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1 밀리언셀러 클럽 51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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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 문단에서 흔들리지 않는 문학적 지위를 갖고 있는 스티븐 킹은 마찬가지로 많은 독자들에게 초자연 소설, 서스펜스, 범죄, SF, 판타지 등에서의 대가로 읽히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책은 총 3억 5천만 부가 판매되었는데 많은 작품이 TV 드라마와 영화 등으로 판권 매매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믿을 수 없는 성과는 2015년에 미국 국립예술기금으로부터 예술 훈장을 받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의 스티븐 킹을 있게 한 여러 작품들 가운데 1973년에 나온 그의 소설 '캐리'는 독보적인 작품으로 1976년 영화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에 의해 영화화 되기도 했는데요. 이런 이력과는 달리 그는 정치적 식견과 행동주의와 관련해서는 민주당 후보를 강력하게 지지한다거나 미국의 부유층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만 한다는 주장을 거의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몇몇 공화당 인사들에 대한 비판적 의견 개진과 현 정치 상황에 대해 자신의 비평을 가감 없이 밝히는 점은 소설가로서의 큰 인기를 감안한다면 공화당을 지지하는 계층에게 있어 어느 정도 거부감을 초래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사회학자나 철학자가 아닌 대중 소설가가 이러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출하는 점이 다른 지식인 계층과 비교해 봐도 특히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다른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다만 문학적 구조와 고정된 주제에 몰입하여 그 입장의 한계를 인정하는 여느 작가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서 해야만 하는 말들을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점은 어쩌면 미국의 민주주의가 우리와 확연히 차이나는 부분일 수도 있겠습니다. 따라서 지금 소개해 이 책은, 원제 "Cell"로 지난 200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동일한 해인 2006년 11월에 번역 출판 되기에 이릅니다. 다만, 현재 이 책은 국내에서 절판된 상황입니다.

개인적으로 킹의 이 소설을 읽게 된 중요한 이유는 지난 2016년에 영화화 되어 나온 존 쿠삭과 새뮤얼 L. 잭슨이 주연한 "셀 : 인류 최후의 날" 때문이었습니다. 영화가 썩 뇌리에 남을 만큼 인상 깊지는 않았지만 원작이 스티븐 킹의 작품인 걸 알게 되어 연말 기념으로 문득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는데요. 2006년에 나온 번역본은 현재 절판된 상황이었지만 아주 빠르게 '헌책방'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주문을 넣고 며칠 뒤에 배송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쯤에서 아주 강한 스포일러 일수도 있겠지만 킹의 이 작품은 소위 '폰 사이코'로 불리 우는 '전파 좀비'가 주된 소재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그 외 세 사람의 인상 깊은 모험극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주인공들 가운데 한 사람인 클레이와 톰이 초반에 서로를 인식하게 되고 이후 엘리스가 존재감을 드러내며 이들의 무리에 합류하게 됨으로써 기본적인 모험 서사의 틀이 잡히게 됩니다. 

우선 킹의 이 소설은 그동안 좀비와 관련된 여러 작품들을 숱하게 인용하면서 그가 창조해 낸 좀비와 그 외의 다른 좀비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전반적인 서사에서 이를 드러내고 있는데요. 물론 앞선 설정은 어떻게 보면 하루 아침에 미국 보스턴을 쑥대밭으로 만든 흐름의 한 구성으로서, 특히 좀비와 관련된 작가의 고유한 해석을 답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의 해석을 통해, 좀비 자체로서의 어떤 문학적 구조보다도 일전에 일독했던 가브리엘 타르드의 '군중'과 칼 구스타프 융의 '무의식에 지배된 군중'에 인식적으로 유사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권 후반부의 게이튼 아카데미에서의 다소 익숙해 보이는 좀비들의 꽤 심각한 반전은 전파의 전달과 더 나아가 그들끼리의 '텔레파시'라는 불명확한 시도 자체가 앞선 군중들을 불확실한 실체로 이끄는 '무의식의 전염성'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교장과 앨리스 또래의 조든이 발견한 '인간의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이성의 사고가 완전히 축출된 상황에서 좀비들의 '질서정연함'은 정말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여겨지는데요. 어떻게 보면 인간의 개성이라는 것이 아주 쉽게 말살될 수 있다는 점과 더불어 그것을 초래하는 요건 역시 아주 단순하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 이를테면 인간 사회의 폭력의 지배나 반지성주의의 팽배 같은 - 이 소설이 시사하는 바는 아주 명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도한 스포일러가 될 듯 싶어 내용을 전부 밝힐 수 없는 후반부의 복선도 이러한 해석을 좀 더 강화시킨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어떻게 보면 '실제에서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은 좀비'가 이처럼 붕괴된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괴로운 맥락을 갖고 있다는 점은 킹의 이 작품을 단순히 좀비 소설로 국한할 수 없는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제 의식에도 불구하고 소설이나 영화를 비롯한 여러 '좀비극'에서 보이던 케케묵은 설정들이 나타나기도 했는데요. 극중 미스터 리카르디가 보인 스스로의 안타까운 행동과 세상의 종말과 다름 없는 상황에서 '신이 내린 저주'를 읊으면서 극단적 회의주의에 몸을 맡기는 일부 종교인들의 모습은 이미 우리가 봐왔던 설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원전 자체에서 작가가 상당한 비속어를 문장에 넣었으리라는 추측과 함께 '어느 기독교인에 대한 지독한 경멸'은 과거 품위를 갖춘 버틀란드 러셀의 고백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역설적인 감정을 독자들에게 강요하게 하는데요. 아마도 종교의 타락을 우리가 실질적으로 가늠케 하는 것은 이러한 위기와 종말의 시대에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파국을 초래하는지, 이성으로 대략 추론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몇 년 간 큰 인기를 끌었던 워킹 데드의 주인공인 릭과 이 작품에서 좀 더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클레이는 앞서 언급한 복선으로 말미암아 다음 권에서 후반부 극의 변화를 독자로서 원치 않는 결말로 귀결될 것 같아 그 점이 우려스러운데요. 또한 과학 만능주의에 대한 극의 주제 의식이 어떤 식으로 문제를 만들어 낼지, 다음 권에서 여실히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스티븐 킹의 유독 자주 보이는 스토리의 '용두사미'가 이 작품에는 들어맞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 유독 이 소설의 원전을 살펴보고 싶은 욕구가 들게 만든 문장이 있었는데요.
  "기운을 내라. 앨리스, 오늘 공사가 다망한 날이었잖니."
  "공사가 다 망해요?"
  바로 클레이와 앨리스의 짦은 대화였습니다. 


