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불편한 책에 대해 한 마디 하고 싶다. 내용 이야기가 아니라 편집 이야기다. 최근 읽은 두 권의 역사책이 모두 중요한 부분을 흰 바탕에 검은 글씨가 아닌 푸른색이나 짙은 녹색 바탕에 흰 글씨로 처리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읽기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정작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읽기 불편하니 아쉽다. 그런가 하면 어떤 책은 판형은 작은데 무리하게 볼륨감을 키우려고 뻣뻣한 종이를 써 손을 아프게 하기도 한다. 미끄러워서 잡기 불편한 책도 있다.

 

책읽기도 노동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눈, 손, 머리 등등에 무리가 가는 노동. 논란의 여지도 있는 이야기도 하고 싶다. 요즘 벽돌책이 많이 나온다. 필요해서 두꺼운 책이 있는가 하면 핵심을 선별하지 못하는 요령부득의 장황함 때문에 책이 두꺼워지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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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문주의자의 경전읽기
일지 지음 / 어의운하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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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의 저자인 일지(一指) 스님의 ‘불교인문주의자의 경전 읽기’는 저자 사후 나온 책이다. 2000년부터 2년간 월간 ‘불광’에 연재한 글을 묶은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출간(2019년 1월) 직후에 샀으나 2년이 지나도록 완독하지 못한 책이다.

 

“부처님은 스스로 인간임을 선언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궁극의 화두인 붓다’라는 글에서 스님은 “불교도들에게 있어 신앙의 의미는 단순한 믿음만이 아니라 지혜의 증장(增長)에 필요한 덕목이며 마음의 청정을 증득(證得)하는 기본 전제.“라는 중요한 말씀을 전했다.

 

스님은 ‘대지도론’의 가르침을 전하며 불교는 신앙이라기보다 신심, ‘신해; 信解‘라는 표현을 더욱 자주 쓴다고 말한다.(51 페이지) 절대화된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보다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에 대한 믿음, 부처님의 중생 구원력에 대한 믿음, 인간은 바른 행위에 의해서만이 고통에서 해탈한다는 믿음, 윤회와 업에 관한 윤리적 행위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스님은 수신(修身)을 강조한다. ”수신이 전제되지 않은 문화란 거품이다.”...수신이라 하니 유흥(遊興)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이 전제는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배워야 하는 존재“(‘티벳 사자의 서’의 메시지)라는 말과 상응한다. 스님은 무명(無明)이 탐욕과 증오를 야기시킨다고 말한다.

 

무명이란 환상과 자기기만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교는 인간을 부처가 될 수 있는 존재로 긍정한다. 물론 불교는 인간의 어두운 이면을 너무 깊이 가르치는 종교이기도 하다. 인간 찬미의 극점에 선(禪)과 화엄(華嚴)이 자리한다.

 

불교 수행을 위해 우리는 어떤 것을 갖추어야 할까? 건강한 몸과 마음이다. 이에 대해 스님은 그것은 육신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자비와 지혜의 가르침을 닦고 깨닫고 실천해 나가기 위한 최초의 전제라고 가르친다.(63 페이지) 스님에 의하면 수행자는 사려 깊고 건강하며 자비로워야 한다.(67 페이지)

 

스님은 경전을 읽지 않는 행태를 비판한다. ”마음만 깨달으면 되지 경전에는 별것이 없다는 오만은 그 자신의 비극이기도 하지만 불교의 비극”이다.(69 페이지) 스님은 경전을 읽지 않고 불교도로 지내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만 얻으려는 행위라 말한다.

 

스님은 깨달음 또는 선(禪)보다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을 강조한다. 스님은 경전 연구든 마음의 깨달음이든 자신의 실존이 없이 모방으로 그친다면 그 웅장한 대장경도 번뇌의 백과사전일 뿐이라 말한다. 스님은 난해한 가르침을 고집하기보다 불교의 가장 기초가 되는 연기(緣起)부터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님은 연기를 상의상관성의 개념으로만 이해하면 실재론적 무한 소급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95 페이지) 그래서 스님은 ‘중론(中論)’을 인용해 존재의 법칙은 연기이며 연기의 본질은 공(空)이며 중도(中道)라고 가르친다. 스님은 해탈이란 신비한 것도 아니고 집중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 상태와 욕구에 대해 사색하고 탐진치로 오염되어 있는 불순한 에너지와 거품을 걷어내면 얻을 수 있는 것이라 가르친다.

