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편에게는 가족 외에 좋아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산과 영화와 만화와 잠자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2년 전부터 막강한 라이벌이 나타났다. 바로 마라톤이다. 주말이면 일단 낮잠을 서너 시간 푹 자고 일어나야 남편 구실에 아빠 구실을 하던 그였는데 마라톤을 시작한 이후 그는 낮잠 대신 운동화 끈을 매고 훌쩍 나가버렸다.

나름대로 아빠와 함께할 주말 프로그램을 잡아놓으면 마라톤 대회가 있다며 약간 미안해하긴 했다. 한두 번은 그냥 그럴 수도 있지 했다. 나쁜 짓 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강릉, 춘천, 원주 등 자꾸 지방 대회에 참가하는 바람에 내 눈밖에 나고 말았다. 지방에서 뛰자면 1박 2일이 보통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아빠 없는 주말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함께 강릉도, 춘천도, 원주도 나의 미움을 사야 했다.

지난 달부터 그는 또 하나의 마라톤 대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뭐라 하는데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한 번 연습하러 나갔다 하면 서너 시간을 뛰고 들어오는데 지치는 건 남편이 아니라 집에서 기다리는 나였다. 마라톤화도 새로 사고, 회사에서 늦게 들어온 날도 몸풀기 운동에 동네 체육 공원 몇 바퀴는 빠뜨리지 않고 돌았다.  아내가 심통이 잔뜩 나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나름대로 대회 준비를 열심히 했다.

내가 그를 위해 한 일은 일주일 동안 불고기  두 번 해준 것밖엔 없다. 대회 이틀 전에야 그게 어디서 열리는지, 어떤 대회인지를 알았다.국제 마라톤 대회 겸 동아 마라톤 대회라고 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회. 그 대회 텔레비전 중계하는 대회 아니냐고 했더니 맞는단다. 그는 이 대회에서 생애 첫 완주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다. 완주, 42.195킬로미터. 난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몰랐다. 단 1킬로미터도 뛰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저 마라톤 선수들이나 뛰는 거리인 줄 알고 있었다.

서울에서 열리는 대회이니 아이들과 함께 응원을 나가기로 했다. 아침 일찍부터 김밥도 싸고 과일도 챙겨 집을 나섰다. 아이들 손을 잡고 나선 응원길은 무척 추웠다. 갑자기 이 남자가 무슨 옷을 입고 뛰는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주최측으로부터 받아온 티는 분명 반팔티에 반바지였기 때문이다.

잠실 운동장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중에 내가 아는 이도 한 명 끼여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도착점에 서서 아무리 둘러봐도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출발한 지 네 시간이나 지났는데 중간에 포기한 건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벌써 연락이 왔을 텐데...  아이들은 추워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남편은 어디쯤 뛰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걱정 속에 한 시간 반을 서성댔나 보다. 어디선가 아들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었다. 추위에 빨갛게 얼어 있었지만 가족을 발견한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정말 처음으로 "수고했다"는 말을 그에게 했다. 무사히 그곳에 와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웠다. 나의 끈질긴 구박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열심히 준비하고 완주에 성공한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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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Ndoit 2006-03-22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넓으시네요. 근데 댁에 남편도 그런 맘을 아시나요?

책숲 2006-10-01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남편이 한강황단수영대회 나간 날이 생각나는군요. 황금같은 휴일에 고수부지 땡볕에서 강 건너간 남편이 돌아오길 하염없이 기다리던..그래도 메달걸고 자랑스럽게 나타난 얼굴을 보니 웃지않을수 없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