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어야 하는 밤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다이아나의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독일 국민 8,000만 명이 8N8 사냥감의 적이다. 어린이, 노인, 환자, 교도소 수감자를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수천만 명이 대대손손 편하게 먹고 살 거액의 상금을 타기 위해 8N8 사냥감을 죽이려 들 수 있다.

물론 사람들이 이런 황당한 얘기를 진지하게 믿는다면 그렇겠지.

시청자 절반이 팩션 드라마를 다큐멘터리로 여기는 나라라면 안 될 것도 없다.

누군가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의 삶을 바꿔 놓을 아주 중요한 질문이라고.

"자유롭게 딱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누구를 죽이고 싶으세요?

 

당신이라면 누가 떠오르는가. 그리고 만약 정말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실행해 옮길 수 있을까. 이 작품은 바로 거기서 출발한다.

한 때 잘나가는 밴드에서 드러머로 활동하며 자작곡을 연주했었던 벤은 현재 커버 밴드에도 못 끼는 곳에서 해고 당한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 해고였고, 술이나 마시려고 가려던 차에 어디선가 젊은 여자의 비명이 들린다. 남자들로부터 폭행을 당해가며 구해줬더니 소녀는 아저씨 때문에 다 망쳤다며 돈이 날아갔다고 소리친다. 그리고 찾아간 딸의 병원에서 전부인인 제니퍼는 딸이 자살을 시도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사실 벤의 딸 율레는 4년 전 자신이 운전하던 차로 교통 사고가 나 두 다리를 잃었고, 일주일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현재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미심쩍은 상황들 때문에 딸이 살인미수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굳어 지려는데, 갑자기 건너편 호텔 옥상의 대형 스크린에 벤의 사진이 뜬다. 아까 자신이 구해줬던 여자의 이마에서 본 것처럼 얼굴에 8자가 그려진 채로 말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정부에서 살인 복권을 발행한다. 단돈 10유로만 내면 누구나 죽이고 싶은 한 사람을 추천할 수 있고, 88일 저녁 88분에 추천된 모든 후보자들 중에서 한 명을 뽑는다. 제비 뽑기로 선정된 8N8 사냥감은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약 12시간 동안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그 사람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더라도 절대 처벌받지 않는다. 대통령이 살인을 포함한 모든 위법행위를 용서하겠다고 공표하고, 사냥감을 포획하여 죽이는 데 성공한 사냥꾼은 상금 1,000유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독일 국민 전체, 수천만 명이 거액의 상금을 타기 위해 사냥감을 죽이려 들 수 있다는 얘기다. 벤은 생각한다. 이런 쓰레기 같은 상황이 진짜일 리 없어. 장난일 거야. 하지만 올해의 살인 복권이 추첨되고, 그 대상자로 베를린에 사는 심리학과 여대생과 벤이 지목된 것이다. 과연 벤은 온 세상이 참여하고 있는 살인 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까. 모두가 그를 죽이려고 들텐데, 그는 누구를 믿고 믿지 말아야 할까.

 

“벤, 만나서 반가워요. 딱 한 가지만 물을게요. 당신의 삶을 바꿔놓을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준비되셨나요?”

벤은 끄덕였다. 그런 다음 다이아나의 요구를 알아차리고 얼른를 터치했다.

“고마워요, . , 그럼 물을게요. 자유롭게 딱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누구를 죽이고 싶으세요?”

벤은 스마트폰을 내리고 주위를 살폈다.

만약 오늘, 지금, 현재, 하룻밤 동안 범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될 추방자 한 명을 추천할 수 있다면 나는 누구를 추천할까? 당신이라면 이런 살인 복권에 누군가를 추천하겠는가? 혹은 당신이 사냥감으로 선출된다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적으로 믿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의 상금을 마다하고 당신을 숨겨줄 그런 사람이 있을까.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작품이 주는 가장 큰 재미는 무엇보다 '예측할 수 없음'에 있다. 그 동안 만나왔던 전작들에서도 그랬지만, 두툼한 페이지를 숨쉴 틈 없이 달려가 범인이 밝혀지고 난 다음에도 해결과 해소의 안도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그 어떤 예정된 것에 대한 불안감, 그러나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것에 대한 기대감까지 차오르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들은 오직 피체크의 작품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의 전매특허나 다름 없다. 이번 작품 역시 초반부터 온 세상이 지목한 살인 게임의 사냥꾼이 된 남자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도망치는 과정은 심장이 쫄깃해지도록 긴장감을 부여하고, 숨 막히는 도심 속 추격전은 흡사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제바스티안 피체크는 영화 <더 퍼지>를 보고 이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는 미국 정부가 하루 동안 살인을 포함한 모든 범죄를 허락하는 미래 세계가 등장하는데, '미래에 모두가 모두의 적이 된다'는 비현실적인 아이디어에 매력을 느꼈다고. 거기서 그는 '현재 모두가 한 사람의 적이 된다'는 현실적 아이디어로 이 작품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누가 당신을 해치고 모욕하고 화나게 했나요?

혹시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한 마녀사냥이 먼 이야기가 아닌 요즘, 살인 복권이라는 작품 속 설정이 허구의 그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당신은 과연 누구의 이름을 적을 것인가. 혹시 누가 내 이름을 적지는 않을까. '내가 죽어야 하는 밤'이라니, 상상만해도 오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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