 

임제선사는 해탈이란 물혹(物惑)과 인혹(人惑)의 속임수를 넘어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라 말했다.(103 페이지) 스님에 의하면 탐욕에서의 해탈인 마음의 해탈과 무지에서의 해탈인 지혜(로)의 해탈이라는 두 가지 해탈이 필요하다.(105 페이지) 스님은 해탈의 사회화를 주장한다. 서재나 강의실에서 고담준론으로 해탈을 논할 것이 아니라 남의 눈물을 닦아 주는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불교적 해탈의 사회화를 실천하는 것이다.(107 페이지)

 

스님은 무아의 길이야말로 해탈의 길이라 말한다. 스님은 무아와 자아는 모순관계가 아니라 말한다. 불교가 부정하는 자아는 소유형의 자아, 아집, 아만, 아견, 아상에 뿌리를 둔 오염된 자아다. 확립해야 할 자아는 안목과 지혜를 열어주고 해탈과 자비로 인도하는 자아다.(113 페이지)

 

우리는 나, 나의 영혼, 마음과 같은 단어를 떠올리거나 사용할 때마다 그 단어에 합당한 인간 존재의 본질, 영속적인 실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아뢰야식 차원의 환상에 빠지기 쉽다.(115 페이지) 스님은 무량수경이 전하는 다섯 가지 대악(大惡)을 말한다.

 

1대악은 살생의 악업이다. 2대악은 도심(盜心)을 품은 사악한 마음이다. 3대악은 항상 사악한 마음에 따라 애욕으로 교란하는 마음이다. 4대악은 탐진치 3독(毒)으로 짓는 구업(口業)이다. 5대악은 술에 탐닉하고 미식(美食)을 좇으며 가족과 스승, 이웃을 돌보지 않는 것이다.

 

스님에 의하면 우리는 업과 번뇌, 무명에 현혹되어 불건강한 탐욕과 분노의 노예가 된 채 막대한 규모의 심리적, 물질적 자원을 과도하게 소모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고통받는 것이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탐욕과 투쟁이 가속된다.(129 페이지)

 

스님에 의하면 유심(唯心)은 마음의 자기생성력과 자기회복력을 강조하는 불교사상의 기본 입장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은폐하고 싶어하는 삶의 허상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허상과 위선에 오염된 자아를 초극하려는 치열한 세계관을 보여준다.(137 페이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초극하려는’이란 말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이 있거니와 이는 마음이 출발점이 된다는 의미다. 마음으로 초극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초극하려는 마음을 내는 것 즉 발심(發心)하는 것이다. 스님은 발심한 사람을 보살이라 정의한다.(스님은 여성 불자들을 보살이라 하지만 이 명칭은 아무에게나 붙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세간적인 것에만 집착하고 있던 자기 존재를 마음의 깨달음, 불도의 실천으로 돌리는 것이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다.(143 페이지) ‘대방광불보은경(大方廣佛報恩經)에 의하면 부처님도 한때 지옥 중생이었으나 보리심을 발함으로써 지옥에서 벗어났다.(144, 145 페이지)

 

스님은 더욱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욕(忍辱) 즉 참고 용서하는 수행을 쌓아야 한다고 가르친다.(151 페이지) 스님은 인욕의 원어인 크샨티는 참는 것이지만 더 깊게는 용서하는 것이라 말한다.(사실 참는 것보다 용서하는 것이 더 적극적인 만큼 중요하다.)

 

스님은 우리는 지금 이 엄청난 속도의 해체, 변화를 견딜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의 재구축을 위해 불교가 설하는 제법실상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161 페이지)

 

스님은 “나날이 마음 쓰기를 풍요롭게 하면/ 도를 이루는 데는 돈이 필요하지 않다/ 보리는 다만 마음으로 찾아야 하거니/ 어찌하여 밖에서 찾아 헤매는가”란 ’육조단경‘의 구절을 소개하며 이 구절을 이른 봄의 황사를 뚫고 달리는 남원행 버스 속에서 읽었다고 말한다.

 

“실상사로 걸음을 옮기던 그날, 실상사는 운봉분지(雲峰盆地)의 낯선 풍경과 정적을 흔들고 지나가는 거센 바람 속에 조용히 서 있었다. 지리산의 웅장한 산자락이 연꽃잎이 되어 둘러싸고 있는 운봉분지의 바람 속에 서 있는 이 옛 선문은 이제 더 원할 것도, 회한도 없이 모든 허장성세를 떨어내어 버린 늙은 비구의 모습처럼 그렇게 쓸쓸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국도를 버리고 실상사로 이어진 운봉분지의 옛 길을 찾아 걸으며 이 선문에 은둔해 버린 옛 선승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한여름의 뜨거운 볕에 그을리면서, 겨울의 찬 눈보라 속을 헤치며, 가을의 깊은 우수에 젖어서 이 길을 묵묵히 걸었으리라.

