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으로 본 한국현대사
한승헌 지음 / 창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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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몽양이 테러나 암살을 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공하면 몽양이 통일 조선의 초대 대통령으로 유력하다는 전망이 나돌자 대통령 자리를 노리던 정치인들의 시기 질투가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중에서도 극우세력이 정계 요인 암살을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찰이 알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하지 중장은 1947년 6월28일 이승만의 테러 음모를 비판하고 그 중지를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낸다. 그로부터 20일 뒤에 몽양이 암살된다. 그러나 미군정의 입장에서도 차후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우려 할 때 여운형이 방해세력이 될 것으로 보았기에, 속내로는 그의 보호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고 보는 논자도 있었다. (30-31)




이 사건[동백림 사건]에 대해서는 2004년 11월 2일 출범한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워 진실위)의 조사 결과(2007년 발표)가 주목을 끈다. 


그 발표문에는 당시의 국내 정치상황과 시대적 배경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 요지는 이러하다. 즉 1967년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이후의 장기집권을 위해 3선개헌을 위한 국회 의식의 개헌 정족수 확보에 급급한 나머지 6·8부정선거를 감행했고, 이에 대항하여 야당과 대학생들이 대규모 규탄시위를 전개하자 많은 대학과 고등학교를 휴업령으로 문을 닫고 탄압하는 시점에서 이 사건을 과장 발표했다. 즉 박 정권이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무력화하기 위해 임석진의 자수를 계기로 동백림 사건을 부풀려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판단했다. 실제로 전후 7차례에 걸친 이 사건 수사 발표 이후 대학생들의 부정선거 규탄시위는 없어졌다(184-185).




김재규는 법정에서 자기와 동향(경북 선산) 출신아며 육사도 동기(2기)일뿐더러 자신을 권력자로 입신시켜주기까지 한 박정희에 대하여 시종 '대통령 각하'란 존칭을 써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리를 버려야 했던 까닭을 막힘없이 진술해나갔다. 그는 '유신체제 완화, 통일주체대의원이 아닌 국민 직선에 의한 대통령선거, 긴급조치 해제, 1979년 9월의 부마사태 등과 관련된 건의를 거듭하면서 체제에 대한 국민의 저항과 국민의 불신을 말해주었으나 대통령은 물러설 줄을 몰랐다'며 자신의 '대의大義'를 내세웠다. 


법무사가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서는 대통령을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하고 묻자 김재규는 "예, 대통령 각하와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문제는 숙명관계가 되어 있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어 "대통령 각하만 희생되면 자유민주주의는 곧 회복된다, 이런 동기에서 했다?"라는 법무사의 물음에 김재규는 "대통령 각하께선 건재하시면 자유민주주의는 회복 안 된다, 이 관계는 대통령 스스로가 그런 식으로 몰고 가셨다, 이런 말씀입니다"라고 했다. 


그밖에도 김재규는 1980년 1월28일자 '항소이유보충서' 말미에 '10·26 혁명의 동기의 보충'이라는 항목을 달고,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힐 수 없었지만 꼭 밝혀둘 필요가 있다면서, 최태민 목사가 총재, 박근혜 양이 명예총재로 있는 구국여성봉사단과 관련된 부정과 원성을 거론하고, 육사생도로서는 용납될 수 없는 박지만 군의 탈선 등에 관한 언급을 하여 주목을 받았다. (329-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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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어떻게 독재의 도구가 되었나
한상범.이철호 지음 / 삼인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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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회심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군사독재자, 즉 친일파들이 쿠데타를 기정사실화해 밀고 나가면서 국민 위에 군림했다. 거기에서 부족한 것은 국민투표라는 그럴듯한 요식행위로 포장했다. 그러고 나면 어용학자와 기회주의적 언론이 나팔을 불어 대며 잔일이나 설거지를 도맡았다. 일제하에서 이미 우리 지식인과 언론은 강자에게 어떻게 아부해야 하는지 충분히 배웠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친일을 한 사람들이나 그들 아류가 대개 그대로 나팔수 노릇을 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이 진행됐다.(68)




대학생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에 관련된 의문의 죽음 여섯 건은 모두 녹화사업이 노골적으로 진행되던 1982년 7월부터 1983년 12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녹화사업은 단지 의문사 여섯 건의 개별적인 사건 모음이 아니다. 이는 국가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진 지시에 의해 관련 기관이 총동원되어 자행한 체계적인 국가 범죄이다. 다시 말해서, 1980년대 초반의 녹화사업은 군이 국방의 의무를 처벌의 수단으로 악용하고, 나아가 프락치 공작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씻을 수 없는 범죄행위이다.(124)




