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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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여류 작가들과는 달리 크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김인숙 작가는 1963년 서울 은평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1983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많은 관심을 받은 바가 있는데요. 2011년부터는 중앙대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다, 2019년부터 동인문학상의 종신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지금까지 활동중입니다. 그녀는 소설가로서 총 15편의 장편소설과 8편의 소설집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비극에 간 소현세자의 짧은 삶을 소재로 한 역사 소설로 지난 2010년 3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제가 김인숙 작가의 작품을 접하게 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닌데요. 1993년에 출간된 '그래서 너를 안는다'에 이어 두 번째 일독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저는 안태진 감독이 연출한 영화 '올빼미'를 극장에서 보게 되었는데요. 영화에 등장한 소현세자 캐릭터의 불행한 서사에 관심이 생겨 그를 다룬 역사 논저나 소설들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김인숙 작가의 이 작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좀 더 빠르게 읽고 싶어 퇴근 길에 직장 근처 중고 서점에 들러 이 작품을 손에 쥘 수가 있었습니다. '폐모살제'의 죄를 물어 광해군을 폐위시킨 희대의 암군(暗君) 인조는 중종과는 달리 본인이 직접 반정에 가담하게 되는데요. 그런 인조에게 소현세자는 자신의 사가에서 낳은 자식이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에서도 왕이 아니라 능양군 시절의 인조가 자신의 큰아들인 소현세자와 둘째인 봉림대군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따뜻한 부성애가 넘치는 장면이기도 했는데요. 전반적으로 이 작품은 병자호란 이후 청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마찬가지로 종실(宗室)의 여식이기도 한 흔과 심석경 그리고 이들과 사뭇 대비되는 만석의 이야기를 버무려 시대의 아픔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이 작품에서 제가 마음 아팠던 부분은 조선의 많은 여자들이 거의 노예로 끌려가 수많은 청나라 병사들에게 겁간을 당하고 걔중에 양반이나 신분이 높은 여식들은 청나라 장군들이나 혹은 청나라 황제의 수청을 들었다는 개연성 높은 서사들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소현세자의 처인 민회빈 강씨가 노예로 잡혀온 조선인들을 구해서 다시 조선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노력한 것이기도 할 텐 데요. 불행하게도 이러한 노력들이 인조의 심기를 건드려 소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의 청군에 대한 항복과 더불어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례'의 치욕을 겪습니다. 소설에서 거듭 '적국'이라 지칭되는 청국의 침입은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무엇보다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해 무지했던 서인들의 정치적 패착과 광해군과는 달리 청국에 대한 경계를 기울이지 않은 인조의 방만한 행위가 이를 초래했다고 봐도 거의 무방해 보입니다. 과거 임진왜란 당시의 명이 군대를 보내 비참한 전란을 끝내는데 도움을 줬다는 소위 '재조지은'의 철지난 감상에 젖어 있던 조선 사대부들은 아무런 비판과 견제를 받지 않았던 '성리학적 명분론'에 몰빵해 나라를 절망에 빠뜨리게 됩니다. 조선의 군왕이었던 인조가 거의 오랑캐라고 취급하던 여진족에게 머리를 조아렸으니 가뜩이나 반정으로 쟁취한 옥좌이기 때문에 왕으로서의 권위와 정치력이 약했던 인조는 청나라에서 그곳 인사들이 갖는 조선에 대한 의구심과 불신을 불식시키기 위해 동분서주 노력하던 그런 자신의 큰아들이 대단히 마뜩잖았을 겁니다. 사실 소현세자의 존재 자체가 일종의 조선이 파견한 외교관으로서, 조선의 이익을 위해 홀로 경주한 것도 어느 정도 가늠이 됩니다. 소현세자는 직접 눈으로 청나라의 강대함을 몸소 봤을 테니, 계속해서 명나라만 부여잡고 실리를 등한시하는 인조 정권을 비롯한 조선의 행태에 위기를 느꼈을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김작가는 그러한 청나라를 같이 지켜본 소현세자와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각기 다른 감상을 소개하고 있기도 한 데요. 스스로도 너무나 경애(敬愛)한 자신의 형이 비참하게 죽고 형수와 조카들이 친부에 의해 도륙되고 나서도 왕이라는 자리를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혈육의 정을 얼마간 배제할 수밖에 없던 그의 고뇌도 어느 정도 짐작이 되기도 했습니다.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와는 달리 소현세자는 글 읽는 것도 좋아하고 여러모로 사려 깊은 인물로 그려지기도 하는데요. 저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세손 시절을 매사 조심하여 행동한 정조의 신중함을 소현세자가 견지했다면 그러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일전에 황현필 선생이 언급한 많은 역사가들이 '소현세자 독살설'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는 의견에 일견 관심이 가기도 합니다. 영화 '올빼미'에서는 인조가 이형익을 사주하는 장면과 이 작품에서 마찬가지로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이형익은 죄가 없다고 말한 부분이 뭔가 오버랩 되기도 했습니다. 이른 나이에 요절한 아들의 무덤에 인조가 한 번도 가지 않았다는 실록의 기록이나 민회빈 강씨에게는 누명을 씌워 사사시키고 손자들에게도 할애비로서는 할 수 없는 짓을 서슴치 않는데요. 종법(宗法)에 의하면 소현세자 사후 봉림대군이 아니라 그의 아들이 세손으로 이어받아야 했음에도 저렇게 무리하게 처리한 것을 보면 뭔가가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많은 역사가들이 추측하는 대로 소현세자가 진정한 '계몽 군주'의 모습을 드러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성리학적 명분론에 빠져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고 조선이 강대국인 청국 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하면 자강을 할 수 있을지 심양과 북경에서 소현세자가 끊임없이 고민했던 점은 그저 상상의 산물이 아님은 확실합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왕을 어찌 왕으로 대접할 수 있겠는가."라는 반문은 이 소설과 앞선 영화에서 그저 상상의 산물일 수도 있지만 그것의 신빙성을 아예 배제할 수 없었기에 소현세자의 그 같은 비참한 최후가 어떠한 역사적 기록도 없이 묻힐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당시 인조에게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를 절단 내고 손자들까지 처리해야 될 아주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어찌 성리학적 정체와 맞닿을 수 있을지 큰 의문이 드는군요. 더군다나 왕과 정치적 동반자라고 봐도 분명한 서인들이 자신들의 세자를 처리해 달라고 왕을 겁박할 일은 거의 만무하다고 봐야겠죠. 모르겠습니다. 전란의 책임과 오랑캐에게 명나라에게 했던 것처럼 사대할 수 없다는 조선 사대부들의 절박한 심정이 끝내 오랑캐와 가까워 보이는 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인지는 아마도 역사만이 알고 있겠죠.


