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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 - 조선의 정치가 9인이 본 세종
박현모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박현모 교수의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는 ‘조선의 정치가 9인이 본 세종’이라는 부제를 가진 책이다. 9인의 정치가는 태종, 황희, 허조, 박연, 정인지, 수양대군, 김종서, 신숙주, 정조 등이다. 우리는 세종을 성군(聖君)으로만 알고 그의 재위기는 오직 평탄하기만 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세종 재위시에도 우여곡절이 많았고 무리수도 있었고 아픔도 겪었고 임금 때문에 살기 힘들다는 불평도 있었다.
세종 재위는 수성(守城)기에 해당한다. 부왕 태종의 작업에 힘입은 바다. 세종은 부왕 태종의 피의 숙청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장인 심온이 숙청당할 때 묵인 내지 승인했다고 할 만한 태도를 보였다. 저자는 태종이야말로 조선왕조를 국가로 인식한 첫 국왕이었다고 말한다. 이를 태종이 화가위국(化家爲國)이란 말을 이해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집을 일으켜 나라를 세운다’는 뜻으로 주로 개국 시조가 사용했다. 물론 태종은 화가위국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그에 준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세조는 계유정난을 건국에 버금간다고 여겨 이 말을 사용했다.) 저자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양녕이 주색잡기에 탐닉한 것과 달리 충녕(세종)은 독서를 피난처로 여겼다는 말이다.
태종은 세종이 밥을 먹을 때도 좌우에 책을 펴놓아 염려스러워 했지만 내심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고 평했다. 태종은 무인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태조는 자신이 가문을 일으켜 국가를 만들었으나(화가위국; 化家爲國)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가문을 무가(武家)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을 했다.
태종은 아버지(태조)는 정치의 세계는 선과 악이 혼재하는 영역이라고 보았다고 말한다. 권간(權奸; 권력을 가진 간신) 속에도 충신이 있고 지금 충신으로 보이는 자도 언젠가는 역신(逆臣)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태종은 충녕이 예능에도 뛰어났고 형제간에도 독특한 우애를 보여주었으며 음주와 가무도 제법 하는 듯했다고 생각했다.
태종은 고려라는 그림 위에 조선왕조의 무늬를 그려넣으려 한 것이 자신의 방식이었다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조정해 정치적 화음을 이루려는 것이 세종의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태종은 충녕을 양성지(梁誠之; 1415 - 1482)의 자주국방론을 반대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사대(事大)외교론자로 평했다.
송파(松坡)라는 호 외에 눌재(訥齋)라는 호도 썼던 양성지는 자주국방론자였고 규장각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다. 태종은 명나라 시조 주원장(朱元璋)의 피의 숙청을 잔인한 것으로 평하는 세론에 반대하며 폭력적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내는 것이야말로 정치가 특히 국왕의 일이라 말했다. 그리고 충녕을 그런 정치관과 정치적 폭력에 대해 정확히 이해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평했다.(44 페이지)
황희는 양녕의 세자 폐위를 반대해 유배에 처해졌었다. 당시 그는 병조판서였었다. 남원에서 4년의 귀양 생활을 하던 황희는 태종의 서거 3개월전 상왕이던 태종의 부름을 받았다. 태종은 황희를 불러 세종에게 중용(重用)할 것을 부탁했지만 세종은 황희를 중용하지 않다가 강원도에 대기근이 일어나자 황희를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세종 재위시 많은 여진족들이 귀화해 왔다. 황희는 이를 조선의 어진 정치, 그리고 오랑캐를 변화시켜 백성으로 삼는 세종의 포용 정책 때문이라 생각했다. 왜구, 여진, 명나라, 남만인(南蠻人)들까지 귀화하려 하자 명나라는 요동 지역의 여진족들이 조선에 귀부(歸附)함으로써 조선이 중화의 국가가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황희는 세종께서 자신을 포함한 여러 신하들의 단점을 아시고도 공적으로 그 허물을 덮을 수 있다며 그렇게 세종께서 시종 보호해주신 덕분에 추문과 허물을 극복하고 청백리로 거듭날 수 있었고 급기야 죽어서 당신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기까지 했다고 말했다.(조말생은 황희를 간악한 소인이라 평했다.) 묘정에 배향되었다는 말은 문묘 공신당에 세종대의 공신으로 모셔졌다는 의미다.