정치 사찰이 정보기관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사회 전반에 대한 사찰은 경찰에 의해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서 경찰도 정치 사찰의 첨병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정치계 및 학원, 노동계에서 사찰활동을 벌인 이들은 경찰 정보과 형사들이었다. 경찰 정보과 형사들은 이른바 '망원(정보원)'도 이용했다. 군사독재 정권에서는 그 야말로 무차별적·전방위적 수단이 동원됐다. 기관원뿐만이 아니다. 도처에 깔린 망원이나 프락치를 통해 온갖 정보가 수집됐다. (125)




대법원은 1990년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대상이었던 한승헌 변호사 등 145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국가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고에게 위자료를 200만 원씩 지급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대법원 판결은 "공공 기관이라 하더라도 사상·신조 등 개인의 인권을 현저히 침해할 우려가 있는 정보 수집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점을 재삼 강조함과 동시에 "국가 안보 등을 위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경우도 은밀한 방법이나 강제 수단에 의해서는 안 되며 공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라는 점을 밝혔다. (127)




이러한 일본의 예에 고무된 친일 세력이나 구시대 봉건 잔존 아류들은 한국에서 박정희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유교적 권위주의를 찬양하며 유교 문화권 어쩌고 하며 수구 윤리에 매달려 왔다. 이 유교적 성향은 남쪽을 유교적 자본주의라고 하고, 북쪽을 유교적 사회주의라고 할 정도로 우리들은 봉건 왕조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청산하지 못했따. 그 단적인 표현이 박정희의 충효 윤리 강조이고, 그에 편승한 파별주의적·족벌주의적 사회행태의 확산이다. 또한 정치 연고 중심의 파벌주의, 재벌의 족별식 경영과 소유의 상속 형태, 사회적 패거리 의식과 독재 정권이 양산하고 조장한 지역 파벌주의·학연주의·학벌주의를 들 수 있다. (205)





군사정권은 정치를 적敵을 격파하는 군사작전식으로 해 나갔다. 그러나 민주정치는 시민의 동질성과 당파 사이에 규칙rule을 준수하며,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는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경쟁이다. 정치판을 전쟁판으로 본 군정 독재자들은 시민사회 자체의 싹을 뭉개버렸다.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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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버린 사람들 -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사건의 기록
김효순 지음 / 서해문집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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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일협정이 체결되기 이전에 재일동포의 국적은 대부분 '조선'이었다. 그것은 남과 북 어느 한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반도(조선반도)에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한국 정부는 일본 영주권을 보장받으려면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도록 하고 남에게 충성할 것을 강요했다. 이런 과정에서 정보부 요원은 자연스럽게 동포사회의 실력자로 군림했다. 민단의 간부나 사업하는 상공인은 정보부 요원의 눈치를 살피고 접대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눈 밖에 나는 언동을 했다가 무슨 보복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민단의 각급 조직은 선거를 통해 집행부를 선출하는 데 경쟁 후보를 제거하기 위해 정보부 요원을 이용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경쟁 후보가 총련 쪽 인사와 비밀접촉을 한다든지 가족 중에 북한으로 넘어간 사람이 있다는 식으로 밀고해 간첩혐의를 뒤집어씌우는 경우도 있었다. (210)



1980년 9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견하기도 했던 이카리는 서 형제 사건과 관련해 국내 언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남겼다. 


"혹독한 남북대립 속에서, 그리고 공산주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박 정권 아래서 서 형제는 '비국민' '비인간' 취급을 받았다. 당국의 규제를 받은 한국의 매스컴은 형제의 공판정에 나와서 직접 자신들의 눈으로 형제를 보고, 자신들의 귀로 형제의 얘기를 들어려고 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재판 진행 중에 형제를 실명으로 등장시킨 스파이 드라마를 만들어 방송까지 했다. 서 형제는 이런 방법으로 중요한 한국의 민중으로부터 고립되어져 갔다." (261)



"우리 재일한국인 정치범 가족은 지금 박정희 일당으로부터 자신들의 육친을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지만, 이 투쟁은 결코 우리만의 투쟁이 아니다. 우리 가족을 진정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은 조국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의 체험과 역사를 통해 아프도록 교훈을 얻고 있다." (354)



그래서 자이니치가 놓인 여러 가지 정치 상황과 일본의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나갈 것인지 일본인이 자신의 문제로 생각해서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76년 이후 석방운동 관련 집회가 시작되면 오사카 민단의 간부와 청년들이 찾아와 격렬히 항의했다. 이들은 구원운동 활동가에게 "너희들은 36년 식민통치를 잊었냐. 식민통치를 반성한다면 이런 집회를 할 수가 없다. 스파이로 잡힌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은 당치도 않다"고 시비를 걸었다. 활동가들은 "식민통치에 대한 반성이 있기 때문에 구원집회를 한다"고 반박했다. 집회당 입구에는 젊은 사람들로 방위대를 편성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했다. 민단 내부에서도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는 체제파와 비주류의 대립도 격렬했다. (423)



