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문학동네에서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출간될 예정이란 소식을 들었다. 총 4권. 예습하는 뜻에서 미뤄뒀던 BBC 드라마를 보았는데, 연초에 KBS에서 수입하여 방영한 것을 결제하여 보았다. 경건하게 마음의 준비를 다 하였으나, 검수를 꼼꼼하게 하시는지 출간이 점점 미뤄졌고 출판사에 따로 문의를 넣기도 여러 번…. 결국 문학동네 카페를 염탐하기에 이르렀다. 『전쟁과 평화』를 기다리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신이 났다. 정말 마지막 알림인 듯 한데, 10월이면 1권부터 순차적으로 출간된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분들께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지난 5월에 써 두었던 리뷰를 가져왔다.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는 순전히 사적인 감상이며 일부 정보는 당시와 달라졌을 수 있다. 이 드라마를 보았음은 짤막하게 페이퍼에도 쓴 적이 있는데, 『전쟁과 평화』를 정말 사랑하시는 ㅂ님께서 BBC 버전을 비롯해 이제껏 나온 영화들에 대한 평을 해주셨고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댓글을 읽으며 느껴지는 ㅂ님의 내공과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ㅠㅠ 나는 이래서 알라딘이 너무 좋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해당 페이퍼를 링크하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댓글을 읽어보셨으면 한다.


  페이퍼 Don't look backhttp://blog.aladin.co.kr/769383179/8486555


이 글은 줄거리 요약과 BBC 버전 드라마에 대한 짧은 감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줄거리를 피하시려면 마지막 다섯 문단 혹은 네 문단만 읽으시길 권한다. 참고로 KBS 방영 버전은 자막이 있어 좋지만 편집된 부분도 있는 듯 했다. 이 드라마는 《피키 블라인더스》 등에 참여한 톰 하퍼의 연출이고, 《오만과 편견》과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 유명작품에 참여한 각본가 앤드류 데이비스의 이름이 눈에 띈다. 방대한 내용을 스크린에 옮기기 위해 6편으로 구성되었는데, 리투아니아 등지에서 로케이션 촬영하여 분위기를 잘 살렸다. 영상미가 빼어나다.


작품은 1805년경 러시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피에르 베주호프는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혁명에 긍정적이고 나폴레옹을 숭배하는 모습은 러시아 사교계와 맞지 않다. 그가 사생아라는 것도 따돌림 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피에르는 아나톨리 쿠라긴과 돌로호프의 방탕한 생활에 어울려 친우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의 진지한 충고를 받기도 한다. 안드레이는 사교계의 위선에 질려 임신한 아내를 아버지의 영지에 맡기고 전쟁에 나간다. 한편 피에르는 아버지의 유언으로 예상치 못한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는다.


피에르는 곧 자신의 친척인 쿠라긴 공작의 딸 엘렌 쿠라기나와 결혼하게 되지만 조건을 노린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다. 쿠라긴은 아들 아나톨리도 부유한 지참금을 가진 안드레이의 동생, 마리야 볼콘스카야와 결혼시키려 하나 실패한다.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의 편에 서서 나폴레옹의 군대에 맞서나 크게 패한다. 바로 아우스터리츠 전투다. 이 전투에서 안드레이는 부상을 입고 쓰러지는데, 나폴레옹은 그가 생각했던 인물이 아니었고 전쟁이 얼마나 허망하며 삶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하기로 마음먹는다.


한편 피에르는 투서로 인해 엘렌이 돌로호프와 만나고 있음을 알게 되며, 자신을 조롱하는 돌로호프와 결투를 벌인다. 크게 상심한 그는 아내에게 결별을 고하고 페테르부르크로 향한다. 프리메이슨에 입단하는 한편 영지에 학교를 세우는 등 농민들을 돌보며 나누는 삶을 실천하려 애쓴다. 안드레이는 집으로 돌아왔으나 아내가 출산 중 사망하자 염세주의에 빠진다. 소식을 들은 피에르는 친우를 찾아와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을 격려한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로스토프 가를 찾은 안드레이는 나타샤를 만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조건이 많이 다른 이 혼인에 반대하는 아버지 볼콘스키 공작은 조건을 붙인다. 1년간 떨어져 있을 것, 돌아온 후에도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결혼하라는 것이다. 나타샤는 안드레이의 부재를 잘 견뎌냈지만 아나톨리 쿠라긴의 유혹에 빠지게 되고 결국 약혼은 취소된다. 피에르는 나타샤를 위로하며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자각한다. 분노와 슬픔에 빠진 안드레이는 전쟁터로 복귀하고, 나타샤는 종교에 의지한다. 한편 볼콘스키 공작이 사망하고, 영지민들의 저항에 발이 묶인 마리야를 나타샤의 오빠 니콜라이 로스토프가 구해주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이 싹튼다.


보로디노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은 안드레이는 병상에 누운 아나톨리를 발견하고, 마음속에서부터 그를 용서한다. 퇴각하는 러시아군이 불을 지른 모스크바로 프랑스군이 진주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는다. 피난길에 오른 로스토프 가는 부상병들을 보살피고 안드레이와 나타샤가 운명적으로 재회한다. 나타샤의 보살핌을 받았으나 안드레이는 결국 세상을 떠난다. 한편 나폴레옹을 암살하려던 피에르는 프랑스군에 포로로 붙잡힌다. 그는 감옥에서 플라톤 카라타예프라는 농부에게서 삶을 대하는 태도, 깨달음을 얻는다.


퇴각하는 나폴레옹군을 추격하던 러시아군에 의해 피에르가 구출된다. 돌아온 피에르는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삶을 소중히 여기며 산다. (엘렌은 사망) 모스크바에서 마리야, 나타샤와 재회한 그는 안드레이를 추억하며 우정을 나눈다. 피에르와 나타샤, 마리야와 니콜라이는 전쟁이 끝난 후 한층 성숙된 모습을 보여준다. 마음을 확인하고 가정을 꾸린 그들이 함께 식사하는 목가적인 풍경에,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피에르의 나레이션이 깔리며 드라마의 막이 내린다.


굵직한 줄기만 정리하다보니 줄거리가 간단해진 감이 있다. 드라마는 좋았지만, 원작 읽기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배우들이 아무리 호연했다 하여도 BBC 시각으로 각색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영상이 무척 아름다우며 인물의 내면 변화와 깨달음을 얻는 장면들을 섬세하게 연출하고 있다. 안드레이의 경우, 그가 멍하니 하늘을 눈에 담으며 전쟁의 허무함과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 장면, 피에르가 찾아와 허무를 떨치라 조언하는 장면, 나타샤와의 첫 만남, 죽음의 문턱에서 삶을 반추하는 모습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내가 좋아하는 러시아 영화는 《러브 오브 시베리아(원제: 시베리아의 이발사)》인데 그 이유는 러시아인들의 열정과 사랑, 순수하고도 거침없는 정신세계를 잘 녹여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광활한 대지 안에서 살아가는, 또 그 땅을 가슴에 담은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다. 적합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 그러니까 사고의 한계치가 애당초 다르다 해야 할까? 원작도 읽기 전이고, 문학 세계에서 편견을 갖고 싶진 않지만- 다소 절제된 분위기의 《전쟁과 평화》는 영국의 《전쟁과 평화》란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번역되는 모든 언어는 현지화 과정을 거친다고 볼 수 있으니 이런 생각은 무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3인- 피에르 베주호프는 폴 다노, 나타샤 로스토바는 릴리 제임스, 그리고 안드레이 볼콘스키는 제임스 노튼이 맡았다. 폴 다노의 영국 억양이 자연스럽다. 선함을 잃지 않는 피에르를 잘 표현한 것 같은데 배우가 동안이라는 것이 아쉽다. 뛰어난 연기로 유명하지만 피에르는 이제껏 맡은 배역(약간 도라이들)과 완전히 달라 새로웠다. 폴 다노는 봉준호 감독의 《옥자》에 캐스팅되었다.


볼콘스키 남매를 연기한 제임스 노튼과 제시 버클리 역시 인상적이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사유하는 장면이 많은 안드레이를 표현했고, 종교적이며 신중한 마리야 역시 눈에 띠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좋은 만남을 가지는 중이란다. 반면 릴리 제임스가 분한 나타샤는 좀 별로였다. 《다운튼 애비》에서의 연기가 훨씬 낫고, 아직 대작의 주연을 맡기엔 부족함이 있어 보인다. 니콜라이 역을 맡은 잭 로우든은 로렌스 올리비에 어워드 수상자다. 돌로호프를 연기한 톰 버크도 인상적이었고 나폴레옹으로 나온 마티유 카소비츠도 반가웠다.


원래 톨스토이는 ‘데카브리스트 3부작’을 쓰려고 했다. 데카브리스트 혁명을 위해 그 시초가 되는 프랑스 자유주의에 영향을 받은 인물들(피에르, 안드레이 등)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선 나폴레옹에 맞선 조국전쟁을 설명해야했다. 그래서 1869년에 출간된 《전쟁과 평화》의 원제는 《1805》였다. 1863년 집필을 시작했을 때 톨스토이의 나이는 겨우 서른다섯을 넘겼으니 여러 모로 대단하다고 하겠다. 1805년에서 1820년의 러시아, 삶에 대한 톨스토이의 철학을 담은 이 소설을 시일 내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10월 10일 『전쟁과 평화』 1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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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9-27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뭐지, [제인오스틴 연애수업]인가.. 그런 제목의 책을 잠깐 넘겨 보았다가 [전쟁과 평화]가 언급되어 있는 걸 봤거든요. 그래서 얼른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어요. 그전에 제인오스틴 연애수업 먼저 읽어야겠지만..
그 책을 읽고 나면 에이바님이 어떤 페이퍼를 쓰실지 벌써부터 기대가 돼요.

