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사회와 이익사회 - 순수사회학의 기본개념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번역총서 7
페르디난트 퇴니스 지음, 곽노완.황기우 옮김 / 라움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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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와 게오르그 짐멜 등과 동시대인으로 독일 사회학회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에 오르면서 초기 독일 사회학의 기초를 쌓으며 큰 명성을 얻은 페르디난트 퇴니스는 1933년까지 킬 대학의 특별한 연구 교수직을 역임했는데요. 특히 1932에서 1933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그가 행했던 나치당의 비판으로 스스로 궁지에 몰리게 되며, 히틀러에 의해 강제로 대학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왠지 칼 슈미트와는 유독 대비되는 행적이기도 합니다. 두 공역자의 해제에는 이상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경향을 갖고 있었던 퇴니스의 학문적 경향과 양심에 대해서도 잘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가 28세때 저술되었으며, 이번에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번역총서로 묶어 1912년 개정판을 바탕이 되었다고, 또한 정부의 재원을 지원받아 출간된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제대 교수였던 황성모 선생의 1982년 국내 번역판을 다시 새롭게 정비하여 낸 것으로 공역자들이 다시 한번 주지하고 있습니다. 독일어 원제는 ‘Gemeinschaft und Gesellschaft’ 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책의 원제를 바로 표현한 게마인샤프트, 게젤샤프트는 매우 유명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당시 독일은 말할것도 없고, 프랑스를 비롯한 미국에서도 이 개념을 여러 곳에서 차용해 의미를 확장시켰는데요. 더불어 우리말로 공동체와 결사체라는 의미로 쓰여지기도 했습니다. 저자인 퇴니스는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라는 대비되는 개념으로 후자를 바탕으로 전자의 우월성을 다소 증명하는 방법을 글의 논리적 전개를 이끌고 있습니다. 또한 ‘부모-자식, 남편-아내, 형제-자매’ 등으로 인식된 기반의 전통적인 공동사회에 대해 개인의 향락 (아마도 안락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을 위한 자원 분배의 차원에서 가부장제를 차악의 문제로 수용하고 있고, 후에 전개된 서술 기반에서 권력 관계와 장원을 언급하면서 농노와 노예 제도에 대해 ‘법적 노예 신분은 그 본질상 의롭지 못하다’고 평가하지만 앞선 가부장 제도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역사의 문제로 치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익사회가 출현하기 이 전의 모든 가용한 생산물이 자급자족 형태로 순환된 공동사회의 생산형태가 앞서 밝힌대로 각 구성원들의 향락의 문제에서 중요한 기반이 되었고, 이후 잘 알려진 바대로 ‘잉여생산물’을 판매의 형태로 출현한 이익사회에 대해 상인과 자본가의 해석을 크게 할애하면서 잠정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평등의 한계를 넘어서면 서로 상이한 것들의 통일체로서 공동사회의 본질이 지양된다”는 측면에서 자본가와 상인의 화폐권력적 우위에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촌락의 구조에서 노동과 생산의 거의 완전한 구조는 선순환의 입장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반면, 각각의 개별 노동력이 수단화가 되는 이익사회의 생산체가 기존의 공동사회가 추구했던 여러 중요한 가치들을 망각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고 보는데요. 이는 “상호간의 믿음과 신뢰가 기반한 관계가 매우 성립하기 어렵게 되는” 이익사회의 단면을 평가하는 것으로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이렇게 1부에 이르는 공동사회와 이익사회의 개념의 일독을 마치고 다음 2부를 읽어나가는 도중에 명백하고 1부와 2부는 구조상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부도 전자인 1부와 마찬가지로 서로 대비되는 규명으로 본질의지와 선택의지를 다루고 있는데요. 2부는 약간 미흡한 선택의지의 해석을 감안한다면 거의 본질의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와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은 본질의지의 인간 전반의 사고와 관념, 감정에 대한 퇴니스의 해석은 본질적으로는 의지를 유기체로 인식하고, 감정과 사고의 영향이 서로 연계되고 주고받는 과정으로 되어 있다는 큰 틀의 인식을 고려한다면 꽤 일관된 논증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의 고유한 기억을 의지의 영향을 주는 중요한 인자로 파악하고, 기억 자체가 ‘필연적 의견, 정언적 명령’으로 호의-습관-기억으로 비롯된 의지 형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본질은 의지와 자유에 비롯되는 것으로 자유와 의지는 곧 하나라는 관념을 잉태합니다. 이렇게 도출된 인간 의지의 개념은 욕망과 욕구와 관련해서 인간의 특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인식이며, 인간 의지 자체가 동물적, 정신적 의지에서 결정된 유기체적 의지로 확신된다면,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이득을 위해 이기심을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경향이 거의 이해가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선택의지는 앞선 본질의지와 명백하게 대비되고 이점은 이익과 이기심의 선택의 문제로 규정됩니다. 결국 “이러한 개개인은 자기의 본질의지에 자신의 태도를 정하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의지를 사실상 본성을 나타내는 명제로 받아들이고 해석되는 것은 일찍이 쇼펜하우어가 시도했던 철학이며, 스피노자 역시 의지와 본성의 문제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태도와 유사합니다.

