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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정복자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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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정복자.

  

  

 

   라 만차의 ‘슬픈 얼굴의 기사’ 돈 키호테는 거인과 싸우고, 두 군대 사이에 끼어들어 놀라운 무훈을 발휘하여 상대편의 왕을 사로잡고, 다른 기사와 부딪혀 그를 쓰러뜨린다. 그 뿐만이 아니다. 쇠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김없이 손을 내밀어 그 쇠사슬을 부수고, 주인으로부터 학대받는 사람을 보면 그의 창칼로 그 핍박을 풀어주려고 노력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선배 기사들의 고행을 본받아 그 또한 산 속에 들어가 깊은 고뇌에 잠긴 묵상을 몸에 익히기도 하며, 정말 필요할 때에는 성스러운 약물을 제조하여 몸을 치료한다. 성주가 어려움에 빠졌더라도 기사의 품격에 어긋나는 일이면 섣불리 뛰어들지 않는 자제심도 가졌으며, 자신의 종자인 산초에게 편력이 끝나면 백작 작위를 보장해주는 섬세함마저 가졌다.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힘은 그의 공주 둘시네아를 향한 타오르는 열정이다. 그러나 그의 공주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다른 공주를 외면하지는 않는다.

 

물론 거인이 풍차로 둔갑한다거나, 혹은 포도주 자루로 변해버린다거나 하는 일도 있고, 군대인줄 알았던 것들이 뛰어들고 보니 양떼들에 불과했다는 것은 사실 사소한 일이다. 그러다가 양치기에게 집단으로 린치를 당하여 치아가 다 빠지고 갈비뼈가 심하게 부러져버리는 것 또한 기사에게는 사소한 일이다. 그런 상황에 처하여 성스러운 약물을 복용하였으나 다만 그 약물이 몸에 맞지 않아서 사소한 구토를 할 때도 있다. 성이 갑자기 마법에 걸려 평범한 주막으로 변할 때도 있고 공주인줄 알았던 존재가 평범한 여자로 변했다거나 하는 일도 있지만, 그러다가 다시 성으로도 바뀌고 공주로 바뀌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자신의 종자에게 약속한 영지와 작위는 언제 획득할 수 있을지조차 가물거리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편력 중에 겪는 일이다. 사실 무엇보다도 그의 공주인 둘시네아는 남정네들을 두들겨 눕힐 수 있을 정도의 용맹을 보유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오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자신을 신실한 편력행에서 탈선시키려는 악마의 소행일 것이다.

 

실상은 이렇다. 라 만차의 돈 키호테는 사실 편력기사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정신이 돌아버린 것이다. 그가 살던 시기에는 더 이상의 기사도, 그리고 공주도 없었고, 다만 남은 것은 소설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전설의 시대를 살고 싶었던 그는 그런 현실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은 망상으로 빠져나가고 만다. 웃긴 것은 기사도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매우 뛰어난 지혜와 이성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사와 그의 전설에 관련된 일이라면 그저 한 눈을 가리고 앞 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게 된다. 오늘날 돈 키호테는 많이 알려져 있듯 망상에 빠진 사람을 지칭하거나, 더 나아가 이상주의자로 해석을 하게 된다.

 

