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추지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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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절반도 진행되지 않았건만 방석에 파묻혀 잠들어 버린 사람. 그런 인물에게 '주인공'이라 할 자격이 있을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배려심이다.

자라, 고와다. 푹 자라.

주인공이니까 노력해야 한다고 대체 누가 정했어?

 

장난 같은 너구리 가면에 시대착오적인 구제고등학교의 검은 망토 차림을 한 괴인이 교토 거리에 나타났다. 그런 이상한 차림을 한 인물이 꾸물거리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신고를 했고, 교토 경찰은 근면한 시민의 신고로 불이 난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겁먹은 시민을 무시하고 괴인은 묵묵히 사람들을 도와주며 활약했고, 괴인이 좋은 놈이라고 알려지자 인기는 거칠 것 없이 올라갔다. 그렇게 교토에 폼포코 가면이 나타나고 일년쯤 지난 뒤에,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 고와다는 게으름을 피울 수 있다면 뭐든 할 거라는 식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업무 시간 의 시간에는 가급적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웠으며, 주말이면 주말이면 밤낮없이 깔아 놓은 기숙사 이부자리에 누워아내가 생기면 하고 싶은 일 목록을 만들고, 기숙사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인해 고와다와 폼포코 가면이 만나게 되었고, 이후 폼포코 가면은 고와다에게 자신의 뒤를 이으라고 다그쳤고, 고와다는 고집스럽게 거절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더는 이 부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는 너구리 괴인과 자신은 게으름을 피우느라 너무 바빠서 그런 일은 할 수 없다는 게으름뱅이 남자의 이상한 실랑이는 계속 되풀이 된다.

게으름 피우느라 바쁘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취미도 없고 애인도 없는 독신인 데다가 딱히 할 일도 없어 보이는 한가한 사람이 말이다. 고와다 못지 않게 그에게 자신의 뒤를 이으라고 강요하는 너구리 가면 역시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아침, 교토 기온 축제를 하루 앞둔 전야제의 날이었다. 그저 주말을 빈둥거리며 보내고 싶었을 뿐인 고와다는 본의 아니게 폼포코 가면과 엮여 원치 않는 모험에 발을 디디게 된다. 교토를 둘러싸고 토요일 단 하루에 일어나는 기상천외한 대소동은 이들 두 캐릭터 외에도 매우 개성이 뚜렷하고 독특하기로는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는 인물들이 함께 한다. 세계에서 가장 게으른 탐정 우라모토와 주말에만 조수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대성 다마가와는 주말 탐정이지만 미행에 굉장히 미숙하다. 주말의 일정표를 빽빽하게 만들어 하루를 보내야만 안심하는 커플인 고와다의 직장 선배 온다와 그의 애인인 모모키, 무시무시한 풍모에 겁을 먹게 만드는 고와다의 연구소 소장인 고토 소장, 알파카와 판박이인 모 거대 조직의 수령 5대 등... 하나 같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까지 주인공이 움직이지 않아도 모험이라는 이야기가 성사될 수 있는 걸까 싶기는 하지만 말이다.

 

"조금은 긴장감을 가져, 이 게으른 인간아."

"우리는 인간이기에 앞서 게으름뱅이입니다."

"게으름 피울 여유는 없어."

"인간은 자신이 진실로 추구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법이죠." 라고 말하면서 고와다는 절벽 끝에서 겨우 버티는 큰 바위를 힘차게 미는 듯한 감촉을 느꼈다.

 

오래 전 모리미 도미히코의 작품을 처음 만나게 된 건 <유정천 가족>이었다. 어딘가 유쾌하면서도 기묘한, 그리고 현실을 넘나드는 매혹적인 판타지와 특유의 이야기꾼다운 문체와 스토리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던 기억이 난다. 보는 내내 킥킥대며 웃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덮기 전에 뭉클하고 짠한 뭔가가 가슴에 남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고 말이다. 주인공이 사람이 아닌 너구리라니. 이 무슨 동화 같은 판타지일까.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마치 너구리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마법처럼 책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너구리며, 텐구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며.. 그들의 다소 황당하고 판타지스러운 이야기에 그냥 자연스럽게 동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신작 <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은 여러 모로 너구리를 소재로 한 <유정천 가족>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세상에 인간, 너구리, 텐구라는 세 존재가 어우러져 살아간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만큼, 이번 신작에서 너구리 가면을 쓰고 무리하게 착한 일을 하려는 '폼포코 가면'이라는 정의의 사도 역시 만화처럼 현실감없는 캐릭터였으니 말이다.

 

 

모리미 도미히코만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력은 이 작품에서도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 어딘가 유쾌하면서도 기묘한, 그리고 현실을 넘나드는 매혹적인 판타지와 특유의 이야기꾼다운 모습으로 종횡무진 마구 달려간다고 할까. 기존의 작품들이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상상력을 넘어서 망상력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조금 더 현실적인 배경과 캐릭터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이렇게 게으른 주인공은 만나본 적이 없지만 말이다. 주인공은 매사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어야만 하나? 탐정이라면 자고로 길을 헤매고 다녀서는 안 되는 걸까? 우리의 영웅이라면, 정의의 사도니까 게으르면 안 되는 걸까? 작가는 말한다. 누구든 졸릴 때는 자야 한다고. 탐정인데 길을 헤매는 모습에 어이없어 할 수도 있지만, 독자들이여 배려심을 가지라고 말이다. 게으름에 능숙한 사람을 동경하여 이 소설을 썼다는 모리미 도키히코는 이 작품을 통해서 게으름뱅이가 활약할 수 있는 전무후무한 세계를 만들어 낸다. 특히나 한국판에서는 특별히 고와다가 활보했던 교토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이 교토의 실재 지명과 장소를 배경으로 했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고 한다. 언제나 모리미 도미히코의 이야기는 교토를 배경으로 펼쳐지기에, 책을 읽을 때마다 교토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당장 교토에 가고 싶다는 마법을 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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