 

그리고 한밤의 실상사 뜨락을 거닐면서 검푸른 별의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의 붓다를 응시하던 그들에게 그 밖의 다른 인생은 아예 없었으리라. 실상사가 서 있는 풍경은 그렇게 고독했다.

 

누구든 좋다. 실상사의 깊은 고독만큼이나 삶의 허망한 가지를 다 쳐 내버린 뒤 선(禪)의 길, 그 밖의 다른 인생은 아예 없는 선승의 자유를 누리고 싶거든 실상사를 향해서 홀로 떠나가기 바란다. 그는 곧 운봉분지의 거센 바람 속에 속기(俗氣)에 찌든 자신을 바라보며 한없이 망설이고 슬퍼하게 될 것이다.”(169 페이지)

 

보살에 대해 금강경에서는 무엇이라 말했는가? 만약 보살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다고 하면 곧 보살이 아니라 말했다. 육조 혜능으로 하여금 선문에 발을 내딛게 한 경전이 금강경이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사용하라)는 의미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 그 구절이다.

 

스님은 현대인들은 자기 일에 대한 전문성, 도덕성, 자기 관리 등에 있어서 철저하다는 의미에서 초기불교의 아라한과 같은 존재이지만 자신의 이익 문제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모순점이 있기에 그 점을 극복하려면 여섯 가지의 바라밀을 행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보시(普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를 이른다. 스님은 타클라마칸 사막을 여행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도불교의 정신사적인 활력이 정점에 도착했을 때부터 불교 승려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 사막을 건너왔다.

 

나는 그 사막의 푸른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빛 아래 일부러 노숙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이 무모하고 엄청난 도전을 하게 만든 불교의 큰 힘은 무엇일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사막의 밤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 말했다고 한다.

 

“어리석은 나그네여, 불교의 큰 물결이 동쪽으로 흐른 힘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신심이며 경전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네.”(197 페이지) 스님은 고급스러운 깨달음이나 현학적인 교학보다 더욱 간절하게 요청되는 것은 현대인은 어떻게 살고 죽어야 하며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화두를 풀어갈 소박하고도 명료한 행동의 가르침일 것이라 말한다.(201 페이지)

 

스님은 현대 불교를 깊이를 잃은 불교라 진단한다.(203 페이지) 스님은 깊이를 잃은 불교는 현대인들에게 인생과 세계에 대한 어떤 해답도 줄 수 없다고 단언한다.(207 페이지) 스님은 이 몸 즐겁자고 하염없이 쌓아가는 악업의 도미노는 명백히 거부하지만 이 몸이야말로 부처가 되는 그날까지 잘 이끌어야 할 수행의 밑천이기도 하다고 가르친다.(211 페이지)

 

스님은 몸의 수행이 없는 깨달음이란 추단(推斷)일 뿐이며 화려하지만 곧 지워질 가면 위의 화장과도 같은 것이라 말한다.(213 페이지) 불교도들은 몸의 즐거움을 위해서 몸에 애착하는 것이 아니라 청정한 수행을 이루기 위해 몸을 유지해야 한다.(215 페이지)

 

잡아함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쾌락에 빠지는 것이나 고행을 일삼는 것은 다 바른 태도는 아니다. 지나치게 서둔다면 고요한 심경을 기대할 수 없고, 너무 긴장을 푼다면 게을러지기 쉽다. 그대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라.” 책의 편집자는 일지 스님이 불교인문주의자를 자처하며 비승비속의 삶으로 수많은 경전을 탐구해나갔다고 말한다.

 

나는 스님에게서 인문적 천재, 불교에 철저한 스승의 면모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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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9 21: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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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9 22: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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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 - 조선의 정치가 9인이 본 세종
박현모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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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 교수의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는 ‘조선의 정치가 9인이 본 세종’이라는 부제를 가진 책이다. 9인의 정치가는 태종, 황희, 허조, 박연, 정인지, 수양대군, 김종서, 신숙주, 정조 등이다. 우리는 세종을 성군(聖君)으로만 알고 그의 재위기는 오직 평탄하기만 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세종 재위시에도 우여곡절이 많았고 무리수도 있었고 아픔도 겪었고 임금 때문에 살기 힘들다는 불평도 있었다.