그리고 3부는 정의와 테제, 자연법을 정리하면서, 마찬가지로 정의와 자연법을 본질의지-선택의지 및 공동사회-이익사회라는 대비되는 논리적 전개로 확실히 표명되고 있는데요. 이익사회에서 선택의지로 기반되는 정의가 과연 반대의 본질의지와 공동사회에서의 가치로 과연 우월한 개념으로 도출될 수 있느냐와 전통적인 관습과 인습의 기반이 되는 공동사회의 관습법을 역사에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퇴니스가 규명하는 마지막 자연법과 관련된 문제는 인간의 의지와는 조금 거리가 먼 관념성과 보편성의 측면에서 찾아보고 있습니다. 따로 독특한 이해라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공동사회의 관습법이 자연법의 일부로 귀속되고 이후 스스로 고유 영역으로서 공법적인 구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측면의 해석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익사회의 고리대금과 같은 불로소득과 관련된 채권법은 개인의 이익의 수단으로 나타났고, 전체적으로 상업 발달과 자본가 계급의 출현으로 탄생한 이익사회가 어떠한 성격을 갖고 있는지 마찬가지로 보여줍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펴본 양 사회의 분석적 측면은 과연 공동체의 국가론으로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혹은 공동사회나 이익사회 한쪽에 기반한 국가를 도출해야 하는지, 양자 모두에게서 공통되는 보편적 이익으로 취합해야 되는지에 대한 퇴니스의 고민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이익과 보편적인 구속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여론에 기반하는 국가체제를 갖추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겁니다. 저자 자신이 히틀러로 대표되는 국가사회주의를 목도한 바가 있듯이 자본주의 발달 시기의 독일의 경험을 비추어 본다면 양쪽을 극명하게 대립시켜 결과물을 살펴보는 일종의 경험도출론은 사실상 실행되기 어려운 문제였을 것입니다. 이익의 문제를 최고 선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이익사회가 무조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믿음은 꽤 위험하기도 한 것입니다. 퇴니스가 자신의 독일이 거대하고 파급력이 큰 위험한 징조를 미리 본능으로 알고 이를 비판했던 것과 같이 온전한 자연법을 도덕적 기초로 삼아 국가의 기조로 삼는 것이 완전한 공동사회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 보다는 좀 더 나은 선택이 되지 않을까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자인 그가 이익사회의 단면을 과감하게 파악했듯이 우리 사회의 이 이익사회화는 꽤 변질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책이 우리에게 어떠한 이해를 가져다줄지는 다소 불명확하긴 합니다만 초기 사회학에서 시도된 규명들이 오늘날에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약간의 희망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끝으로 덧붙여, 98페이지에 오타 한 곳을 발견했는데요. 정부의 지원으로 출간한 책이 제대로 된 마무리도 안 된것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이 팔릴 책도 아니니 다시 재출간하는 것은 익히 어려운 일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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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의 설계자들 - 1945년 스탈린과 트루먼, 그리고 일본의 항복 메디치 WEA 총서 8
하세가와 쓰요시 지음, 한승동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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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전의 설계자들’이라는 글을 쓴 하세가와 쓰요시는 일본 출신으로 도미하여 캘리포니아대 산타바바라 캠퍼스 역사학과에서 학생들을 지도한 일본계 미국인인 학자입니다. 그에게 필생의 논저라고 불릴만한 이 글의 목적은 2차대전 대일전과 관련하여 새롭게 살펴보는 스탈린과 소련의 역할, 그동안 학계와 많은 학자로부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이 일본과 일왕의 항복을 이끌어냈다고 알려진 기존의 믿음을 다시 재검토하게 만드는 내용들을 포함한 것입니다. 참고로 이 책은 2005년에 첫 출간이 되어. 2011년 내용의 재보강을 통한 일본판이 2011년에 나왔고, 국내 번역판은 이 2001년 판을 기본으로 출판되었습니다. 특히 한국어판 서문을 저자가 직접 작성하면서 마지막 부분에 “이 책에서는 딱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이런 굴욕을 강제한 나라에 태어난 저자로서 그 역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한국 독자들이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한국인 독자들에게 겸허한 고백을 하고 있는데요. 아마도 한국어로 번역된 자신의 책이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들어있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습니다.

