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어떻게 독재의 도구가 되었나
한상범.이철호 지음 / 삼인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러한 사회심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군사독재자, 즉 친일파들이 쿠데타를 기정사실화해 밀고 나가면서 국민 위에 군림했다. 거기에서 부족한 것은 국민투표라는 그럴듯한 요식행위로 포장했다. 그러고 나면 어용학자와 기회주의적 언론이 나팔을 불어 대며 잔일이나 설거지를 도맡았다. 일제하에서 이미 우리 지식인과 언론은 강자에게 어떻게 아부해야 하는지 충분히 배웠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친일을 한 사람들이나 그들 아류가 대개 그대로 나팔수 노릇을 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이 진행됐다.(68)




대학생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에 관련된 의문의 죽음 여섯 건은 모두 녹화사업이 노골적으로 진행되던 1982년 7월부터 1983년 12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녹화사업은 단지 의문사 여섯 건의 개별적인 사건 모음이 아니다. 이는 국가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진 지시에 의해 관련 기관이 총동원되어 자행한 체계적인 국가 범죄이다. 다시 말해서, 1980년대 초반의 녹화사업은 군이 국방의 의무를 처벌의 수단으로 악용하고, 나아가 프락치 공작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씻을 수 없는 범죄행위이다.(124)




정치 사찰이 정보기관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사회 전반에 대한 사찰은 경찰에 의해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서 경찰도 정치 사찰의 첨병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정치계 및 학원, 노동계에서 사찰활동을 벌인 이들은 경찰 정보과 형사들이었다. 경찰 정보과 형사들은 이른바 '망원(정보원)'도 이용했다. 군사독재 정권에서는 그 야말로 무차별적·전방위적 수단이 동원됐다. 기관원뿐만이 아니다. 도처에 깔린 망원이나 프락치를 통해 온갖 정보가 수집됐다. (125)




대법원은 1990년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대상이었던 한승헌 변호사 등 145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국가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고에게 위자료를 200만 원씩 지급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대법원 판결은 "공공 기관이라 하더라도 사상·신조 등 개인의 인권을 현저히 침해할 우려가 있는 정보 수집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점을 재삼 강조함과 동시에 "국가 안보 등을 위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경우도 은밀한 방법이나 강제 수단에 의해서는 안 되며 공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라는 점을 밝혔다. (127)




이러한 일본의 예에 고무된 친일 세력이나 구시대 봉건 잔존 아류들은 한국에서 박정희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유교적 권위주의를 찬양하며 유교 문화권 어쩌고 하며 수구 윤리에 매달려 왔다. 이 유교적 성향은 남쪽을 유교적 자본주의라고 하고, 북쪽을 유교적 사회주의라고 할 정도로 우리들은 봉건 왕조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청산하지 못했따. 그 단적인 표현이 박정희의 충효 윤리 강조이고, 그에 편승한 파별주의적·족벌주의적 사회행태의 확산이다. 또한 정치 연고 중심의 파벌주의, 재벌의 족별식 경영과 소유의 상속 형태, 사회적 패거리 의식과 독재 정권이 양산하고 조장한 지역 파벌주의·학연주의·학벌주의를 들 수 있다. (205)





군사정권은 정치를 적敵을 격파하는 군사작전식으로 해 나갔다. 그러나 민주정치는 시민의 동질성과 당파 사이에 규칙rule을 준수하며,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는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경쟁이다. 정치판을 전쟁판으로 본 군정 독재자들은 시민사회 자체의 싹을 뭉개버렸다. (2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