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은 이런 말로 시작된다.
“내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이 서술은 소설의 주제를 알려준다. 소설 데미안은 주인공인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자신에게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둘러싼 질서, 즉 기존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여기서 이 소설에 가장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부터 사회화라는 명목으로 도덕, 질서, 가치관등 나의 외부에서 생성된 것들을 체화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이 체화됨으로써, 주입된 질서가 처음부터 나의 것이었던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 질서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는 안주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질서는 내가 만든 나의 질서가 아니고 타인인 만들어 놓은 질서, 즉 타인이 만들어 놓은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에 도달하려면 그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기존 가치관을 떠나 방황이라는 끊임없는 망치질을 통해 자신을 둘러 싸고 있던 세계를 깨뜨린다. 그리고 전쟁에 참전하여 부상당한 후, 데미안을 만나게 되고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데미안과 완전히 닮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소설에서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가도록 인도하는 자로서, 싱클레어의 친구이자 스승이다. 데미안은 순종적, 수동적 이지 않고, 주도적이고 능동적이다. 그는 기존 질서에 대하여도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존재이고, 자신의 삶을 사는 존재이다. 그는 기존 가치관에 질문을 제기하면서 싱클레어로 하여금 다른 가치가 있을 가능성을 제기함으로써, 싱클레어를 자신에게로 이르게 하는 길의 여정에 오르게 한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 싱클레어가 데미안과 완전히 닮은 자신을 발견했다는 진술이 나오는데, 이 진술은 결국 싱클레어가 여정의 끝에서 자신의 길을 찾았음을 의미한다.
소설 데미안을 읽다가 보면, 헤르만 헤세는 철학자 니체의 사상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g하게 되었다. 니체 역시 기존 서구의 도덕을 노예의 도덕이라고 비판하면서 현실의 삶과 자신의 삶을 살아가도록 강조한 철학자이다. 이것은 이 책의 주제와 비슷하다.
이 책의 내용에서도 니체의 사상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 많이 볼수 있다
첫장인 ‘두세계’는 아버지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로써, 편안하고 밝은 세계인 반면, 아버지의 질서가 미치지 않는 또래 친구들의 세계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세계이다. 이것은 니체가 말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떠올리게 한다.
아폴론적인 것은 이성, 밝음 질서를 의미하고, 디오니소스적은 열정, 어두움, 혼돈을 의미하는 데 기존 질서를 깨뜨려야만 새로운 질서가 도래 하듯이 그리스예술은 이 두가지 모두로 인해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소설 데미안에서도 또래 집단의 지배자인 크로머라는 어둠으로부터 데미안이 싱클레어를 구출함으로써 싱클레어는 자신의 길에 이르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에서는 니체가 말한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을 떠올릴 수 있다.
성경에 따르면, 카인은 인류최초의 살인자로 자신의 동생인 아벨을 살해한 것으로 지탄 받는다. 자신의 죄를 깨달은 카인은 후회하면 살해당할 까봐 두려워하고, 하느님은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표식을 찍어 주신다는 내용이다.
카인과 아벨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는 약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것이 데미안의 새로운 해석이다. 남들과는 다른 비범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이마에 표식이 있은 강한 종족들을, 이들을 시기 하고 두려워한 약한 자들이, 자신들이 겁쟁이라는 것을 숨기 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니체가 기존 도덕이 노예도덕이기 때문에 사회의 진보를 막는다는 것을 비판하면서 도덕의 새롭게 써야 한다는 주장을 생각나게 한다.
니체는 도덕을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주인도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발적 긍정에서 성장하고, 자기 스스로 가치를 설정하며,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는 자의 도덕이다. 반면 노예도덕은 복수심, 원한감정, 즉 반동적 집단 본능에서 성장한다. 가치를 스스로 설정하지 못하고, 자신이 아닌 것 전부에 대해 부정만을 할 뿐인 자들의 도덕이다.
사회의 진보는 주인도덕을 가진 자들에의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기존 서양의 도덕은 약자들이 강자를 시기 질투하여, 약자인 자신들의 속성인 순종, 복종을 미덕으로 삼는 노예도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주인도덕을 가진 강자들이 날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책에서는 데미안이 주인도덕을 가진 자를 대표하는 자이고, 마지막에 싱클레어가 자신 속에서 발견한 데미안은 주인도덕의 상징이다.
이책에서 자신이 가진 표식을 자각하는 것은 약자들의 도덕으로 인해 가려져 있던 자신의 참모습을 찾았음을 의미한다. 카인의 후예로서 표식을 가진 데미안은 싱클레어 역시 표식을 가진 자신과 같은 종족임을 알고는 싱클레어가 자신의 길을 찾도록 인도하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완전히 닮은 자신을 발견하였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자신의 길을 찾았음을 의미한다. 자기안에 원래 부터 있었지만 가리워져있던 자신의 본 모습을 인식한것이다. 자기속의 데미안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알을 깬 새가 날아가는 곳은 아브락사스인데 이것은 니체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를 떠올리게 한다. 싱클레어가 만나게 되는 교회 오르간 연주자인 피스토리우스는 불을 숭배하는데, 불을 숭배하는 배화교의 창시자가 바로 짜라투스트라이다.
아브사스는 선과 악, 신과 악마등 양극성을 하나로 포괄하는 신이다.
니체는 당시 서양의 문제가 선과악, 저승과 이승, 육체와 정신등 모든 것을 둘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판단하고,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나타나게 된 것이 조로아스터, 즉 영어식으로 짜라투스트라에서부터 시작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문제를 해결할 자도 짜라투스트라 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니체 자신의 사상을 짜라투스트라 라는 인물이 세상에 전파하도록 설정한 것이다. 데미안에서 아브락사스는 니체의 책 주인공인 짜라투스트라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데미안은 아주 오래전 민음사 버전으로 한번 읽은 적이 있다.
그렇지만, 고전이란 읽을 때마다 새롭게 얻는 것이 있다는 의미를 모모북스에서 출간된 데미안을 읽고 다시 한번 느끼게 된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