우선 이 책은 총 7장으로 1940년 9월 독일과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 동맹에 가세한 시점부터 1945년 9월 5일 소련군이 쿠릴열도의 모든 섬의 점령이 완료된 시기까지를 시간적 공간의 범위로 삼고 있습니다. 약간의 논외지만, 얼마전에 서평을 썼던 가토 기요후미의 ‘대일본제국 붕괴’의 많은 근거가 바로 쓰요시의 이 글이더군요. 먼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얄타 회담이라고 잘 알려져 있는 루즈벨트와 처칠 그리고 스탈린의 당시 막바지에 이른 대전의 향방을 탐색하는 이 정치적 회담을 ‘냉혹하게 국가 이익을 추구하는’ 스탈린이 주도한 루즈벨트에 대한 각종 이권 쟁취로 해석하는 ‘얄타밀약’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완전하게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저는 일차적으로 치열한 독소전쟁을 전개했던 스탈린의 소련이 동등한 연합군으로서 받아들여진 점과 전자를 통해 확장되는 얄타밀약의 논리로서 노골적인 기만정책을 통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통한 만주의 소련군 진입을 무조건 비윤리적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대응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도 드러나지만 사실상 만주에 대한 이권 포기를 결정했던 장제쓰와 얄타회담을 통한 중국의 양보를 기반으로 한 소련의 이들 지역의 이익을 또 미국 정부가 기만책으로 상대했다는 점에서 솔직히 이러한 정치외교적인 전술의 시험대에서 무조건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워 보입니다. 그야말로 순진한 생각이죠. 더불어 일소 중립조약을 루즈벨트 역시 독일과의 전선에 모든 역량을 쏟아내고 있는 소련과 동시에 미영에게도 분명 이득이라고 봤으며, 일소 중립조약이 마찬가지로 전쟁 과정에서 소련의 이익에 그 실효를 다했다는 판단으로 이미 일본과의 참전에 정당성을 갖고 있는 소련에게 조약 위반만을 들이대는 것 또한 별다른 의미가 없어보입니다. 각각의 주요한 정치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입장에 맞는 평가와 결정이 있을 순 있겠지만, 주축국의 일원이자 침략국의 일본이 국제 무대에서의 외교적 도의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지 다들 이해하실겁니다. 루즈벨트에 이어 백악관에 등장한 해리 트루먼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결과를 “진주만에 대한 복수”로 생각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는 것에 대해 우리가 트루먼을 냉혹한 살인마라고 비난할 수 없는 것과 동일한 국가적 배경과 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이런 과정에서 일왕은 ‘일격평화론’에 입각한 종전 논리를 갖고 있었는데요. 즉, 저자의 설명대로 ‘상대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날리고 그러한 유리한 배경 속에서 전쟁을 마무리한다”는 이 일격평화론은 반대로 루즈벨트와 트루먼은 ‘가혹평화론자’로서 그것이 수사에 불과할지라도 무조건 항복을 포함한 어떠한 반론도 받아들이지 않는 국익의 신봉자이자 정치인들이었습니다. 일전에 E.H 카는 “1차대전이 전쟁에 대한 그 끝도없는 낭만주의적 분위기가 더 큰 파멸을 불러 일으켰다”고 평가한 바가 있습니다. 전쟁의 패색이 이미 시작된 대전의 암울한 분위기에서 일왕을 비롯한 당시 일본의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자원과 수단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하게 미국에게 충분한 일격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국가의 운명을 손안에 놓고 가늠하는 자들이라면 모든 가능의 수를 올려놓고 또한 자신들의 그런 위치를 공고히 해주는 데 기반이 된 수많은 국민들을 희생의 값어치로 여기는 것은 더욱 피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격을 오키나와에 있었던 그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민과 군에 모두를 포함한 ‘반자이 어택’으로 만든 것만으로도 일왕이 그 권좌에 있을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전 국민을 고양시켜 대결전에 준비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는 것은 히로히토가 얼마나 미화되어 왔는지 밝히는 사례라고 여겨집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허버트 빅스가 왜 이 일왕의 가면을 벗겨내려고 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다만,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종래의 트루먼을 비롯한 미국 정부가 소련의 대일 참전을 사실상 원하고 종용해 왔다는 측면의 분석이 잘못 되었을수도 있다는 해석입니다. 물론 이것과 관련해 많은 학자들로부터 다른 의견과 해석이 있습니다만 맨하탄 계획에 의해 원자폭탄이 준비되었지만 당시 루즈벨트에 이어 대통령이 된 트루먼이 오키나와의 경험을 통한 미군들의 희생을 고려했다면 원폭이 아니더라도 소련의 참전을 통한 목적 달성이 더 쉬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를 “히로시마에 의한 원폭투하는 스탈린의 대일본 참전을 앞두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더 상세하게 서술한다면 일본의 무조건 항복 자체보다는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여 극동과 일본에서 이익을 획득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루즈벨트가 승인한 스탈린과의 얄타 회담에서의 정치적 약속을 트루먼도 존중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소련의 대일본전 참전에 대해서는 매우 마뜩치 않아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점은 스탈린에 대한 트루먼의 개인적 감정이라기 보다는 앞으로 전후 관리와 질서에 있어서 소련을 잠정적으로 적으로 여겼고, 마찬가지로 히로시마를 쑥대밭으로 만든 원자폭탄을 스탈린이 “소련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받아들인것도 트루먼과 다를바 없는 생각이겠죠.