"예, 맞습니다. 우린 가능한 빨리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법정이나 사문위원회에서 내가 그러게 말했다고 증언하셔도 전 그 사실을 부인할 겁니다."

전에 그런 여자들과 강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터득한 사실 하나가 그 나이까지 살아온 아줌마들은 거의 난공불락이라는 것이었다.

아들을 생각하려 할 때마다 클레이는 머릿속에 미친 쥐새끼를 풀어 둔 기분이었다. 그 쥐새끼는 당장이라도 허술한 우리를 부수고 나와 입에 닿는 건 닥치는 대로 갉아먹을 판이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신호 말이야. 과학 소설 같기는 하지만, 불과 15년이나 20년 전만 해도 대다수 사람들에게 휴대폰도 과학 소설 같았을 테니까."

"그래요. 우린 모두 누군가를 잃었어요. 대시련의 시기니까요. 모두 여기 [요한계시록]에 예언되어 있죠."

그들은 자기들만의 무리 속에서 자기들끼리만 속닥거리며 기계적으로 움직였고, 기껏해야 손전등을 휘두르거나 다른 손으로 여행 가방을 바꿔 드는 게 의미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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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12-18 0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사가 다 망하다. 다망하다. 정말 원전 찾아보고 싶어지게 하네요^^

베터라이프 2022-12-18 08:30   좋아요 1 | URL
어떻게 보면 우리식의 전형적인 말장난인데 역자가 왜 이런식으로 번역을 했는지 원서의 문장이 궁금할 정도였어요. ^^
 
포스트 트루스 - 가짜 뉴스와 탈진실의 시대
리 매킨타이어 지음, 김재경 옮김, 정준희 해제 / 두리반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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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매킨타이어는 근래 미국에서 주목 받는 철학자로 웨슬리언 대학에서 사회과학 학사를 그리고 미시건 대학에서 철학 석·박사를 취득합니다. 이후 그는 미국 보스턴 대학의 철학 및 과학사 센터의 연구원이자 일반인들을 위한 평생 교육원의 기능을 하는 하버드 익스텐션 스쿨의 윤리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킨타이어는 스스로를 철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과학을 훼손하려는 시도와 그러한 시도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과학자들에게 제공하고 있기도 한데요. 그런 측면에서 그는 여러 사회 철학 방법론을 담은 에세이들과 더불어 인간 행동 과학과 일반적인 순수 과학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 글도 출간하기에 이릅니다. 최근에 나온 그의 저서, '과학 거부자와 대화하는 방법'은 그의 이러한 관심사를 잘 드낸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ost-Truth"로 지난 201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매킨다이어의 이 글은 제목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오늘날 정치권을 비롯한 소셜미디어 등에서의 광범위한 탈진실 상황을 분석하고 이러한 사회병리적 현상의 원인을 규명하는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탈진실 즉, 사적일 뿐만 아니라 공적인 무대에서 거짓말을 무분별하게 일삼는 행태는 우리의 민주주의에 있어 커다란 위협임은 분명합니다. 이 같은 거짓말과 날조된 이야기들이 범람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있어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것인지는 많은 토론이 있어야만 할 듯 싶은데요. 다만 글 초입에 저자가 통찰로서 밝히는 '진실이 개인의 정치적 입장에 종속된다'는 문장은 오늘날의 세태를 아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봐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특히 최근에 우리 역시 앞선 탈진실의 상황을 직접 목도하기도 했는데요. 분명한 진실에 대해 정치인들이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세법, 사적 이익, 당파적 이득에 몰두한 점은 과거 트럼프 시대에서 창출한 '대안적 사실 Alternative Facts과 같은 탈진실이 잉태된 시작점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기본적으로 저자는 현재 전세계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탈진실의 원인에 있어 과학부인주의와 인지편향이 자리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뒤의 6장에서 강하게 주지하고 있듯, "과학은 '가치'가 아니라 '사실'에 몰두하는 학문"입니다. 특히 많은 인문학 전공자들에 의해 '과학적 사실'에 대한 비틀기와 왜곡이 과학 자체를 경멸하고 부인하는 흐름을 만들어냈는데요. 앞 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폐암에 있어 흡연의 관련성"과 '지구온난화에 대한 본질" 등은 자신들의 이권이 달려 있는 거대 기업과 그들과 유착된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에 의해 부정 되기에 이릅니다. 위의 두 가지 사례는 더 이상 입증될 필요도 없이 수많은 근거 자료들이 넘쳐 나고 있음에도 소수의 알량한 이익을 위해 진실이 마치 이데올로기적 정치 토론과 같은 접근법으로 오도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드러난 저자의 논증을 조금 확대 시켜 "기업들의 이익을 해치지 않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불사할 수 있다는 반사회적인 관념 체계가 무분별하게 기승을 부린다면 탈진실의 시대에 우리 정치는 파시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생각합니다.