전쟁과 평화와 다르지만 뜬금없이, 이 페이퍼를 읽다보니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생각이 나요. 이건 펭귄에서 다섯권짜리로 읽었는데, 5권 읽을 때 펑펑 울었거든요.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읽었었어요. 그런 감정 말고도 여러가지로 아, 정말 뛰어난 작품이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전쟁과 평화]가 그 뒤를 이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돼요. 어째서 그럴까요?

기다립시다.
저, 기다리는 거 정말 잘해요.

에이바 2016-09-27 17:27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에 페이퍼 쓸 땐 출간이 이렇게 늦어질지 몰랐어요. 박형규 교수님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요. 이 작품을 읽었을 때 어떠한 감동을 마주할까 생각하면 아주 설레요. 아, 이건 가십인데 드라마에서 안드레이 역할을 맡았던 제임스 노튼이 차기 007 물망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확정은 아닌 것 같고요. 그 다음엔 찾아보지 않아서...ㅎㅎ

레미제라블도 전쟁과 평화도, 한 국가를 뒤흔든 중요한 사건들을 다룬 장편이면서 문학성이 있기 때문일까요? 전 사실 레미제라블을 읽지 않아서 다락방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짐작해봐요. 영화나 뮤지컬에서 보았던, 혁명에 자신을 내던지는 시민들의 숭고함에 차오르는 감동을요.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오잖아요. 기다려봐요, 우리.

oren 2016-09-27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전쟁과 평화』에 푹 빠져 지내고 있는데 에이바 님의 이 글을 읽으니 정말로 반갑네요. 저는 맹은빈 님이 번역한 동서문화사 판(전2권 1,724쪽)을 사서 읽고 있는데, 어제 막 1권의 클라이막스 부분(아나똘리의 나따샤 유괴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안드레이와의 약혼은 파경을 맞고, 나따샤는 음독자살까지 시도한 끝에 뜻밖에 삐에르에게서 위로와 평안을 얻는 장면)을 다 읽고, 이제 막 2권째로 넘어가서 1812년 나폴레옹이 네만 강을 건너 모스크바로 진군하는 장면들로 나아가고 있답니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에 영화로 만들어진 《전쟁과 평화》에 대한 기사도 더러 찾아서 읽어봤는데, 오드리 햅번이 나따샤로 등장했던 `옛날 고전 영화`와 이번에 BBC에서 새로 만든 두 영화는 기필코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에이바 님께서 정말 훌륭하게 요약해 놓으신 글 너무 잘 읽었고,『전쟁과 평화』원작이 주는 깊은 울림과 격한 감동도 놓치지 마시기를 바랄께요~

에이바 2016-09-27 17:28   좋아요 0 | URL
저도 동서문화사 판을 사야하나 했는데 톨스토이 전공이신 박형규 교수님 번역으로 뿌쉬킨하우스에서 출간될 예정이란 소식을 듣고 계속 기다렸어요. 그러다 출판사를 옮겨 문학동네에서 출간된다기에 또 부푼 마음을 안고 기다리고 있고요.

기억이 좀 가물가물한데 드라마 상에서 나타샤의 납치나 음독자살은 각색되었던 것 같아요. 다만 그 고생을 한 나타샤를 피에르가 첫 눈에 알아보지 못하는 장면은 약간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여전히 젊고 예뻐서요. 아무래도 여주인공이라 미모를 포기할 수 없었던가 짐작했고요... 아무튼 2016년 드라마는 영상과 연출이 굉장히 섬세하고 아름답습니다.

지난 번에 썼던 페이퍼에 댓글로, 전쟁과 평화를 정말 아끼고 사랑하시는 바스티안님이 영화들에 대한 평을 해주셨는데요. 2016년 BBC 드라마를 최고로, 뒤잇는 건 1972년 세르게이 본다르추크 감독의 러시아 영화를 꼽으시더라고요. 책이 출간되어 읽고 나면 드라마와 영화를 다시 보려고 합니다. oren님 댓글 감사드리고요, BBC 드라마도 즐겁게 감상하시면 좋겠습니다.

2016-10-10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0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0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0 1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0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0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1 0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1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1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1 15: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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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밤, cyrus님이 올리신 ‘아프로디테님이 보고계셔’를 보고 쓰는 글입니다. 이 글은 cyrus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글을 쓰시는데 들인 시간과 노력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글에 대한 애정, 자료 조사에서 오는 수고로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cyrus님의 글을 보고 좀 많이 놀랐습니다. cyrus님의 글과 제 글들의 내용과 구조에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페이퍼는 cyrus님의 ‘아프로디테님이 보고계셔’와 제 글인 ‘에드거 앨런 포와 울랄룸’, ‘에드거 앨런 포와 사랑의 시’의 유사성에 관해 쓸 예정입니다.


시의 해석과 자료 편집에 있어 특별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에드거 앨런 포의 「율랄리」와 「울랄룸」에 등장하는 아슈타르테(비너스)와 프시케의 관계, 프시케 신화, 아슈타르테 소개 등으로 이어지는 글을 보면서…, cyrus님의 글이 제 글 두 개를 하나로 이어 행간을 메우고 증보하셨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듭니다.


먼저 제 글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저는 아티초크에서 나온 에드거 앨런 포 시선 리뷰를 마친 얼마 후, 「율랄리」와 「울랄룸」에 대한 긴 페이퍼를 알라딘 서재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에드거 앨런 포와 울랄룸’, ‘에드거 앨런 포와 사랑의 시’과 거의 비슷합니다. 아슈타르테 이미지도 넣었고요.  업로드 후 글의 완결성이 떨어진다 생각하여 수정하다가 결국 삭제하였습니다. 아마 잠시 올려둔 동안 읽으신 분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두 작품에 등장하는 ‘아슈타르테’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싶었기에 글을 두 개로 나누었고, 지난 봄에 고쳐 써서 타 사이트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글을 쓰면서 들이는 애정은 아실 겁니다. 제가 소설을 쓴 것도 무엇도 아니지만…, 그때의 추억 때문에요. 다른 글보다 ‘에드거 앨런 포와 울랄룸’ 이 특별한 이유는 자료를 찾으며 이 시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원문을 찾아 읽고, 제가 좋아하는 목소리로 녹음된 낭송을 듣고, 제 스스로 번역했다가 그 졸역에 질색하기도 하고…. 여러 번 읽다 보니 의문점이 생겨 출판사에 문의하기도 했습니다. 2015년 7월 26일의 문의 내용입니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로 볼 수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 당시 공진호 번역가는 하퍼 리의 『파수꾼』 출간 북 콘서트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에 계셨습니다. 번역할 때 저본으로 삼은 시집이 미국 자택에 있었기 때문에 돌아가셔서 확인해 주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이는 출판사에서 알려주신 이야기인데 제가 그 글을 지워버려서 해당 캡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 문의글에 대한 답변이 왔습니다. (관련 없는 이야기는 삭제했습니다.)







이렇게 계속 읽으니 자연스레 「울랄룸」에 등장하는 아슈타르테에 관심이 생기고,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비너스(아프로디테)와 연관시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비너스는 금성을 말하며, 포의 작품에서 프시케가 거리껴하는 별을 가리킵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에 이르게 도와준 공진호 번역가의 해설도 주를 달아 페이퍼에 썼습니다. 이제 cyrus님과 제 글의 유사성을 이야기하겠습니다.


cyrus님은 제 글을 언급하시며 고대 가나안, 바빌론 신화의 여신인 ‘아스타르테’에 대해 소개하십니다. 아스타르테는 아프로디테와 동일하게 여겨지며 유대인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이후 「울랄룸」에 대한 화자와 프시케의 의견 차이가 그리스·로마 신화의 아프로디테와 프시케를 연상시킨다며 프시케 신화를 부연 설명하시지요.









다음은 제 글입니다. 바빌론 여신에 대한 설명은 뒤로 빠졌으나, 「울랄룸」 시에 대한 설명과 프시케 신화를 언급하며 아프로디테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신화 설명까지, cyrus님의 글과 유사합니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로 볼 수 있습니다.)