또한 당시 일본 정부가 일방적인 소련의 일소중립 조약 거부에도 소련과의 화친을 통해 미영과의 전쟁을 끝내려고 접근한 것도 자포자기의 심정인지 외교전략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안일하게 여긴것 인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능수능란한 스탈린의 책략에 놀아나 선전포고장 하나만을 손에 쥔 일본의 멍청한 대응과 미영과의 직접 교섭을 당시 일본 육군이 절체적으로 반대했다고 밝히면서 이들 육군은 “1억 일본 국민을 길동무 삼아 자폭할 각오였다”는 냉엄한 한줄 평가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도 ‘국체 호지’, ‘일왕제의 존치’를 아주 일관되게 강조했던 것은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야마토인 혹은 야마토 문명으로 여겨지는 신도와 일왕이 신과 마찬가지라고 여겨지는 믿음이 주변의 모든 것을 초월해 중요한 것인지 일개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분명 이해는 되지 않았습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에 서명하기까지 일왕에 대한 전쟁 책임을 회피시키고 더불어 일왕제를 존치하는데 연합국 특히 미국의 동의를 받으려고 정치적 노력을 수없이 시도하고 방안을 마련하는 것에 대해 실로 아연한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요. 일왕이 일본 역사의 전면에 실질적으로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메이지 유신 이후 수많은 주변의 아시아인들을 말로 다 못하는 고통에 빠트려 놓고도 그 일왕은 90세 가까이 천수를 누린 것은 비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이러한 모든 정치적 인식과 과정이 종전 도입, ‘종전을 도입한다’는 자신들의 책임을 전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수사’의 수립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종전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 책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이 막심한 피해를 초래한 세계적인 대전과 이것의 많은 정치적 행위자들이 얼마나 규정할 수 없는 군사외교적 전략과 전술을 사용했고,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국가 관계를 수도 없이 조정하고 심지어 광범위한 기만책과 허위 전술 등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했는가에 대한 가감없는 분석입니다. 연합국에 의해 대악으로 규정된 독일과 일본의 만행을 결코 숨기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막대한 민간인들의 인명 피해를 초래했던 원폭 공격과 도쿄에 대한 미 공군의 수많은 소이탄 공격에 있어서도 ‘부수적 피해’라고 여겼던 일왕과 그 신하들, 그 반대편의 커티스 르메이 같은 적극적인 전쟁론자들 모두 우리가 이룩했던 계몽과 근대의 가치와는 매우 동떨어진 역사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전쟁에 있어서 도덕론자 같은 관찰은 피해야 하지만 지금에야 심각한 제국주의자라고 알려진 영국의 위대한 총리 윈스턴 처칠이 일본 제국주의를 일개 아시아인에 의한 똑같은 아시아인들의 다툼으로 여겼던 것과 같이 세계 2차대전이 과연 해방을 위한 전쟁이었는지는 이 책을 통해서도 결국 다시 되새김 해보게 됩니다. 다만, 지금의 수많은 일본인들이 이 책을 보고 나서 자신들의 역사를 어떻게 생각해 볼지 무척 궁금해지는 것은 또 어쩔 수가 없더군요. 저자도 이와 관련하여 글 후반부에 태평양 전쟁에 참가했던 한 해병대원이 목도했던 일본군에 의한 미군 포로와 희생된 미군들에 대한 참상을 목격하고, 이를테면 희생된 미군 병사의 성기를 잘라 목이 잘린 그 병사의 입에 넣는 등의 목불인견을 통해 일본인들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표출한 바가 있습니다. 현재의 전체 일본인들이 과거 자신들의 윗세대가 자행했던 전쟁 전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지 식민지 지배의 후손인 저같은 한국인은 실로 궁금할 따름입니다.

끝으로 거의 이틀동안 10시간이 넘도록 이 책에 집중을 했는데요. 만약 2차대전과 전후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하세가와 쓰요시의 이 책에 적지 않은 만족을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근래에는 과거 소련측의 자료가 많이 공개되어서 특히 스탈린의 전쟁 수행에 대한 행적들이 이 책에도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앞선 표현대로 스탈린은 냉혹한 국가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가이자,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지정학을 신봉하는 매우 현실주의자라는 것을 다시금 알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얄타회담과 당시 루즈벨트와 스탈린의 정치 게임을 좀 더 알고 싶으시다면 최근 출간된 마이클 돕스의 ‘1945’를 같이 읽어 보시면 좀 더 충분한 이해를 갖게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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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현 2019-04-22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좋은 책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하세가와 쓰요시의 책과 관련된 도서인 『8월의 폭풍』의 역자입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5357299

하세가와의 책이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둘러싼 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을 심도 있게 고찰하고 있다면, 『8월의 폭풍』은 하세가와 책이 비교적 간략하게 다루고 있는 소련의 대일전 참전에서 소련군이 수행한 군사작전을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8월의 폭풍』은『종전의 설계자들』의 참고문헌이기도 합니다.

『8월의 폭풍』을 『종전의 설계자들』과 같이 읽으신다면 더 많은 도움이 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제가 번역한 『8월의 폭풍』도 언젠가 소개해주시고 서평을 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베터라이프 2019-04-24 08:25   좋아요 0 | URL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보도록 할게요..