 

세종 재위는 수성(守城)기에 해당한다. 부왕 태종의 작업에 힘입은 바다. 세종은 부왕 태종의 피의 숙청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장인 심온이 숙청당할 때 묵인 내지 승인했다고 할 만한 태도를 보였다. 저자는 태종이야말로 조선왕조를 국가로 인식한 첫 국왕이었다고 말한다. 이를 태종이 화가위국(化家爲國)이란 말을 이해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집을 일으켜 나라를 세운다’는 뜻으로 주로 개국 시조가 사용했다. 물론 태종은 화가위국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그에 준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세조는 계유정난을 건국에 버금간다고 여겨 이 말을 사용했다.) 저자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양녕이 주색잡기에 탐닉한 것과 달리 충녕(세종)은 독서를 피난처로 여겼다는 말이다.

 

태종은 세종이 밥을 먹을 때도 좌우에 책을 펴놓아 염려스러워 했지만 내심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고 평했다. 태종은 무인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태조는 자신이 가문을 일으켜 국가를 만들었으나(화가위국; 化家爲國)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가문을 무가(武家)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을 했다.

 

태종은 아버지(태조)는 정치의 세계는 선과 악이 혼재하는 영역이라고 보았다고 말한다. 권간(權奸; 권력을 가진 간신) 속에도 충신이 있고 지금 충신으로 보이는 자도 언젠가는 역신(逆臣)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태종은 충녕이 예능에도 뛰어났고 형제간에도 독특한 우애를 보여주었으며 음주와 가무도 제법 하는 듯했다고 생각했다.

 

태종은 고려라는 그림 위에 조선왕조의 무늬를 그려넣으려 한 것이 자신의 방식이었다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조정해 정치적 화음을 이루려는 것이 세종의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태종은 충녕을 양성지(梁誠之; 1415 - 1482)의 자주국방론을 반대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사대(事大)외교론자로 평했다.

 

송파(松坡)라는 호 외에 눌재(訥齋)라는 호도 썼던 양성지는 자주국방론자였고 규장각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다. 태종은 명나라 시조 주원장(朱元璋)의 피의 숙청을 잔인한 것으로 평하는 세론에 반대하며 폭력적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내는 것이야말로 정치가 특히 국왕의 일이라 말했다. 그리고 충녕을 그런 정치관과 정치적 폭력에 대해 정확히 이해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평했다.(44 페이지)

 

황희는 양녕의 세자 폐위를 반대해 유배에 처해졌었다. 당시 그는 병조판서였었다. 남원에서 4년의 귀양 생활을 하던 황희는 태종의 서거 3개월전 상왕이던 태종의 부름을 받았다. 태종은 황희를 불러 세종에게 중용(重用)할 것을 부탁했지만 세종은 황희를 중용하지 않다가 강원도에 대기근이 일어나자 황희를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세종 재위시 많은 여진족들이 귀화해 왔다. 황희는 이를 조선의 어진 정치, 그리고 오랑캐를 변화시켜 백성으로 삼는 세종의 포용 정책 때문이라 생각했다. 왜구, 여진, 명나라, 남만인(南蠻人)들까지 귀화하려 하자 명나라는 요동 지역의 여진족들이 조선에 귀부(歸附)함으로써 조선이 중화의 국가가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황희는 세종께서 자신을 포함한 여러 신하들의 단점을 아시고도 공적으로 그 허물을 덮을 수 있다며 그렇게 세종께서 시종 보호해주신 덕분에 추문과 허물을 극복하고 청백리로 거듭날 수 있었고 급기야 죽어서 당신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기까지 했다고 말했다.(조말생은 황희를 간악한 소인이라 평했다.) 묘정에 배향되었다는 말은 문묘 공신당에 세종대의 공신으로 모셔졌다는 의미다.

 

최윤덕(崔潤德), 허조(許稠), 신개, 이수(李隨), 이제(양녕대군), 이보(李補; 효령대군) 등이 함께 배향되었다. 허조(許稠)는 하양(河陽) 허씨다. 허조는 유감동(兪甘同; ? ~ ?) 사건을 논했다. 유감동은 조선 전기의 기생, 무희, 시인으로 양반 출신 부녀자였으나 남편에게 버림받은 뒤 기녀로 생활하며 고관 40여 명과 간통해 처벌 받은 여자다.

