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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지를 이용한 조선시대 지역지리의 복원 - 땅과 사람의 기록으로 보는 시대상
정치영 지음 / 푸른길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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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영(丁致榮) 교수의 ‘지리지를 이용한 조선시대 지역지리의 복원’은 조선시대의 주요 지리지들을 활용해 오늘의 참고점을 모색한 책이다. 오늘날의 지역성이나 지역 구조가 과거의 그것에 기초해 형성되었기에 과거의 지역지리학을 연구하는 것은 오늘의 지역을 고찰하고 미래의 지역을 예측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12 페이지)

 

조선 시대에 제작된 전국 지리지는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의 관찬(官撰) 지리서, 동국여지지, 대동지지 등의 사찬(私撰) 지리지 등이다. 세종실록지리지는 1424년 세종이 대제학 변계량에게 지지(地誌) 및 주, 부, 군, 현의 연혁을 편찬하여 올리라는 명을 내린 것에서 비롯된 책이다.

 

여지도서는 1757 - 1765년 사이에 각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邑誌)를 모아 책으로 묶은 것으로 조선 후기 들어 간행된 지 270년이 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고치고 그간 달라진 내용을 싣기 위해 1757년(영조 33년) 홍양한의 건의로 왕명에 따라 홍문관에서 간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자연을 인식하는 데에 이원적인 인식 체계를 보였다. 산을 중심으로 한 체계와 하천을 중심으로 한 체계다. 전자의 대표적 예가 산경표이고 후자의 대표적 예가 정약용의 대동수경이다. 세종실록지리지는 경기도의 대천(大川; 주요 하천)으로 한강과 임진강을 꼽았다. 한탄강은 임진강의 지류다.

 

산은 산(山)이나 봉(峰)으로 명칭이 나뉘었지만 하천은 매우 다양했다. 강(江), 천(川), 수(水), 포(浦), 탄(灘), 도(渡), 진(津) 등이다. 또한 산은 하나의 이름을 갖는 데 비해 하천은 지류뿐 아니라 본류의 경우에도 구역이나 장소마다 다른 명칭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는 온난습윤한 기후 조건과 함께 토양의 모재가 되는 암석 중 화성암인 화강암과 화편마암이 전 국토 면적의 2/3를 차지한다. 그래서 토양 종류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할 법하지만 지형이 복잡하여 토양 종류가 많은 편이다. 점토질 토양은 사질 토양보다 비옥하다. 오늘날은 토양 구조, 점성(粘性), 토양색 등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조선시대는 토양의 비옥도를 중요하게 여겼다.

 

제주도의 토성을 부조(浮燥)하다고 표현했다. 이는 가벼워서 건조하면 바람에 날리기 쉬운 화산회(火山灰) 토양의 물리적 특성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척박(瘠薄)한 땅으로 분류된 곳 가운데 삭녕, 연천, 마전 등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산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보았다. 절대 고도보다 주변보다 우뚝 솟아 있는 땅을 산으로 여긴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하천을 제사 장소로도 여겼다. 이런 신성한 하천을 규모와 무관하게 대천으로 여겼다. 조선시대에 읍치(邑治)는 수령에 의한 지방 지배 기능과 재지세력에 의한 자치 기능의 두 가지 역할을 담당하는 정치, 행정적 중심지였다. 연천의 읍치는 연천군 읍내리에 있다가 1910년 연천군 차탄리로 옮겨졌다. 연천읍의 읍치는 군자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동쪽으로 차탄천을 바라보며 남동향으로 열린 골짜기 안에 들어서 있었다.

 

일반적으로 관아(官衙)는 풍수적으로 가장 좋은 곳(명당)에 자리했다. 조선은 국가 지도 이념인 유학(儒學)을 온 백성에게 보급하기 의해 1읍 1교(1邑 1校) 원칙에 따라 전국의 모든 군현에 향교를 세웠다. 군현이 없어지면 향교도 없어졌고 군현이 생기면 향교도 생겼다.

 

1차 산업을 중심으로 한 마을을 촌락(村落)이라 하고 2. 3차 산업에 종사하는 인구 비율이 높은 마을을 도시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행정, 군사, 경제, 교육 등의 중심지 역할을 한 읍치가 도시에 가까웠고 나머지 대부분 지역은 촌락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산을 중요시한 것은 그만큼 산이 많기 때문이다.

 

촌락은 북쪽의 산과 언덕에 기대어 산과 평지가 만나는 완경사면에 남쪽을 바라보고 자리했다. 이는 장점이 많다. 북쪽의 산이 겨울철 차가운 바람을 막아준다. 햇볕이 잘 들어 따뜻하다. 지하 수면이 낮아서 물을 쉽게 얻을 수 있다. 하천 범람 위험을 피할 수 있다. 토목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은 큰 강변의 평야지대보다 골짜기나 분지가 벼농사에 유리했다.

 

우리나라는 괴촌(塊村)이 많았다. 괴촌이란 민가가 모여 불규칙한 덩어리 모양을 한 마을을 말한다. 대다수의 촌락은 집단 이주에 의해 단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한두 가구로 시작해 수백년에 걸쳐 만들어졌기에 계획적인 가옥 배치는 상상할 수 없었다. 대지가 한정되었고 더욱 명당은 제한적이기에 모여 살 수밖에 없었다. 집촌해야 하는 벼농사 중심의 체계도 한 몫 했다.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한 동족촌(同族村)이 많은 것도 주요 원인이었다.

 

토지에서 나는 소산(所産)을 토의(土宜)라 했다. 토공(土貢)은 공물을 말한다. 지리지마다, 지역마다 산물의 표기가 달랐다는 점이 특이하다. 여지도서에는 미역이 나는 군현으로 55개 지역이 기록되었다. 이는 세종실록지리지의 두 배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는 광물 자원이 다양할 뿐 아니라 일찍부터 이를 이용해 다양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해 왔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광물을 감정하고 탐사하는 방법이 고려시대에 비해 크게 발달하여 주요 광물인 철, 납, 아연, 금, 은 등의 광상(鑛床) 개발이 촉진되었다. 광상은 유용 광물의 집합체를 이르는 말이다.