최윤덕(崔潤德), 허조(許稠), 신개, 이수(李隨), 이제(양녕대군), 이보(李補; 효령대군) 등이 함께 배향되었다. 허조(許稠)는 하양(河陽) 허씨다. 허조는 유감동(兪甘同; ? ~ ?) 사건을 논했다. 유감동은 조선 전기의 기생, 무희, 시인으로 양반 출신 부녀자였으나 남편에게 버림받은 뒤 기녀로 생활하며 고관 40여 명과 간통해 처벌 받은 여자다.
세종은 유감동 사건 처벌 대상자를 최소화하라고 지시했다. 허조는 세종이 여종 덕금이 학대받은 사실을 접하고 마음 아파했다고 평했다. 또한 이런 생각을 가졌기에 세종이 부민고소금지법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았다고 평했다.(하급 서리나 일반 백성들이 경외의 상급 관리들을 고소하지 못하게 하는 법제인 부민고소금지법은 세종의 대표적 악법으로 꼽힌다.)
허조는 세종이 후궁보다 낮은 노비 출신의 신빈 김씨를 총애하여 그녀를 후궁 중 최고 자리인 빈으로까지 올린 사실을 언급했다.(신빈은 소헌왕후의 시녀였다.) 그리고 세종이 자신의 즉위 후 초토화된 처가를 생각해 소헌왕후를 극진히 대했다고 평했다.
박연(朴堧)은 세종 즉위 후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은 사람이다. 박연은 자신이 문과에 급제했을 때만 해도 자신이 음악의 길을 걸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며 어떤 계기로 자신이 음악에 관한 주상의 지우(知遇; 인격이나 학식을 남이 알고서 잘 대우함)를 받게 되었는지 잘 모른다고 말했다. 박연은 세종이 자신에게 맡긴 첫 번째 임무는 황종(黃鍾; 음악을 이루는 기본음)을 찾는 것이라 말했다.
박연이 아악(雅樂) 전용을 주장하자 세종은 반대했다. 세종은 아악은 본래 우리나라 음악이 아니라 중국 음악이라 말했다. 세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아서 향악을 듣고 죽어서 아악을 듣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말했다. 박연은 세종의 말에 일리가 있지만 종묘나 사직 제사는 아악으로 국가 행사의 상징성을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박연은 공자가 계환자가 제나라의 여악(女樂)을 받아들이자 서둘러 노나라를 떠난 공자를 언급하며 세종의 여악 사용 긍정론을 비판했다. 박연은 여악을 쓰면 음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연은 세종이 당대의 정치는 후세인들이 평가하게 하자고 말했다고 말했다. 세종은 그런 생각으로 목조(穆祖)에서 태종까지만 칭송하는 것으로 용비어천가를 구성하게 했다. 박연을 통해 우리는 세종이 최상의 음악정치를 펼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정인지가 본 세종편에서 거론된 인물 가운데 정창손을 빼놓을 수 없다. 정창손은 단종 복위 사건을 세조에게 고변한 사람이거니와 세종에게는 충신, 효자 등이 나오는 것은 자질(資質)의 문제이지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고 말해 파직당했다.(정인지는 술에 취해 세조를 너라고 불렀으며 굳이 어린 조카를 죽였어야 했느냐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정인지는 한글 창제의 최대 수혜자는 사실상 자신이라고 말했다.