저자는 인간 행동학의 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실과 거짓을 냉정하게 구별 짓기 어려울 수 있는 '인지 편향'과 가치적 확증 편향에 대해 여러 실제 실험 자료를 첨부하여 앞선 논지를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앞선 부분의 핵심 사항인 '의도적 합리화'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는데요. 우리가 믿고 싶은 사실이 진실을 인식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의도적 합리화는 인지부조화와 확증 편향과 함께 작용될 정도로 그것의 사례는 매우 광범위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일전에 리차드 J. 번스타인은 자신이 믿고 있었던 사실이 분석을 통해 거짓임이 밝혀졌을 때 인간은 그것을 마땅히 수정하고 바로잡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그것이 철학이 추구하는 건전한 방법론이면서 진실에 대해 수긍하고 인정하는 인간의 중요한 의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스타인의 마땅한 주장과는 달리 현재의 탈진실의 시대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과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적 당파의 권익을 위해 마땅히 사실을 맹렬히 거부하여 근거가 희박한 거짓말을 그것의 대체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꽤 노골적인 가치 조작이 자의든 타의든 일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개인의 정치적 의견이나 발언 그리고 그러한 의도들이 현대 정치에서 중요한 부분임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세대와 세대를 거쳐 우리 사회가 축적한 지식들이 소수의 정치적 편익과 셈법에 따라 비틀고 망가뜨리고 편의적 수용이라는 현란한 기술이 방조된다면 그것은 사회 계층의 최상위에 있는 힘과 돈을 가진 기득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시민들을 입맛대로 다루고 싶어하는 의도에 부합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도널드 트럼프를 향해 '인종차별과 여성 혐오, 반지성주의와 같은 정치인이라면 결코 겉으로 태연히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을 가급적 내색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취지로 언급한 바가 있는데요. 후쿠야마가 기본적인 정치인의 품위에 대해 말한 것인지는 불명확합니다만 어떤 누군가가 뼛속 깊은 KKK 일원이거나 혹은 민주주의를 극심하게 혐오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자신이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한다는 식의 가식이나 위선이 필요할 때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물론 후쿠야마의 저런 그럴듯한 논법에 제가 긍정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는 별개로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은 정치인들을 비롯한 공적인 무대에 얼굴을 내미는 인사들이 겉으로 나마 '일반적인 상식인의 기준을 견지한다'는 암묵적 룰과 같은 알량한 위선마저도 쓸모없게 만들기에 이릅니다. 사실상 트럼프가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한 '대안적 사실'과 같은 것들은 저자가 비판하는 대로 "진실과 거짓의 중간 지점도 역시 거짓"일 수밖에 없는 확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러한 특정 이데올로기적 주장과 반대편의 정치인들을 터무니 없는 '가짜 뉴스'로 공격하는 행태가 일부 언론들에 의해 '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 기존 언론들의 출처가 불명확한 가짜 뉴스의 보도와 여러 SNS에 범람하는 누군가를 향한 악의적인 왜곡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진 것이죠. 이에 매킨타이어는 언론들이 '진실 만을 보도한다는 일종의 직업적 윤리관'이 사주와 기자들의 사적 이익으로 치환되면서 이러한 흐름이 가속화 되어왔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떠한 지경에 처해있는지는 이미 모두가 목도하고 있다 생각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는 언급하는 대로 우리가 거짓과 가짜 뉴스에 왜 치열하게 저항해야만 하는지 이 글의 전체적인 논증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선 트럼프와 같이 '여성 혐오'와 '인종차별'이 누군가의 정치가 될 수 있다는 극단적 병리가 어쩌면 진실을 거부하는 탈진실과 과학부인주의와 같은 반지성주의에 확실히 근거하고 있다 여겨집니다.


끝으로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극단주의 정치의 새로운 시작은 전 유럽과 미국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느 사회든 상당한 정치 전반에 대한 불신과 먹고 사는 것이 나날이 힘들어지는 계층들이 극단주의와 극우 포퓰리즘을 지지하면서 우리가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여러 문제들의 책임을 이민자들과 여성들, 성소수자 및 더불어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에게 분노를 돌리고 있습니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분노의 정치가 초래하는 그 파멸적인 끝이 어떠했는지 이미 뼈저리게 체험한 바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경고를 인류에게 남기고자 그녀가 어떠한 노력들을 기울였는지 우리도 이미 대략적이나마 인지하고 있는데요. 이처럼 탈진실이 더욱 만연되어 가는 시대 자체가 저자의 경고대로 단순한 민주주의의 위기 뿐만 아니라 끔찍한 전체주의의 재래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를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특정한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는 행위 자체가 파시즘을 부를 수 있다는 점도 우리가 인식해야만 될 것 같습니다. 또한 범람하는 가짜 뉴스에 대해 변별력을 키울 수 있도록 현장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어느 교사의 가짜 뉴스 식별법을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리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1. 저작권을 확인하라
2. 여러 출처를 통해 확인하라
3. 출처의 신뢰성을 평가하라 (예컨대, 충분히 오래 인정받았는지 확인하라)
4. 정보의 게시 일자를 확인하라
5. 주제에 대한 지은이의 전문성을 평가하라
6.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일치하는가를 확인하라
7. 현실성 있는 내용인지 의심하라




- 이 글 마지막 부분에는 우리에게 여러 티비 프로그램들을 통해, 익히 알려져 있는 정준희 교수의 해제가 담겨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만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진실을 왜곡하는 정치꾼들은 그저 ‘개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중에 특정한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를 명확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타보 음베키 Thabo Mbeki는 항레트로바이러스제가 서구권 국가들이 꾸며낸 계략에 불과하며 에이즈를 치료하려면 마늘즙과 레몬즙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진실을 부정하는 정치인들이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는 세상이 만들어진 이상, 탈진실은 이미 어느 한 사람을 넘어서는 문제로 발전했다.