사실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새로운 돈 키호테를 만난 듯했다. 나는 통섭, 으로 윌슨의 책을 처음 접했는데, 지금이야 흔한 단어이지만 내가 읽을 당시에는 단어 자체가 상당히 생소했었다. 물론 학제간의 간격을 극복하고 공통분모를 찾아 가로지르는 일, 이라는 개념 자체는 누구나 떠올릴 수 있지만, 어떤 개념이든지 그 이름이 붙을 때 제대로 연구 대상으로 잡을 수 있다. 이 통섭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인데, 통섭을 윌슨의 의도로 다시 정리하자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그 사실들에 기반한 이론을 통합’ 하는 것이다. 보통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화해, 정도로 쉽게 이해되는 경향이 있고, 윌슨 본인도 거기에 대해서 크게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조금 다르다. 저 정리를 뜯어보면 통섭, 이라는 것의 개념만 정의한 것이 아니라 그 방법론까지 정의해놓았다. 가장 먼저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을 찾는다. 그리고 그 사실들에 기반한 다양한 이론들을 수집한다. 그러면 이론들 사이에는 사실이라는 공통집합이 생긴다. 이런 이론들의 통합을 통하여 우리는 사실이라는 것에 대하여 완전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이런 통섭과 윌슨과 돈 키호테가 무슨 관계인가 하니, 이렇게 방법론까지 정의해두었기에 그렇게까지 허황되어보이지는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힘든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과 악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애로사항이 많다. 통섭도 마찬가지이다. 쉽게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통합한다, 정도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진정한 통섭의 걸림돌이 될 수 있을 것이고 - 이런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냥 사회학자가 물리학 책이나 생물학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 (혹은 그 반대가) 통섭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 그렇지는 않더라도 특히나 윌슨의 경우에는 진화론 만능주의가 아니냐, 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진화론을 중심으로 통섭을 시행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사실을 택할 것인가’도 문제가 된다. 거칠게 말해서 원자가 양성자, 중성자, 전자로 이루어져있다, 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에 해당할만한 인문학적인 이론이 있는가? 결국 인문학적인 이론과 함께 나아가려면 인간과 그 문화에 관련된 사실을 채택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통섭 자체는 필연적으로 인간중심적이라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론을 택할 것인가’ 또한 문제가 된다. 한 사실을 설명하는 두 이론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두 이론의 발전 단계가 너무나 다르면, 쉽게 말해서 그 사실을 한 이론이 다른 이론에 비하여 너무나 잘 설명한다면 우리가 굳이 두 이론을 통합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연유로 나는 통섭에 대하여 부정적 예측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부정적 예측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통섭 자체에 대하여 부정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도덕, 자유 의지, 선과 악, 등의 문제에 있어서 그런 윤리학적으로 어려운 문제의 생물학적 기반을 찾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눈을 뜨게 되고, 우리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에 획기적 변화가 올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아직은 쉽게 도달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꿈을 꾼다고 해서 누가 비난할 것인가? 모두가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더라도 누군가는 별을 바라보고 그 별을 손아귀에 쥘 꿈을 꿀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나는 윌슨에게서 돈 키호테를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앞서 인간 중심적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는 결국 ‘통섭’ 자체의 성격을 규정한다. 결국 통섭이라는 것은 윌슨에게 있어서 인간 존재의 특성에 대한 이해를 의미한다. 윌슨이 그동안 천착해온 연구 분야와 저술한 책들 (바이오필리아, 인간 본성에 관하여 등) 을 살펴보면, 결국 그의 관심사 자체가 인간을 향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관심사를 넘어 윌슨 본인은 인간 존재에 대하여 애정을 가지고 완전한 이해에 이를 수 있다는 돈 키호테적인 낙관주의를 가지고 있다. 정말 인간 존재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우리가 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이번에 그가 쓴 지구의 정복자,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여야만 할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책 이기적 유전자, 에서 개체 선택론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우리 인류는 일종의 운반자로, 자기 복제자인 유전자가 어떻게든 자신을 퍼뜨리기 위하여 잠깐 머무는 로봇과 같은 존재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유전자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존재는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거친 말로 도킨스가 표현했듯이, 우리가 피임만 하더라도 우리는 유전자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이기적 유전자’ 라고 해서 꼭 그 유전자대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이야기는 버리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이렇게 유전자 결정론으로 여기는 것은 도킨스의 저서에 대한 가장 큰 오해다.) 하지만 이렇게 도킨스가 인간의 특이한 위치를 인정하고, 유일하게 학습을 통하여 본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라고 용기를 북돋아주더라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는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왜냐하면 이런 개체선택론에서는 개체와 다른 개체 사이의 상호작용을 유전자 입장에서 해석하기에, 정작 ‘개체’ 본인의 생각으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결론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런 결론을 가져오는 것은 이타주의에 관한 것이다. 주변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이 유전자가 자신을 퍼뜨리려고 표현형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거라고? 그리고 그런 모습들 중 이타적인 모습이 가끔 보이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확산에 ‘도움’ 이 되기 때문에 보이는 거라고? 그리고 호혜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이타주의가 발달하기란 쉽지 않을 거라고?

 

이타주의가 드러나는 모습에는 크게 가지가 있다고 개체선택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이야기한다. 그 중 첫 번째는 혈연선택이다. 말 그대로 자신의 친족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 도움을 준다는 이야기이다.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는 말이다. 친족이라면 자신의 유전자를 일부라도 공유할 것이다. 이를 두고 보통 포괄적응도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 지구의 정복자, 에서는 혈연 선택과 포괄적응도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는 약간 미묘한 차이가 있다.) 두 번째 전략은 서로 같은 목표를 추구하고 있을 때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원시인이 되어 사냥감을 추적한다고 하자. 공동의 목표가 있을 때에는 서로 협력하여야만 유전자 입장에서도 좋다. 괜히 따로 떨어졌다가 사냥감에게 도리어 각개격파 당할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세 번째가 바로 호혜적 이타주이다. 트리버스가 정립한 이론인데, 쉽게 말해서 서로 오래 볼 사람이면 일단 도움을 주는 게 좋다는 이야기이다. 도와준 사람이 나를 다시 도와줄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이를 조금 수학적으로 풀어나가면 팃포탯 전략이 나오게 된다.

 

앞서 말한 문단에서 나온 용어를 조금 설명하겠다. 포괄적응도는 혈연 선택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어떤 의미에서 다른가? 보통 진화론에서 적응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자손을 많이 남긴다, 라는 이야기로 받아들여도 좋다. 그렇다면 포괄적응도는 포괄해서 자손을 많이 남긴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굳이 자손을 낳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내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자손을 낳아준다면, 그 자손을 통하여 나는 유전자를 전한 것이다. 이런 배경 하에 좀 더 엄밀하게 살펴보면, 다음을 생각하여야만 한다.