댓글 감사드립니다
 
권력 사고의 프런티어 3
스기타 아쓰시 지음, 이호윤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 푸른역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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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스기타 아쓰시는 도쿄대의 법학부를 나와 현재 호세이 대학 법학부 교수로 있는 학자입니다. 참고로 호세이 대학은 도쿄 6대학 중의 한 곳으로 일본에서도 명문에 속하는 대학이기도 합니다. 또한 약간의 논외로 저자는 일관되게 자민당의 아베 정권을 비판해 온 것으로 유명한데요. 일본인들 특유의 정치적 발언을 아끼는 성향을 고려한다면 꽤 드문 케이스라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바로 2016년에 번역 출간한 그의 다른 논저 ‘정치는 뉴스는 아니라 삶이다’ 역시 그런 연장선상에 있는 글이라 조만간 구해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소개해 드릴 이 책도 역시 지난번에 서평을 썼던 다카하시 데쓰야의 ‘역사/수정주의’와 마찬가지로 사고의 프런티어 시리즈 중 하나이고,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이 주관하여 푸른역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일찍이 계몽주의 시대에 장 자크 루소로 대표되는 인민주권의 개념에서 일반의지와 함께 이 권력이 꽤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는데요. 절대권력을 추구했던 이전의 왕정 시기에 권력의 주체는 소위 신에 의한 대리자를 자청했던 왕정의 지배자들에게 권력은 국한되어 왔습니다. 계급적 신분 사회를 따로 논하지 않더라도 로마 교황이 실제 정치해서 패퇴한 이후로 봉건시대를 거쳐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로열 the royal’이 아닌자들이 감히 이 권력을 논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점차 열리게 된 논의의 의미로 정치학자 스티븐 루크스이 정의한 권력으로 이 책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소위 ‘A가 B로 하여금 원하지 않는 어떤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는 대표적 정의가 수많은 권력과 권력론을 논하는 책들의 거의 첫머리에 실리게 되었는데요. 이것은 권력과 주체의 관계로 시작되어 자유의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에서 후자에 이르는 권력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 누구에게 부여될 수 있는가’라는 정치철학적 물음에 맞닿게 됩니다. 이 점은 위대한 정치학자인 로버트 달의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가?”와 함께 일맥상통해 보이기도 합니다. 달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원화 될 수 있는 권력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말이죠. 그래서 이 글의 1장은 이런 논의적 연계로 시작되고 있고, “인간은 늘 명확한 의도를 가지지는 않는다”는 증거는 바로 권력의 명확한 의도와 정확한 주체화가 말처럼 쉽지는 않다는 말을 증명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뒤이어 2장에서 논하겠지만 권력 자체를 종식시키려고 하는 이들은 권력이 작동할 수 있는 공간 자체를 제거해야 하지만 이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할지는 꽤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많은 정치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 권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그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흔히 자유주의자들처럼 “권력은 아래로부터 온다”는 푸코의 명제에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보여왔던 것처럼 이 권력의 논의 과정 자체가 크게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 위험성도 갖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인민 주권하에 인민은 이미 이성을 겸비하고 있는 존재로 가정되고 있지는 않다”는 저자의 평가는 포괄적인 논의의 측면에서 꽤 의미심장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미 공화주의적 가치와 민주주의의 이행이 성숙된 국가들에게서는 권력 자체는 바로 아래로부터 부여된 것임을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일종의 공안국가의 모티브가 된 홉스의 파놉티콘을 격렬하게 비판한 미셸 푸코는 권력이 위에서 시작되면 어떠한 부작용을 갖고 있는지 탐구한 학자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언어학적이고 심리학적인 권위를 차치한다 하더라도요. 사실상 푸코가 비판한 교도소와 학교 및 각종 규율 시스템을 장착한 ‘규율권력’을 면밀하게 분석한 것은 점차 ‘경제적 문제’가 시민들의 정치와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정치권력이 사회 전반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려고 하는 시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전통적인 권력의 의미가 변화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즉 근대를 넘어 오늘날에 이르는 시간 동안 칼 슈미트가 다원주의를 공격하고. 적 아니면 친구라는 대칭적 사멸주의와 자유주의자들이 권력의 일원화를 반대했지만 “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주권론의 기만성을 폭로하는 점에서는 매우 웅변적이지만, 다른 한편 비판이 그들 자신에게로 되돌아올 가능성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는 한계를 저자는 같이 논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이러한 일원화된 권력에 대해 좀 더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2장에서 다루는 중요한 문제인 권력과 폭력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논쟁적인 부분이 있는데요. 일전에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세기’란 글에서 ‘국가 폭력이 너무 만연되어 그것이 폭력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확산된 시대적 분위기’에서 합당한 권력과 폭력의 차이를 구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국가 권력은 정당한 폭력이 기반되어야 한다든지, 어떻게 하면 권력에서 폭력을 제거할 수 있는지 서로 다른 질문들이 철학적 물음으로 확산되어 왔습니다. 이 책에서는 하이에크 조차도 시장에서 강요된 권력이 나타날 수 있다고 밝혔고 타인과 타인과의 문제에서도 언어 폭력을 비롯한 다변화된 폭력의 가능성, 앞서 언급한 슈미트의 적과 나와의 개념 등 꼭 대칭적 관계 뿐만 아니라 한나 아렌트가 언급했던 비대칭적 관계에도 이러한 폭력의 문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연 노동자에게 노동력을 팔지 않을 자유가 있는가’를 이를 명확히 대변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앞선 권력의 합법적 폭력의 정당성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권력과 폭력의 문제는 일면화 될 수 없는 복잡성을 갖고 있다고 이 글을 통해서도 깨닫게 됩니다.