 

모든 지리지가 토의(土宜), 광상(鑛床) 등에 관한 항목을 꼼꼼하게 기록한 것이 주목된다. 백성의 어려움이 컸으리라 보인다. 백토는 고령토라고 한다. 도자기를 만드는 흙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백토 산지가 한 곳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여지도서에는 더 많은 곳이 기록되었다.

 

경상도 진주목, 평안도 구성, 선천, 함경도 길주, 단천, 종성도호부 등이다. 송이버섯의 경우 29곳이 늘었다. 물론 세종실록지리지보다 여지도서에서 크게 준 항목도 있다. 옻나무(354 페이지), 닥나무(378 페이지) 등이다. 조선을 문적(文籍)의 나라라 한다. 그렇기에 이런 작업이 가능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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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파 한눈에 보기 - 신학, 성례, 교회 정치 체제를 중심으로
전희준 지음 / 이레서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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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다니던 시골 장로교회에서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 자기 교단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기 교회의 신자들이 느는 것에만 집중하는 교회였다는 점이다. 교파를 떠나 그리고 신앙적 인도를 위한 가르침을 잠시 에포케하고(내려놓고) 문화사적 또는 역사적 의미로 여러 신학을 자유롭게 가르쳐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다른 교단도 크게 다르지 않는 현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희준의 ‘기독교 교파 한눈에 보기’에서 비슷한 사연을 만났다. 장로교회에서 감리교에 가까운 신앙을 보이자 이단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한 신자의 사연이 소개된 것이다. 감리교를 이단이라 하다니,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그러니 당연히 저런 교회는 물건 팔 듯 설교를 할 것이 분명하다.

 

이런 말을 음미한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 교파를 제대로 알면 자신이 속한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고 더 건전하고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본문에는 장로교가 하나님의 주권을 더 강조하기에 인간의 책임을 더 강조하는 교파들을 공부하면 개혁주의 신학의 잘못된 적용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미국 감리교회의 경우 1800년대 중반 노예 문제로 북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로 분열되었다. 장로교는 하나의 교단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종교 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을 거부하고 개혁주의 신학을 받아들여 개혁에 동참한 이들이 세운 여러 교회가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장로교회의 체계가 형성, 발전했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는 1054년 공식 분열되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교류했지만 1054년 완전히 갈라섰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동방교회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과 파괴를 일삼은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1965년 1054년의 파문(서로 파문)이 철회되었다. 로마 가톨릭은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임신을 받아들인다. 동방정교회는 원죄 없는 임신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마리아에게 특별한 지위(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를 부여한다. 로마 가톨릭은 성경 해석의 권위가 교황에게, 동방정교회는 공의회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르시온은 열등한 구약의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사도신경이 생겨났다. 한 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음을 선언한 것이다.

 

영은 순수하고 거룩하지만 물질 세계는 더럽고 죄악에 물들었다고 믿는 이원론 신앙에 대처하기 위해 예수님의 성육신, 십자가 처형, 부활 등을 언급한 것이다. 기독교 공인 이후 모든 교회가 모여서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만들었다. 성자가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는 아리우스주의(성자는 피조물이라고 봄)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다. 동방정교회는 성령이 아버지에게서만 나온다고 믿고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은 아버지와 아들(필리오케)에게서도 나온다고 믿는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헤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6장 18절) 이 말씀과 관련해 다른 교파에서는 헬라어로 베드로는 남성 단수 명사이지만 반석은 여성 단수 명사이기 때문에 같이 취급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로마 가톨릭은 예수님이 실제로 사용하신 언어는 아람어였고 아람어에는 두 단어간의 성 구별이 없기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개신교는 첫 번째 해석을 더 강조하고 동방정교회는 두 번째 해석을 더 강조한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사이에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다. 원래 루터란이란 표현은 로마 가톨릭이 루터를 따르는 놈들이라는 조롱의 의미로 붙인 이름이었다. 장로교를 칼뱅주의 대신 개혁주의라 부른다. 개혁주의는 칼뱅이 큰 영향을 미쳤지만 다수 개혁가들의 공통된 사상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다수의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목사 임직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를 받아들인다는 선서를 한다. 중용의 신앙은 성공회의 주요 특징이다.

 

다양한 성향의 신앙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기준은 램버스 4개조다. 감리교회의 기원은 기도, 금식, 성경 공부, 선행 등의 방법들을 규칙적으로 실행하며 신앙생활을 한 옥스퍼드 대학교 학생들 모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홀리 클럽, 규칙주의자, 방법주의자(Methodist) 등으로 불렸는데 후자의 이름이 감리교회의 이름이 되었다. 이 클럽의 일원이었던 존 웨슬리는 1728년 영국 성굥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그는 미국 조지아로 선교하러 가다가 죽음의 위험을 겪으면서 자신에세 구원의 확신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의 회심을 올더스게이트 회심이라 한다. 거리의 신도회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웨슬리는 조지 화이트필드와 함께 당시 영국 교회에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노동자들을 위해 야외에서 설교했다. 수많은 사람이 회심한 가운데 웨슬리는 새 교회를 세울 마음이 전혀 없었으나 기존 교회와의 갈등이 계속되자 교단을 설립했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감리교 선교사는 일본 주재 선교사였던 로버트새뮤얼 맥클레이다. 맥클레이는 1884년 6월에 내한해 고종에게 학교, 병원 사업에 한하여 선교사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1885년 4월 아펜젤러 부부가 입국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감리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존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는 존이 교단 설립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찰스는 영국 국교회 교회 마당에 묻혔고 존은 감리교 예배당 옆에 묻혔다.