수양대군이 본 세종편에서는 세종이 한 이런 말이 나왔다. “작년의 강무(講武)는 참으로 한심했다.” 포천 매장원에서 일어난 집단 동사 사건을 두고 이른 말이었다. 수양대군은 부왕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평소 신료들의 말을 경청하시던 부왕께서는 유독 강무에 대해서만 완강하셨다.“ 세종은 강무란 군국의 중대한 일로서 만일 이를 행하지 않는다면 무비(武備)가 쇠퇴할 뿐만 아니라 이미 이루어놓은 왕법에도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수양대군은 창업의 시기에는 권도(權道)가 중요하지만 수성(守城)의 시기에는 정도(正道)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세종은 풍수학을 강명(講明; 강구하여 밝힘)하는 일은 결코 유자(儒者)의 분수 밖의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또한 비록 주자(朱子)의 말이라도 다 믿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김종서는 우리나라의 외환(外患)은 북방에 있다는 세종의 말을 거론했다. 김종서는 거의 모든 사안을 의논해서 아뢰라는 세종의 정치 방식이 아랫사람들에게 달가운 것만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신하들의 생각을 존중하는 주상의 의도야 고마운 일이지만 적절하고 타당한 의견을 내놓기 위해서는 늘 맡은 직무를 연구하고 생각하여 정통해 있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종서는 세종이 최윤덕을 기용한 데서 알 수 있듯 전하께서는 능력만 있다면 문벌과 신분 고하를 초월해서 인재를 등용하곤 했다고 말했다. 서얼 출신의 황희를 중용하여 국가의 저울추 역할을 담당하게 한 것이라든가 천출의 장영실을 등용해 물시계를 비롯한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킨 것 등이 그 예라는 것이다.
신숙주는 세종이 성삼문에게 단종을 잘 돌보라고 한 말이 그를 꼭 왕위에 앉혀놓으라는 말씀이었는가 묻는다.
성삼문은 세조가 왜 모반을 했느냐고 묻자 당치 않다고 말하며 ”본 임금을 복위하려는 것이 어찌 반역이란 말이오? 자기 임금을 사랑하는 것은 모반이고, 나으리처럼 남의 나라를 도둑질하여 빼앗는 것이 충성이란 말이오?“라고 덧붙였다. 이에 세조가 ”그러면 처음 선위 받을 때 저지할 일이지, 지금껏 내게 맡겨두었다가 이제 와서 나를 배반하는 이유는 뭐냐?”고 묻자 성삼문은 “사세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오. 나으리가 평소 곧잘 주공(周公)을 끌어들였는데, 주공도 이랬습니까?”라고 말했다.
정조는 모나지 않게 그럭저럭 넘어가는 것(무모릉; 無模稜)을 문제삼았다. 정조는 자신의 측근 세력인 시파(時派) 신료들의 태도에 한탄했다. 규장각 내에서 누구보다 정조의 개혁의지를 잘 이해하던 정동준은 화성 건설 과정에서 음독 자살했다.
정조는 재위 19년에 이가환과 정약용을 지방에 좌천시킨 것이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말한다. 정조는 이가환을 충주목사로, 정약용을 금정찰방으로 파견해 지방의 천주교 확산을 막게 하면 그들에게 씌워진 천주교도라는 오명이 벗겨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남인 내에서 유일하게 학문적 능력과 정치적 감각을 아울러 갖춘 두 사람이 떠나자 채제공의 판단력이 흐려졌고 결국 정승직을 버리고 물러났다.
정조는 자신이 즉위했을 때 자당이 아니면 무조건 배척하고 자당은 무조건 감싸는(당동벌이; 黨同伐異) 행태가 종식될 것으로 기대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말한다. 정조는 나이 오십이 되어서 마흔아홉까지의 잘못을 깨달았다는 거백옥을 거론하며 내 나이 오십에 이르러서야 재위 24년 동안에 한 가지 일도 제대로 해놓은 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정조는 자신이 재위 19년에 탕평 정국을 이루었다고 운을 뗀 뒤 흥미롭게도 세종에게도 재위 19년이 중요한 해였다고 말했다. 자신이 가장 배우려고 하는 준거군주인 세종께서는 그 해에 정사를 위임하고 기민을 구휼하며 새로운 기술을 실험하는 한편 대외 문제를 예방하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 정조는 세종에 비하면 자신은 참으로 부끄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