하지만 인지부조화의 특성 가운데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주위에 동일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을수록 인간의 ‘비합리적인‘ 경향이 더욱 강화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특정한 주제에 감정적으로 몰두한 경우 올바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영향을 받아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진보주의자나 보수주의자나 위협적이지 않은 거짓 진술에 대해서는 평가에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는 위협적인 거짓 진술을 훨씬 더 높은 확률로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셜미디어가 주목을 받으면서 이러한 정보 대혼란은 더욱 심각해졌다. 인터넷상에서는 사실과 의견이 뒤죽박죽 섞여서 나타나는데 무슨 정보를 믿어야 할 지 누가 알겠는가?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는 "탈진실은 파시즘의 전조 pre-fascism나 다름없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당시 일반적인 사회과학자들은 과학 이론이 실패한다면 그 이유는 과학자들의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념적인 편견이 개입해 충실히 증거에 고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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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2 23: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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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3 00: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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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3 00: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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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3 16: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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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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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여류 작가들과는 달리 크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김인숙 작가는 1963년 서울 은평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1983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많은 관심을 받은 바가 있는데요. 2011년부터는 중앙대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다, 2019년부터 동인문학상의 종신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지금까지 활동중입니다. 그녀는 소설가로서 총 15편의 장편소설과 8편의 소설집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비극에 간 소현세자의 짧은 삶을 소재로 한 역사 소설로 지난 2010년 3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제가 김인숙 작가의 작품을 접하게 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닌데요. 1993년에 출간된 '그래서 너를 안는다'에 이어 두 번째 일독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저는 안태진 감독이 연출한 영화 '올빼미'를 극장에서 보게 되었는데요. 영화에 등장한 소현세자 캐릭터의 불행한 서사에 관심이 생겨 그를 다룬 역사 논저나 소설들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김인숙 작가의 이 작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좀 더 빠르게 읽고 싶어 퇴근 길에 직장 근처 중고 서점에 들러 이 작품을 손에 쥘 수가 있었습니다. '폐모살제'의 죄를 물어 광해군을 폐위시킨 희대의 암군(暗君) 인조는 중종과는 달리 본인이 직접 반정에 가담하게 되는데요. 그런 인조에게 소현세자는 자신의 사가에서 낳은 자식이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에서도 왕이 아니라 능양군 시절의 인조가 자신의 큰아들인 소현세자와 둘째인 봉림대군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따뜻한 부성애가 넘치는 장면이기도 했는데요. 전반적으로 이 작품은 병자호란 이후 청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마찬가지로 종실(宗室)의 여식이기도 한 흔과 심석경 그리고 이들과 사뭇 대비되는 만석의 이야기를 버무려 시대의 아픔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이 작품에서 제가 마음 아팠던 부분은 조선의 많은 여자들이 거의 노예로 끌려가 수많은 청나라 병사들에게 겁간을 당하고 걔중에 양반이나 신분이 높은 여식들은 청나라 장군들이나 혹은 청나라 황제의 수청을 들었다는 개연성 높은 서사들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소현세자의 처인 민회빈 강씨가 노예로 잡혀온 조선인들을 구해서 다시 조선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노력한 것이기도 할 텐 데요. 불행하게도 이러한 노력들이 인조의 심기를 건드려 소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의 청군에 대한 항복과 더불어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례'의 치욕을 겪습니다. 소설에서 거듭 '적국'이라 지칭되는 청국의 침입은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무엇보다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해 무지했던 서인들의 정치적 패착과 광해군과는 달리 청국에 대한 경계를 기울이지 않은 인조의 방만한 행위가 이를 초래했다고 봐도 거의 무방해 보입니다. 과거 임진왜란 당시의 명이 군대를 보내 비참한 전란을 끝내는데 도움을 줬다는 소위 '재조지은'의 철지난 감상에 젖어 있던 조선 사대부들은 아무런 비판과 견제를 받지 않았던 '성리학적 명분론'에 몰빵해 나라를 절망에 빠뜨리게 됩니다. 조선의 군왕이었던 인조가 거의 오랑캐라고 취급하던 여진족에게 머리를 조아렸으니 가뜩이나 반정으로 쟁취한 옥좌이기 때문에 왕으로서의 권위와 정치력이 약했던 인조는 청나라에서 그곳 인사들이 갖는 조선에 대한 의구심과 불신을 불식시키기 위해 동분서주 노력하던 그런 자신의 큰아들이 대단히 마뜩잖았을 겁니다. 사실 소현세자의 존재 자체가 일종의 조선이 파견한 외교관으로서, 조선의 이익을 위해 홀로 경주한 것도 어느 정도 가늠이 됩니다. 소현세자는 직접 눈으로 청나라의 강대함을 몸소 봤을 테니, 계속해서 명나라만 부여잡고 실리를 등한시하는 인조 정권을 비롯한 조선의 행태에 위기를 느꼈을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김작가는 그러한 청나라를 같이 지켜본 소현세자와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각기 다른 감상을 소개하고 있기도 한 데요. 스스로도 너무나 경애(敬愛)한 자신의 형이 비참하게 죽고 형수와 조카들이 친부에 의해 도륙되고 나서도 왕이라는 자리를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혈육의 정을 얼마간 배제할 수밖에 없던 그의 고뇌도 어느 정도 짐작이 되기도 했습니다.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와는 달리 소현세자는 글 읽는 것도 좋아하고 여러모로 사려 깊은 인물로 그려지기도 하는데요. 저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세손 시절을 매사 조심하여 행동한 정조의 신중함을 소현세자가 견지했다면 그러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일전에 황현필 선생이 언급한 많은 역사가들이 '소현세자 독살설'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는 의견에 일견 관심이 가기도 합니다. 영화 '올빼미'에서는 인조가 이형익을 사주하는 장면과 이 작품에서 마찬가지로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이형익은 죄가 없다고 말한 부분이 뭔가 오버랩 되기도 했습니다. 이른 나이에 요절한 아들의 무덤에 인조가 한 번도 가지 않았다는 실록의 기록이나 민회빈 강씨에게는 누명을 씌워 사사시키고 손자들에게도 할애비로서는 할 수 없는 짓을 서슴치 않는데요. 종법(宗法)에 의하면 소현세자 사후 봉림대군이 아니라 그의 아들이 세손으로 이어받아야 했음에도 저렇게 무리하게 처리한 것을 보면 뭔가가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많은 역사가들이 추측하는 대로 소현세자가 진정한 '계몽 군주'의 모습을 드러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성리학적 명분론에 빠져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고 조선이 강대국인 청국 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하면 자강을 할 수 있을지 심양과 북경에서 소현세자가 끊임없이 고민했던 점은 그저 상상의 산물이 아님은 확실합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왕을 어찌 왕으로 대접할 수 있겠는가."라는 반문은 이 소설과 앞선 영화에서 그저 상상의 산물일 수도 있지만 그것의 신빙성을 아예 배제할 수 없었기에 소현세자의 그 같은 비참한 최후가 어떠한 역사적 기록도 없이 묻힐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당시 인조에게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를 절단 내고 손자들까지 처리해야 될 아주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어찌 성리학적 정체와 맞닿을 수 있을지 큰 의문이 드는군요. 더군다나 왕과 정치적 동반자라고 봐도 분명한 서인들이 자신들의 세자를 처리해 달라고 왕을 겁박할 일은 거의 만무하다고 봐야겠죠. 모르겠습니다. 전란의 책임과 오랑캐에게 명나라에게 했던 것처럼 사대할 수 없다는 조선 사대부들의 절박한 심정이 끝내 오랑캐와 가까워 보이는 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인지는 아마도 역사만이 알고 있겠죠.