끝으로 오늘날 보편적인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있게 한 권력과 자유와의 관계, 자유의 심도 있는 논의들은 앞선 논의 형태가 대칭적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권력과 자유는 서로 따로 규명을 해야 할 정도로 정치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적극적 자유’를 확대시켜 궁극적으로 인간의 해방의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근대의 역사 자체가 해방과 자유의 역사라고 봐도 무방하며, 권력이 우리 사회에게는 법이라는 최소한의 안전망을 갖고 본질적으로 우리의 자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자는 이것과 관련하여 ‘해방 자체를 한번에 이루려고 하는 것은 약간 무모하다’고 여기고 있는데요. 여기에서 지금까지 논의하고 있는 권력의 개념이 ‘아래에서 오는가, 위에서 오는가’의 단편적인 물음보다 권력 자체가 법이 보증하는 대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키고 비로소 우리의 해방을 밝혀낼 수 있는지에 대해 먼저 추궁해봐야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권력이 궁극적으로 이데올로기의 여파에 흔들리지 않아야 하며, 존 롤스를 언급하기에 앞서 보편적인 공리주의에 입각해 권력 스스로의 책무를 벗어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중요할텐데요. 오늘날 선출되지 않은 경제 권력들의 과도한 대두와 돈과 관련된 정치 권력들의 전자에 대한 편입은 전체적으로 권력론 자체를 다시 써야 하는 시기에 오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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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 붕괴 - 1945년 일본의 패망과 동아시아
가토 기요후미 지음, 안소영 옮김 / 바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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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 책의 저자 가토 기요후미는 일본근현대사와 동아시아사 등을 연구하고 있는 역사학자입니다. 한자로도 동일하게 ‘대일본제국붕괴’인 원전은 지난 2009년 일본에서 출간되었는데요. 흥미롭게도 2010년 국내에 번역 출간되고 나서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을 친히 게재할 정도로 한국에서의 출판에 큰 관심을 가진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문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에 계신 분들의 강렬한 지식 욕구에 무척 놀랐습니다”라는 문장입니다. 이 일본인 역사학자가 그동안 삶을 살면서 귀와 눈을 막지 않았다면 일본 식민지 시기의 한반도와 중국, 동남아시아에서의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역사를 인식하고 있을겁니다. 우리 한국인이 그러한 역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이 일본인 역사학자는 어떤 말을 이 책에 담았나 바로 그런 의구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로 관심을 받을 수 밖에요. 한국어판 서문에 박혀 있는 저자의 저 문장 때문에 저는 뭔가 복잡한 심사를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일제 식민지 시기와 그 종전의 역사가 한국인들에게 단순히 ‘강렬한 지식 욕구’로 해석되는 건지 하는 씁쓸한 감상과 함께 말이죠.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는 그동안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주변국들에 대한 식민지 침탈의 역사를 담은 글을 읽을 때마다 매우 집중해서 그리고 토씨 하나 허투루 넘어가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데요. 가토 기요후미의 이 책도 마찬가지로 기묘하지만 많은 책들이 시원하게 이해되지 않는 간극이 있었습니다. 또한 꽤 교묘한 언설도 함께요. 오늘날 자민당과 총리 아베를 필두로 위에서 아래로 불고 있는 일본 내의 ‘역사수정주의적 입장’은 대다수의 일본인들의 예의 침묵과 함께 강화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아시아인들에게 진 것이 아니라 미국에게만 진 것이다”부터 시작해서 꽤 대표적으로 뿌리채 뽑히지 않고 있는 난징대학살의 그 왜곡적 인식 태도, 독일과 비교해서도 드러나는 사과와 배상에 대한 애매한 태도 등 외에도 수백 수천가지가 있지만 대다수의 일본 국민들을 포함한 일본 자체는 매번 그래왔습니다. 일본 내에서는 그나마 리버럴한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는 오에 겐자부로조차도 전후 역사에 대한 약간 애매한 태도를 갖고 있죠. 최근에 불거진 위안부 문제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일본측의 정치역사적 태도로 인해 한국 내에 동아시아 공동체 혹은 동아시아 연대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을 정말 끊임없이 비판해 왔던 것입니다.