시에 대한 해석은 평이합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과 신화를 떼놓을 수 없으니까요. 다만 제 글이 알라딘에 업로드된 후, 내용과 형식이 거의 유사한 글을 cyrus님이 쓰셨다는 것이 의아합니다. 「율랄리」와 「울랄룸」을 엮은, 그리고 저의 글을 링크시키시면서요. 제가 쓴 글들이 미흡했기 때문일까요. 원래 저는 리뷰와 두 페이퍼를 합친 글을 쓰고 싶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후 쓴 글들은 차례로 읽는다는 전제 하에 작성되었고 그렇기에 설명없이 비워놓은 행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와 울랄룸, 율랄리와의 관계나 신화 속 프시케와 아프로디테의 관계가 「울랄룸」에서도 비춰볼 수 있다는 것들 말입니다. 굳이 쓰지 않더라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cyrus님이 에드거 앨런 포의 팬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보다 작가의 많은 작품을 읽으신 것도 알고 좋은 글도 많이 쓰셨지요.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도 여전히, 님의 글이 제가 비워둔 행간을 채우고 증보하신 글이라는 느낌이 가시질 않습니다. ‘아프로디테님이 보고계셔’를 읽으면서 자괴감을 느꼈고, 이 글을 알라딘에 올림으로써 불편한 상황을 초래하는 자신이 탐탁지 않습니다. 제 글을 읽고 cyrus님이 ‘아슈타르테’가 언급된 다른 소설이 있으니 찾아보겠다, 댓글을 다셨을 땐 예상치 못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답변을 주셔도, 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저 역시 앞으로 알라딘에 글을 올리는 것에 대해 숙고하도록 하겠습니다.


cyrus님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글을 임의 편집하여 밑줄긋기 한 것에 사과드립니다.



cyrus님이 쓰신 ‘아프로디테님이 보고계셔’ : http://blog.aladin.co.kr/haesung/8785364


저의 리뷰  ‘문학계의 반 고흐’ : http://blog.aladin.co.kr/769383179/7767910

저의 페이퍼 ‘에드거 앨런 포의 울랄룸’ : http://blog.aladin.co.kr/769383179/8751546

저의 페이퍼 ‘에드거 앨런 포와 사랑의 시’ : http://blog.aladin.co.kr/769383179/8754783



(2016. 09. 26. 09:51 일부 하이퍼링크 오류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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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24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바님. 어제의 글은 제가 에이바님의 글이 미흡하다고 생각하면서 쓴 게 절대로 아닙니다. 에이바님의 글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울랄룸>이라는 시가 있는 줄 정말 몰랐습니다. 제가 민음사에 나온 정규웅 번역의 《애너벨 리》를 가지고 있었고, 여러 번 읽었음에도 <울랄룸>에 대한 기억이 없었어요. 그래서 오랜만에 시집을 다시 봤습니다. 책장 구석에 있던 《애너벨 리》를 다시 보도록 해준 분이 에이바님이고, 글을 쓰도록 영감 주는 분도 에이바님입니다.

그래서 저는 에이바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 에이바님의 글 두 편을 ‘먼댓글’로 설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먼댓글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어제 쓴 글을 ‘수정’ 설정으로 전환하면 에이바님의 글이 먼댓글 설정에 실패한 날짜와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먼댓글 설정이 안 된다는 걸 확인하고, 저는 글 시작하는 부분에 에이바님의 두 편의 글을 링크했습니다. 저는 링크를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 글이 일차적으로 에이바님의 글을 참고해서 썼으니까요. 만약에 링크를 하지 않고, 에이바님에 대한 언급이 한 마디라도 없었으면 에이바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이 에이바님에게는 변명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아슈타르테에 관한 내용은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서 정리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히브리 신화》와 《여신》에 아슈타르테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고대의 신을 조사하면서 부활절의 유래를 알게 되었고요.

에이바님의 글이 먼댓글로 연결이 되었더라면 <리지아>에 관한 내용만 언급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먼댓글 연결이 실패되면서 글을 쓰게 된 동기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에이바님이 먼저 썼던 내용이 언급되었던 것입니다. 제 글이 에이바님의 글 내용과 유사한 부분은 인정합니다. 그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에이바님의 글의 주소를 링크한 것이며 제 글 본문 중간에 에이바님의 글을 참고하려고 강조했습니다. 에이바님이 캡처한 사진에 그 내용이 있습니다.

어제 시이소오님의 블로그에 이런 내용의 댓글을 남겼어요. 리뷰를 쓰기 전에 다른 분들의 리뷰를 먼저 본다고요. 저는 책에 대한 감상이 다른 분들과 겹치지 않게 쓰려고 합니다. 남들이 생각하지 않은 것을 쓰고 싶어요. 이런 글을 쓰면 정말 뿌듯한 기분이 들어요. 하지만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생각한 건 줄 알고 열심히 썼는데, 나중에 누군가가 먼저 내가 했던 생각을 글로 정리한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있어요. 그럴 때 허무하죠. 그래서 어제 쓴 글은 저로서는 부족함이 많이 느껴졌습니다. 어제 글은 에이바님의 글을 참고해서 정리한 수준에 불과하니까요. 앞서 말했듯이 에이바님의 글의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닙니다. 제 글이 에이바님의 글을 표절한 수준으로 보인다면 글을 삭제하겠습니다.

에이바 2016-09-24 11:47   좋아요 0 | URL
음... cyrus님. 님의 답변을 보니 저는 더욱 난감합니다. 저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 먼댓글 설정을 하려 했는데 불가하여 대신 제 글을 링크하셨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제 글을 참고해서 글을 작성하셨고 그걸 본문에 강조하려고 하셨고요.

먼댓글 설정은 제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알라딘 서재를 만들 때 먼댓글이 뭔지 몰랐고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도 굳이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제 글에 먼댓글을 쓰겠나 하는 생각에요. 제 기억으로는 이 얘기를 ㄷ님이 먼저 해주셨고, A님도 말씀해주셨는데 두 분 모두 제 글을 링크한 후 페이퍼를 쓰셨습니다. 하지만 해당 페이퍼에서 제 글에 대한 생각과 의견을 밝히셨을 뿐 cyrus님처럼 제 글을 가져다 쓰진 않으셨어요.

cyrus님도 그렇게 하실 수 있었어요. 제 글을 링크하시고 ˝리지아˝ 이야기만 덧붙이셨으면 먼댓글 설정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먼댓글 기능을 하는 글이 됩니다. 다른 분들이 먼댓글 설정이 안 되어 링크하고 이런 글을 썼다고 제게 알려주셨던 것처럼요. 먼댓글 설정이 안 되어 어쩔 수 없이 글을 쓰게 된 동기를 밝혔다고 하셨는데 제겐 이 글을 쓰게 된 게 먼댓글 허용을 하지 않은 제 탓이라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본문 중간에 제 글을 참고하였음을 `강조`했다고 했는데 cyrus님의 글이 그렇게 느껴졌다면 제가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거예요. 제 닉네임은 두 번 언급됩니다. 제 글을 링크하실 때, 그리고 아스타르테에 주목했다고 하실 때. 전후로 제 글을 참고했다는 설명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링크한 것이 참고했다는 뜻인가요? 아무리 링크해주셨어도, 제 글을 읽지 않고 cyrus님이 쓰신 글만 보면요. 그 글은 온전히 님이 쓰신 글이에요. 제가 님의 글을 읽으며 서운함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포인트를 잘 모르고 계신 것 같습니다.

따로 정리하신 아슈타르테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내용이 있건 없건, 타인의 글에서 힌트를 얻었다면 그것을 밝혀주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요. 이 페이퍼에서 밝힌 것처럼 시의 해석, 신화에 대한 부연설명에 대해 특별함을 주장하려는 게 요지가 아니에요. 이제서야 cyrus님이 너무 당연하게 제 글을 참고해서 썼다고 하시니 힘이 빠집니다.

시이소오님 서재에 남기신 댓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cyrus님보다 글을 먼저 썼기 때문에 예상표절로 느껴지시나요. 댓글의 처음부터 끝까지 cyrus님 비겁하세요. 제가 고민하고 자료조사를 한 뒤 애정으로 쓴 글이기 때문에 님의 글을 본 순간 유사함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님께서 쓴 글이기 때문에 님의 판단이 가장 정확합니다. 제가 cyrus님의 글이 표절이라 하면 받아들이실 수 있으세요? 제가 유사하다는 표현을 괜히 썼을까요? 저에게 책임을 넘기지 마세요. `아프로디테님이 보고계셔`를 읽었을 때 보다 지금 님의 댓글을 읽으니 더... 마음 한구석이 이지러지는 것 같습니다.

2016-09-24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4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4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9-24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바님의 답글을 10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읽었습니다. 에이바님을 속상하게 만든 원인을 스스로 확인하고, 있으면 정식으로 사과하려고요. 그리고 지금 이 댓글은 또 한 번 에이바님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심정으로 썼습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느끼셨다면 제 표현이 어수룩한 탓입니다.

먼댓글 설정이 실패한 사실을 언급한 점은 어제 있었던 상황을 밝혔을 뿐입니다. 먼댓글을 허용하지 않은 에이바님에 책임이 있다는 식의 뉘앙스를 주려고 언급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받아들이실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제가 상대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어제 있었던 일을 제 관점대로 밝히고 말았습니다. 먼댓글 허용을 원하지 않는 분들도 계시는데, 제가 그 점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예전에도 제가 아무런 예고 없이 상대방의 서재 글에 먼댓글을 작성하는 바람에 상대방이 난감한 입장을 보인 적이 있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상황의 실수를 에이바님 앞에서 저질렀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에이바님이 두 편의 글을 공들여 쓰신 점,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에이바님의 글 링크 주소만 올리고, 참고한 내용이 어떤 것인지 상세하게 밝히지 않은 점이 잘못되었습니다. 어제, 오늘 일을 계기로 앞으로는 상대방의 서재 글을 인용하거나 참고할 때도 명확하게 사실을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즐겁게 보내야 할 주말에 저 때문에 기분이 상하셨을 겁니다. 비록 댓글이지만 저의 반성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고, 가슴 속에 쌓인 속상한 감정들이 풀렸으면 합니다.

에이바 2016-09-24 15:24   좋아요 2 | URL
cyrus님. 저도 상처 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꾸 님께 모진 말씀을 드리는 이 상황이 싫습니다.