굶어죽다시피 한 박정기의 사례에서 보듯 재일동포 유학생 사건의 피해자들은 구속 기소돼 장기간 감옥에 수감됐던 사람들에 그치지 않는다. 정보기관에 끌려가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고 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채 풀려난 사람들, 수사관의 가혹행위와 회유를 이겨내지 못하고 누군가의 이름을 대야 했던 사람들, 검찰 쪽 증인으로 법정에 불려나와 조작사건의 피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해야 했던 사람들, 자신의 친구와 동료가 간첩으로 몰려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체하며 침묵을 지켜야 했던 사람들, 이 모두가 피해자다. 이들이 입었던 정신적 상흔을 어루만져주고 위로해주어야 한다는 의식은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존재하지도 않았다. (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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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들 - 마르크스에서 시진핑까지, 세계공산주의자들의 삶과 죽음
김학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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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셰스쿠는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공포정치의 도구들을 발달시켰다. 그 핵심은 보안대로, 8만 명의 군인과 10만 명의 무장경찰관으로 구성됐다. 그들은 대체로 죄수를 비롯해 과거를 감추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로, 사회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선발됐다. 그래서 자신들에게는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차우셰스쿠에게 맹목적이면서 광란적으로 충성하게 만들었다. 이들 가운데 어떤 부대는 차우셰스쿠가족을, 어떤 부대는 당요인들을, 어떤 부대는 정부요인들을 경호하도록 상시배치되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부대는 투옥과 고문을 전담하고 있었다. 그들은 물론 완전히 초법적인 존재로 국가 안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보안대와 긴밀히 연결된 기구가 내무부였다. 이들은 보안대와 함께 전 국민의 10퍼센트에 가까운 2백만 명 정도를 공식적·비공식적 정보요원으로 썼다. 편지검열과 전화도청은 일상생활의 일부였다. 불법적인 체포와 투옥은 여기저기서 쉽게 이뤄졌다. 그래서 1980년대에 들어서는 많은 국민들이 해외탈출을 꿈꾸게 됐는데, 탈출하다가 잡히는 경우 경찰의 맹견들에게 산 채로 먹히는 일도 드물지 않을 정도였다. (375)

 

 

 

중국의 대내외적상황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정립된 마오쩌둥의 이론들과 전략들은 중국공산당의 희생과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37년에 4만 명 수준이던 당원의 수가 1941년에는 80만 명 수준으로 늘어난 사실이 그것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양적 팽창은 질적 저하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는 19411월부터 19422월 사이에 정풍운동당내투쟁을 개시했다. 명분은 질적 저하를 방지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마오에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한다는 정략적 목적에서 진행됐다. 2년 동안 계속된 이 운동은 상대방을 서로 밀고하는 가운데 보안조직을 담당한 세력에 의해 고문과 살해가 자행됐고 그 과정에서 자살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28인의 볼셰비키그룹의 우두머리였던 왕밍은 군중 앞에서 자아비판을 하는 수모를 당했다. ‘생래적 악한으로 불리던 캉성은 보안조직을 이끌면서 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괴롭혔다. 결과적으로, 이 운동은 마오쩌둥1인지도체제를 굳히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466)

 

 

 

이러한 격찬의 홍수 속에서 유일한 예외가 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미국공산당의 혹평이었다. 미국공산당은 이 책[에드거 스노, 중국 위의 붉은 별]을 금서로 지정했고 아울러 미국공산당에 연결된 어떤 단체도 이 책 광고를 싣지 못하도록 조처했다. 미국공산당은 소련의 지령을 받았음이 확실했다. 소련이 이 책을 배척하는 데는 까닭이 있었다. 이 책은 우선 중국공산당이 소련의 지원을 받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해왔음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세계꽁산주의운동을 소련이 홀로 지도해왔다는 주장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이어 중국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이래라 저래라 지시해 중국공산당을 여러 차례 어려움에 빠뜨렸던 코민테른을 비판했는데, 그것은 코민테른으로 하여금 그토록 변덕스럽게 움직이게 만든 스탈린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이미 1920년대에 중국혁명에 대한 스탈린의 잘못된 정책을 매섭게 비판했었다. 미국공산당은 이 책을 트로츠키추종자에게 매수돼 쓴 것이라고까지 음해했다. (629)

 

 

 