그럼 이쯤에서 다시 책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총 7장의 분량으로 되어 있는데요. 특히 기존의 일본인에 의한 종전사와 관련해 새로운 서술의 행간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준비되지 않은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이뤄진 당시 조선, 타이완, 만주를 살펴보고 있으며, 기존의 알탸회담이 일본에게 있어서 스탈린에 의한 술책으로 보는 것과 루즈벨트에 이어 등장한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사실상 부정적인 의견 등 입니다. 당시 일왕에 의한 ‘항복 옥음 방송’ 으로 인해 한반도에 정치적 공백이 발생했고, 한국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게 되는 과정과 이후 자기 결정권이 박탈당하는 정치적 혼란의 분위기를 꽤 객관적으로 설명해 내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자에게 한가지 고마운 점은 영국과 미국은 조선의 독립이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했지만, 본디 한반도에 있던 조선은 일제치하의 35년을 제외하면 오랫동안 통일 왕국의 역사로 존재했던 것을 첨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정에 어두운 미국과 영국을 꼬집은 것이죠. 그리고 중국의 장제쓰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한반도에는 필히 정식의 정부가 있어야만 주장했던 것도 서구와 이 지역 사람들과의 본질적인 역사인식 차이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이렇게 일왕의 항복 선포 전후에 발생한 사건들 중에서는 소련의 만주 침공을 비판하고 있는데요. “소련으로서는 군사적 위혐도 받지 않았음에도 중립조약을 위반하면서까지 만주에 침공한 대의 명분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고 평가하는데요. 이 부분이 앞뒤 행간으로는 당시 일본 제국을 위한 변명인지, 눈뜨고 소련에게 강탈당한 만주을 바라보는 중국의 장제쓰를 위한 건지는 다소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연합국으로 참전해 독일과 유럽에서 치열하게 전쟁을 치룬 스탈린에게 그 전에 맺은 일본과의 중립 조약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며, 이미 세계대전인 상황에서 주축국을 제거하기 위한 명분이 스탈린에게 있었는데 뻔히 알고 있는 일본인 역사학자가 명분 운운 하는 것은 다소 이치에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또한 소련의 참전을 막기 위해 당시 일본 내각이 전면적인 모스크바에 대한 화평교섭을 시작하면서 소련 측이 시간을 끌기 위해 일본 대사에게는 즉시 선전포고를 하고 대사관 주위의 통신을 끊은 걸 대단한 술책으로 여기는 저자의 인식도 이해하기 힘들더군요. 스스로도 외교에서 강대국이 일방적으로 행하는 수단들에 대해 단순히 도덕이상주의적 접근은 거의 쓸모가 없다고 인정했으면서, 미국은 인정할 수 있고, 소련은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의 이분법은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통용될 만한 가치일수는 있겠으나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여기에는 얄타 밀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스탈린의 술수라고 언급하고 “독일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스탈린은 일본의 분할 점령을 통해 미국에게서 양보를 얻으려고 했다”고 분석하는데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소련군에 의한 만주 진입을 정당성의 문제로 치환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일본 제국이 패망하기까지의 각국의 정치적 셈법과 외교적 술수 등을 잘 설명해 냈으면서도 조선 총독부가 와해되고 해방 한반도에 속속들이 생겨나는 정치 세력을 열거하는 와중에 이 중 백범 김구 선생을 설명하면서 “과격한 독립 운동”을 시도했다고 평가하는 대목에서는 역시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원폭 개발의 성공과 소련의 공동성명 참가를 명백히 밝혔다면 일본은 항복 의사를 표명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미군이 진입한 오키나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할 필요도 없이 도쿄가 미 공군에 의해 대 공습을 받을때도 본토에서의 결사 항전을 주장했던 인사들이 적지 않았는데, 마찬가지로 이 부분과 논리적으로 대치되는 저자의 평가는 “일왕의 항복 표명의 가장 큰 이유는 원폭 투하가 아니라 소련의 선전포고였다”입니다.

약간의 논외지만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지역에 산개해 살고 있던 일본인들이 3천만이나 되었는데도 당시 일본 정부는 각자 알아서 살길을 찾으라는 식의 아무런 대책을 보이지 않은 것을 당시 일본 정부가 얼마나 대책이 없었는지 저자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인 특유의 책임 회피에 대한 냉엄한 책임 추궁이랄까요. 일왕이 항복 옥음을 발표하면서 ‘신민’이라고 언급한 부분은 오로지 ‘일본인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한때 나마 강하게 일본 제국 신민으로 이해되었던 ‘반도인’과 ‘본도인(타이완인들)’들은 순식간에 제국 신민이 아닌 것이 되었다고 아마도 패망하는 일본 제국의 허울을 꼬집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역사학자의 이 책은 일본 제국의 패망과 관련된 정치와 외교, 그리고 국제관계를 설명하는 선에서 더불어 첨언으로 제국이 사라진 조선과, 타이완, 만주 등을 살펴보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뒤에 동남아시에 대한 간략한 서술도 이어지지만 큰 의미는 없어 보였습니다. 이 책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좀 더 곰곰히 생각해봐야겠지만 이러한 역사적 서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는 약간 어렵기도 하군요. 그래서 저는 이 책의 보론으로서 하세가와 쓰요시의 ‘종전의 설계자’를 다음 읽을 것으로 준비해 놨습니다. 약간의 애석한 저의 평가는 대충 이 즈음에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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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현기증 - 소셜미디어 속에서 길을 잃은 현대인
