빈과 6개월간 집을 바꿔서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 그녀는 보스턴에 도착하자마자 공황 상태에 빠진다. 누군가와 서로 집을 바꿔서 지내기로 한 계획 자체가 갑자기 최악의 실수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사실 그녀가 택시 안에서 공황 발작과 공포를 느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집착이 심했던 전남자친구 조지와 헤어지는 과정에서 죽을 뻔했던 경험이으로 인해 불안 장애와 신경증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조지는 케이트를 찾아와 그녀를 벽장에 가두고는 자살했다. 그녀는 벽장 속에서 이틀이나 지나서 사람들에게 발견되었고, 그 후로 그녀의 마음은 좁은 벽장 속에 갇혀 버렸다. 그런 케이트였기에 미국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새 삶을 살 수 있는 이번 기회는 굉장한 도전이기도 했다. 과연 그녀는 이 낯선 도시에서 신경증과 불안 장애 증상을 극복하고 잘 지낼 수 있을까.

이 작품의 원제는 'Her Every Fear'로 국내 번역본 제목인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와는 어떻게 보더라도 전혀 상관없는 의미로 읽힌다. 가끔 이렇게 원제와 전혀 상관 없는 제목이 붙는 경우가 있는데, 정말 생뚱 맞은 오역인 경우도 있지만, 이 작품처럼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반대로 감탄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 제목은 실제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내용 상의 설정인데다 문장 그 자체로도 굉장히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에 작품의 타이틀로 전혀 손색이 없거니와, 사실 다 읽고 나면 이 제목이 완벽한 맥거핀의 일종이라는 점 때문에 더 멋지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구체적인 내용을 다 언급할 수는 없지만, 바로 이 제목 때문에 범인을 유추하는데 커다란 함정이 만들어지고, 초반 스토리의 흐름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부분이 있고, 실제로 꽤 중요한 단서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에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상 굉장히 센스 있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는 얘기다.

 

그들은 일 년 동안 사귀었고, 둘만의 세상에서 안전했다. 어쨌든 케이트는 안전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평생 언제든 비극적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살았다. 여덟 살 때 부모님이 데려간 상담소에서 심리치료사가 가장 무서운 것을 세 가지만 말해보라고 하자 케이트는 울음을 터뜨렸다. 낯선 사람, 거미, 가스 유출, 학교 일진, 보이지 않는 세균, 험한 날씨 중에서 세 개만 고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모두의 예상대로 불안 장애 진단을 받았고, 또한 공상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진단도 받았다. 한마디로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했다.    p.112~113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항상 생각나는 영화 중의 하나가 바로 <로맨틱 홀리데이>라는 작품이다. 아마도 이 작품이 주는 낯설지만 아득하고 설레이는 공간에 환상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주요 플롯은 L.A에서 잘 나가는 영화예고편 제작회사 사장인 아만다와 영국 전원의 예쁜 오두막집에 살면서 웨딩 칼럼을 연재하는 아이리스. 6천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살고 있던 두 여자가 홈 익스체인지 휴가를 보내기로 하고, 2주의 크리스마스 휴가 동안 서로의 집을 바꿔 생활하기로 한다. L.A에 있는 화려하고 최신식의 커다란 집과 영국에 있는 벽난로와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가득한 오두막집이 낯선 공간이라는 부정적인 느낌보다는 새로운 공간이라는 설레이는 느낌을 주었던 작품이었다. 피터 스완슨의 신작에서도 이렇게 완전히 다른 나라에 있는 두 사람이 집을 교환한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하지만 반대로 이 작품에서는 낯선 공간이 주는 무서움과 불편함을 극대화시켜 색다른 공포를 자아내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어 오싹함을 안겨 주고 있다.

피터 스완슨은 데뷔작인 <아낌없이 뺏는 사랑>에서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던 비밀 가득한 악녀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누구나 그런 환경에서 같은 선택을 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끔찍해질까라는 걸 보여 줬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서 어차피 누구나 한번은 죽게 마련인데 그 시기를 조금 앞당기는 것뿐이라는 살인의 당위성을 굉장히 설득력있게 그려내며,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말 나쁜 것인지. 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었다. 사랑의 다른 면을 통해 인간 내면의 악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가답게 작품을 통해 독자들이 그 동안 옳다고 믿어 왔던 통념이 완전히 허물어지는 경험을 하게 했었다. 이번 작품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에서는 여성들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집착, 언어폭력, 가스라이팅, 데이트폭력 등 매우 현실적인 공포를 그려 내며 인간 내면에 감추어진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 본다. 구성과 플롯, 반전 등 모든 면에서 피터 스완슨의 작품들 중에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당장 영화로 만들어져도 손색이 없을 만큼 생생하고, 매혹적인 이야기였다. 피터 스완슨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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