첫번째 댓글에 대한 답글에서, 먼댓글은 님이 제 글을 수정하고 편집한 이유로 납득할 수 없기 때문에 지적한 것입니다. 의도하신 바가 아닌데 꼬아들은 것처럼 되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제 글에 대한 인용이나 참고 사실을 밝히시는 것 역시 처음 글을 쓰실 때 하셔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았지요. 이후 제가 유사성 문제를 제기했고 cyrus님은 제 글을 참고하였다 밝히셨는데...

저는 지금 좀 답답한 심정입니다. 아프로디테 글을 보고 왔는데 제 글을 참고했다는 부연 설명 외엔 변한 것이 없어서요. 제가 모바일로 보고 있어서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나요. cyrus님, 입장을 바꿔서 제가 님의 글을 참고한 상황이라고 가정하면 지금 상황을 납득하시겠어요? 여기서 참고했다는 건 cyrus님이 사용하신 표현이고요. 제 표현을 다시 가져올게요.

저는 cyrus님의 글이 제 글 두 개를 하나로 이어 행간을 메우고 증보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유사하다고 판단한 문단들도 이미 말씀드렸고요. 다시 말씀드리면, 아슈타르테와 리지아 추가 정보 외 거의 모든 부분입니다. 제 글을 임의적으로 수정하고 편집하셨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저 역시 이 페이퍼를 쓰면서 어쩔 수 없이 편집하였으나 문장은 남겨두었고 cyrus님의 글임을 확실히 밝혔습니다.

cyrus님은 거기에 대해서 참고했다고 하시는데, 그래서 저는 이 대화가 겉도는 느낌이에요. 참고하셨다기엔 내용이나 구조가 지나치게 유사하지 않나요. 제 기분을 상하게 해서 미안하다 사과하실게 아니라 `왜` 기분이 상했고 `왜` 이 글을 써야 했는지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만약의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제가 만약 cyrus님이었다면요.

제 글에서 유사하다고 제기된 부분들에 반박합니다. 문제제기 이유가 합당하고 인정할 만 하면 해당 부분을 삭제한 뒤, 삭제 이유를 정확히 밝힙니다. 그리고 사과문을 씁니다. 이 모든 것은 제 스스로가 글에 대한 유사성을 받아들였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cyrus님. 그저 참고했다는 문장을 삽입하고 넘어가는 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봉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저는 정말 진지하게 앞으로 알라딘에 이런 글을 올리지 말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많이 어지럽습니다. 답변을 주셔도 좋고, 안 주셔도 괜찮다고 페이퍼에도 썼어요. 저는 이 글을 쓸 때, 만약 님이 답변을 주신다면 글에 대한 유사성에 대한 동의나 비동의, 그에 따른 이유를 생각했습니다. 표절한 수준으로 보인다면 글을 삭제한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cyrus님의 답변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제 의견을 밝혔고 그에 따른 반응을 바랐습니다. 먼댓글 허용이 안 되서 동기를 풀어 설명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이전 댓글에 이미 그건 아닌 것 같다, 제 글을 링크한 후 부연할 부분만 추가하셔도 되지 않았냐고 말씀드렸습니다. 제 글을 다시 쓰실게 아니라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먼댓글 문제는 cyrus님이 글을 쓰는 과정을 설명하신 것이지, 제 페이퍼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cyrus님. 제게 사과하셨지만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요. 님은 저의 문제제기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페이퍼를 쓴 목적은 님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닌데 제 댓글은 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 속이 상합니다.

yamoo 2016-09-24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요~ 에이바 님, 사이러스 님이 정말 에이바 님 글을 수정하고 편집했다고 생각하세요? 제3자가 보기엔 그냥 참고해서 쓴 거 같은데요..

에이바 님은 사이러스 님이 에이바 님의 글 두 개를 하나로 이어 행간을 메우고 증보하셨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데요...그래서 그게 명백한 표절이라고 생각하고 계시구요. 사이러스 님이 참고만 했다고 하니, 명백한 표절을 해 놓고 참고했다고 해서 무지 기분이 상하신 거 같습니다.

근데, 사이러스 님의 글과 인용해 주신 에이바 님의 글을 보니, 도대체 에이바 님의 글 두 개가 뭔지 모르겠군요. 도통 모르겠습니다. 이 페이퍼에서요. 그 두 개를 하나로 이어 행간을 메우고 증보했다고 했는데, 에이바 님이 이 글을 아무리 읽어도 그 글 두개가 뭔지 모르겠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내용과 형식이 매우 유사해서 기분이 언잖다고 하셨는데, 알라딘 리뷰에 같은 책에 대한 리뷰를 봐 보세요. <더 로드>에 대한 리뷰만 봐도 내용과 형식이 유사한 글이 넘칩니다. 줄거리 요약하고 자기 느낌 부가한 형식으로 썼을 경우 거의 내용과 형식은 비슷합니다.

문제는 에이바 님의 글의 내용과 형식이 매우 독특하다는 데 있는데요...제가 문의드리고 싶은 것은, 글쓰는 데 다른 사람이 쓴 글의 구조를 참조하면 안되는가...해서요. 만일 사이러스 님이 에이바 님의 글 두 개의 간격을 독창적으로 매웠다면 그게 표절이 되는 건가요? 에이바 님이 페이퍼에 말씀하셨듯이 쓰지 않은 내용을 사이러스 님이 쓴 건데요...그 생각의 단초를 참고해서 쓰면 표절이 되는지요?

3자가 보기에 에이바 님의 글을 적극적으로 참고해서 쓴 거 같습니다. 에이바 님이 강조하신 그 독특한 사고가 소개한 시의 다른 참고문헌에 나와 있는 내용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글의 형식을 모방해서 쓰는 게 표절에 해당하냐는 것이고, 내용과 형식이 유사하면 표절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에이바 님이 쓴 원글을 모두 읽지 않았고, 인용해 주신 부분만 읽었기에 에이바 님이 생각하시는 그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페이퍼에서 보여지는 내용은 사이러스 님이 에이바 님의 글을 표절했다고 보긴 힘든 거 같습니다..

에이바 2016-09-24 16:30   좋아요 0 | URL
야무님. 먼저 저와 cyrus님이 동의하기 전에는 유사성이 있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 페이퍼를 읽고 댓글도 읽으셨다면 cyrus님의 글과 유사성이 있다고 판단한 제 글들이 어떤 것인지, 어떤 문단인지 아시리라 사료됩니다. 또한 말씀하신 그 독특한 사고가 저만의 것이라 주장하는게 아님은 글의 본문과 댓글에도 남겼습니다. 저에게 cyrus님의 글에 대한 옹호를 하시려면, cyrus님이 참고하신 제 글들도 읽어보고 판단하심이 좋지 않을까요.

cyrus 2016-09-24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문제의 원인은 저한테 있다는 전제하에 저와 에이바님 단 둘이서 원만하게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에이바님의 문제 제기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전에 단 댓글에 보면 글의 유사성 문제를 인정한 점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제가 문제가 되는 내용 일부를 삭제하지 않았고, 사과문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에이바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냥 참고만 했다고 언급만 하는 저의 태도가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오늘 같은 상황이 처음이라서 제가 미숙하게 대응하는 바람에 에이바님에게 실망감을 안겨줬습니다.

오늘 밤에 공개 사과문을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문제 내용을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제와 오늘 오전에 있었던 저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에이바 2016-09-24 16:38   좋아요 0 | URL
cyrus님,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글을 쓰기 전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같은 곳에서 활동하는 알라디너이고 cyrus님과는 독서 취향도 겹치기 때문에요. 이 일로 인해 좋은 관계로 남지 못할까 우려가 많았습니다... 공개적인 글을 써서 심기를 어지럽힌 점, 저 역시 깊이 사과드립니다.

yamoo 2016-09-24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두 개의 글이 뭔지 찾았네요..
9/8 쓰신 에드거 알렌 포와 사랑의 시...와 9/7쓰신 에드거 앨런 포의 울랄룸..사이러스 님이 글을 지우신다니 유감이네요. 제가 생각한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자의 요지는 제가 생각할 때 에이바 님이 포의 시를 읽고 든 생각의 핵심은
`기형도`와 `헬렌`으로 이어지는 논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돌려받지 못하는 미완성의 사랑..

˝〈Deep in Earth〉를 기형도 시인의 단어를 빌려 번역한 것은 읽자마자 이 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에드거 앨런 포의 사랑이 땅에 묻히는 것과 기형도의 사랑이 빈 집에 갇히는 것... 두 시는 모두 사랑하는 이, 혹은 사랑 자체의 상실을 노래하고 있다. 포의 사랑은 죽음이 앗아갔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이 중단되었거나 거부되었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그러나 기형도의 사랑에선 죽음이 암시되진 않으나, 대상의 부재로 인해 그 감정이 더 이상 상호적이지 않음을 느낀다.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사랑은, 그러니까 돌려받지 못하는 사랑은 미완성인 걸까. 포의 마음에서 툭 떨어져 나온 2행의 시구처럼.
포의 작품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는 시론과도 관계 있다. 그가 생각하는 시의 정수는 아름다움이고, 이를 잘 설명하는 것은 우울한 톤과 운율(음악성)이며, 그 소재는 미인의 죽음이다. 그 예로 잘 알려진 시 〈애너벨 리〉와 어제 포스팅한 〈울랄룸〉이 있다. 그러다면 아름다움은 미인의 죽음으로서만 표현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순수하게 아름다움 그 자체를 찬양하고 노래하는 시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헬렌To Helen〉이다.˝


두번 째 글의 핵심은 포의 시 <울랄룸>이 아내 버지니아의 죽음에서 비롯된 슬픔의 노래를 프시케와 연결시키면서 등장한 에슈타르테다. 죽음의 이미지로 여신 에슈타르테를 연결한 것이고, 이후 내용은 <세 종교 이야기>의 내용을 참고한 글이다.