 

우리나라 성결교회는 19세기 성결운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자생 교단이다. 운동의 이론적 토대는 웨슬리의 완전 성화론이다. 우리나라 성결교회는 4중 복음을 강조한다. 중생(重生), 성결(聖潔), 신유(神癒), 재림(再臨) 등이다. 앞의 두 가지는 웨슬리 신학을 계승한 것이고 뒤의 두 가지는 19세기 성결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성결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으로 거듭난 후에 믿음으로 순간적으로 받는 것이라고 한다. 신유는 신자가 하나님의 보호로 항상 건강하게 지내는 것, 아플 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나음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성결교회는 병을 낫기 위하여 기도, 안수 하는 것을 당연한 특권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의약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오순절 교회 범주에 속하는 교회들은 결속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이들은 성령 세례에 대한 이해를 공유한다. 오순절 교회와 비교 대상이 있다면 바로 성결운동이다. 성결 운동은 성령 세례가 내적인 성결을 가져온다는 점을 강조한 반면 오순절 운동은 성령 세례의 1차적 증거는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순복음교회가 속한 하나님의 성회가 오순절 운동의 기치 아래 형성된 교단이다. 오순절은 부활절(復活節) 후 50일째 되는, 성령 강림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루터교회도 개혁주의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인간의 공로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가르친 중세 교회를 비판하면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섯 개의 ‘오직’을 따른다.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 등이다. 체코의 얀 후스, 이탈리아의 지롤라모 사보나톨라, 프랑스의 피터 발도, 영국의 존 위클리프 등을 종교 개혁 이전의 개혁가들이라 부른다.

 

웨슬리가 개혁주의와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이는 부분은 예정론을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개인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자유도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웨슬리를 따르는 교파로 감리교회 외에 성결교회, 오순절 교회, 구세군 등을 들 수 있다. 웨슬리주의를 이해하려면 네덜란드의 신학자이자 목사인 야코뷔스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에서 유래한 사상 체계인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살펴보아야 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과 각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선한 것에 대한 출발이자 지속이며 성취이지만 불가항력적인 것은 아니다.

 

루터교와 장로교회는 이 세상에서 완전한 성화(聖化)는 불가능하다고 믿는 반면 감리교회에서는 완전 성화를 믿는다. 물론 감리교회에서 믿는 완전 성화는 절대적 의미의 거룩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정도의 상대적 완전함을 의미하지만 장로교회나 루터교회와 크게 차이나는 지점이다. 네덜란드의 칼뱅파와 항변파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1618년 11월부터 1619년 네덜란드 도르트에서 교회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개혁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정죄하고 칼뱅주의 5대 교리로 알려진 도르트 신조를 발표했다.

 

당시 정죄된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오늘날 감리교 신학을 이루는 웨슬리안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다르다. 전자는 사람의 본성이 완전히 부패했다는 점을 부정하고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은 반면 후자는 사람의 완전한 타락을 인정하고 본성상 사람의 의지는 악을 행하는 일에만 자유롭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구원론의 관점에서 일반 침례교회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특수 침례교회는 개혁주의를 받아들였다. 각각 독립적으로 발전한 두 파는 웨슬리의 부흥 운동에 자극을 받아 결국 신학적 차이를 극복하고 1891년에 통합을 이루었다.

 

성례 즉 성만찬과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예식으로 내적이고 영적인 은혜의 외적이고 가시적인 표지를 의미한다. 모든 교파에서 성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며 성례가 주는 특별한 유익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성례의 구체적 내용에서는 견해가 다양하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는 표지 자체가 의미라 말한다. 즉 성례 자체로부터 은혜가 전달된다고 믿는다는 의미다. 침례교회에서는 외적 의식은 상징일 뿐이라고 믿는다.

 

구세군은 외적인 형태의 성례를 거부한다.(구세군을 창시한 윌리엄 부스는 감리교회 목사였기에 웨슬리의 성례관을 대체로 받아들였다.) 웨슬리가 감리교회의 종교 강령을 제정할 때 39개 신조 중 14개를 삭제했는데 성례 조항은 유지했다. 루터는 세례가 생명을 주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물은 절대 그런 일을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물과 함께 그리고 그 곁에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신자는 바로 그 일을 행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물 가운데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세례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몸 전체를 담그는 침수례(浸水禮), 물을 머리에 찍는 점수례(點水禮), 물을 머리에 뿌리는 살수례(撒水禮), 물을 머리에 붓는 주수례(注水禮) 또는 관수례(灌水禮) 등이다. 세례 의식에서 중요한 것은 죽음과 부활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결을 나타내는 것이다. 침례교회는 수세자(受洗者)가 물에 잠기는 의식 즉 침수례만을 인정한다. 침수례 때 물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완전히 잠기는 것은 장사지냄을, 물에서 나오는 것은 부활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초기 한국 성결 교회는 침수례를 강조했지만 현재는 침수례를 권유하기는 해도 수세 방법을 한정하지는 않는다. 침례교회에서는 모태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유아 세례도 거부한다. 어린 아이는 믿음을 스스로 고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결교회도 이런 입장을 따른다. 우리나라는 초기 교회의 경우 세례를 주기 전에 엄격하게 교육하고 철저히 점검했다. 세례 전에 대개 1에서 2년 동안 복음서, 기본 교리서, 교회 생활 안내서로 교육하는 학습 제도를 채택했다.

 

학습인은 책 내용을 암기하고 우상숭배, 귀신 숭배, 조상 제사를 버리고 주일을 지키며 바른 직업을 가지고 나쁜 습관을 버리고 믿음의 열매로 두 명 이상을 전도해야 하며 교리 질문에 바르게 답하고 직접 입으로 신앙을 고백해야 했다. 1907년 새문안 교회 당회록에 의하면 여섯 명 중 한 명만 문답을 통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교회는 몇 번의 교육만으로 세례 준비 과정을 마친다. 그리고 지식만 전달하고 삶을 점검하는 시스템은 거의 시행하지 않는다.

