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기 - 지그문트 바우만의 마지막 인터뷰
페터 하프너 지음, 김상준 옮김 / 마르코폴로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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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으로 20세기가 낳은 훌륭한 사회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대학 강단에서 뿐만 아니라, 상아탑 밖의 많은 이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지식인이었습니다. 스스로 유대인보다 폴란드인이라는 정체성을 먼저 인정했던 바우만은 그럼에도 1968년 폴란드의 정치적 위기 동안 시민권을 박탈 당하고 국외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는 영국에 거주하면서 런던 정경대에서 수학하고 이후 리즈 대학의 사회학 교수를 역임하게 됩니다. 1970년 이스라엘에서의 소위 시오니즘에 대해 회의를 느낀 바우만은 1990년대 후반부터는 근대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가이자, 동시에 경제적 이익에만 수렴한 세계화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비판을 가했는데요. 이렇게 그의 60여권이나 되는 논저들은 많은 이들에게 '정상적인 사회를 위한 목적 의식'에 큰 영감을 주고 있고 다국적 거대 기업들과 이들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는 근대 이후의 국가 체제에도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제가 비록 그저 곁다리로 바우만의 글을 접한 사람이지만 그를 통해 진정 '세계의 실체'에 대해 깨달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거창한 언변과 같은 '각성'이라는 단어는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바우만이 있었기에 제 인생이 변화되지 않았나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따라서 이 책은 독일어 원제, "Zigmunt Bauman : Das Vertraute unvertraut machen"으로 지난 201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2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일종의 대담집이라고 볼 수 있는 이 글은 스위스 출신의 기자로 알려져 있는 페터 하프너가 2014년 2월과 2016년 4월에 지그문트 바우만의 자택에서 그의 삶이라는 주제와 함께 자본주의와 기술 만능, 행복, 인간의 꿈, 사회의 정의와 같은 주제로 질의응답의 형식을 따와 출간된 것입니다. 2017년 1월 9일에 바우만이 세상을 떠난 것을 감안한다면 이 대담집 자체는 꽤 귀중하다고 여겨지는데요. 더욱이 이 글을 통해 바우만의 유고작이 된 '레트로토피아'의 집필 의도를 얼마간 이해할 수 있어서 그것대로 저에겐 의미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폴란드에서의 행적을 얼마간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었는데요. 이미 국내에 정식으로 바우만에 대한 전기가 출판되었지만 그럼에도 사별한 그의 부인인 야니나 레빈슨과의 첫만남과 두 사람의 결혼생활에 대한 내밀한 삶의 기록들과 더불어 노대가의 인간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어 지그문트 바우만을 존경하고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나름대로 일독의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우선 바우만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집중했던 주제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데요. 그는 '불평등의 문제'에 대한 대안과 해결책에 노년의 기력을 쏟아붓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에 대해 6장에서 자신이 불만과 불행속에서 죽을 것이라는 반쯤 농담과 함께 "납득할 만한 답을 찾기 위해 문제와 씨름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고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과거 '찬란한 근대'가 인간의 역사에서 번영의 기초를 쌓은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수세기에 걸쳐 정치 전반이 자본주의에 귀속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물론 대니 로드릭과 같이 정부가 자본주의와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는 인식을 포함해, 더 나아가 버틀런드 러셀처럼 정부가 자본을 결코 거스를 수 없다는 비판적 현실을 여기저기에서 드러내기도 했는데요. 이 같은 정부와 자본주의에 대한 이견에 있어서 바우만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불행하게도 그것은 사회의 실패로 귀결되었다."고 꽤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역사는 바우만의 평가대로 세계의 유력한 민주주의 국가들이 과거 히틀러의 나치즘에 가졌던 다소 온건한 태도와 그런 접근법이 증명한 바가 있는데요. 일전의 자크 파월과 제임스 Q. 위트먼과 같은 학자들도 지난 역사의 오점들을 꽤 차분하게 진술합니다. 사실상 파시즘을 초래한 망가진 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벤자민 카터의 논증대로 독일의 평범한 시민들이 그 시대를 나름 살만했다고 여기면서 끝내 왜곡된 권력에 저항하지 않은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여기서 슘페터의 회의적인 관점을 다시 반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민주주의 역시 이런 권력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이에 바우만은 6장에서 현재의 권력은 이미 세계화가 되었다고 단정하고 그의 이러한 발언의 맥락은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권력 자체가 이제 전지구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분석일 겁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급과 그 영향력이 이미 전세계의 주도적 권력이 되었고 이미 상당한 권력을 시장에 위임했다고 봐도 무방한 현재의 국가 체제가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현실에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는데요. 물론 겉으로는 너무나 태연하게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자본가들과 그의 추종자들이 현재로선 민주주의 자체에 반하는 소위 대항 세력과 같은 짓은 범하고 있지 않지만 무엇보다 이 세계는 아주 강고하게 사회 제도와 국가의 역할 등 러셀의 언급대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 배려와 관심이 철지난 논리로 치부되고, 오로지 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은 바우만이의 "저는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라는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개인적으로는 몹시 궁금한데요. 아마 일개 사회학자가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분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가 먼저 나서서 우리의 근대를 비판하고 자본주의가 초래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신자유주의자들과 맞서 싸운 것은 그도 역시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바우만의 말대로 "좋은 사회는 우리에게 아직 충분히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회"라는 역설적 의미를 곱씹어 본다면 '중세시대의 농노조차도 지주들에게 저항할 권리가 있었다.'는 바우만의 역사적 해석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텐 데요. 또한 히틀러의 박해를 피해 조국을 떠난 보통의 유대인이었던 바우만이 이스라엘의 전세계인들을 속이는 가짜 놀음의 본질을 간파하고 시오니즘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세상을 뒤집어 바꾸기 위해 그 처절한 '공장식의 살육 시스템'을 몸소 겪기도 했던 바우만은 그 시대의 많은 유럽인들이 중세의 종교적 사고에 매몰되 그저 현실에 체험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것에 급급했다는 진술로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남기고 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묵묵히 견딜 필요가 없는 시대라는 그의 평가는 많은 우리 시민들의 '야생성'을 상실한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할 일이 너무나 많고 우리의 민주주의 역시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롭게 출발해야만 하는 것이 세상을 떠난 바우만의 바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사회 전체에 소비가 제일이라는 인식을 주입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만약 인간이 자신을 성찰 하지 않고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는 것이 자명한 결과일 텐 데요. 반대편에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소비지상주의 시대에서 그만큼 인간은 자유롭다는 의미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소비의 화신이 되어 재화를 통해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그것이 일종의 선택의 자유와 같은 의미로 정리되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여기에 바우만은 "자유롭다는 것은 자신만의 바람과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동하는 근대의 소비지향적 생활방식은 이런 자유를 약속하지만 그런 약속을 지키지는 않죠."라고 그 본질을 추적합니다. 그동안 많은 정치학자들이 시민은 주권자이자 동시에 소비자, 혹은 시장의 참여자라고 정치경제학적 측면에서 이를 주입하기도 했는데요. 낮에는 사회학을 공부하고 밤에는 경제학을 연구할 수 없다는 이런 바우만의 비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물론 사회학에 대한 진정성을 간접적으로 피력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정치 특히, 민주주의에서 시장 논리를 분리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살만한 사회 혹은 정의로운 사회는 바우만이 슬프게 그려낸 '레트로토피아'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낱 가질 수 없는 꿈이 될지도 모릅니다.