세자가 적의 땅에서 무엇을 하느냐. 그가 누구를 만나느냐.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일일이 말로 되어 나오지 않는 임금의 불안이 오히려 대신들을 두렵게 만든다고 했다.

조선은 그들의 적의 축에도 끼지 못했으나, 성가신 후방임에는 틀림없었다. 뒤를 걱정하면서 앞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조선의 것으로 태어나 청의 역관이 된 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조선의 피는 깡그리 잊고, 청의 세도만 살아남은 자와 같은 자들이 관소에 와서는 더욱 그 세도를 뽐내었다.

"내가 적의 땅에 오래 있으면서 매일같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허면, 대감은 아시오? 숭정의 연호를 지우고, 또 지우고, 또 지우고, 그리고 간교한 자들처럼 입술에 침을 적셔 말하오. 숭덕의 세상에 숭정은 없사옵니다. 조선이 그것을 모르지 않사옵니다. 아니구려......이제는 순치구려. 숭덕의 세상에도 없던 숭정이 순치의 세상에 있을 수 있소?"

그들은 전쟁 중의 위급한 상황에서도 남송의 어린 왕에게 <대학>을 강연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재상 육수부의 예를 들기도 했는데, 세자가 매일같이 글을 읽으면 대신들은 남송의 육수부가 그랬던 것처럼, 적을 맞아 자신을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을 것인가.

명에는 황제에게 아첨하고 간교한 말을 올리는 자들만이 살아남은 게 아니라 황제보다 더 높이 있는 환관들에게 줄을 대는 자들만이 살아남았다고 했다.

상은 오래 아프셨다. 보위에 오른 후 반란과 전쟁이 끊이지를 않아 심화가 병의 근원이 되었을 것이다. 노여움은 불안이 되고, 불안은 몸속 깊은 곳의 농증이 되었다.

그러나 세자가 원손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그 작은 나라의 비루함이 아니었다. 비루함의 너머에 있는 것, 혹은 그 중심에 있는 것......그것이 바로 언젠가는 이루어져야만 할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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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2 01: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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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2 14: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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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2 23: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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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3 0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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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세계대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에마뉘엘 토드 지음, 김종완.김화영 옮김 / 피플사이언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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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토드는 프랑스 생제르망앙레 이블린 출신의 역사가, 인류학자, 인구학자, 사회학자로 자신의 전공 분야인 가족 구조와 인구학 뿐만 아니라 다수의 정치 에세이를 비롯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정치 체제 등의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파리1대학에서의 수학 후,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역사학과 관련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프랑스 르몽드의 문예부에서 일하다 다시 개인 연구를 지속하게 되는데요. 특히 1976년에 소련의 유아 사망률을 근거 소련의 붕괴를 예측한 것으로 인해 큰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유럽 통합과 관련된 유럽 연합 아이디어에 그는 상당히 비판적으로 알려져 있었는데요. 이에 1992년에 EU가 실질적 유럽 연합의 기초로 설정한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국민투표를 강하게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15년 1월에 있었던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학살된 샤를리 에브도 직원들과의 연대 행진에 대해 토드는 "이것은 프랑스의 자유주의적 가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내부의 인종차별적이고 반동적인 흐름을 대변하는 표현"이라고 비판을 가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토드는 유럽 통합주의에 반대하고 기존의 본질적인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인물로 읽혀지기도 합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第三次世界大戦はもう始まっている"로 2022년 7월 일본에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2년 11월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논저는 프랑스나 영국에서 먼저 출간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국내 출간본이 중역본이 아님을 먼저 인지하시고 글을 일독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자인 에마뉘엘 토드는 이 책을 통해 러시아에 대한 우크라이나 침공의 근본적인 원인을 다루고 '이것이 전세계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요. 아마 많은 분들이 이미 인지하고 계시겠지만 전쟁의 근본 원인은 우선 NATO에 책임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NATO가 미국의 영향력 안에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실체적으로는 미국의 책임이 있다고 봐야 할 텐 데요. 그렇다고 제가 국제정치적 선악론에 기대어 미국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인 에마뉘엘 토드 역시 전형적인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전쟁의 일어난 전후 과정을 상세히 살펴보는 것으로 이 책의 목적을 뒷받침 하고 있었는데요. 글 서두에서 저자는 국제정치에서의 현실주의자인 존 미어샤이머를 인용하여, 이 전쟁의 책임이 일정 부분 미국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NATO의 동진과 관련해, 1990년 2월, 당시 베이커 국무장관이 고르바초프에게 "NATO를 동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을 것을 보증한다"는 확약이 이후 발트3국의 가입을 비롯한 실제적 동진으로 쓸모 없는 휴지 조각이 된 바가 있습니다. 더욱이 이라크 전쟁을 이끈 조지 W. 부시 행정부를 쥐락펴락한 네오콘들이 근본적으로 반러시아주의자 내지는 러시아에 혐오를 보이는 인물들로서 미국 정치권이 러시아에 대해 어느 정도 편견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번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전쟁의 정당성이 거의 결여된 결정임은 분명합니다. 또한 순수하게 러시아의 안보가 정말로 외부로부터 크나큰 위협을 받는 상황이거나 러시아 국민들의 안전이 실질적으로 위협 받는 상황도 아니고 특히나 우크라이나의 NATO가입 문제는 외교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도 분명 존재함에도 이를 무시한 것은 푸틴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독일과 프랑스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와 더불어 NATO의 동진이 러시아의 안보에 어떻게 위협이 되는지 제대로 고심하지 않은 미국과 유럽 당국의 순진한 대처도 푸틴의 오판에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또한, 러시아와의 방어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행정부의 체제 모호성도 언급하면서 동시에 우크라이나인들을 인간 방패로 삼아 미국이 러시아와의 대리전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저자는 사실상 결론 짓고 있었습니다.