그러니까 에이바 님은 첫번 째 글인 `돌려받지 못한 사랑의 미완성`과 두번 째 글인 `죽음의 이미지로 해석한 여신 에슈타르테`의 간격을 사이러스 님이 수정 증보하여 자신의 글로 만들었다는 거다. 그 핵심 논거는 아마도

˝1847년 버지니아는 24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울랄룸>은 버지니아의 죽음 이후에 나온 시다. (이 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에이바님의 글을 참고할 것) 여기서는 화자와 ‘프시케(Psyche)’라는 이름의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영혼’이다. 그래도 화자는 프시케를 사랑하고, 끝까지 함께하고 싶어 한다. 그는 ‘아스타르테의 다이아몬드 초승달’이 자신들의 평화를 비춰주는 희망의 빛으로 생각하지만, 프시케는 공포에 질린 채 ‘창백한 빛’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

이 부분에 있는 듯하다. 버지니아의 죽음을 프시케로 연결시킨 부분이 들어있기 때문. 이후 에이바 님이 언급한 아슈타르테의 내용 역시 편집 및 수정을 했다고 한다.

물론, 사이러스 님이 에이바 님의 글을 적극적으로 참고 해서 글을 썼기 때문에 비슷한 내용이 페이퍼 글에 들어갈 수 있다. 에이바 님이 독창적으로 파악한 부분이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다. 포의 아내의 죽음을 프시케로 연결시키고 아슈타르테로 확장한 것만 봐도 에이바 님이 말한 바대로 자신의 글의 기조를 그대로 갖다 쓴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헌데, 그 두 글을 수정 증보하고 편집했다는 에이바 님의 생각은 나와는 좀 다른 듯하다. 가장 핵싱이 되는 논점이 사이러스 님의 글에서는 아얘 보이지 않기에 그렇다. 그 핵심은 `돌려받지 못한 미완성의 사랑`(첫째 글)과 죽음 이미지로 여신을 해석한 프쉬케-아슈타르테(둘째 글)를 연결하여 수정 증보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이러스 님의 글에 이 부분이 들어가 있었다면 에이바 님이 말한바 있는 ˝제 글 두 개를 하나로 이어 행간을 메우고 증보했다`는 생각이 타당했을 것이다. 그러면 사이러스 님은 명백히 에이바 님의 글을 표절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사이러스 님의 글은 에이바 님의 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아슈타르테의 정보를 확장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포의 시에 대한 어떤 감정을 여신과 연결하는 취지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에이바 님이 기형도와 헬렌을 인용한 그 핵심 기조가 완전히 빠져 있다. 그래서 두 글을 이어 하나로 수정 증보했다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이러스 님은 에이바 님의 글로부터 포와 그의 아내의 관계와 여신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부가하는 것이 페이퍼를 쓴 목적으로 보인다. 만일 사이러스 님의 글이 에이바 님의 표절이라면 아무개 소설가의 새 소설집은 명백한 표절작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에이바 2016-09-24 17:12   좋아요 0 | URL
야무님. 잘못 짚으셨습니다. 저와 cyrus님이 줄곧 이야기를 나눈 것은 에드거 앨런 포의 시, 율랄리와 울랄룸에 등장하는 아슈타르테에 대한 해석입니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기에 포의 작품에서 신화, 초자연적이고 비이성적인 요소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울랄룸에 등장하는 아슈타르테(아프로디테)와 사이키(프시케)의 관계를 그리스로마 신화를 가져와 해석하는 것은 평이하다고 여겨집니다. 이 해석에 대해 특별함을 주장할 의지가 없다는 것은 여러 번 밝혔습니다. 다만 제가 먼저, 울랄룸과 율랄리를 묶어 포스팅하였고 이런 관계성을 드러낸 글을 읽으신 cyrus님께서 참조나 인용 표시 없이 글을 쓰신데 유감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댓글로 cyrus님이 제 글을 보기 전에 울랄룸을 잊고 있었다 하셨고, 제 글을 참고한 후 정리하였다 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제 해석은 독창적이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글들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여러 모로 유감입니다.

yamoo 2016-09-24 17:33   좋아요 0 | URL
그럼 더욱 이상한데요? 먼저 울랄라와 울랄리를 묶어 포스팅했다고 해서 나중에 페이퍼를 쓰는 사람이 거기에 정보를 부가하여 에이바 님이 쓰시지 않은 것을 추가하여 글을 쓰는 게 문제된다는 말씀인가요? 참조 표시는 두 번이나 했지요. 제가 에이바 님께 댓글을 단 이유는 표절이라 언급하셨기 때문입니다. 미묘한 문제라서요. 이 문제는 사실 미묘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사안 같아 제가 문제제기를 하는 거에요. 에이바 님이 이 페이퍼에서 사이러슨 님의 글에 표절이라고 언급하신 근거가 글의 구조, 내용과 형식이기에 그렇습니다. 관계성을 드러내어 그것을 확장하는 글을 쓰는 것이, 특히 인용없이, 표절인지를 제가 줄곳 묻고 있는 것입니다. 관계성만 드러냈기에 그것을 보충하여 쓴 글 역시 인용이 없다면 표절인지 묻고 있는 겁니다. 참조는 있는데, 인용이 없는....그러니까 적극적으로 참조해서 쓴 글이 과연 표절이 되느냐는 것이에요..

에이바 2016-09-24 17:59   좋아요 0 | URL
야무님. 저는 줄곧 유사성이 있다고 표현했지 표절이란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하지 않은 표현을 가져와 말씀하시는데 상당히 피로함을 느낍니다. cyrus님께서 유사성에 대해 인정하셨고, 그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하셨습니다. 글을 쓴 동기는 제 글을 읽고 리지아에도 아슈타르테가 등장한다고 쓰기 위함이셨다고요. 그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제가 이 글을 쓴 이유에 대해서도 충분히 주고받았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제 해석이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표절이 아니라 유사성이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 이유를 모르십니까. 제 글과 유사성이 있다고 해도 글을 쓰는데 들이는 애정과 노력이 보이는 글에 어떻게 표절이란 말씀을 쉽게 하세요.

yamoo 2016-09-24 18:58   좋아요 0 | URL
저는 에이바 님의 생각에 독창성이라고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독특하다 했지요. 왜 자꾸 에이바 님의 해석을 제가 독창적이라고 했다고 하시는지...

핵심을 계속 부정하시는데요...에이바 님께서 마음이 언잖은 이유가 두 글에 대한 수정 증보이고 이걸 사이러스 님이 인용을 안했기 때문 아닙니까? 저는 인용 필요까진 없고 참조만으로 충분하다는 의견이구요...

그리고 인용 여부를 문제 삼는 건 표절 때문에 그렇습니다. 표절이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으셨어도 인용을 문제 삼는 것 자체가 표절과 밀접히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표한 사안이라고 했구요..

에이바 님은 논점의 핵심을 계속 부인하고 계십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9-24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과를 해야 될 분은 사이러스 님이 아니라 에이바 님이 아닌신가요. 사이러스 님을 마치 글 도둑으로 매도하던데 이게 과연 그럴 정도의 표절이 되었나요 ? 시에서 신화적 흔적을 찾아내는 것이 비단 에이바 님만의 독창성인가요 ? 솔직히 에이바 님 글 두 번 정독했는데.. 당최, 에이바 님의 지적의 합당한 당위성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상징 해석에서 유사성은 비일비재합니다. 사이러스 님은 이미 에이바 님 글을 링크를 걸어두어 참고했음을 이미 밝힌 상황인데, 먼저 상징 해석을 했다 해서 그 이후의 모든 동의는 다 표절이 되는 겁니까 ?

에이바 2016-09-24 18:10   좋아요 0 | URL
곰곰생각하는발님. 님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제 글에는 표절이라는 표현은 없을 뿐더러 글 도둑이라 매도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렇게 비춰질까 봐 신중히 단어를 골라가며 쓴 글이었는데 제 부족함을 느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포의 작품을 해석할 때 신화적 상징을 끌어오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발상입니다. 저는 독창적이라 표현하지 않았고 주장할 의지도 전혀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cyrus 2016-09-24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님, 곰발님. 오늘 에이바님은 제가 에이바님의 글 링크 주소만 달랑 올리고, 참고한 사실을 간단하게 언급한 태도에 실망하셔서 이 글을 쓰셨습니다. 제가 에이바님의 입장이라면 속상한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에이바님과 알고 지낸 관계라는 이유로 에이바님의 글을 참고한 사실을 대충 밝혔습니다. 이 문제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분명히 저한테 있습니다. 제 행동이 잘못했음을 인정하면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바람에 일이 더 커졌습니다.

yamoo 2016-09-24 18:52   좋아요 0 | URL
중요한 건 에이바 님의 불편함 속에 내재해 있습니다. 함부로 왜 내 생각을 가져다 쓰냐?는 것인데요....제가 봤을 때 사이러스 님의 글은 아무 문제가 없는 듯 보여서 제가 댓글을 다는 것입니다. 사과할 건덕지가 별로 안 보이는데 말이죠..

yamoo 2016-09-24 1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이바 님 정말 이상하시네요. 표절이라는 말을 제가 괜힌 만들어냈다고 하시고...