끝으로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 시민이 자신의 삶을 통해 쟁취할 수 있는 행복의 본질은 어쩌면 난해한 의미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바우만이 논하는 대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도덕의 귀환이 필요한 것은 인간을 본래의 양심에서 비롯된 도덕 관념으로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불편하고 마뜩잖고 난감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도덕 자체가 '마음의 짐'이라는 그의 논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우리 스스로의 행복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고 앞선 민족주의의 문제와 페해를 해결할 어떤 대안을 다른 민족주의 자체에서 찾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바우만의 비판과 이기주의 자체에 어떠한 공동선을 기대할 수 없는 것 또한 이런 맥락에 기반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염려와 타인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정치의 삭막함과 민주주의의 쇠락을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우만은 강한 논조로 "설사 대안을 찾아낼 수 없다 하더라도 대안을 숙고하기 위해서는 비판적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글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이 이상 회의주의와 비관주의가 사회에 확고하게 뱀처럼 똬리를 튼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점을 이제 모두가 마음속에서 고민해 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바우만은 자신의 이 글에서 카를 슈미트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합니다. "역겨운 나치라는 수치스러운 이름으로부터 벗어나 오늘날 지적인 엘리트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진술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데요. 저 극우 포퓰리즘의 귀중한 아이디어를 제공 받은 출처가 무덤에 있는 카를 슈미트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세계의 매몰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스스로의 가치와 대체 불가능성을 깨달을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낍니다. 이런 상태에 이르기는 어렵고, 이기주의자는 이런 상태에 이르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며 고독에 침잠해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경험은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고 세계에 반응하는 방식에, 그리고 세계 속에서 걸어갈 길을 정하는 데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극도의 비인간성이 제 삶을 할퀴고 갔습니다. 난민이 되어 폭격으로 쑥대밭이 된 거리로 내몰렸고, 쳐들어오는 나치군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갔고, 망명의 비참함 속에서 기적처럼 목숨을 건졌으니까요.

민족주의에 대한 치료법을 또 다른 민족주의에서 찾으려는 건 터무니없고 소름 끼치는 생각입니다.

저는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세계가 더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제 필생의 작업이 이 세계를 전혀 이끌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카프카는 세상이 그 반대로 돌아간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죄가 없는 사람은 고발되지 않기 때문에, 고발되는 이는 반드시 죄가 있다는 거죠.

대부분의 국가에서 강력한 국가에 대한 요구가 커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사람들은 제한 없는 자유에 넌더리를 냅니다.

규제를 없애면, 사유화하면, 모든 것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넘기면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죠.

국가는 70년대에 인기를 잃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복지국가를 고쳐 쓸 수는 없었어요. 자원이 너무 적었거든요. 그리고 국가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그들의 자유를 빼앗아 가는 데에 사람들은 질렸고 아주 신물이 났습니다.

"생활 정치"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지웁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만큼의 자원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불만과 불행속에서 죽을 겁니다. 풀지 못한 문제가 있으니까요. 납득할 만한 답을 찾기 위해 문제와 씨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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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2 01: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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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2 15: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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