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탐정 -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집장의 37년 단어 추적기
존 심프슨 지음, 정지현 옮김 / 지식너머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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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전이 누군가가 쓴 책이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다. 책상과 부모님의 책장, 컴퓨터 안에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전은 그저 어떤 단어의 뜻에 대해 조금만 모르는 것 같으면 거쳐야 하는 성가신 단계쯤인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 사전을 썼다. 매일 출근해서 알파벳의 다음 단어를 정의하는 계획을 세우는 직업이 세상에 있다면 믿겠는가?    p.21

몇 년 전에 미우라 시온의 <배를 엮다>라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대형출판사의 사전편집부를 중심으로 팀원들이 각자의 개성과 성격을 드러내며, 모두가 한 권의 사전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상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었다. 묵묵히, 성실하게 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나 할까. 시종일관 따뜻하고 유쾌한 필치로 그려진 그 작품을 잃으면서, '성실'이라는 단어가 좀 멋없고, 지루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런 성실함이 쌓여야 비로소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사전' 편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요즘이야 워낙 전자 사전이나, 스마트폰 등을 통해서 사전 검색 기능을 활용할 수가 있어서, 종이 사전은 보기가 힘들어 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빽빽한 종이 사전을 뒤져가면서 단어의 뜻풀이를 하던 시기를 떠올려 오면 그 얇은 종이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디를 넘겨도 빽빽하게 인쇄된 문자의 행렬들이 세상의 모든 비밀들을 전부 담고 있을 거라는 기대감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고 말이다. 이번에 만난 <단어 탐정>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사전인 <옥스퍼드 영어 사전(OED)>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는 대단히 놀라운 작품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존 심프슨은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사 사전부에서 37년 동안 사전을 만드는 일을 해왔다. 그가 사전 편찬자로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단어의 탄생과 생존, 소멸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엄청난 기록이기도 하다.

 

사전 편찬자들이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무엇인가?"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질문이지만 우리는 괴롭다. 나는 항상 없다고 대답한다. 역사 사전 편찬자는 편애하면 안 되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모든 단어는 저마다 다른 의미에서 중요하다. 사전 편찬자의 전형에 인간적인 요소를 넣고 싶어 하는 저널리스트들에게는 매우 불만스러운 대답이다.   p.120

<옥스퍼드 영어 사전(OED)> 1884년에 초판 1권이 출간되었고, 1928년 초판 12권이 완간되었으며, 이후 개정판 2판으로 20권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온라인 사전도 출범되었으며, 2037년에는 개정판 3판이 출간될 예정인 방대한 분량의 사전으로 전체 21,728페이지에 60여만 어휘를 담고 있는 사전이다. 게다가 이 사전은 단순한 단어의 의미뿐만 아니라 단어의 역사적인 발달 순서와 용법을 참고할 수 있는 문헌 자료도 제공하고 있어, 그야말로 단어의 역사를 기록한 사전이기도 하다. 저자는 독자들이 직접 적어 보낸 단어 카드로 문헌 조사를 하던 종이책 시대의 OED부터 방대하고 체계적인 구조를 갖춘 온라인 OED로 변화하기까지, 한 사전의 의미 있는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역사 사전을 만드는 작업의 재미와 흥분감은 수백 년 동안 잊힌 단어를 되찾고 문화와 사회 속에서 단어가 발생하는 모습을 살펴보는, 마치 탐정 같은 사전 편찬자의 일에서 나온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말 이 책을 읽다 보면 왜 '탐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 저절로 수긍이 갔다.

특히나 재미있었던 부분은 펜과 색인 카드, , 사람들에 둘러싸여 손으로 써내려 가던 시절이었다. 엄청난 독서를 통해서 사전에 수록된 것들보다 훨씬 앞서는 단어와 의미의 용례를 수없이 찾고, 카드철에 넣으며 자료를 만드는 과정도, 현대 OED에 가장 많은 인용문 자료를 제공한 독자였던 나이 지긋한 노부인에 관한 일화도 흥미로웠다. 책을 읽다 발견한 단어 정보를 보내는 걸로 시작해, 이후 그녀가 제공한 정보의 분량이 색인 카드 약 25만 개에 이르렀다고 하니 어느 정도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전을 만드는 일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 보다 '사전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 자체를 다루는 데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어 더 의미가 있었고, 그 중 몇몇 단어를 추려내어 그 역사와 용법을 제시해주고 있어 영어의 어원과 활용에 대한 팁도 얻을 수 있는 두 배의 즐거움을 준다. 사전 편찬이라는 엄격하고 강직한 직업에 관한 너무도 흥미진진한 이 책은 언어와 언어의 기원, 그리고 그것의 의미와 사용 방식 등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매혹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이 보여 주는 것은 위대한 사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를 넘어서 그 이상의 모든 배경과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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