 

세종은 유감동 사건 처벌 대상자를 최소화하라고 지시했다. 허조는 세종이 여종 덕금이 학대받은 사실을 접하고 마음 아파했다고 평했다. 또한 이런 생각을 가졌기에 세종이 부민고소금지법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았다고 평했다.(하급 서리나 일반 백성들이 경외의 상급 관리들을 고소하지 못하게 하는 법제인 부민고소금지법은 세종의 대표적 악법으로 꼽힌다.)

 

허조는 세종이 후궁보다 낮은 노비 출신의 신빈 김씨를 총애하여 그녀를 후궁 중 최고 자리인 빈으로까지 올린 사실을 언급했다.(신빈은 소헌왕후의 시녀였다.) 그리고 세종이 자신의 즉위 후 초토화된 처가를 생각해 소헌왕후를 극진히 대했다고 평했다.

 

박연(朴堧)은 세종 즉위 후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은 사람이다. 박연은 자신이 문과에 급제했을 때만 해도 자신이 음악의 길을 걸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며 어떤 계기로 자신이 음악에 관한 주상의 지우(知遇; 인격이나 학식을 남이 알고서 잘 대우함)를 받게 되었는지 잘 모른다고 말했다. 박연은 세종이 자신에게 맡긴 첫 번째 임무는 황종(黃鍾; 음악을 이루는 기본음)을 찾는 것이라 말했다.

 

박연이 아악(雅樂) 전용을 주장하자 세종은 반대했다. 세종은 아악은 본래 우리나라 음악이 아니라 중국 음악이라 말했다. 세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아서 향악을 듣고 죽어서 아악을 듣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말했다. 박연은 세종의 말에 일리가 있지만 종묘나 사직 제사는 아악으로 국가 행사의 상징성을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박연은 공자가 계환자가 제나라의 여악(女樂)을 받아들이자 서둘러 노나라를 떠난 공자를 언급하며 세종의 여악 사용 긍정론을 비판했다. 박연은 여악을 쓰면 음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연은 세종이 당대의 정치는 후세인들이 평가하게 하자고 말했다고 말했다. 세종은 그런 생각으로 목조(穆祖)에서 태종까지만 칭송하는 것으로 용비어천가를 구성하게 했다. 박연을 통해 우리는 세종이 최상의 음악정치를 펼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정인지가 본 세종편에서 거론된 인물 가운데 정창손을 빼놓을 수 없다. 정창손은 단종 복위 사건을 세조에게 고변한 사람이거니와 세종에게는 충신, 효자 등이 나오는 것은 자질(資質)의 문제이지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고 말해 파직당했다.(정인지는 술에 취해 세조를 너라고 불렀으며 굳이 어린 조카를 죽였어야 했느냐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정인지는 한글 창제의 최대 수혜자는 사실상 자신이라고 말했다.

 

수양대군이 본 세종편에서는 세종이 한 이런 말이 나왔다. “작년의 강무(講武)는 참으로 한심했다.” 포천 매장원에서 일어난 집단 동사 사건을 두고 이른 말이었다. 수양대군은 부왕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평소 신료들의 말을 경청하시던 부왕께서는 유독 강무에 대해서만 완강하셨다.“ 세종은 강무란 군국의 중대한 일로서 만일 이를 행하지 않는다면 무비(武備)가 쇠퇴할 뿐만 아니라 이미 이루어놓은 왕법에도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수양대군은 창업의 시기에는 권도(權道)가 중요하지만 수성(守城)의 시기에는 정도(正道)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세종은 풍수학을 강명(講明; 강구하여 밝힘)하는 일은 결코 유자(儒者)의 분수 밖의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또한 비록 주자(朱子)의 말이라도 다 믿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김종서는 우리나라의 외환(外患)은 북방에 있다는 세종의 말을 거론했다. 김종서는 거의 모든 사안을 의논해서 아뢰라는 세종의 정치 방식이 아랫사람들에게 달가운 것만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신하들의 생각을 존중하는 주상의 의도야 고마운 일이지만 적절하고 타당한 의견을 내놓기 위해서는 늘 맡은 직무를 연구하고 생각하여 정통해 있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종서는 세종이 최윤덕을 기용한 데서 알 수 있듯 전하께서는 능력만 있다면 문벌과 신분 고하를 초월해서 인재를 등용하곤 했다고 말했다. 서얼 출신의 황희를 중용하여 국가의 저울추 역할을 담당하게 한 것이라든가 천출의 장영실을 등용해 물시계를 비롯한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킨 것 등이 그 예라는 것이다.