 

로마 가톨릭은 화체설을 주장한다. 성찬식을 집례하는 사제가 축성(祝聖; 거룩하게 구별하는 기도)할 때 떡과 포도주의 본질에 실제로 변화가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동방 정교회도 사제가 축성할 때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믿지만 인간의 지성으로는 변화의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고 믿는다. 루터의 성찬 이해는 공재설(共在說) 또는 공존설(共存說)이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제 떡과 포도주 안에, 그것들과 함께, 그리고 그것들 아래에 임재한다고 믿는다.

 

루터교에서는 실재설이라는 용어를 쓴다. 침례교회는 상징설을 유지한다. 떡과 포도주는 단지 상징일 뿐이라는 의미다. 상징설은 떡이 자신의 몸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떡이 내 몸을 의미한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1529년 10월 1일 독일과 스위스의 종교 개혁가들이 마르크부르크에서 모였다. 하지만 이들은 성찬의 의미를 놓고 심각한 이견을 보인 끝에 적대적 언사를 주고받고 말았다. 개혁교회 연합이 무산된 순간이다. 감리교회, 장로교회 등은 영적 임재설을 믿는다.

 

칼뱅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찬에 임재하지 않고 하늘에 임재할지라도 신자가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생명을 주는 감화를 그에게 전달한다고 생각했다. 교회 정치체제는 감독 정치(로마 가톨릭, 감리교회, 구세군, 성공회), 회중 정치(침례교회), 장로 정치(장로교회, 성결교회)로 나뉜다. 우리나라 감리교회에는 장로 직분이 있다. 감리교회에서는 원래 목회자를 부르는 호칭이었으나 1949년 교리와 장정을 개정해 평신도 직제로서 장로를 공식화하면서 우리나라 감리교회에만 장로 직분이 생기게 되었다. 장로교회에서는 목사를 가르치는 장로로 칭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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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우종학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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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적 차원이지만 최근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재점화되었다. 기독교인들과의 대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도 한 요인이 되었다. 그들과의 대화로부터 영감을 얻기도 했지만 아쉬움도 느꼈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내 지식 또는 과학으로 기독교를 분석하는 내 방식에 불편감을 드러냈다. 그들의 문제는 지식 특히 과학 지식이 많은 사람을 신앙심이 없는 부류로 치부한다는 점이다.

 

나는 그들로부터 믿음이 좋은 사람이란 말을 들으려면 가끔씩이라도 하나님, 아멘, 주님 등의 말을 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나는 자연이라는 책을 통해 신성한 존재를 느끼는 데 관심이 있다. 이런 내 지향성과 공명하는 책이 ‘지질학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같은 책이다. 어떤 내용이 펼쳐졌을지 큰 궁금증을 자아내는 책이다. 합리적인 부분이 있으면 수용할 생각이다.

 

각설하자면 성경과 자연을 하나님을 알려주는 두 가지 책으로 놓고 이야기를 펼친 책이 있다. 우종학 교수의 ‘과학시대의 도전과 하나님의 응답’이다. 저자가 전제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1) 성경과 자연, 이 두 책의 저자는 한 분 하나님이기 때문에 서로 모순될 수 없다.(32 페이지) 2) 과학은 자연이라는 무대에서 벌어진 현상을 읽은 내용인 동시에 다양한 데이터를 종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리고 과학의 다른 설명들과 모순되지 않는 하나의 인과적 설명 체계를 찾아가는 과정이다.(34 페이지)

 

3) 과학은 한계가 분명히 있지만 발전할수록 자연의 참 모습을 점점 더 정확하게 밝힐 것이다.(37 페이지) 4) 과학은 자연에 대한 영원한 근사(近似)이지만 그럼에도 창조의 역사에 대한 놀라운 비밀들을 드러내주는 유용한 도구다.(38 페이지) 저자는 과학이 자연을 100% 그대로 반영한다고 보는 나이브한 실재론이나 자연의 참모습과 상관 없는 주장일 뿐이라는 상대주의를 모두 비판하며 과학이 자연의 모습을 어느 정도 유용하게 드러낸다고 보는 비판적 실재론을 지지한다.(38 페이지)

 

본문에 기록된대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과학으로 우주의 창조를 설명하려는 노력 자체를 불편하게 느낀다.(77 페이지) 과학은 새로운 데이터나 이론, 발견 등의 출현으로 인해 바뀔 수 있는 가변적 학문이지만 그렇다고 마구 바뀌는 학문은 결코 아니다.(82 페이지) 이에 나는 경험이 인식 수준으로 상승하는 과정을 지배하는 규칙성이란 말을 덧붙이고 싶다.

 

과학은 경험적인 대상만을 다루기에 초자연적인 신 존재나 섭리 등을 본질적으로 다룰 수 없다.(83 페이지) 과학은 중립적인 반면 가치중립적이지는 않다. 과학이 중립적이라는 말은 자연세계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학문이기에 유신론이나 무신론에 대해 중립적이라는 의미이고 가치중립적이지는 않다는 말은 연구비가 어느 쪽으로 흘러가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가에 따라 방향이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나는 과학이 중립적이라는 말은 큰 틀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가치중립적이지는 않다는 말은 사회적 차원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는 진화론은 목적이 없지만 사회진화론은 인간(단체)의 의지가 투사되어 목적을 장착했다는 말을 연상하게 한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럼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성경은 창조의 방법에 관해서 과학적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다.(106 페이지) 지구를 중심으로 한 고대의 우주관은 성경의 배경이 되는 근동 지방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상식이었으며 동시에 고대 히브리인들이 가졌던 우주관이기도 했다.(109 페이지) 성경은 창조주를, 자연은 창조세계를 보여준다.(115 페이지)

 