따로 정리하신 아슈타르테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내용이 있건 없건, 타인의 글에서 힌트를 얻었다면 그것을 밝혀주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요. 이 페이퍼에서 밝힌 것처럼 시의 해석, 신화에 대한 부연설명에 대해 특별함을 주장하려는 게 요지가 아니에요. 이제서야 cyrus님이 너무 당연하게 제 글을 참고해서 썼다고 하시니 힘이 빠집니다.

제 글에 대한 인용이나 참고 사실을 밝히시는 것 역시 처음 글을 쓰실 때 하셔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았지요.

이런 말 속에 담긴 숨은 전제가 뭐겠습니까? 표절했다는 거 아닙니까? 인용표시 없이 에이바 님 글을 수정 증보했다고 하시고...인용표시가 안 되 있으니 삭제하고 사과하라...라는 의견 속에는 표절했다는 것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표절이라고 말을 해야 하나요? 인용 여부의 문제는 표절 때문에 벌어지는 일 아닙니까? 인용해야 할 부분을 인용하지 않고 자기 글인것처럼 가져다 쓴게 표절이니까요.

에이바 님이 마음이 불편한 핵심이 바로 내 생각을 사이러스 님이 가져다가 막 수정 증보했다는 거 아닙니까? 왜 딴 소리릴 하시는지...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제3자 입장에서 에이바 님의 글과 사이러스 님의 글을 3번씩 정독했지만 약간의 유사성만 발견했습니다. 사이러스 님의 글은 포인트가 에이바 님과 전혀 다릅니다. 유사성 만으로 사과를 해야한다는 것이 저는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진짜 이 페이퍼는 사이러스 님이 에이바 님의 생각을 훔쳐 글을 썼다는 뉘앙스가 너무 강해요. 이건 제가 이달의 당선작을 실명 비판한 것보다 더 심한 글이라 생각됩니다. 한 사람에게 내 생각을 도둑질했으니 사과하라니...어디 무서워서 알라딘에 글을 쓰겠습니까?!


22c 2016-09-24 22:27   좋아요 0 | URL
사이러스님이 사과문까지 올리며 인정한 그것에, 갑자기 ˝이건 제가 이달의 당선작을 실명 비판한 것보다 더 심한 글˝이라는 말을 하시니 당황스럽네요.

사이러스 님이 진심으로 사과문을 올린 마당에 이런 덧글은 이제 그만 남기시는게 좋겠네요.

에이바 2016-09-26 09:56   좋아요 0 | URL
저는 표절이란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유사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표절이라는 매우 까다롭고 민감한 언어로 확대하여 논점을 흐리거나 바꾸지 말아주십시오. 글과 댓글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적인 문맥을 살피시길 권합니다. 소모적인 논쟁은 하고 싶지 않으니 더 이상 댓글에 답하지 않겠습니다.

yamoo 2016-09-24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에이바 님께서 제기하신 핵심이 유사성이 있으면 그 글은 원 글에 대한 인용을 해야 한다...로 봤습니다. 인용 여부는 표절과 직결되기 때문에 두 글이 유사하면 이후의 글은 원 글을 표절했다는 귀결로 이어집니다.

이건 정말 심각한 사안입니다. 그래서 제가 계속 댓글을 달고 있는 것이구요. 사이러스 님의 사과는 정말 심각한 문제점을 던져준다고 생각합니다~ 표절의 외연에 대한 문제라서요..

2016-09-24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이바 2016-09-26 09:56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댓글 감사드립니다.

2016-09-24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이바 2016-09-26 09:58   좋아요 0 | URL
글을 쓰기 전 많이 고민하고 신중하려고 노력했는데 그렇게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2016-09-24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이바 2016-09-26 09:59   좋아요 0 | URL
저의 마음을 살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시간들입니다...

단발머리 2016-09-25 16: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링크된 글들 여러 번 읽어봤는데, cyrus님은 ˝아프로디테님이 보고 계셔˝에서, 에이바님의 글을 링크하시고 본문에 에이바님의 글을 `참고`했다고 써놓으셨지만, 서술하신 내용들은 아무래도 cyrus님의 글처럼 느껴지네요.
에이바님이, cyrus님이 에이바님 페이퍼 두 개를 ˝하나로 이어 행간을 메우고 증보하셨다˝고 생각하는게 전혀 무리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cyrus님이 공개 사과문을 올리며 정식으로 사과하셨으니, 더 이상의 분란 없이 잘 마무리되길 바랍니다.

에이바 2016-09-26 10:02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의 의견 표명에 감사드립니다. 글을 쓰며 고민이 많았는데 저의 입장을 헤아려 주셔서 또 감사드립니다.

2016-09-25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이바 2016-09-26 10:18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모든 부분에 공감합니다. 그리고 제 마음을 살펴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런 분들이 꽤 계시고 저 역시 거기에 합류하려 했지만, 서재를 계속 열어두는 것은 결국 알라디너와 이 곳에 대한 애정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염려하시는 부분을 보고 좀 놀랐습니다. 사실 거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중입니다. 다시 한 번, 님의 따뜻한 말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락방 2016-09-26 1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이제야 봤네요. 이 글을 쓰기까지, 그리고 댓글들에 답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기운이 빠지셨을지 짐작되고도 남습니다.
지금은 어떤 기분으로 계실지, 지친 마음은 좀 달래지셨을지 궁금합니다.
에이바님, 저는 여기 계속 있을겁니다. 계속 여기서 에이바님의 글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이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에이바 2016-09-26 18:5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다른 분들도 비슷한 말씀, 위로의 말씀들을 해주셔서 그저 감사드릴 따름이에요. 마음은 아직 부유하는 상태지만 괜찮습니다.

단발머리 2016-09-29 14:38   좋아요 0 | URL
아주 잘 전달되었습니다.^^

다락방님, 에이바님...

두 분 다 이 마음 변치 마시길 바랍니다.

2016-09-29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이바 2016-09-29 14:32   좋아요 0 | URL
이 글을 쓸 때 혹 제 의도가 다르게 비춰질까 고민이 많았는데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말씀들에도 공감해요. 따뜻한 말씀에 깊이 감사드려요. 저는 이제 괜찮아졌어요ㅎㅎ
 
폴 발레리 시선 - 바람이 일어난다! 살아야겠다! 아티초크 빈티지 시선 12
폴 발레리 지음, 성귀수 옮김 / 아티초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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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전에 에미넴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학창시절에 유급을 여러 번 했지만 영어성적만큼은 좋았던 것이 사전을 외웠다고 했다. 한 장씩, 한 장씩 단어를 다 외면 찢어서 먹었다고 그랬던가(약간 이야기가 섞인 것 같지만)…. 그래서 본인은 라임을 만들지 못하는 단어가 없다고, 발음을 구부려서 운을 맞춘다고 그랬었다. 『폴 발레리 시선집』 역자 서문을 읽으면서 시어를 고민하는 발레리를 읽고 있으려니, 시대와 환경이 모두 다른 두 사람의 일화가 겹쳐지는 것이다. 사실 발레리의 시는 그렇게 쉬이 읽히진 않았다. 발레리의 시론을 소개하는 서문에서 겁을 집어먹은 탓이었을까. 8월부터 읽기 시작한 시집은 여지껏 애를 써 가며 읽고 있다.


프랑스어를 할 줄은 알지만 불문학과는 거리가 멀고, 문학의 묘미를 알고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고작해야 3년. 보들레르와 랭보, 베를렌의 시를 읽고 약간 으스대기도, 음미해보기도 하였지만 나는 아직 프랑스어로 씌어진 시의 매력을 다 알지 못한다. 그저 좋다, 이 표현은 기가 막힌 걸…, 하며 가끔 원문을 찾아보는 정도이다. 그래도 아주 헛된 시간을 보내진 않았는지 시집에 있는 《텔켈》을 보니 필립 솔레르스라든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이라든지 기억이 떠오르긴 하였다. 어찌 되었든 폴 발레리 시집이 출간되기를 기다렸으나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였다. 시인의 이름을 도처에서 맞닥뜨렸으나 정작 작품은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해변의 묘지」의 문장, 가슴을 울리는 그 명문은 기억하고 있다. Le vent se lève!… il faut tenter de vivre! 바람이 일어난다!… 살아야겠다! ‘tenter de가 들어감으로써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이 문장에 대한 해설은 상세하게 실려 있다…. 아폴리네르 시집에서도 느꼈었지만 성귀수 번역가는 아주 꼼꼼한 분인가 보다. 일단 장점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 하지 않는가. 성 번역가는 원문에 해당하는 시어를 고민, 또 고민하여 번역하였다는 생각이 많이 떠오른다. 행간에 숨겨진 노고가 읽힌다고 하는 편이 더 와 닿을까. 어느 번역가가 그렇지 않겠냐만, 번역가의 작업으로 두 프랑스인의 시집을 연달아 읽은 감상은 그러하다.


약간 아쉬운 점은 문체가 묘하게 취향을 타지 않나하는 것이다. 결과물을 놓고 평하기는 쉽고- 이게 참 뭐라 꼬집을 수는 없는데, 먼저 평을 남겨주신 다른 분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재 문체’…. 좀 심한가 싶다가도 공감을 부르는 표현이다. 예를 들자면 ‘노다지’가 있다. 노다지란 말을 문학 작품에서 본 것이 처음인지 아니면 너무 오래된 건지 모르겠는데 원문이 궁금해져 찾아봤다. 번역문과 원문 순이다. 「젊은 운명의 여신(La jeune parque)」 중의 한 대목이고, 시집에는 40쪽에 해당한다.