 

신숙주는 세종이 성삼문에게 단종을 잘 돌보라고 한 말이 그를 꼭 왕위에 앉혀놓으라는 말씀이었는가 묻는다.

 

성삼문은 세조가 왜 모반을 했느냐고 묻자 당치 않다고 말하며 ”본 임금을 복위하려는 것이 어찌 반역이란 말이오? 자기 임금을 사랑하는 것은 모반이고, 나으리처럼 남의 나라를 도둑질하여 빼앗는 것이 충성이란 말이오?“라고 덧붙였다. 이에 세조가 ”그러면 처음 선위 받을 때 저지할 일이지, 지금껏 내게 맡겨두었다가 이제 와서 나를 배반하는 이유는 뭐냐?”고 묻자 성삼문은 “사세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오. 나으리가 평소 곧잘 주공(周公)을 끌어들였는데, 주공도 이랬습니까?”라고 말했다.

 

정조는 모나지 않게 그럭저럭 넘어가는 것(무모릉; 無模稜)을 문제삼았다. 정조는 자신의 측근 세력인 시파(時派) 신료들의 태도에 한탄했다. 규장각 내에서 누구보다 정조의 개혁의지를 잘 이해하던 정동준은 화성 건설 과정에서 음독 자살했다.

 

정조는 재위 19년에 이가환과 정약용을 지방에 좌천시킨 것이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말한다. 정조는 이가환을 충주목사로, 정약용을 금정찰방으로 파견해 지방의 천주교 확산을 막게 하면 그들에게 씌워진 천주교도라는 오명이 벗겨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남인 내에서 유일하게 학문적 능력과 정치적 감각을 아울러 갖춘 두 사람이 떠나자 채제공의 판단력이 흐려졌고 결국 정승직을 버리고 물러났다.

 

정조는 자신이 즉위했을 때 자당이 아니면 무조건 배척하고 자당은 무조건 감싸는(당동벌이; 黨同伐異) 행태가 종식될 것으로 기대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말한다. 정조는 나이 오십이 되어서 마흔아홉까지의 잘못을 깨달았다는 거백옥을 거론하며 내 나이 오십에 이르러서야 재위 24년 동안에 한 가지 일도 제대로 해놓은 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정조는 자신이 재위 19년에 탕평 정국을 이루었다고 운을 뗀 뒤 흥미롭게도 세종에게도 재위 19년이 중요한 해였다고 말했다. 자신이 가장 배우려고 하는 준거군주인 세종께서는 그 해에 정사를 위임하고 기민을 구휼하며 새로운 기술을 실험하는 한편 대외 문제를 예방하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 정조는 세종에 비하면 자신은 참으로 부끄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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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보며 오늘의 우리에게도 시사적인 내용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아침이다.

 

정조 7년(1783년)의 기록을 통해 정조가 승지에게 무모릉(無模稜)이라는 말을 꺼냈음을 알 수 있다. 국가 경영의 책임 당사자들이 자신의 안녕만 염두에 두고 모나지 않게 그럭저럭 넘어가는 것을 지칭해 한 표현이다. 정조는 서로 공손히 하며 정사(政事)를 위해 바람직하게 협력 한다는 의미의 동인협공(同寅協恭)이란 말도 했다.

 

이어 잘 하려는 마음이 지나쳐 졸렬한 결과를 낳는 것을 의미하는 욕교반졸(欲巧反拙)이란 말도 했다. 종합하면 무모릉을 지양하고 동인협공을 지향하되 욕교반졸의 잘못을 하지 않도록 과감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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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을까? - 전곡선사박물관장이 알려주는 인류 진화의 34가지 흥미로운 비밀
이한용 지음 / 채륜서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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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을까?’는 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센터가 선정한 2020년의 과학도서 10권 가운데 한 권이다. 저자인 이한용은 전곡 선사박물관 관장이다. 책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1부 인류의 도구, 2부 인류의 기원, 3부 인류의 예술 등이다.

 

책은 자연석과 석기를 구분하는 데는 엄격한 규칙이 있다는 부분부터 시작해 구석기 시대 백남준이란 내용에 이르기까지 “인류 진화의 34 가지 흥미로운 비밀”을 망라했다. 자연석과 석기를 구분하는 기준은 돌에 사람이 도구를 사용해 가공한 흔적이 있는가 여부다. 사람이 도구를 사용해 만든 석기에는 일정한 형태가 있다.(규칙성과 정형성이 중요하다.)