저자는 성경과 과학을 합리적으로 조화시켜 보려는 노력을 일치론적 해석이라 칭한다. 일치론적 해석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경 본문을 여전히 과학 교과서처럼 읽음으로써 성경 본문의 기술과 과학의 내용을 조화시키기 위해 작위적인 가정들을 자꾸 만둘어내게 된다.(122 페이지) 비일치론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창세기 1장을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포괄적 서술로 해석한다.(124 페이지)

 

성경이 창세(創世) 사실을 비유적으로 즉 과학적 사실과 거리가 있는 방식으로 기술했다고 해서 창세 사실 자체가 없었던 일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마찬가지로 창조 기사를 비유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창조 기사를 허구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126 페이지) 설득력 있는 말이다. 저자는 과학은 기독교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고 말한다.(127 페이지) 중요한 사실은 과학이 다루는 내용에 관해서는 과학자들의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지만 철학적 해석에 관해서는 과학자들의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134 페이지)

 

저자는 과학주의 무신론의 공격에 대해서는 지성적 접근을 하라고 권한다. 자자는 그들의 주장에 귀기울이라는 말을 한다. 그들의 주장을 믿고 따르라는 말이 아니라 냉철히 살펴보고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과학주의 무신론자들이 어떤 점을 잘못 이해하는지 파악해 그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을 듣고 역사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광해군 이야기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폭군(暴君) 또는 혼군(昏君)으로 알려진 광해군이 재평가된 것은 일본인 이나바 이와키치로 인해서이다. 그는 광해군의 미덕을 새삼 일깨웠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전하며 일부에서 이나바 이와키치의 발언이 자신들의 대조선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기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광해군에 대한 충실한 해석은 수용하되 이나바 이와키치의 의도를 간파해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어려운가?란 것이다. 더욱이 일본인 학자가 주장했다고 해서 맞는 이야기임에도 폐기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설령 이나바 이와키치의 의도에 빠져든다고 해도 일제 강점기가 지나도 한참 지난 지금 어떻게 그 인식을 실천하겠는가?(역사 이야기 시간이 아니어서 이만 줄임)

 

저자가 천문학을 이야기한 부분이나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주장에 담긴 아포리아를 지적한 부분은 특별히 새로운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지의 사실이기에 상술하지 않는다. 짧게 언급하자면 인간을 포함해서 생물의 몸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탄소를 비롯한 다양한 원소들은 어디에서 만들어졌으며(140, 141 페이지) 핵융합 반응의 재료가 되는 수소나 헬륨 등은 어디서 기원했을까?(142, 143 페이지) 저자는 무(無)를, 공간은 존재하지만 질량이 없는 빈 공간으로 정의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양자역학에서 진공에서도 순간적으로 에너지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럼 공간은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묻는다.(147 페이지)

 

오늘날 과학이 밝히지 못한 내용이라고 해서 앞으로 몇 백년 뒤에도 밝힐 수 없다고 가정하는 것은 그리 지혜롭지 않지만 현대 과학이 물질의 기원을 엄밀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147 페이지) 저자는 신은 스스로 존재한다고 말하며(148 페이지) 도킨스의 주장(”신은 누가 만들었는가?“)에 담긴 허점을 지적한다. 도킨스의 주장대로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면 인간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는가?

 

물질이 진화 과정에서 인간을 만들어냈다면 그 물질은 누가 만들었는가?(149 페이지) 또한 자연법칙은 어떻게 기원했는가?(154 페이지) 저자는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했고 그래서 에너지와 물질이 존재한 것이라 말한다.(157 페이지) 또한 기독교의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한 뒤에 우주가 스스로 운행되도록 버리고 떠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주를 붙들고 다스리면서 자연법칙에 따라 우주가 운행되도록 섭리하고 있다고 말한다.(158 페이지)

 

과학만으로 기독교 신앙과 과학주의 무신론 중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줄 수 없다고 해도 과학을 넘어서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를 포함하여 전체 우주에 관한 질문들을 던져본다면 무신론의 설명보다 유신론의 설명이 훨씬 더 포괄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맑시스트 테리 이글턴은 도킨스와 히친스가 종교보다 더 큰 해악인 자본주의가 일으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놀랄 정도로 침묵한다고 신랄히 비판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이글턴의 지적은 내가 미처 하지 못한 생각임을 절감했다. 과학주의 무신론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에 대한 해석이다.(171 페이지) 저자는 자연현상이 과학으로 설명된다면 무신론이 되는가?라고 묻는다. 신은 필요 없게 되는가?란 질문이다. 저자는 기독교가 제시하는 초월적인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여전히 자연현상을 붙들고 섭리하고 계신다고 말한다.(178 페이지)

 

나는 자연법칙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저자는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 유로의 창조가 일어난 첫 창조의 시점에서 끝나지 않았고 긴 시간 계속되었음을 과학이 증언하고 있다고 말한다.(201 페이지) 아퀴나스도 이런 생각을 피력했다. 저자에 의하면 이런 계속적 창조는 범재신론이나 과정신학의 관점으로 볼 필요는 없다.(202 페이지) 존 폴킹혼은 자연법칙을 통해 섭리하시며 인과율에 따라 새로운 창조물들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 즉 계속적 창조는 하나님의 초월성보다 내재성이 강조된다고 이해한다.

