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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버린 사람들 -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사건의 기록
김효순 지음 / 서해문집 / 201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한일협정이 체결되기 이전에 재일동포의 국적은 대부분 '조선'이었다. 그것은 남과 북 어느 한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반도(조선반도)에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한국 정부는 일본 영주권을 보장받으려면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도록 하고 남에게 충성할 것을 강요했다. 이런 과정에서 정보부 요원은 자연스럽게 동포사회의 실력자로 군림했다. 민단의 간부나 사업하는 상공인은 정보부 요원의 눈치를 살피고 접대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눈 밖에 나는 언동을 했다가 무슨 보복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민단의 각급 조직은 선거를 통해 집행부를 선출하는 데 경쟁 후보를 제거하기 위해 정보부 요원을 이용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경쟁 후보가 총련 쪽 인사와 비밀접촉을 한다든지 가족 중에 북한으로 넘어간 사람이 있다는 식으로 밀고해 간첩혐의를 뒤집어씌우는 경우도 있었다. (210)
1980년 9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견하기도 했던 이카리는 서 형제 사건과 관련해 국내 언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남겼다.
"혹독한 남북대립 속에서, 그리고 공산주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박 정권 아래서 서 형제는 '비국민' '비인간' 취급을 받았다. 당국의 규제를 받은 한국의 매스컴은 형제의 공판정에 나와서 직접 자신들의 눈으로 형제를 보고, 자신들의 귀로 형제의 얘기를 들어려고 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재판 진행 중에 형제를 실명으로 등장시킨 스파이 드라마를 만들어 방송까지 했다. 서 형제는 이런 방법으로 중요한 한국의 민중으로부터 고립되어져 갔다." (261)
"우리 재일한국인 정치범 가족은 지금 박정희 일당으로부터 자신들의 육친을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지만, 이 투쟁은 결코 우리만의 투쟁이 아니다. 우리 가족을 진정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은 조국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의 체험과 역사를 통해 아프도록 교훈을 얻고 있다." (354)
그래서 자이니치가 놓인 여러 가지 정치 상황과 일본의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나갈 것인지 일본인이 자신의 문제로 생각해서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76년 이후 석방운동 관련 집회가 시작되면 오사카 민단의 간부와 청년들이 찾아와 격렬히 항의했다. 이들은 구원운동 활동가에게 "너희들은 36년 식민통치를 잊었냐. 식민통치를 반성한다면 이런 집회를 할 수가 없다. 스파이로 잡힌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은 당치도 않다"고 시비를 걸었다. 활동가들은 "식민통치에 대한 반성이 있기 때문에 구원집회를 한다"고 반박했다. 집회당 입구에는 젊은 사람들로 방위대를 편성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했다. 민단 내부에서도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는 체제파와 비주류의 대립도 격렬했다. (423)
굶어죽다시피 한 박정기의 사례에서 보듯 재일동포 유학생 사건의 피해자들은 구속 기소돼 장기간 감옥에 수감됐던 사람들에 그치지 않는다. 정보기관에 끌려가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고 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채 풀려난 사람들, 수사관의 가혹행위와 회유를 이겨내지 못하고 누군가의 이름을 대야 했던 사람들, 검찰 쪽 증인으로 법정에 불려나와 조작사건의 피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해야 했던 사람들, 자신의 친구와 동료가 간첩으로 몰려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체하며 침묵을 지켜야 했던 사람들, 이 모두가 피해자다. 이들이 입었던 정신적 상흔을 어루만져주고 위로해주어야 한다는 의식은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존재하지도 않았다. (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