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를 떠나보내며 - 상자에 갇힌 책들에게 바치는 비가
알베르토 망겔 지음, 이종인 옮김 / 더난출판사 / 2018년 7월
평점 :
품절


 

책은 그걸 읽는 순간 속에 존재하고, 그 후에는 읽은 페이지들에 대한 기억으로서 존재하며, 책이라는 구체적 형태는 얼마든지 처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다. 가령 보르헤스가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보르헤스의 수수한 집을 방문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의 개인 도서관이 바벨탑처럼 어마어마할 것으로 상상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실제로는 수백 권의 책들만 보관했고 그것들조차 방문객들에게 선물로 줘버리곤 했다. 가끔 어떤 책들은 그에게 감상적인 혹은 미신적인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그가 기억하는 몇 줄의 문장이었지, 그 문장이 수록되어 있는 책이라는 구체적 형태는 아니었다.  p.87

 

이 책은 현재 아르헨티나 국립 도서관장으로 재직 중이며, 작가이자 번역가, 편집자, 국제펜클럽 회원이자 '책의 수호자' '도서관의 돈 후안' 등으로 불리며 명실공히 세계 최고 수준의 독서가이자 장서가로 평가 받는 알레르토 망겔이 70여 개의 상자에 3 5천여 권의 책을 포장하며 느낀 소회와 단상을 담은 에세이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누구도 모든 책을 읽을 수 없고 그걸 바랄 수도 없기에, 우리는 어떤 사람의 애독서 목록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그래서 모든 서재는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말이다. 어떤 책을 읽느냐, 또는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느냐는 독서 목록에 따라 누가 우리의 친구이고 또 누가 우리의 친구가 아닌지를 말해준다는 그의 말에 괜시리 뭉클해졌다. 책이야말로 내가 살아온 역사이고, 내가 생각하는 세계의 바탕이며,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 역시 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어 왔기 때문이다.

알베르토 망겔은 십대 후반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피그말리온'이라는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다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만났고, 시력을 잃어가던 그에게 4년 동안 책을 읽어주면서 큰 영향을 받은 걸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와 보르헤스가 책을 소유하는 방식은 완전히 정반대이다. 보르헤스는 책을 읽고 난 뒤 그것은 기억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책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는 처분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반면, 망겔은 언어의 구체적 물질성, 책의 단단한 현존, 그 형체, 크기, 질감을 원했다. 그랬기에 망겔에게 책을 상자에 넣어 창고에 처박아두는 일은 생매장처럼 느껴졌고, 서재의 해체 후 긴 애도의 기간을 견뎌야 했던 것이다. 그러했으니 서재를 해체하기로 결정하고, 마침내 모든 책을 포장한 후 텅 빈 서재의 한가운데서 그가 느꼈을 부재의 무게란 어땠을 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나는 그 책을 집어 들고 페이지를 넘기며 여기저기 한 줄씩 읽어본다. 이 책은 내가 오래 전 손에 들고 펴 보았던 바로 그 책인가? 이 책은 내가 처음으로 헤세의 싯다르타 왕자 이야기와 마거릿 미드의 사모아인 이야기를 읽었던 때 갖고 있었던 책과 동일한가? 분신의 전설에 따르면 우리의 분신은 그림자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곧바로 그를 알아본다고 한다. 여기 브로드웨이에서도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의 도플갱어는 그림자가 없고 과거도 없다. 각각의 독서 체험은 독특한 장소와 시간을 갖고 있기에 복제될 수 없다. 나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도서관도 완벽하게 부활할 수는 없는 것이다.  p.132

 

현재 내 서재에는 이천 권 정도의 책이 있는데.. 워낙 좁은 방이라 책이 늘어날 때마다 책장에 이중으로 넣다 보니.. 나중에는 필요한 책을 찾느라 애를 먹기도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주기적으로 책들을 정리하게 된다. 보관할 책인지 다시 읽지 않을 책인지 구분해서, 필요 없는 책은 선물을 하거나 중고서점에 판매를 하는 식으로 정리를 하게 된다. 그리고 책을 정리할 때마다 나 역시 망겔 처럼 추억과 명상에 잠기곤 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책 속에는 책을 읽었을 당시의 내 시간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었고, 그리고 그때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으며, 날씨며 풍경들이 고스란히 함께 있다. 마치 시간이 멈춰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망겔의 말처럼, 모든 서재는 일종의 자서전일 수밖에 없다. 나는 한 번이라도 더 읽을 만한, 분명 언젠가 다시 페이지를 들추게 될 책들 위주로 서재에 보관을 하는데, 그렇게 책장을 채우고 있는 목록들이야말로 나라는 인간의 이루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이니 말이다.

망겔은 스스로를 위로할 목적으로 침대 맡에 놔둔 물건이 언제나 책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니 그의 서재는 그 자체로 위로와 조용한 안식의 장소였을 것이다. 망겔 처럼 모든 문제의 해답이 책 안에 있다고 믿는 사람, 삶을 견디게 해주고 돌파하게 해주는 것이 책의 힘이라고 믿는 사람, 서재야말로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며 자신의 일부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야만 한다. 단테, 보르헤스, 카프카, 셰익스피어, 플라톤, 장자 등 동서고금의 책들을 종횡무진 아우르는 망겔의 해박함과 통찰, 그리고 책에 관한 절절한 애정 고백이 당신의 마음을 단 번에 사로잡을 테니 말이다. 책과 도서관, 그리고 문장들과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로 가득한 마법 같은 작품이다. 알베르토 망겔의 책들이 전부 좋았지만, 이 책은 그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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