 

폴킹혼은 무로부터의 창조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계속적 창조는 내재성을 드러낸다고 설명한다. 나는 지구가 1만년전에 창조되었고 인간과 공룡이 함께 존재했다고 보는 창조과학을 잘못이라 생각한다. 지구가 1만년전에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젊은 지구 창조론이라 한다. 많은 지성인들이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과학을 부정하는 창조과학 때문이다. 그들의 젊은 지구론을 수용하려면 지질학, 천문학, 대기과학, 생물학, 물리학 등 상당히 많은 과학을 포기해야 한다.(217 페이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위하여 고난받는 일을 기뻐해야 하지만 복음과는 상관 없이 자기 잘못으로 고난받는 것은 그저 안타까운 일이다.(219 페이지) 우리가 태양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조금 있다고 해서 태양이 핵융합 반응을 통해 엄청난 에너지를 낸다는 사실이 무너지지 않는다.(225 페이지) 창조과학회가 제시하는 지엽적인 반증들이 설령 과학적인 가치가 있다 해도 젊은 지구론을 지지해주지 않고 자연계에는 아직 설명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다양하고 놀라운 새로운 지식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아무 때나 반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 이론이 아직 확립되지 않아 결론을 찾아가는 과정이거나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새로운 대안이 요구될 때반증 사례를 제시해야 한다.(226 페이지) 이 책을 통해 흥미로운 개념을 많이 접한다. 오랜 지구 창조론이 그 중 하나다. 천문학이나 지질학의 결과는 수용하지만 생물진화는 부정하는 입장이다.(236 페이지)

 

기독교의 여러 창조론 가운데 ‘날 - 시대(day - age theory)’ 이론이 있다. 성경 창세기의 하루를 100만년이나 10억년처럼 오랜 기간으로 보되 창조의 순서는 성경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주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셋째 날에 태양이 창조되고 넷째 날에 태양이 창조된다는 창조 기사는 태양이 창조되기 이전에 식물이 창조되어 10억년 동안 생존해야 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오랜 지구론이나 젊은 지구론은 모두 생물 진화를 반대하는 반진화 운동의 창조과학 흐름 안에 있다.(257 페이지)

 

진화적 창조론은 과학 발전 과정과 성경 해석의 역사를 반영한다. 물론 이는 과학 발전에 따라 성경 해석이 달라지는 문제를 낳게 된다. 저자는 성경 자체와 나의 성경 해석 사이에는 간극이 있기 마련이고 나의 성경 해석도 계속 변한다고 말한다.(271 페이지) 상경 해석이 변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점이다. 성경이 원래 의미하는 메시지에 더 가까이 가는 것이고 이는 신앙의 성숙을 의미한다.(272 페이지)

 

저자는 구원의 길은 성경에서 찾고 창조의 역사는 자연을 통해 배우라고 조언한다.(281 페이지) 진화는 시간에 따른 변화를 의미한다.(287 페이지) 가령 별이 초신성으로 일생을 마감하는 과정을 진화라고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증언하는 동시에 자연법칙을 사용해서 섭리하고 창조할 능력이 있다고도 중언한다.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알려면 자연이라는 책을 읽어야 한다.(293 페이지) 하나님이 천사를 사용하지 않고 다양한 지질학적 방법을 사용해 바위를 창조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간절히 창조과학 신봉자들이 좋은 스승이나 균형 잡힌 책을 통해 창조주를 믿으면서도 과학을 수용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성경)는 인간의 언어로 주어졌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근원적 한계를 갖는다. 하나님의 계시는 무한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완벽하지 않다.(300 페이지) 우리는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른다.

 

진화라는 개념이 성경에 위배된다는 주장은 성경에 표현된 문자에 얽매어 하나님의 전능한 창조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다.(301 페이지) 과학에서 사용하는 우발성이라는 개념과 우리 일상 용어인 우발성이란 개념은 전혀 다르다. 과학에서 설명하는 우발성이란 다양한 실현 가능성 중 하나가 실현됨을 말한다. 과학은 그 현상 뒤에 어떤 목적이나 섭리가 있었는지 또는 없었는지 다루지 않는다. 진화는 과학적으로 우연한 현상으로 설명되지만 전능한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대로 진화를 통해 생물들을 창조할 수 있다.(302 페이지)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적인 설명을 진화론이라며 일방적으로 누명을 씌운다. 저자는 중요한 말을 한다. 과학이 자연이라는 실제에 대한 영원한 근사에 불과하듯 신학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영원한 근사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과학도 겸손해야 하고 신학도 겸손해야 한다. 교회는 젊은 지구론이 무너지면 복음이 무너진다는 생각에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

 

미세 조정된 우주(fine tuned universe)란 개념이 있다. 우리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서 100억년 이상의 우주 역사가 필요하고 1000억개나 되는 은하가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인간이 탄생하고 존재할 수 있는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주의 물리적 조건이 마치 누군가에 의해 미리 세밀하게 조절된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다. 이를 인류 원리라 한다. 여섯 가지 우주 상수 값들이 초기 우주에서 0.00000001%만 컸다면 수소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0.00000001%만 작았다면 탄소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는 ‘인간 없는 황량한 우주’가 되었을 것이다.(수소가 없다면 물도 만들어질 수 없다. 탄소가 없어도 생명은 생길 수 없다. 탄소 기반 생명체 외에 다른 생명체는 없다.) 다중우주론은 이런 미세한 조정을 우연으로 돌리는 것이다.(우주가 하나만이라면 그런 대단히 놀라운 조건을 갖추는 것이 이상하지만 우주가 아주 많다면 그렇게 많은 우주 가운데 하나에서 인류가 존재할 조건을 갖추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아직 모른다는 설명도 있다. 초월적 존재의 섭리로 설명하기도 한다. 은하 숫자들이 적었다면 우주 팽창이 더 빨라져 인류가 살 수 없는 우주가 되었을 것이다. 충격적(?)인 것은 이렇게 넓은 공간에 우리 밖에 없다면 엄청난 낭비라고 말하며 외계인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상정하는 것을 자주 보아왔지만 같은 현상을 통해 인류원리를 제시하는 것을 접하고 보니 신선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는 점이다. 나는 다중우주론을 (의미도 모르고) 좋아했지만 초월적 존재의 섭리라는 설명을 하는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정교하게 조율된 우주’ 같은 책에 관심이 간다.