이미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자신들의 군사 위성을 제공함과 동시에 각종 무기들을 지원하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략을 봉쇄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는데요. 전쟁 발발 초기에 젤렌스키는 이 전쟁에 전유럽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것은 일찍이 무산된 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온전히 전쟁의 참화가 집중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약간의 논외이기도 하지만 1991년부터 2009년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인구 유출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저자인 토드는 언급하고 있는데요. 일례로 폴란드의 경우, 자국 내에 들어온 우크라이나인들이 이미 100만명을 넘겼을 정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젤렌스키가 자국의 국민들을 통합하여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충분히 긍정적인 일이나 그가 유럽에 행했던 정치적 술수, 즉 "우크라이나 다음에 러시아가 노리는 것은 당신들이다."와 같은 주장들을 고려해 본다면 저자가 우크라이나 정권에 갖는 의구심 또한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특히 토드는 젤렌스키가 실제 최고 통치자가 아니라 배후에 군부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보였는데요. 지금과 같은 전쟁 상황에서 실권은 군부가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 전쟁이 마무리 된 후에 과연 우크라이나 군부가 국내 정치에서 '평화적인 과거'로 돌아갈지는 어느 정도 의문입니다. 튀르키예의 에르도안의 일례를 생각해 본다면 전후 우크라이나 정국 자체가 혼돈에 빠질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많은 전세계 언론들은 작금의 전쟁을 소위 "자유 민주주의 대 전제 정치" 정도로 구도를 잡고 있는데요. 이는 우크라이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크게 어긋나지 않은 해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그들의 '자유 민주주의'가 허위에 불과하고 실질적으로는 "자유주의 과두제'라고 일컬어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는데요. 이는 미국이 금권정치 하에 의회와 행정부 모두가 정치적 자금이 기반이 된 로비 정치의 실상이 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충분히 이런 시각이 이해가 됩니다. 더욱이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전반이 어느 정도 기업의 지배 하에 놓여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면 마찬가지로 과두제의 단어도 쉽게 매칭이 될 텐 데요. 그래서 저자는 앞선 명칭은 "자유주의 과두제 대 권위주의 민주주의"로 마땅히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더욱이 이들 자유주의 과두제 국가들이 민족주의적 경향까지 숨기고 있지 않은 것을 고려해 볼 때, 이는 국제 정치를 쉽게 선악론에 기대어 설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브레진스키가 언급한 대로 이런 국제 정치 자체가 '회색 지대'와 다름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끝으로 저자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이후, 폴란드와 국경을 면한 우크라이나 서부에 상당한 수의 폴란드 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폴란드가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도 있다는 것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앞으로 폴란드의 행보가 자신의 가장 큰 관심이라는 것을 서두에 밝히면서 말이죠. 물론 폴란드가 '그런 정치적 무리수를 과연 감행할 수 있겠는가.'라는 회의감이 들기도 하지만 앞선 러시아의 크림 반도 점령을 살펴봤을 때, 무조건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취급할 수 없기도 합니다. 일전에 국민 국가의 탄생을 알린 베스트팔렌 조약 체제는 현재 다시금 민족주의적 망령을 되살리고 있는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의 대두로 인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이에 혹자들은 베스트팔렌 체제는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언급하기도 하는데요. 저는 유럽에서 다시금 민족주의적 폐쇄성이 정치 논리로 부상하여 사회 전반을 인질 삼으면 제3차 대전은 그리 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국제 정치의 파국은 일종의 도미노 현상처럼 사소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는 것처럼 저자가 우려하는 대로 3차 대전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무엇보다 잘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미국이 자꾸 러시아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행위는 중국의 더 큰 개입과 조력을 러시아로 향할 수 있기에 자국 내의 반러 감정과 러시아에 대한 이유 없는 혐오를 정치권이 좀 더 자제해 보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토드의 이 글을 통해 미국 내에서 러시아에 대한 혐오가 얼마나 큰 지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우려할 만한 상황이라고 여겨집니다.



-에마뉘엘 토드는 자신의 글에서 미국에 의한 대만 방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요. "항공모함 기술이 이미 쇠퇴하고 있는 시점에서 나는 미국이 대만을 지키지 않는다 혹은 지키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중국이 아직 대만에 대규모 병력을 상륙할 자원이 갖춰지지 못해 대만 침공을 주저하고 있지만 몇 년 뒤에 군사적 현대화가 마무리 된 이후에는 시진핑이 대만 침공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대만에서의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중 양국은 서로 엄청난 군사적 피해를 입히고 끝내 미국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예측되는데요. 토드와는 달리 저는 미국이 대만을 포기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미어샤이머가 내린 최초의 결론은 "지금 일어나는 전쟁의 책임은 푸틴이나 러시아가 아니고 미국과 NATO에 있다." 이다.

당시 소련 서기장 고르바초프에게 1990년 2월 9일 미국의 베이커 국무장관이 "NATO를 동쪽으로는 1인치도 확장하지 않을 것을 보증한다,"고 전당했다.