  

  속눈썹 파고드는 무지막지한 금빛 섬광!

  오, 노다지의 밤이 짓누르는 눈꺼풀이여,

  너의 금빛 어둠 속을 더듬어 가며 나는 기도했다.





‘노다지의 밤’은 ‘nuit de tresor’였다. 발레리의 다른 시도, 이 시의 원문을 다 읽지 않아 ‘노다지’가 아닌 다른 표현이 더 취향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폴 발레리는 스테판 말라르메의 가르침을 받았고 마지막 상징주의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그의 시는 절대시, 순수시를 지향하고 있다. 산문적 요소가 제거된 언어, 완벽한 시어들로 이루어진 건축물이 바로 발레리의 시이다. 발레리 시에 대한 해설을 찾아보면 건축, 음악, 춤에 대한 이야기들이 눈에 띈다. 형태가 이룩하는 조화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작품들에서 이런 공통점이 읽히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프랑스 현대시에 대한 앎이 부족하여 다른 시인들, 특히 상징주의 시인들과의 비교가 힘들다. 알 듯 말 듯 할 뿐. 그래서 일단 구매를 미뤄둔 프랑스 현대시사 두 권을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책까지 읽고 리뷰를 썼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자꾸 미루면 시집 리뷰를 영영 못 쓸 것 같아서….


이 시집은 프랑스 시의 걸작으로 꼽히는 「젊은 운명의 여신」과 「해변의 묘지」가 수록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가치를 증명하고 있지만 「잠자는 여인」과 「석류」, 「별로 희망 없는 소망」도 무척 좋았다. 「잠자는 여인」을 읽으면서는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권, 『갇힌 여인』이 떠올랐다. 마르셀은 잠이 든 연인, 알베르틴을 보며 생각한다. 사랑은 소유, 이 여인을 완전히 가질 수 있는 순간은 알베르틴이 ‘잠’에 드는 시간이다. 깨어 있는 동안 정신을 온전히 소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마치 식물처럼 고요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충족되는 것이다. 발레리의 욕망은 잠자는 연인을 바라보며 그 내면도 투사하고자 하지만 말이다.


발레리의 「석류」는 지난 정지용 시선 리뷰에서도 언급했었는데 마티스의 그림을 떠오르게 한다. 전문을 소개한다.



석류


알갱이들의 과잉을 못 이겨

반쯤 벌어진 석류들아,

마치 자신의 발견들로 터져 나간

당당한 이마들을 보는 듯하여라!


오, 어정쩡 입 벌린 석류들,

자긍심으로 과로한 너희가

태양들을 견디다 못해

홍옥의 격막을 찢어,


껍질의 건조한 금빛이

어떤 힘에 부응해

과즙 붉은 보석들로 자폭하면,


그 찬란한 파열은

꿈꾸게 한다, 내 지난 영혼의

은밀한 건축술을.


(82)




「별로 희망 없는 소망」은 발레리의 마지막 연인, 잔 로비통을 위한 작품이다. 2008년에 발표된 시집 『코로나 & 코로닐랴』에 실린 유고작인데, 앞서 소개되는 작품들과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사랑을 갈구하는 시를 읽으면 발레리도 사람이었네, 하는 생각과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32살이라는 데서 자연스레 돋는 소름이 공존한다. 사진 자료와 함께 발레리와 교분을 나눈 문인들과 연보를 읽노라면 시인의 생애를 잠시 들여다본 느낌이다. 프랑스 3대 문인으로 꼽히는 앙드레 지드, 폴 클로델, 폴 발레리 세 사람의 관계도 재미있다. 폴 클로델의 누나 카미유 클로델은 로댕의 연인으로, 천재성에 버금가는 비극적 삶으로 알려져 있다. 카미유는 드뷔시와 잠시 약혼관계였는데 발레리와 드뷔시도 서로 알고 지냈다. 당시 파리 사교계가 얼마나 넓고도 좁았는지 알 수 있다. 


앙드레 지드는 발레리를 설득하여 《구시첩》에 「젊은 운명의 여신」을 실을 수 있도록 장려한데다, 〈누벨 르뷔 프랑세즈〉 편집장이기도 하였으니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발레리는 《아티초크 빈티지 시선》으로 소개된 안나 드 노아이유와도 친분이 있었고, 상징주의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보들레르의 직계 후배라고도 할 수 있고. 또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과 에드거 앨런 포와의 관계, 이들을 즐겨 읽던 윤동주나 정지용과의 연관성까지 생각하면 아티초크에서 선정한 시인들이 모두 이어져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미소짓게 된다. 상세한 시 해설과 발레리 연보는 시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알찬 시집을 이런 가격에 내놓은 출판사가 대단할 뿐이다. 새삼 아티초크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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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09-23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르셀 레몽 <프랑스 현대 시사> 책 좋아요/ 책이 두꺼워서 좀 부담스럽지만 건질 게 노다지ㅋ인 책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을 통해서 본다기보다는 훨씬 더 빈번히 지능을 통해서 본다. 그들은 오색영롱한 공간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들을 인식한다. 그들의 눈에는 저 위에 희끄므레하고 유리가 반사하는 구멍들이 뚫린 입방체를 보게 되면 즉각적으로 그것은 `집이다!`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폴 발레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방법론 서설』)
-제 8 장 상징주의의 고전, 폴 발레리


제가 관심두는 불어권 책 번역을 거의 성귀수 씨가 하는 터라 저는 일단 취향 하이파이브 면에서 신뢰하는 편인데, ˝노다지˝ㅎㅎ 정말 아재스럽긴 합니다; 예스러운 표현으로 시인이 써서 그렇게 번역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저도 불어를 아는 게 아니니^.ㅜ;

에이바 2016-09-23 11:27   좋아요 1 | URL
네 그 책이랑 아카넷에서 나온 책 두 권 사려고요. 인용까지 해 주시니 더더욱... ㅠㅠ 저는 성귀수 씨 번역 기억나는게 뤼팽 전집 정도이고 제대로 읽은 건 아폴리네르 때부터라서요. 아재라는 표현 좀 그렇긴 한데 정말 그러합니다... 네... 좀 예스러이 번역하려 했나 싶기도 하고요? 근데 또 아티초크의 보들레르 번역은 그렇지 않거든요. 결국 취향인 것 같아요. 노다지 정말... 오랜만에 본 단어라... 한편으론 성 번역가는 이런 느낌으로 발레리를 읽는구나 싶었고 무엇보다 젊은 운명의 여신, 해변의 묘지 새 번역 완전 번역을 보게 되어 즐거웠어요.

cyrus 2016-09-23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판 발레리 시집을 읽어봤는데, 역시 상징주의 시는 어려웠습니다. ^^;;


에이바 2016-09-26 10:23   좋아요 0 | URL
그래서 쉬이 읽히지 않나 봐요. 공부를 하고 읽으면 나아지리라 생각하고 있어요.

2016-09-24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4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고기자리 2016-09-25 13: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뜬금없는 말이지만 저는 에이바 님의 독서하는 방식을 참 좋아합니다. 최대한 저자의 생각에 귀 기울이고, 에이바 님의 생각도 발전시켜 가는 방식을요. 두루두루 읽는 것도 물론 좋지만 특정 영역을 탐구하는 덕후적 읽기도 참 좋고요.


제가 요즘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 자주 접속도 못 하고, 책도 읽질 못 하고 있지만 독서에 대한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게 해주시는 분들 중 한 분이세요.

특히 요즘 글들 참 좋습니다..


초딩 2016-09-25 13:26   좋아요 3 | URL
에이바님의 독서법에 대한 말씀
완전 공감합니다!
에이바님 물고기자리님 평안한 일요일 되세요~

에이바 2016-09-26 10:27   좋아요 2 | URL
제 만족을 위한 읽기에 불과하다 생각하는데 이렇게 좋게 봐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렇잖아도 최근 물고기자리님의 글이 올라오지 않아 어찌 지내시는지 궁금하던 차 였어요. 모쪼록 마주하신 일들이 좋은 방향으로 풀려, 책을 읽고 즐기는 여유를 되찾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초딩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두 분 다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eBook] 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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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들은 읽고서 별점 매기기나 리뷰 쓰기가 무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줄거리를 요약하거나 느낌을 뭉뚱그려 쓰기엔, 그 글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애초에 에세이를 즐겨 읽지도 않지만 이 책의 ‘서른여섯에 세상을 떠나야했던 젊은 의사가 남긴 감동의 기록’과 같은 광고 문구도 그리 끌리지 않았다. 뻔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폴 칼라니티의 글을 읽은 나는, 이제 그의 생에 대해 겸허한 자세를 취한다. 가슴이 찡해졌다거나, 눈시울이 붉어졌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하는 길목에서 그를 마주하려 한 이 젊은이가, 얼마나 삶을 사랑하고 아꼈는지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리뷰를 쓰는 것은 무용하다고 여긴다. 별점을 매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죽음을 실제로 겪는 것보다 죽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되묻던 청년이 그 고통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문학에 빠졌던 폴 칼라니티가 의학을 탐구하게 되는 과정, 의사가 된 후의 고충과 자기반성, 의사와 환자의 삶 두 가지를 동시에 경험하고서 써 내린 이 기록 앞에- 이 책의 여기는 어떠했고 이 대목은 어떠했다며 평가하기엔 나는 이 명제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다. 삶과 죽음. 이 명제에 대해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밑줄긋기를 모아두고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내가 폴의 기록에서 어떤 해답을 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찾아내야 해요.”