 

구석기 시대 인류 진화와 석기제작 기술을 한 마디로 하면 머리는 점점 커지고 석기는 점점 작아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석기를 더 작게 만들기 위해 채택한 기술이 간접타격이다. 돌망치로 돌을 직접 떼어내는 대신 사슴뿔로 만든 일종의 정(punch)을 사용해 길고 얄팍하게 만드는 것이다.

 

선사박물관, 하면 아슐리안 주먹도끼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주먹도끼는 대략 160만년전 아프리카에서 처음 만들어 사용되기 시작해 약 10만년전까지 구석기 시대의 거의 전 시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먹도끼의 모양이 서로 다른 것은 석기를 만드는 기술력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원재료인 석재의 차이 때문이다.

 

한탄강에서 주은 규암계 자갈돌로는 아무리 뛰어난 석기 제작자라고 해도 유럽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얄팍한 모양의 주먹도끼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슐리안 주먹도끼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은 계획성과 예측능력, 기억력과 창의성 등이다. 그래서 아슐리안 주먹도끼를 인류 최초의 예술품이라 하는 것이다.(주먹도끼는 양면 가공 ‘석기; bifaces‘다.)

 

최초의 석기는 약 250만년전 호모 하빌리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지만 자료들이 계속 밝혀지고 있어 시기가 더 올라갈 여지는 충분히 있다. 주먹도끼 만드는 사람의 뇌를 최신 의료장비로 조사해 보니 돌을 솜씨 좋게 두드려 깰 때 작동하는 뇌의 특정 부위와 말을 할 때 작동하는 뇌 부위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30 페이지)

 

아름다운 좌우대칭의 주먹도끼가 예술본능 발현의 산물이 아니라 자연적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 인류가 진화함에 따라 석기도 진화했다. 그리고 석기가 진화할 때마다 인류도 진화했다. 인류가 두 발로 일어섰을 때, 본격적인 사냥꾼이 되어 아프리카를 벗어났을 때, 네안데르탈인과의 경쟁이 심해지던 때, 인지혁명이라는 지적 능력이 대폭발 했을 때 등이 인류 진화의 획기적 시기들이다.

 

인류가 석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지 100만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때부터다. 현미경으로 석기 날을 자세히 관찰하면 이 석기가 가죽을 벗기는 데 쓴 것인지 나무를 자르는 데 쓴 것인지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석기를 만들어서 사용해 보면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써는 용도를 위해서라면 굳이 그렇게 정교한 대칭의 석기를 만들 필요는 없다는 점이 중요하게 드러난다.(44 페이지)

 

2005년 포브스지가 선정, 발표한 인류 역사의 20대 발명품 가운데 하나로 낚시 바늘이 있다. 인류 역사는 바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53 페이지) 귀가 있는 바늘로 꼼꼼하게 꿰맨 옷이 빙하기의 추위를 넘어서는 데 유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재까지의 고고학 증거로 볼 때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바늘이 있었지만 네안데르탈인에게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55 페이지) 이 차이는 작지만 아주 중요한 차이를 낳았다. 작은 것이지만 바늘 구멍을 뚫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사냥을 통해 할 수 있게 된 육식과 석기는 불가분의 조합이다.

 

사냥으로 획득한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함으로써 신체를 튼튼하게 할 수 있었고 두뇌도 커졌다. 석기 제작은 뇌를 자극해 뇌 발달을 촉진했다. 석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냥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전략 수립 및 역할분담을 통한 사회적 조직력이다.

 

저자는 우리들이 대부분 오른손 잡이인 이유는 석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정교한 손동작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좌뇌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좌뇌의 운동조절기능의 영향을 받는 것은 오른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에서 만물의 영장이며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인식만이 있었던 시대에 인류가 사냥감에 불과한 미천한 생물이었다는 인식을 하는 것은 어렵고 복잡한 문제라 말한다.(9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애석하지만 초기 고인류는 사냥꾼이 아니라 사냥감에 가까웠다.(98 페이지) 사람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체질적 특징은 직립보행이다.(107 페이지) 직립보행의 가장 유력한 동기는 나무 위에 살던 인류의 조상이 열대우림이 사바나로 변하는 환경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매일 일상적으로 별 어려움 없이 잘 걸어 다니고 있지만 걷는 과정은 간단한 기술이 아니다. 걷기는 매우 정교한 해부학적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과정이다. 몸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게 두 발로 걷는 과정이지만 두 발에만 집중해서 보더라도 인간은 참으로 놀라운 묘기를 부리는 복잡한 기계다.(111 페이지)

