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마시며/ 한이나 시인(2007년 출간 능엄경 밖으로 사흘 가출수록 시)

 

마음의 불을 끄고 춘설차 한 잔을 마시네 찻잎에서 우러나 물드는 찻물을 보네 누가 찻잔 속에 들어가 제 몸의 속살까지 물들이며 향기로 오나 옛 그림 속 오월의 차나무 잎, 우러나오는 그 가슴의 그리움을 마시리 찻잔 속에 뜨는 달을 노래하리 그대와 나 사이, 끊을 수 없는 생각으로 내리는 봄눈 머뭇거리며 눈발로 흩날리네

 

녹차 한잔/ 고옥주 시인(1991년 출간 나무 나무수록 시)

 

그대에게 녹차 한잔 따를 때 내 마음이 어떻게 그대 잔으로 가울어 갔는지 모르리. 맑은 마음 솟구쳐 끓어 오를 때 오히려 물러나 그대 잔을 덥히듯 더운 가슴 식히리. 들끓지 않는 뜨거움으로 그리움 같은 마른 풀잎 가라앉혀 그 가슴의 향내를 남김없이 우려내야 하리. 그대와 나 사이 언덕에 달이 뜨고 풀빛 어둠 촘촘 해 오니 그대여, 녹차 한잔 속에 잠든 바다의 출렁임과 잔잔한 온기를 빈 마음으로 받아 드시게.

 

한이나 시인의 차를 마시며’, 고옥주 시인의 녹차 한잔에 화답(和答)해 쓴 시 같다.. 두 시 모두 단아하고 고운 시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군자(君子)는 마음이 평탄하고 물로 쓸어내린 등 시원하다˝ 원문이 군자탄탕탕(君子坦蕩蕩)인 이 표현의 출처는 ‘논어‘이다.

이 표현과 조선 중종 때의 선비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 1503 - 1557)의 소쇄(瀟灑)란 말의 연관성이 궁금하다.

소쇄는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이다. 양산보는 별서(別墅) 정원인 소쇄원(瀟灑園)으로 유명한 분이다.

지난 주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1493 - 1564)의 집터에서 청송당(聽松堂)과 겸재가 그린 청송당 그림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청송은 소나무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이다. 당시 나는 송풍회우(松風檜雨)란 말도 했었다. 이 말은 찻물 끓는 소리를 소나무에 바람 불고 전나무에 비내리는 것에 비유한 청허(淸虛) 휴정(休靜; 서산대사) 스님의 표현이다.

양산보와 성수침은 기묘사화(1519년) 때 스승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 - 1520)의 참담한 죽음을 목도하고 세상에 대해 두려움과 환멸을 느껴 정계에서 물러나 칩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수영 시인의 ‘격문‘이란 시에 이런 표현이 있다. ˝땅이 편편하고/ 집이 편편하고/ 하늘이 편편하고/ 물이 편편하고/ 앉아도 편편하고/ 서도 편편하고/...어머니가 감탄하니 과연 시원하고/ 무엇보다도/ 내가 정말 시인이 됐으니 시원하고..˝
이 말도 군자탄탕탕과 관련이 있다. 아무래도 오늘의 주제는 맑음이다. 시원함에 맑음이 포함되었는지 모르지만.

찻물 끓이는 소리 대신 찻물 끓는 듯 고요하고 맑은 가브리엘 포레의 피아노곡집인 녹턴을 들으며 고요함과 맑음에 대해 생각해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산(茶山) 선생 관련 자료를 검색하다가 함순례 시인의 법당 가서 눕고 싶은 날’(2017121일 불교평론 수록)이란 글을 뒤늦게 찾아 읽었다.

 

하동 평사리문학관 레지던스 입주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필자는 법당에 들어가면 눕고 싶다고 운을 뗀 뒤 만약 실제로 자신이 법당에 벌렁 드러눕는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 것이고 스님은 어떤 표정을 지으실 것이며 등등을 생각하게 되고 결국 그런 충동이 일 때마다 숭산 스님의 책 부처님 손바닥에 재를 털면에 나오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는 말을 한다.

 

책의 내용인 즉 어떤 남자가 담배를 피우면서 선원(禪院)에 들어와 부처님의 얼굴에 연기를 불어 대고 부처님의 손바닥에 재를 털자 주지 스님이 당신 미쳤소? 왜 부처님께 재를 털고 있소?” 하고 꾸짖었고 이에 그 남자는 우주 모든 것이 부처인데 그러면 어디에 재를 털겠습니까?”란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주지 스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나갔으니 이런 경우 주지 스님은 어떻게 그 남자를 가르쳐야 옳았겠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자신이 주지 스님이었다면 그 남자를 한대 후려쳤을 것이라 답한 사람도 있었다.