앤드루 킨 지음, 진달용.전준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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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런 러니어, 니콜라스 카와 함께 네트워크 및 소셜미디어, 인터넷 미디어, 인터넷 생태계와 관련해 요즘 많이 인용되고 또한 여러 매체에 조언을 해오고 있는 앤드루 킨의 일종의 디스토피아적인 네트워크 시대를 진단한 이 책 ‘디지털 현기증’을 일독했습니다. 킨의 번역 출판은 이번이 두번째인데요. 2010년에 국내에 출간된 ‘인터넷 원숭이들의 세상-구글, 유튜브, 위키피디아’가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앤드루 킨은 네트워크와 소셜미디어를 통칭한 뉴미디어 시대와 관련하여 재런 러니어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느껴졌는데요. 이 점은 뒤에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킨의 간단한 약력은 영국 런던 대학과 미국의 버클리 대학을 거쳐 실리콘 벨리의 기업가로 또한 CNN을 비롯한 언론에 칼럼을 기고하고 현재는 TV쇼 킨온의 진행을 맡고 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Digital Vertigo’ 로 2012년에 출간된 것을 국내에는 지난 2016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앞서 잠깐 설명해 드린대로 저자인 앤드루 킨은 오늘날 소셜미디어 시대와 관련하여 비판적이고 비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자신의 입장을 위해 제러미 벤담과 파놉티콘, 조지 오웰의 1984 등을 자주 인용하고 있는데요. 특히 제러미 벤담과 관련해서는 약간의 희화화와 익히 알려지긴 했지만 그의 파놉티콘을 현대의 면밀한 감옥으로 재탄생시켜 해석해 자신의 논리를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데요. 물론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겁니다. 더불어 역자는 글의 초입에서 킨의 글이 충분히 공감이 가지만 논리의 과장도 분명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페이스북의 CEO인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기업인의 인터뷰 발언이나 기사 등을 곳곳에 인용하고 있는데요. 자신의 논증 과정을 인터뷰와 발언 등으로 보강하는 것은 충분히 공감은 되나 이것을 이를테면 네트워크 시대 전반적인 상황의 모습으로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무리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날 킨의 해석대로라면 이 소셜미디어로 비롯되는 뉴 미디어 시대를 ‘과잉가시성’이라는 용어로 규정하는 것인데요. 이것은 심각한 노출증과 빠르게 유입되고 빠르게 지나가면서도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집착을 결코 놓지 못하는 혹은 자제하지 못하는 모든 세태를 꼬집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21세기에 과연 소셜미디어가 국가를 대신해 개인의 정체성의 구원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적지 않을 것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개인의 행복과 관련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는 군중 속에서 홀로 분리되어 있는 인간의 외로움”이라고 저자는 그 상반된 면을 지적하면서도 “인간은 본디 홀로 있을 시간이 있어야만 한다”고 동시에 주장하는 것은 아이러니 하기도 합니다. 저는 인간의 행복이란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충분한 자기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소셜미디어와 수많은 웹들이 과연 그 연결성 만으로 우리의 나은 삶과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을지는 저역시 크게 회의적입니다. 거대한 나르시시즘적 창궐의 시대에 과연 진정성이라는 것이 존재할 지는 여러분도 인식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또한 이 점을 바탕으로 킨은 네트워크 시대의 지성, 네트워크 지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꽤 산만한 서술로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아주 간략한 이해는 “중동 사회에서 소셜미디어가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에 얼마나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인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물론 위의 과정을 면밀히 관찰하고 수집한 마누엘 카스텔과는 비교할바는 아닙니다만 분명 시대착오적인 독재자와 독재정권을 제거하는데 민중들의 역할과 이들을 광장에 모이게 한 수많은 휴대폰과 연결성을 너무 과소 평가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아마도 과잉가시성과 소셜미디어로 연결된 전지구의 수많은 사람들이 벌이는 나르시시즘에 저자는 치를 떨고 있는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위키피디아를 비롯한 ‘집단지성’이 우리의 민주주의에 어떠한 희망이 될지 기대하고 있는 많은 학자들을 도외시하는 경우라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양가적 측면이라고 도식적으로 말하기 보다는 분명 희망적인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페이스북과 트위터닷컴을 비롯한 소셜미디어 기업들이 수많은 회원들의 빅 데이터로 말미암아 막대한 기업 가치를 불리고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대중들의 현실 기피는 심각한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소셜미디어가 자발적 참여의 공간이 아니라 우리를 영속적인 가입자 신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주장이나, “우리가 소셜미디어의 상품이 되어가고 있는 형국”으로 보는 시각도 위의 인식과 동일선상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조로프의 법칙처럼, 소셜미디어가 민주화되지 않은 이란, 시리아, 중국과 같은 국가들에서 비밀 경찰들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주장은 소셜미디어의 극명한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는 것인데요. 반대로 미국의 CIA가 이제는 미행을 붙이거나 도청을 하지 않더라도 이 ‘나르시시즘 시대’에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올린 개인 정보들을 살짝 보기만 해도 위치정보를 비롯한 갖가지 정보를 취합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른 것은 또한 괴상할 정도로 획기적인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따라서 앤드루 킨의 결론은 이러한 소셜미디어의 이행화가 “고독하고 분열적인 개개인이 모인 군중시대”로 귀결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그와 같은 변형된 제러미 벤담의 ‘사회적 효율성과 중앙계획이 변조된 방식’을 비판하면서, 사회적 파편화에 대해서도 경고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고 있습니다. 몇가지 대안으로 존 스튜어트 밀의 점진적인 디지털 자유론을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크게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네트워크 시대의 문제 의식은 공감할 만하나 이를 위한 논증이 매우 산만하고 꽤 감정적이기까지 해서 개인적으로는 일독 후에 큰 아쉬움이 남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전문적인 연구를 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약간의 비관의 태도로 우리의 세태와 이용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은 충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우리 개인의 정체성이 완성되고 완벽하며 종결된 총체적인 모습으로 통합된 부분들의 조직적 결합이 아니라 사실 계속 움직이고 변화하며 불완전한 무엇보다도 최종 상태가 아니라 언제나 새로 시작하는 어떤 것이라 불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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