 

코페르니쿠스의 원리라는 것이 있다. 평범성의 원리라고도 하는 이 원리는 지구는 특별하지 않다는 원리다. 지구가 속한 태양계가 우리 은하의 중심에서 25,000 광년 떨어진 변두리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 은하 역시 1000억개나 되는 수많은 은하 중 하나라는 사실도 그렇다. 이 원리는 생물학에까지 적용되었다. 인간은 침팬지나 오랑우탄 같은 영장류와 98% 정도 비슷하다. 우리는 어디에서 인간의 특별성을 찾아야 할까? 변두리 중의 변두리에서 먼지로 만들어진 존재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숨결이 불어넣어진 방법으로 신에 의해 창조된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예시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구성하는 다섯 요소 중 특별한 것이 이성이다. 기독교에 아니 창조 섭리와 구원에 관심이 있지만 아직 제도권 기독교인이 아닌 나는 저자의 결론과 다른 길을 제시하고 싶다. 이성과 감성, 그리고 기억의 연관성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저자를 통해 놀라운 우주의 비밀을 엿본 느낌이 든다. 지질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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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당신이 왜 우울한지 알고 있다 - 나의 알 수 없는 기분에 대한 가장 과학적인 처방전
야오나이린 지음, 정세경 옮김, 전홍진 감수 / 더퀘스트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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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권의 정신의학과 박사 야오나이린의 ‘뇌는 당신이 왜 우울한지 알고 있다’는 뇌와 나의 관계를 쉽게 설명한 친절한 책이다. 1부 뇌는 당신이 왜 우울한지 알고 있다, 2부 뇌가 지각하는 세상이 당신이 볼 수 있는 세상, 3부 뇌는 답을 알고 있다 등으로 이루어졌다.

 

우울증이 가장 먼저 나오고 제목에도 등장하는 것은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일 것이다. 전 세계에서 해마다 3억명이 우울증의 영향을 받고 그 중 80만명은 목숨을 끊는다. 우울증 발병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유전자다. 우울증은 기억력을 책임지는 해마의 신경세포 20퍼센트를 손상시킬 수 있다.

 

우울증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많다. 그 중 네 가지를 들어보자. 모노아민 가설, 염증가설, HPA축 변화 가설, 신경가소설 가설 등이다. 저자는 친절하게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불안도 같은 유형으로 다루어졌다. 저자는 전문가답게 사회불안장애 환자에게 관계 기술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덧붙여 대인관계의 불안을 대처한 버트런드 러셀의 예도 든다.

 

조증(燥症) 환자가 극도로 흥분된 시간을 보내며 에너지를 소모한 후 불쑥 극도로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져든다는 설명을 통해 우리 몸이 에너지와 관련이 깊으며 양극성정동장애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양극성정동장애 환자는 더 빨리 늙는다고 한다. 명상 등을 통해 감정을 잘 조율하고 다스리는 것이 필요함을 절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책은 가벼운 호기심을 유발하기도 한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은 뇌일까? 나일까?란 말이 그것이다. 트라우마에는 물론 우울증에도 적용될 수 있을 말이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방법이다. 유산소 운동을 해 해마 손상을 막는다. 명상을 한다. 스트레스도 해석 방법에 달렸음을 인식한다 등이다.

 

저자는 중독은 도파민이 만든 뇌의 욕망일 뿐 행복이 아니라고 말한다. 도파민은 행복 호르몬이 아니라는 뜻이다. 도파민은 당신이 뭔가를 원하게 한다. 또한 당신이 나서서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을 선택하게 한다. 연구에 따르면 하나의 행동이 무의식적인 습관이 되는 과정에서 뇌의 활동은 복측선조체(측좌핵)에서 점차 배측선조체로 옮겨간다. 이 습관이 고착될수록 뇌의 전전두엽이 그 행동을 통제할 능력이 약해진다.

 

저자는 많은 사람이 공부를 싫어하는 것은 공부할 때 도파민 분비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말한다. 원시적 생존과 직접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당신이 배움의 결과가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접하는 것 자체를 보상으로 여긴다면 좀 더 쉽게 공부에 중독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공부 중독은 좋은 중독이다. 난이도가 높지 않아야 하며 너무 큰 기대를 품지 말아야 하며 비교적 빨리 보상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을 선택한다면 나쁜 중독을 대체할 수 있다.

 

환각은 머릿속 탐정인 시각피질이 추리한 세상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추리하는 것이 시각피질이다. 조현병 환자는 한 가지 일에 오래 집중하지 못한다. 기억력도 떨어진다. 사고력도 부족하다. 그래서 한 가지 일이나 생각에 관해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두서 없이 말하기 십상이다. 심지어 하던 이야기를 잊기도 한다.

 

조현병의 유전 기여율은 85퍼센트에 이른다. 하지만 어떤 하나의 유전자나 몇 개의 유전자로는 그 발병 원리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저자는 최신 연구 성과도 소개한다. 가령 베타아밀로이드 단백질이 알츠하이머병을 일으키는 치명적인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알츠하이머병에 대항하는 데 도움을 주는 숨은 영웅이라는 반전의 결과가 그것이다.(201 페이지)

 

공기 오염이 알츠하이머 발병율을 높인다는 주장도 있다. 만성 당뇨병도 뇌의 위축을 가속화한다. 운동으로 뇌의 노화를 늦추어야 한다. 특히 유산소 운동이 좋다. 절식(節食)은 뇌의 노화를 늦춘다. 모든 형식의 배움은 대뇌의 노화에 맞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무기다. 적극적 대인관계도 중요하다.

 

흥미로운 것은 창의력(있는 사람)과 사이코패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점이다. 바로 도파민이다. 사이코패스와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의 공통점은 도파민 분비량이 많아 보통 사람보다 새로운 자극을 좋아하고 신기한 것과 보상을 추구한다. 또한 보통 사람들과 달리 모험이나 처벌을 그다지 꺼리지 않는다. 그들은 승률과 상관없이 모험심을 자극하는 일이어야 흥분한다.

 

저자는 어떤 심리적 특징도 환경을 벗어나 혼자 존재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평생 발달하는 뇌의 비밀은 연결에 있다고 말한다. 관건은 꾸준한 기능 훈련에 있다. 흥미롭게도 청소년기부터 성년기가 될 때까지 뇌의 부피는 오히려 감소한다.(239 페이지) 이는 뇌가 쓸모없는 시냅스를 계속 잘라내고 쓸모 있는 시냅스만 강화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뇌가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이다.