폴 칼라니티의 글에서 투병생활의 감상적인 면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좋다. 폴은 오히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자신의 삶은 죽음을 마주하려는 탐구의 과정이었다는 1부, 유한한 삶 속에서도 그 의미를 찾아내고 제대로 살아가려는 노력과 그 희망이 좌절되더라도 무너지지 않는 위대한 정신을 담은 2부. 어느 날 갑자기 확 줄어버린 체중에서 자신의 이상 징후를 예감한 순간부터, 손끝이 갈라져 고통스런 와중에도 장갑을 끼고 원고를 마쳤다는 아내 루시의 목격에 이르기까지…. 남겨진 사람들과 그를 뒤따를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죽음 앞에서도 명징한 의식을 유지하려 했던 폴의 절박함. 그것은 언젠가 자신이 추구했던 것은 목사의 역할이었다는 고백을 떠올리게 한다.


어떻게 죽음을 앞두고서 사랑과 희망을 잃지 않고 의미 있는 날들을 살아낼 수 있었을까. 영원한 이별에 앞선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인 무너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소중한 사람이 병원에 다녀올 때 마다 검사 결과에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한참, 폴의 이야기에서 삶의 한 조각을 발견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에게 폴이 남긴 기록을 무턱대고 감동이라며 추천하기 보다는, 언젠가 때가 되어 당신과 자연스럽게 ‘만나길’ 바란다. 삶과 죽음에 대한 유려한 문장들과 함께….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회 방문객과도 같지만,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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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3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3 2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4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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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그럴 것 같았다. 이 글을 읽고 나면 소설가 구병모의 팬이 될 것 같은 예감이 왔다. 사실 한국문학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위저드 베이커리』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그리고 『빨간구두당』같은 작가의 소설집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작가의 신작이기도 하거니와, 동네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던 노인에게 소년 로봇이 배달된다는 소개글 덕분이었다. 로봇, 그리고 로봇이란 단어를 만들어냈다고 여겨지는 카렐 차페크(실제로는 그의 형이라 한다). 요즘 나는 종종 그를 떠올리곤 했기 때문에 왠지 그와 연관하여 지금이, 구병모의 세계를 만날 좋은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봇의 감정 발생 서사는 구병모 작가가 밝힌 것처럼 숱하게 되풀이된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무엇보다 이 로봇은 어떤 존재일까. 나는 명정에게 배달되어 은결이라 이름 붙여진 이 소년 로봇을 기존의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안드로이드들과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예를 들어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그리고 인공지능에 관한 스파이크 존즈의 영화 『그녀her』와 같은 소재들이 합쳐진…. 은결은 이렇게 발전할 ‘안드로이드’의 프로토타입이다. 가사노동을 위한 로봇들이 보급되는 근미래에, 인간의 형태를 지니고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는 로봇들의 프로토타입.


어쩌면 소설은 그런 식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은결이 지닌 인공지능을 최적화로 사용한 결과로 기술과 윤리에 대한 갈등과 고민의 메시지를 던진다든가- 하지만 명정은 홀로 세탁소를 운영하는 노인이다. 아들의 부고를 들은 6개월 후, 바다를 건너 온 소년 로봇에게 둘째가 생긴다면 붙여주었을 이름을 주고 애지중지하는…. 노인의 삶에 무슨 변화가 있겠는가. 명정은 은결의 기능을 대부분 최소화한 뒤 곁에 두고 허드렛일을 시킨다. 기존의 작품들에서 안드로이드들은 인간처럼 사고하고 행동하지만 은결은 늘 로봇임을 주지시키는 설명이 나온다. 피부 아래는 합성 금속, 눈동자는 조리개가 달린 카메라, 고저 없는 목소리.


그렇다고 은결이 노동을 제공하는 기계로서만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명정은 좁은 세탁소 공간 너머의 세계를 은결이 경험하길 바란다. 은결을 대체할 수 있는 부품이 없기에, 고장이 날까 봐 공원을 걷고 심부름을 보는 정도에 그쳐 있지만 말이다. 은결에 관심을 보이는 열세 살 시호와 준교가 대학에 갈 때까지, 은결은 세탁소의 고요한 삶을 지키고 있다. 아이들과 나눈 대화에서 사실과 소망을 구분하는 방법을 배우고, 인간의 성장을 지켜보며 시간의 흐름을 배운다. 과연 은결은 시호가 내준 과제인 ‘하고 싶다, 하고 싶지만 해야 한다, 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다’를 구분할 수 있을까.


해외 토픽에서 배운 고백을 써 먹고, 오래 곁을 지킨 이웃들을 위로하는 은결의 대응은 경험의 축적에 따른 최적의 결과일까 아니면 인간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일까. 자신이 떠난 후 남겨질 은결을 염려하는 명정에게 준교가 말한다. 로봇의 감정은 지식의 변형태이며 일종의 전산상 오류가 아니겠느냐고. 다만 은결이 특별하니 은결의 감정도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겠냐고 말이다. 그렇지만 과학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육감, 그런 예감을 은결이 느낀다는 것도 시스템의 오류라고 할 수 있을까? 명정이 떠난 후, 언젠가 보았던 장면을 홀로 재현하며 충동적으로 무엇을 벌인 결심조차도?


마음을 담아 보낸 씨앗이 화분으로 돌아온 걸 보았을 때, 공기 중을 떠도는 미묘한 분위기를 알아채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떤 상실감을 느끼는 것…. 잃어버린 기억으로 인해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알지 못할 은결이 느끼는 통증과 안정감은 진정 인간다운 것이란 무엇일지 생각하게 한다. 그 행동의 여파로 은결은 시간으로부터―인간으로 치면 노화일―선물을 받는다. 그를 향한 변함없는 애정과 함께. 명정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생각했던 것 보다 오랜 시간을 꽤 인간답게 살고, 또 염려했던 것 보다 행복한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소설은 아름답다. 담고 있는 시선이 아름답다. 세탁소조차 기계화 공장에 밀리는 시기, 인간과 로봇의 만남에서 피어난 따스함은 오랫동안 생각이 날 듯 하다. 그래,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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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09-19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뇌과학 관련 책 많이 안 읽어서 완전 무식하지만... ㅎㅎ
에이바님 글 읽다보니 <마음의 미래>에서 로봇의 의식에 대한 부분이 생각나네요. 그러니까 로봇이 거울을 보고 맞은편에 보이는 물체가 자기 자신임을 `의식`했다는 실험결과가 있더라구요. 그게 바로 로봇이 의식을 갖고 있다는 증거라고 하던대요.

윗 부분에, 은결이 사실과 소망을 배우고 인간의 성장을 지켜보며 시간의 흐름을 배운다고 하셨잖아요.
이게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두렵게도 느껴지네요.
로봇에게 의식이 있을까요? 의식이 있다면 감정이 있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감정이 있다면 단순한 기계가 아닐텐데요.
로봇은 정말 감정을 느끼는 걸까요.

점점 궁금해집니다. 소설 속처럼 인류가 진화한 로봇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요. @@

에이바 2016-09-19 13:38   좋아요 0 | URL
지금 저한테 책이 없어 확인이 안 되는데 작가의 말 뒤를 보면 참고서적이 쭉 나와있는데 <마음의 미래>도 있었던 것 같아요. 말씀하신 거울을 보고 자기를 인식하는 에피소드, 은결이한테도 있고요.ㅎㅎ 구병모 작가가 참고한 책들을 미리 봤더라면 이 소설이 또 다르게 전해졌을 듯 해요. A님이 강추하셔서 사 두고선 아직도 안 읽었네요...ㅠㅠ

순전히 제 생각이지만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에겐 당연히 의식이 있지 않을까요. 단순한 연산기능이 아니라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고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사고하기를 기대받잖아요. 통계적인 반응이라 해야겠지만, 낭만적으로 생각한다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보면 우울증에 걸린 로봇이 나오고요, 미드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를 봐도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인공지능이 등장해요. 영화 <그녀>를 봐도 그렇고... 비록 연결망을 통해 이어져 있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객체로서 인식하는 인공지능이 있다면 의식이 인간의 전유물이라 할 순 없지 않나 하고요. 그렇다면 감정도 가질 수 있지 않나... 갑자기 한 장면이 떠올라요. 영화 <아이, 로봇>에서 로봇 써니한테 형사가 `넌 인간처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거나 위대한 음악을 만들진 못하잖아` 하니 `그럼 넌 할 수 있어?`... 웃프네요.

로봇의 3원칙도 그렇고, 예로 든 작품들은 일단 인간에 위협적이진 않은데요. 인간과 기계의 공존에 관해선...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일론 머스크가 구글 딥마인드 관련해(아무튼 인공지능) 경고했던 것 같아요.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만큼 성장하는 시기는 의외로 멀지 않다고요. 몇십 년이 아니라 불과 십 년 안팎이라고요. 제가 자주 방문한 사이트를 추려 광고가 뜨는 걸 보면 가끔 소름끼치는데 그것과 비교도 못 할 기술,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기술... 이세돌 기사가 알파고에 승리했다곤 하지만 위대한 인간 이세돌의 승리라서, 범인인 저로선 막연한 두려움만 있어요. 그냥 낭만적으로 생각하며 자위할 수 밖에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