직후 푸틴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강력한 국제기구가 국경을 접하는 것은 자국의 안전 보장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판단된다."고 주장했다. 즉 이 시점에서 러시아는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경고하면서 "러시아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레드 라인"임을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우크라이나군은 미국과 영국의 지도와 훈련으로 재조직화되어 보병뿐 아니라 대전차포와 대공포까지 갖추었다. 특히 미국의 군사 위성 지원이 우크라이나군의 저항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1990년부터 1997년까지 미국인 고문의 도움을 받아 경제 자유화라는 난폭한 기획이 추진되었는데 러시아 경제와 국가를 파탄으로 이끌었다.

미국의 목적은 우크라이나를 NATO의 사실상 가입국으로 만들어 러시아가 미국에 대항할 수 없는 종속적인 지위로 내모는 것이었다.

즉 미국과 영국은 우크라이나인을 ‘인간 방패‘로 내세워 러시아와 싸우는 것이다. 현재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견고하게 연대한 듯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 배신에 대해 우크라이나인의 반미 감정이 고조될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미국은 지금까지 러시아와 체스 같은 게임을 계속해왔는데, 푸틴이 이렇게까지 결단을 내려 대규모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에 정면으로 맞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러시아의 도전을 받아 미국도 상당히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수많은 연설에서 반복해서 요구하는 내용은 분명하다. 유럽을 전선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러시아가 노리는 곳은 당신들의 나라다‘라며 유럽 여러 나라를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필사적이다.

정무차관 올리비아 뉼런드의 남편은 네오콘의 대표 논객인 로버트 케이건이다. 그는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고 ‘세계 민주주의의 향방은 모두 미군에 달려 있다‘는 망상을 가진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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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기 - 지그문트 바우만의 마지막 인터뷰
페터 하프너 지음, 김상준 옮김 / 마르코폴로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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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으로 20세기가 낳은 훌륭한 사회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대학 강단에서 뿐만 아니라, 상아탑 밖의 많은 이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지식인이었습니다. 스스로 유대인보다 폴란드인이라는 정체성을 먼저 인정했던 바우만은 그럼에도 1968년 폴란드의 정치적 위기 동안 시민권을 박탈 당하고 국외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는 영국에 거주하면서 런던 정경대에서 수학하고 이후 리즈 대학의 사회학 교수를 역임하게 됩니다. 1970년 이스라엘에서의 소위 시오니즘에 대해 회의를 느낀 바우만은 1990년대 후반부터는 근대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가이자, 동시에 경제적 이익에만 수렴한 세계화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비판을 가했는데요. 이렇게 그의 60여권이나 되는 논저들은 많은 이들에게 '정상적인 사회를 위한 목적 의식'에 큰 영감을 주고 있고 다국적 거대 기업들과 이들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는 근대 이후의 국가 체제에도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제가 비록 그저 곁다리로 바우만의 글을 접한 사람이지만 그를 통해 진정 '세계의 실체'에 대해 깨달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거창한 언변과 같은 '각성'이라는 단어는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바우만이 있었기에 제 인생이 변화되지 않았나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따라서 이 책은 독일어 원제, "Zigmunt Bauman : Das Vertraute unvertraut machen"으로 지난 201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2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일종의 대담집이라고 볼 수 있는 이 글은 스위스 출신의 기자로 알려져 있는 페터 하프너가 2014년 2월과 2016년 4월에 지그문트 바우만의 자택에서 그의 삶이라는 주제와 함께 자본주의와 기술 만능, 행복, 인간의 꿈, 사회의 정의와 같은 주제로 질의응답의 형식을 따와 출간된 것입니다. 2017년 1월 9일에 바우만이 세상을 떠난 것을 감안한다면 이 대담집 자체는 꽤 귀중하다고 여겨지는데요. 더욱이 이 글을 통해 바우만의 유고작이 된 '레트로토피아'의 집필 의도를 얼마간 이해할 수 있어서 그것대로 저에겐 의미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폴란드에서의 행적을 얼마간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었는데요. 이미 국내에 정식으로 바우만에 대한 전기가 출판되었지만 그럼에도 사별한 그의 부인인 야니나 레빈슨과의 첫만남과 두 사람의 결혼생활에 대한 내밀한 삶의 기록들과 더불어 노대가의 인간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어 지그문트 바우만을 존경하고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나름대로 일독의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우선 바우만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집중했던 주제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데요. 그는 '불평등의 문제'에 대한 대안과 해결책에 노년의 기력을 쏟아붓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에 대해 6장에서 자신이 불만과 불행속에서 죽을 것이라는 반쯤 농담과 함께 "납득할 만한 답을 찾기 위해 문제와 씨름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고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과거 '찬란한 근대'가 인간의 역사에서 번영의 기초를 쌓은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수세기에 걸쳐 정치 전반이 자본주의에 귀속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물론 대니 로드릭과 같이 정부가 자본주의와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는 인식을 포함해, 더 나아가 버틀런드 러셀처럼 정부가 자본을 결코 거스를 수 없다는 비판적 현실을 여기저기에서 드러내기도 했는데요. 이 같은 정부와 자본주의에 대한 이견에 있어서 바우만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불행하게도 그것은 사회의 실패로 귀결되었다."고 꽤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역사는 바우만의 평가대로 세계의 유력한 민주주의 국가들이 과거 히틀러의 나치즘에 가졌던 다소 온건한 태도와 그런 접근법이 증명한 바가 있는데요. 일전의 자크 파월과 제임스 Q. 위트먼과 같은 학자들도 지난 역사의 오점들을 꽤 차분하게 진술합니다. 사실상 파시즘을 초래한 망가진 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벤자민 카터의 논증대로 독일의 평범한 시민들이 그 시대를 나름 살만했다고 여기면서 끝내 왜곡된 권력에 저항하지 않은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여기서 슘페터의 회의적인 관점을 다시 반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민주주의 역시 이런 권력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이에 바우만은 6장에서 현재의 권력은 이미 세계화가 되었다고 단정하고 그의 이러한 발언의 맥락은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권력 자체가 이제 전지구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분석일 겁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급과 그 영향력이 이미 전세계의 주도적 권력이 되었고 이미 상당한 권력을 시장에 위임했다고 봐도 무방한 현재의 국가 체제가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현실에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는데요. 물론 겉으로는 너무나 태연하게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자본가들과 그의 추종자들이 현재로선 민주주의 자체에 반하는 소위 대항 세력과 같은 짓은 범하고 있지 않지만 무엇보다 이 세계는 아주 강고하게 사회 제도와 국가의 역할 등 러셀의 언급대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 배려와 관심이 철지난 논리로 치부되고, 오로지 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은 바우만이의 "저는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라는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개인적으로는 몹시 궁금한데요. 아마 일개 사회학자가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분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가 먼저 나서서 우리의 근대를 비판하고 자본주의가 초래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신자유주의자들과 맞서 싸운 것은 그도 역시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바우만의 말대로 "좋은 사회는 우리에게 아직 충분히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회"라는 역설적 의미를 곱씹어 본다면 '중세시대의 농노조차도 지주들에게 저항할 권리가 있었다.'는 바우만의 역사적 해석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텐 데요. 또한 히틀러의 박해를 피해 조국을 떠난 보통의 유대인이었던 바우만이 이스라엘의 전세계인들을 속이는 가짜 놀음의 본질을 간파하고 시오니즘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세상을 뒤집어 바꾸기 위해 그 처절한 '공장식의 살육 시스템'을 몸소 겪기도 했던 바우만은 그 시대의 많은 유럽인들이 중세의 종교적 사고에 매몰되 그저 현실에 체험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것에 급급했다는 진술로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남기고 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묵묵히 견딜 필요가 없는 시대라는 그의 평가는 많은 우리 시민들의 '야생성'을 상실한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할 일이 너무나 많고 우리의 민주주의 역시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롭게 출발해야만 하는 것이 세상을 떠난 바우만의 바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사회 전체에 소비가 제일이라는 인식을 주입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만약 인간이 자신을 성찰 하지 않고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는 것이 자명한 결과일 텐 데요. 반대편에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소비지상주의 시대에서 그만큼 인간은 자유롭다는 의미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소비의 화신이 되어 재화를 통해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그것이 일종의 선택의 자유와 같은 의미로 정리되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여기에 바우만은 "자유롭다는 것은 자신만의 바람과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동하는 근대의 소비지향적 생활방식은 이런 자유를 약속하지만 그런 약속을 지키지는 않죠."라고 그 본질을 추적합니다. 그동안 많은 정치학자들이 시민은 주권자이자 동시에 소비자, 혹은 시장의 참여자라고 정치경제학적 측면에서 이를 주입하기도 했는데요. 낮에는 사회학을 공부하고 밤에는 경제학을 연구할 수 없다는 이런 바우만의 비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물론 사회학에 대한 진정성을 간접적으로 피력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정치 특히, 민주주의에서 시장 논리를 분리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살만한 사회 혹은 정의로운 사회는 바우만이 슬프게 그려낸 '레트로토피아'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낱 가질 수 없는 꿈이 될지도 모릅니다.