 

인류는 머리가 먼저 좋아지고 두 다리로 일어선 것이 아니라 두 다리로 일어서서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보니 머리도 커지고 좋아진 것이다.(113 페이지) 사람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 3가지는 두발 걷기, 도구 제작 능력, 커다란 뇌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두발 걷기다.(146 페이지)

 

저자는 구석기시대의 여러 사건들은 마치 드라마 줄거리를 연상하듯 상상하며 재구성하는 재미가 있다고 말한다.(116 페이지) 평균적인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만일 날 음식을 먹는다면 매일 5kg의 양을 여섯 시간에 걸쳐 씹어야 한다고 한다. 불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만큼 중요하다. 구워 먹는다는 것은 인류 최초의 요리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119 페이지)

 

초기 고인류들은 하이에나, 독수리 등과 같이 맹수가 먹다 남긴 고기 찌꺼기나 부서진 뼈 속에 남아있던 골수를 빨아먹는 야생의 사체 청소부 역할을 하면서 서서히 동물성 단백질에 적응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126 페이지) 인류 진화과정을 아주 짧은 말로 요약하여 표현하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 그리고 이 적응력을 무기로 지구의 구석구석에 퍼져 살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135 페이지)

 

호모 에르가스터는 아프리카를 벗어난 첫 인류다. 인간 가운데 가장 빠른 우사인 볼트가 100미터를 주파한 9초 58의 기록은 시속으로는 37.5km 정도다. 이 스피드는 치타는 물론 곰보다도 느린 것이다. 그럼에도 인류가 공포의 사냥꾼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목표물을 정해 끈질기게 뒤쫓아가서 잡는 추격사냥의 비법을 통달했기 때문이다.

 

전력을 다해 사냥을 해야 하는 사자나 치타와 같은 맹수들이 급격한 체온상승을 견디지 못하고 그늘에 앉아 혀를 뽑아 물고 핵핵거리는 것으로 강제 쿨링을 시도할 때 인간은 털이 없는 온몸을 냉각판 삼아 상대적으로 유리한 체온관리가 가능했다. 경쟁자들이 쉬고 있을 때도 사냥감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쫓아가는 데는 당해낼 재주가 없었을 것이다.(138 페이지)

 

네안데르탈인은 현생 인류 못지 않은 문화를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151 페이지) 그들의 뇌 용량은 현생 인류보다 100cc 정도 더 컸다. 지난 2010년 아시아인과 유럽인의 유전자에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2% 정도 섞여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현생 인류가 네안데르탈인 멸종의 주범인지 여부도 논란 거리다.

 

오늘날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은 네안데르탈인이 약 3만년 전에 홀연히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는 점이다.(153 페이지) 네안데르탈인은 우리들 호모 사피엔스와 함께 지구가족의 일원으로서 오랜 기간 함께 살았었다.(174 페이지) 데니소바인도 우리와 동시대를 살았었다.(165 페이지) 즉 우리,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이 함께 했었다는 것이다.

 

인류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직립보행 덕이다. 직립보행을 하게 됨에 따라 똑바로 세워진 척추는 뇌는 물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강 내부의 해부학적 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187, 188 페이지) 지금까지 발견된 화석자료만으로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시기를 정확히 확정할 수 없지만 약 50만년전을 전후로 후두의 위치가 다른 영장류에 비해서 훨씬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간 것은 분명해 보인다,(188 페이지)

 

인간이 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것은 구강구조의 변화뿐 아니라 두뇌와 청각기관이 함께 발달했기 때문이다.(189 페이지)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하고 호모 사피엔스는 남은 것은 본격적인 예술활동의 차이에서 비롯된 창의력과 적응력의 차이로 인한 것이라 말해지지만 최근 네안데르탈인이 남겨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동굴벽화가 발견되고 있어 주목된다.(216 페이지)

 

동굴벽화에서 원근법은 물론 반 고흐 그림에서 보이는 점묘화 기법도 관찰된다는 사실이 놀랍다.(220 페이지) 오래된 동굴벽화는 서양에서만 발견되어야 하는 자존심에 상처가 생기는 발견들이 최근 들어 계속 이어지고 있다.(220 페이지) 저자는 우리가 인류의 진화와 구석기시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앞으로도 우리 인간은 계속 진화할 것이기 때문이라 말한다.(255, 25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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