세자가 적의 땅에서 무엇을 하느냐. 그가 누구를 만나느냐.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일일이 말로 되어 나오지 않는 임금의 불안이 오히려 대신들을 두렵게 만든다고 했다.

조선은 그들의 적의 축에도 끼지 못했으나, 성가신 후방임에는 틀림없었다. 뒤를 걱정하면서 앞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조선의 것으로 태어나 청의 역관이 된 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조선의 피는 깡그리 잊고, 청의 세도만 살아남은 자와 같은 자들이 관소에 와서는 더욱 그 세도를 뽐내었다.

"내가 적의 땅에 오래 있으면서 매일같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허면, 대감은 아시오? 숭정의 연호를 지우고, 또 지우고, 또 지우고, 그리고 간교한 자들처럼 입술에 침을 적셔 말하오. 숭덕의 세상에 숭정은 없사옵니다. 조선이 그것을 모르지 않사옵니다. 아니구려......이제는 순치구려. 숭덕의 세상에도 없던 숭정이 순치의 세상에 있을 수 있소?"

그들은 전쟁 중의 위급한 상황에서도 남송의 어린 왕에게 <대학>을 강연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재상 육수부의 예를 들기도 했는데, 세자가 매일같이 글을 읽으면 대신들은 남송의 육수부가 그랬던 것처럼, 적을 맞아 자신을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을 것인가.

명에는 황제에게 아첨하고 간교한 말을 올리는 자들만이 살아남은 게 아니라 황제보다 더 높이 있는 환관들에게 줄을 대는 자들만이 살아남았다고 했다.

상은 오래 아프셨다. 보위에 오른 후 반란과 전쟁이 끊이지를 않아 심화가 병의 근원이 되었을 것이다. 노여움은 불안이 되고, 불안은 몸속 깊은 곳의 농증이 되었다.

그러나 세자가 원손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그 작은 나라의 비루함이 아니었다. 비루함의 너머에 있는 것, 혹은 그 중심에 있는 것......그것이 바로 언젠가는 이루어져야만 할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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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2 01: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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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2 14: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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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2 23: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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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3 0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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