끝으로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 시민이 자신의 삶을 통해 쟁취할 수 있는 행복의 본질은 어쩌면 난해한 의미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바우만이 논하는 대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도덕의 귀환이 필요한 것은 인간을 본래의 양심에서 비롯된 도덕 관념으로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불편하고 마뜩잖고 난감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도덕 자체가 '마음의 짐'이라는 그의 논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우리 스스로의 행복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고 앞선 민족주의의 문제와 페해를 해결할 어떤 대안을 다른 민족주의 자체에서 찾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바우만의 비판과 이기주의 자체에 어떠한 공동선을 기대할 수 없는 것 또한 이런 맥락에 기반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염려와 타인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정치의 삭막함과 민주주의의 쇠락을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우만은 강한 논조로 "설사 대안을 찾아낼 수 없다 하더라도 대안을 숙고하기 위해서는 비판적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글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이 이상 회의주의와 비관주의가 사회에 확고하게 뱀처럼 똬리를 튼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점을 이제 모두가 마음속에서 고민해 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바우만은 자신의 이 글에서 카를 슈미트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합니다. "역겨운 나치라는 수치스러운 이름으로부터 벗어나 오늘날 지적인 엘리트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진술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데요. 저 극우 포퓰리즘의 귀중한 아이디어를 제공 받은 출처가 무덤에 있는 카를 슈미트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세계의 매몰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스스로의 가치와 대체 불가능성을 깨달을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낍니다. 이런 상태에 이르기는 어렵고, 이기주의자는 이런 상태에 이르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며 고독에 침잠해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경험은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고 세계에 반응하는 방식에, 그리고 세계 속에서 걸어갈 길을 정하는 데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극도의 비인간성이 제 삶을 할퀴고 갔습니다. 난민이 되어 폭격으로 쑥대밭이 된 거리로 내몰렸고, 쳐들어오는 나치군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갔고, 망명의 비참함 속에서 기적처럼 목숨을 건졌으니까요.

민족주의에 대한 치료법을 또 다른 민족주의에서 찾으려는 건 터무니없고 소름 끼치는 생각입니다.

저는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세계가 더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제 필생의 작업이 이 세계를 전혀 이끌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카프카는 세상이 그 반대로 돌아간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죄가 없는 사람은 고발되지 않기 때문에, 고발되는 이는 반드시 죄가 있다는 거죠.

대부분의 국가에서 강력한 국가에 대한 요구가 커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사람들은 제한 없는 자유에 넌더리를 냅니다.

규제를 없애면, 사유화하면, 모든 것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넘기면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죠.

국가는 70년대에 인기를 잃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복지국가를 고쳐 쓸 수는 없었어요. 자원이 너무 적었거든요. 그리고 국가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그들의 자유를 빼앗아 가는 데에 사람들은 질렸고 아주 신물이 났습니다.

"생활 정치"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지웁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만큼의 자원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불만과 불행속에서 죽을 겁니다. 풀지 못한 문제가 있으니까요. 납득할 만한 답을 찾기 위해 문제와 씨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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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2 01: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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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2 15: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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