 

인간의 뇌는 30세가 되어야 안정을 찾는다. 뇌는 부피가 줄어들수록 안정되는 아이러니한 존재다. 브루스 후드의 ‘뇌는 작아지고 싶어 한다’에 의하면 지난 2만년 사이 인간의 뇌는 15퍼센트나 줄어들었다.(이 책은 진화에는 목적이 없다는 글로 포문을 연 인상적인 책이다.)

 

저자는 일생에서 뇌 가소성이 가장 활발한 아동기에 주입식이나 경쟁을 붙이는 공부는 아이에게 불안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킴을 지적한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은 뇌 신경세포의 유전자 발현과 뇌 신경망의 구축은 물론이고 아이의 열린 마음과 학습능력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

 

저자의 견해에 두루 공감하지만 특히 최상의 수면이 최상의 뇌를 만든다는 말에 가장 크게 공감한다. 잠은 몸과 마음을 수리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알려져 있다. 같은 말이겠지만 잠을 자면 뇌가 회로를 수정하는 능력을 강화해 정보를 빠르게 배우고 조합하는 능력이 향상된다는 말(253 페이지)에 관심이 간다.

 

잠은 단순히 발육을 위한 원시적 보조기능이나 환경 스트레스에 대한 방어 반응에 머물지 않고 뇌의 신경가소성을 향상시켜준다.(254 페이지) 사람의 뇌가 성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새로운 신경세포를 만들어내는 것을 신경을 재생한다 하고 이런 특성을 신경가소성이라 한다.(32 페이지)

 

잠을 자면 뇌의 독소를 배출할 수 있다. 자는 동안 일어나는 기억의 공고화는 단순히 하루 종일 겪은 일의 모든 구체적인 사항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많은 구체적인 사항을 전체적인 개념으로 정리하고 창의적으로 재구성한 후 이미 있는 신경 기억망으로 보내는 것을 말한다.(259 페이지) 잠 자는 시간은 감정 회복에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규칙적인 유산소 운동이 양질의 잠을 자게 하고 낮에 졸음을 덜 느끼게 하는 효과를 낸다. 심각한 우울증 환자는 해마의 신경세포 중 20퍼센트가 죽음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인지능력이 떨어진다. 기억력의 핵심은 신경가소성이다. 정보는 막 뇌에 들어왔을 때 일단 단기기억의 형식으로 해마에 저장되고 다시 몇 시간에서 며칠 안에 종류별로 부호화되어 대뇌피질의 장기기억 저장소(신피질)로 들어간다.

 

적정한 정도로 잘 잊어버리는 사람일수록 기억력과 학습능력이 뛰어나다. 뇌는 새로운 자극에 먼저 반응한다. 새로운 반응을 편애한다고 할 수 있다. 진화 과정에서 익숙한 일보다 돌발적 사건에 주목하는 것이 생존에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집중력의 필수 조건은 멍 때리기다. 뇌는 우리가 일이나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을 때도 뇌의 여러 영역에서 광범위한 활동이 일어난다. 이를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라 한다.

 

어떤 일에 흥미가 있을수록 그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이런 사실은 감정이 행동을 하도록 한다는 말을 기억하게 한다. 그런데 행동은 기억과 밀접하다. 감성을 담당하는 부분과 기억을 만드는 영역이 중첩되어 있다는 말도 예로 들 수 있다.

 

유산소 운동은 언제나 답이다. 한 번의 운동으로도 뇌 기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중강도의 운동은 뇌의 실행 기능에 도움을 주고 고강도의 운동은 뇌의 정보 처리에 도움을 준다. 명상은 집중력을 올려준다. 창의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신경세포 사이의 연결이 보통 사람보다 강하다.

 

가난은 뇌의 창의력을 떨어뜨린다. 전두엽이 아니라 소뇌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소뇌는 운동을 조절하고 자세와 균형 유지에 필요한 기관이다. 전문 영역과 관련 없는 지식이라 해도 가능한 한 많이 흡수해야 한다. 소재를 많이 가지고 있어야 어려운 문제와 맞닥뜨려도 자신의 창의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양질의 검증받은 과학 지식을 많이 가지라고 권하는 전문가(박문호 박사)의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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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권의 정신의학과 박사 야오나이린(姚乃琳)이 쓴 ‘뇌는 당신이 왜 우울한지 알고 있다’를 읽고 있다. 姚는 예쁠 요란 글자다. 琳은 옥(玉)을 뜻하는 림이란 글자다. 요(姚)가 예쁠 요란 글자이기 때문에 요조숙녀란 글자의 요자로 알 수 있지만 요조숙녀는 窈窕淑女라 쓴다.(姚는 예쁠 요자이기도 하고 경솔할 조자이기도 하다. 요와 조니 요조라 해도 될까?) 요조숙녀라는 말은 군자호구(君子好逑)란 말과 같이 쓰인다. 요조숙녀는 군자에게 딱 맞는 짝이라는 의미다. 逑는 짝을 의미하는 글자다.

 

요조숙녀 군자호구란 ‘시경(詩經)’에 수록된 글로 주(周)나라 문왕과 그의 아내 사씨(氏)의 결혼을 찬양한 것이라고 한다. 시경의 명성은 높다. 시경이 출처인 문구 가운데 유명한 것이 징비록(懲毖錄), 쇄미록(瑣尾錄) 등이다. 瑣는 자질구레할 쇄자다. 부스러지다, 가루 등의 뜻도 있다. 이 글자와 유사한 의미들을 가진 글자가 설(屑)이란 글자다. 화산쇄설암의 설자다. 정신의학과 박사의 이름으로부터 화산쇄설암이란 말까지 온 이 글쓰기는 너무 요동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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