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멈추는 법
매트 헤이그 지음, 최필원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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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인간이 백 살을 넘겨 살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계속 살아 나갈 의지가 없기 때문에, 지겹게 반복되는 생각과 인생에 지쳐 버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언젠가는 살아오면서 숱하게 봐 온 미소나 몸짓에 진저리를 치게 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모든 것이 영영 깨지지 않는 사이클 안에 갇혀 버린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여기, 현재와 과거 사이를 오가며 사는 남자가 있다. 그에게 순간은 언제나 지금과 그때 사이에 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그에게는 조금 특별하게 흘러간다.

 

 

그녀가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펜을 똑딱거린다. 한 번의 똑딱거림은 한 순간이다. 한 번, 그리고 잠시 멈추었다가 또 한 번. 오래 살수록 점점 힘들어진다. 순간을 붙잡는 것. 각 순간들이 도착하는 즉시. 과거와 미래가 아닌 무언가에 갇혀 사는 것. 이곳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

역사 교사인 톰 해저드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관해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당시에 살았던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인 셰익스피어가 이야기 속에 등장하고, 톰은 그가 우리처럼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작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사업가이기도 했고, 연극 제작도 했었고, 우리와 똑같이 숨을 쉬고, 잠을 자고, 또 화장실도 들락거렸으며, 입냄새를 심하게 풍기기도 했던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그가 입 냄새를 심하게 풍겼다는 걸 대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마치 그 시절에 살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느 날 톰은 동료 교사인 카미유와 대화를 나누다 그녀가 읽고 있었던 피츠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라는 책을 본다. 그녀가 이 책을 읽어 봤냐고, 어땠냐고 물어보는데 그는 머릿속 무수한 기억들 속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있다. 그는 지금 런던 학교의 교무실에 앉아 있지만, 그와 동시에 파리의 호텔 바에도 들어와 있었다. 두 세기, 두 곳의 장소와 두 개의 시간 사이에 갇혀 버린 것이다. 대체 그의 정체는 뭘까.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40대로 보이는 톰은 세월이 흘러도 외모가 변하지 않는 독특한 병에 걸린 사람이다. 애너제리아라는 명칭의 이 병을 앓는 사람들은 노화의 속도가 정상인들에 비해 15배쯤 느리다. 그리고 면역 체계가 강화되어 거의 모든 바이러스성 감염과 세균성 감염으로부터도 안전하다. 하지만 그들에게만 시간이 멈춰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들도 언젠가는 죽는다. 슈퍼히어로는 아니라는 얘기다. 단 이들이 죽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구백오십 살쯤 돼서 자다가 죽거나, 아니면 폭력에 의해 심장이나 뇌가 손상되어 죽거나. 주인공 톰 해저드는 4백여 년 전에 태어났다. 중세 시대였기에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늙지 않는 외모 덕분에 마녀로 몰려 익사했다. 게다가 평생 유일하게 그가 사랑한 여인 로즈는 전염병으로 죽었다. 그 모든 세월을 거쳐 홀로 남은 그는 현재 439살이다. 자신의 변하지 않는 외모를 주변인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8년마다 계속 신분을 바꾸며 평생을 떠돌아 다니며 외롭게 사는 그에게 유일한 삶의 목표는 로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매리언을 찾는 것이다. 그의 딸 역시 자신처럼 늙지 않는 병에 걸려 사람들로부터 도망쳐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2초 만에 벌어진 일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4세기만에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제스처 하나 때문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다는 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 눈 깜빡할 새 한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이 파악될 때가 있다. 모래알만 보고 우주를 이해할 수 있듯이. 한순간에 빠진 사랑은 첫눈에 반한 사랑과는 또 다른 것이다.

무려 사백 년이 넘는 시간을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마녀사냥과 전염병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던 중세 시대를 거쳐, 셰익스피어가 활약한 엘리자베스 시대, 재즈가 흘러 넘치던 19세기 초의 파리를 지나 피츠제럴드와 찰리 채플린이 살던 뉴욕을 거쳐, 21세기 현재에 이르는 그 긴 시간의 여정이라니. 이야기는 끊임없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그가 살았던 과거 속 각각의 시대상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나 셰익스피어와 피츠제럴드가 등장하는 장면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1599년의 런던, 셰익스피어가 <뜻대로 하세요>를 공연할 때 필요한 류트 연주자로 톰을 캐스팅하게 된다. 톰은 그와 함께 무대에 오르고, 작가가 아닌 배우로서의 셰익스피어를 바라보기도 하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셰익스피어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1928년의 파리, 바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외로웠던 톰은 우연히 화려한 커플 옆자리에 앉게 된다. 톰에게 블러디 메리라는 칵테일을 추천한 바로 그 남자는 스콧 피츠제럴드, 그는 아내와 함께였다. 사백 년 이상 살다 보면 세상 그 누구를 만나도 흥분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톰이지만, 침대 옆에 놓아 둔 책을 쓴 작가와 우연히 마주하게 된 그날의 사건은 그에게도 무척 특별하게 기억된다. 그리고 독자인 나에게도 이런 순간들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것 같다. 셰익스피어,  피츠제럴드와 같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평범한 인간이고 싶다. 그런 바람을 품어온 지 꽤 되었다. 한 사백 년쯤.

애너제리아를 앓는 사람들의 모임인 '소사이어티'는 평생을 떠돌아 살아야 하는 톰에게 안정된 삶을 보장해주는 대신, 8년마다 완전히 정체를 바꾸어야 하고, 그들이 의뢰하는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톰은 평범한 사람들인 하루살이들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도록, 자신과 같은 증상을 앓는 이들을 찾아 모임에 가입하도록 권유한다.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부득이한 방법을 쓰더라도 그들의 존재를 보호하기 위해서. 왜냐하면 자신이 수백 년 동안 찾아 헤매고 있는 딸 매리언을 소사이어티가 찾아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과연 그는 딸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4세기만에 처음으로 마음을 흔드는 여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절대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는 소사이어티의 규칙을 지킬 수 있을까. 이야기는 긴장감 넘치는 미스터리처럼 진행되다가, 가슴을 설레게 하는 로맨틱 드라마가 되기도 하고, 수세기의 시간을 넘나들며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판타지가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눈을 뗄 수 없는 탄탄한 구성과 흥미진진한 전개 덕분에 페이지 위의 글들이 영상화되어 눈 앞에 보이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으로 영화 제작이 확정되었다고 하는데, 영화화는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매트 헤이그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만나는 건데,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진행되는 스펙터클한 스토리에다 단단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마치 그림 그리듯이 장면들을 그려내고 있어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과거라는 것이 조용히 쌓이고 쌓여 현재를 만들고, 그 시간의 축적이란 모든 물체와 단어 사이에 유령처럼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너무도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방금 전까지는 1950년대였다가 이내 1920년대로 바뀌기도 하는 그 순간들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마치 마법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근사한 작품과 사랑에 빠지지 않을 방법이란 없다. 아마 이 책을 읽게 되는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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