 

숭산 스님의 답은 아무 말 하지 말고 그 남자에게 재떨이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으로 가만히 있는 것은 올바른 용심(用心)이 아니기에 담뱃재는 재떨이에 떨어야 한다는 걸 말없이 보여주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라면 먼저 우주 모든 것이 부처라는 극히 관념적인 말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물을 것이고 모든 것이 부처인데 왜 이름을 다 다르게 부르는지도 물을 것이고 그 남자 말대로 모든 것이 부처라면 담배를 든 손가락에서 가장 가까운 자신(이라는 부처)의 손바닥에 재를 떨지 굳이 멀리 있는 부처님이라는 부처의 얼굴에 재를 떨고 연기를 불어댈 필요가 있는가, 물을 것이다.

 

숭산 스님의 지론이 궁금하다. 모든 것이 부처라는 말은 숭산 스님의 지론인가? 아닌가?

 

궁금한 것은 모든 존재가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모든 존재는 부처라는 완료형으로 바꾸어 말하는 이유이다.

 

숭산 스님의 가르침은 그 남자에게 말없이 바른 길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방편이지만 석연치 않다.

 

덜 깬 중의 특성은 그가 덜 깨쳤다는 것을 모르는 바 그는 법당을 지나다가 본존불에 침을 뱉을 수 있고(“부처가 원래 있었더냐?”) 방장(方丈: 불교의 종합수도원인 총림의 최고 책임자) 스님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네가 무엇이냐? 너는 없는 것이다.”라며 대갈일성으로 깨우침을 줄 수 있는 바 그가 그 깨침의 환각에서 벗어나는 것은 쉰 밥을 퍼먹고(그에게는 쉰 밥/ 성한 밥의 구별이 헛되므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난 다음부터라는 도정일 교수의 책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의 한 챕터(‘문학적 신비주의의 두 형태’)가 생각난다.

 

도정일 교수의 결론은 은유의 인식 기능 자체가 아닌 은유 장르의 무차별적 확대가 도달하는 신비주의의 폐해를 경계하자는 것이다.

 

과학도 은유의 한 형태라 말해진다. 임동빈 교수는 한갓 화학물질인 유전자에 무슨 이기심이 들어 있으며 우리의 생활방식인 문화에 무슨 유전자가 살고 있겠냐고 말하며 그것들을 현란한 은유라 칭한다.(20131118일 숭실대신문 수록 '은유로서의 과학')

 

두루뭉실한 유사성을 날카로운 차이를 통해 비판하는 것이 합리주의의 핵심이라는 글(이정우 교수 지음 '가로지르기' 131 페이지)을 떠올리게 된다.

 

두루뭉실하지 않은 새롭고 독창적인 은유를 만드느라 골몰하는 사람들을 그리며 날카로운 과학자이자 시인이었던 바슐라르의 책을 읽고 싶은 시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역(易)을 가지고 말하려는 자는 그 풀이를 숭상하고, 행동하려는 자는 그 변화를 숭상하고, 기술적 응용을 원하는 자는 그 상(象)을 숭상하고, 미래를 예견하려는 자는 그 점(占)을 숭상한다..

이것이 바로 주역(周易)이 말하는 네 가지 도(道)이다. 나는 어떤 경우인가?

전형적으로 들어 맞지는 않지만 나는 풀이를 숭상하는 사람 즉 이론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다.

허수경(許秀卿) 시인의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주역의 괘로 풀이한 적이 있다. 그때 활용한 것이 소축(小畜) 괘와 이(頤) 괘이다.

소축(小畜)은 리(履)와, 이(頤)는 대과(大過)와 짝을 이룬다.(小畜은 굴레를 씌워 길들이는 원리, 履는 놓아주어 이행하게 하는 원리, 頤는 먼저 내실을 다지는 길, 大過는 큰 과오를 감수하는 길이다.)

주역의 괘들은 이렇듯 대대(待對; 짝)로 구성되었다. 나에게 관심거리로 다가오는 것은 이(頤) vs 대과(大過)이다.

관심거리로 다가오기보다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왜 아픈가?

내실을 다진 삶도 큰 과오를 감수하며 행동한 삶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차라리 내실도 다지며 과오도 감수하며 실행하는 길을 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 말하는 바 가르치며 성장하듯, 육체와 정신, 감성과 이성이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듯(강남순 교수 지음 ‘배움에 관하여‘ 323 페이지), 이론과 실천, 이해와 변혁이 상호 대립되는 것이 아니듯(김영민 교수 지음 ‘신 없는 구원 신 앞의 철학‘ 70 페이지) 내실 다지기와 감행(敢行)은 상호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현장에서 배우고 이론으로 현장을 상상하는 길을 갈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리라.

이렇게 나는 ‘주역‘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자신의 괘로 삼을 것을 제안하는 강병국 저자의 ‘주역독해‘란 책을 읽고 새해 첫 날 나의 길을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우주에는 뭐가 있어요?”란 아이들의 물음에 , , 별이 있단다.”고 답한다는 천문학자 박석재 박사의 책(’해와 달과 별이 뜨고 지는 원리‘ 67 페이지)을 다시 읽는다. 저 질문에 무엇이라 답할까? 나는 온도 차이가 있다고 답할 것이다.