래티모어는 일본의 아시아침략을 맹렬히 비판했다. 그는 유럽에서 나치독일과 파시스트이탈리아가 침략전쟁을 확대하게 된 것도 일본의 아시아침략이 처음부터 저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뿌리를 일본제국주의의 아시아침략에서 찾았다. 이러한 시각에서, 그는 일본제국주의와는 어떠한 형태의 타협또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그가 일본의 아시아침략을 그렇게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일본이 아시아를 침략하는 시발점이었던 한반도침략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안은 것은 우리로서는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그가 한민족은 일제의 패망과 동시에 독립해야 한다고 명백히 주장한 사실은 정당히 평가돼야 할 것이다. 이 시점에 미국에서 한민족의 독립을 옹호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에 유의하며 그의 주장은 더욱 빛난다고 볼 수 있다. (654)

 

 

 

소련이 붕괴되면서 그동안 기밀로 분류됐던 소련의 공식문서들이 공개되기 시작했는데, 코민테른 시절에 동지들을 밀고한 노사카의 스파이행위들도 공개된 것이다. 코민테른 지령에 따라 미국에 두 차례 잠입해 활동했던 시기에는 코민테른과 미국 모두를 위해 이중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자료들도 공개됐다. 심지어 패전 직후 연합국의 일본점령기에도 연합국최고사령부의 첩자로, 또는 미국의 첩자로, 이중플레이를 했다는 자료들도 공개됐다.

(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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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ft 1848-2000 -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
제프 일리 지음, 유강은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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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확산에는 중요한 초국가적 차원이 존재한다. 민주주의는 대부분 18세기에서 현재까지 지평을 확대하는 일련의 범유럽적인 국면들에 의해 일국의 국경을 넘어서 형성되었다. 현대 유럽 역사에서 이와 같은 초국가적인 헌법 제정의 순간이 다섯 차례 있었고, 이 순간들은 다가올 수 십 년의 한계와 가능성을 정해주었다. (31)

 

앞선 시기에도 사회주의자들은 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신들의 호소를 확장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계급정치'의 지반에 의지한 채 다른 중요한 인구 구성원들을 사회주의 지지층에서 효과적으로 배제했다. 노동계급의 남성성이라는 강하게 젠더화된 이상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정치가 축소되면서 여성을 차별하고 배제한 것이 이러한 결과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38)

 

사회당과 공산당이 없었다면 민주주의는 애초에 출발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1860년대와 1960년대 사이에 두 정당은 광범위한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끄는 활발한 중심을 형성했다. 이것이 바로 다시금 불러내서 정당한 평가를 제시해 마땅한 사회주의의 역사이다. (40)

 

카를 마르크스와 1860년대에 시작된 사회민주주의 전통은 음모적 전위집단과 이들의 반란에 대한 환상을 결정적으로 거부했다. 지배계급에 의한 반혁명적 폭력에 맞서 무장으로 혁명을 방어할 필요성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그러나 1871년과 1917년 사이에 사회주의 정당들의 지배적인 혁명정치 모델은 거역할 수 없는 의회 다수파를 장악한다는 민주적 약속을 중심으로 정해졌다. 앞선 시기의 봉기 전통의 영웅적 행동과 비극적 한계를 보여준 1871년의 파리코뮌Paris Commune이 핵심적인 분수령이 되었다. 파리코뮌의 실패는 음모의 지평을 넘어서는 민주적 방법의 필요성을 보여주었다. (65)

 

엑소더스는 경제 관제고지보다는 지방의 창의적 실천에 초점을 맞추는, 협동에 기초한 사회주의 경제학의 다른 전통을 환기시켰다. 지역사회에 기초한 계획의 탈집중화된 모델을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사회를 부흥시켰으며, 노동과 일상생활을 잇는 새로운 연결고리를 구체화했다. 민주적 계획은 좌파가 다시 집권하기만 하면 적절한 기획을 제공했다. 1990년대의 세계화된 경제에서 각국의 정부가 운신할 여지는 줄어들었지만 그렇더라도 창의적인 공공투자 전략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871)

 

급진주의의 진정한 가능성은 사회주의 정당들 자체가 아니라 두 가지 새로운 정치공간에서 발견될 터였다. 첫 번째 공간은 지배적인 사회주의 정당들과 소규모 좌파 사회주의 정당 및 녹색당을 연결시켜 주었다. 두 번째는 의회영역과 의회 외부 사회운동 사이의 폭넓은 연계였다. (888)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상호적대가 초창기 파시즘의 승리에 파국적으로 기여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게다가 전쟁기간 중에 잠시 협력하긴 했지만 1989~91년 이후에야 두 세력은 비로소 분열을 완전히 극복했다. (994)

 

'좌파'를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더욱 넓고 엄격한 틀, 나아가 그것의 모든 사회·경제·문화·개인적 차원과 동일시함으로써 20세기 마지막 30년의 사회주의 위기로 인해 야기된 무력감에서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주장한 것처럼,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의 최고의 성취를 이루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지만, 민주주의의 가능성은 언제나 사회주의의 범위를 뛰어넘었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1968년 이후 시기에 분명해졌다.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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