 

해에는 주위보다 온도가 낮아 어둡게 보이는 부분인 검은 점(sunspot)이 있고 달에는 신록이나 높은 고원 지대 즉 밝은 부분과 달리 바다라 불리는 낮고 어두운 지역이 있다.(’해와 달과 별이 뜨고 지는 원리‘ 78 페이지)

 

물론 이름이 바다일 뿐 그곳에 물이 있지는 않다. 우리 민족은 달의 어두운 부분을 방아 찧는 토끼로 표현했다. 알아줄 만한 감수성이다.

 

여기서 어두움의 수사적 의미가 빛나는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놀랍고 수수께끼 같은 우주의 구성 요소 치고는 다소 평범한 이름”(폴 스타인하트, 닐 투록 지음 끝없는 우주‘ 54 페이지)인 암흑물질과 암흑 에너지는 빛을 방출하지도 흡수하지도 않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주를 이루는 물질의 90 퍼센트가 암흑 물질(중력과만 상호작용을 하는)이다. 우주 에너지의 70 퍼센트가 암흑 에너지이다.(레너드 서스킨드 지음 우주의 풍경‘ 8 페이지)

 

암흑 물질은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 우주의 팽창 속도를 늦추는 역할을 하는 물질이고 암흑 에너지는 우주를 가속 팽창하게 하는 에너지이다.(이강환 지음 우주의 끝을 찾아서‘ 60 페이지.. 이론(천체) 물리학자 폴 스타인하트와 닐 투록은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란 이름을 놀랍고 수수께끼 같은 우주의 구성 요소 치고는 다소 평범한 이름이라 말한 반면 이강환은 암흑 에너지를 멋진 이름이라 말한다. 나는 전자의 의견에 공감.)

 

천문학자 이강환에 의하면 우주 초기에는 물질이 끌어당기는 힘(중력)이 더 커서 우주가 감속 팽창을 했고 그 이후 빈 공간이 점점 커짐에 따라 암흑 에너지의 힘이 더 커져 가속 팽창을 하게 되었다.(’우주의 끝을 찾아서‘ 254 페이지)

 

천체물리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달의 극지방(極地方)의 분화구에 생명체가 있다면 햇빛을 산란시킬 만한 대기가 없음에도 영원한 어둠 속에서 살아 가고 있을 것이라 말한다.(’타이슨이 연주하는 우주 교향곡 2‘ 50 페이지)

 

영원이란 어떤 의미일까? 타이슨은 해의 중심에서 생성된 광자(光子: 빛 입자)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표면으로 직진한다면 단 2.3(해의 반지름은 695km. 빛의 속도는 초당 30km.: 69,5/30 = 2.3166)가 걸린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빛은 평균 1cm를 진행할 때마다 전자, 원자 등과 충돌하고 해의 자체 중력 탓에 중심부의 밀도가 아주 높아 밖으로 움직이는 도중 어딘가에 흡수되었다가 재방출되면서 추가시간이 생기는 등의 이유로 중심에서 표면까지 이동하려면 100만년이 걸린다고 말한다.(’타이슨이 연주하는 우주 교향곡 1‘ 84, 85 페이지)

 

말할 것도 없이 100만년은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하지만 그 수조차 영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달을 광기(光氣)와 연결시키는 서양 사람들의 사고는 유명한데 그들이 한 달에 두 번 뜨는 보름달을 blue moon이라 칭하는 것은 달의 극지방에 살아 있을 수도 있는 영원한 어둠 속의 생명체를 생각한 결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한 달에 두 번 뜨는 보름달은 불길하다는 의미의 blue moon이지만 대기의 먼지나 연기 때문에 달은 정말 푸르게 보일 수도 있다.

 

감기 때문에 복용한 항생제 때문에 그간 좋았던 위의 한쪽에 불편감이 생기는 것을 보며 내가 생각한 것은 해의 흑점과 달의 바다이다. 아픈 곳은 실제 온도가 낮아진 결과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아울러 나는 한다.

 

, 나는 불을 숭배하는 배화교(拜火敎: 조로아스터교) 신자인 듯 하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의 1981년 영화 '불을 찾아서'를 기억한다.

 

이 작품은 이웃 종족의 습격으로 생명과도 같은 불씨를 잃어버린 한 종족이 불을 위해 세 사람을 파견하는 이야기이다. 셋은 불을 찾아서 죽도를 광야를 헤맨 끝에 불씨가 아닌 불을 만드는 방법을 습득해 온다.

 

예나 지금이나 불은 여전히 숭배의 대상이다. 하지만 더 필요한 것은 불을 만드는 법이다. 고기를 낚아 주는 것이 아닌 고기 잡는 법을 알려 주어야 한다는 유대인의 지혜를 받아 나도 건강에서도 사유에서도 스스로 불을 만드는 법과 어울려 놀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