 

먼저 포괄적응도는 개체 간의 상호작용을 고려한다. 포괄적응도에 관한 등식은 다음과 같다. 개체 A의 포괄적응도 = 상호 작용이 없을 때 A 개체의 적응도 + (유전자 형질 a가 A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도와 형질 a가 A와 근연관계에 놓인 개체 B에 영향을 주는 정도의 합) 여기서 볼 때 실질적으로 혈연 선택이 작용하는 곳은 괄호 안이기 때문에 혈연선택은 엄밀히 말하자면 포괄적응도에 포함되는 그리하여 그 적응도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볼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포괄적응도와 혈연선택을 동일하게 두는 것은 미묘한 문제다. 윌슨은 이를 무시하고 (사실 이타적이나 이기적 행동을 고려하기 위해서는 상호작용이 없을 때의 A개체의 적응도를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에 ‘무시’ 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둘을 동일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무시한 경우 우리는 부등식을 하나만 고려하면 된다. 바로 rb-c>0 라는 것이다. r은 근친도, 얼마나 두 개체가 가까운가 (보통 유전적으로 가까운가, 라는 말을 사용한다.)를 의미하는 수치이며, b는 어떤 행위를 했을 때의 이득, c는 그 행위를 했을 때의 불이익이다. 그야말로 명료한 수식이다.

 

팃포탯 전략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쉽게 이야기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죄수의 딜레마, 라는 이야기를 안다. 이를 돌파하는 전략이 바로 팃포탯 전략이다. 처음에는 협력한다. 만약에 상대방이 나를 배신한다면 그 다음에 똑같이 배신한다. 이런 단순한 전략이 죄수의 딜레마를 헤쳐나가는 전략이 된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걸까? 수학적인 증명은 여기서 하기가 곤란할테지만 경험적인 사실은 알려줄 수 있다. 액설로드라는 학자가 이 죄수의 딜레마를 돌파할 전략을 찾기 위하여 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 그 대회에서 우승한 전략이 바로 팃포탯이다. 결국 계속 관계가 유지된다면 협력하는 것이 서로에 이득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호 호혜적 이타주의가 성립할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개체적인 입장이 아니라 집단적인 입장이라면? 집단 선택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사실 저렇게 세 가지로 개체의 행동을 분석할 필요가 없다. 그냥 이타적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 이기적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집단을 막아낼 수 있다, 라고 해석하면 이타주의에 대한 해석이 완료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입장에 지구의 정복자, 가 있다.

 

사실 지구의 정복자, 의 저자인 윌슨은 개체선택설을 지지하던 사람이었다. 물론 받아들이는 데에는 심리적으로 저항이 컸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지금와서 이렇게 개종을 한 것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가진다. 잘 살펴보면 포괄적합도, 라는 말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 rb-c>0이어야 남을 도울 수 있다면, r은 어떻게 결정하는가? 윌슨은 바로 이 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실질적인 생물 종들의 관찰에서는 이 근연도 개념이 얼마나 허구인지 드러난다고 윌슨은 역설한다. 또한 적용이 되는 경우더라도 근연도 r이 r의 의미를 가지지 못할 정도로 크게 확장되어야만 하는 경우가 많으니 도대체 r을 설정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결국 r이라는 것의 모호한 정의에 윌슨은 통렬한 비판을 날리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윌슨의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윌슨은 개체 선택을 버리고 집단 선택 쪽으로 넘어가서 새로운 수학적 모델을 만든다. 그것이 바로 다수준 선택이다. 개체 선택과 집단 선택이 각각 다른 수준에서 일어난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두 이론을 종합한 이론인데,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탄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먼저 인류가 어떻게 진사회성 (분업을 하고 세대를 거쳐 번식을 하는)을 획득하게 되었는지를 윌슨은 추적한다. 그리고 그 추적의 결과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정리된다 : 개체 선택을 통하여 여러 선적응들을 거쳐서 인류가 진사회성의 문턱에 도달하게 되었고, 그 선적응들을 통하여 발생한 집단에서 다시 자연 선택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윌슨의 주장에서도 문제가 있다. 책 말미의 해설에서 최재천 교수가 해설하듯이 윌슨 본인은 개미를 연구하던 사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개체선택을 개미와 같은 초유기체적인 의미에서 이해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도 이야기했듯 포괄적응도와 혈연선택을 거의 비슷한 의미로 계속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 오해라면 오해라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포괄적응도를 어디까지 해석할 것인가? 사실 윌슨이 제기한 문제는 근친도 r을 단순히 혈연을 넘어 관계를 맺는 전부로 본다면 사라질 수 있는 문제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경우 윌슨의 말대로 r의 정의가 그때그때 달라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고 모호함이라는 측면은 해소되지가 않지만 이론의 통일성이라는 측면은 유지가 된다.

 

또한 사회 자체의 근원적인 억압성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윌슨의 이론은 해석에 논쟁의 불씨를 남겼다. 윌슨의 이론을 다시 살펴보자. 여러 선적응들을 거쳐서 진사회성의 문턱에 이르러 집단을 이루고 사회성을 발달시켰다. 이 과정을 조금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인간의 조상은 육지에 살고, 손이 있으며, 어느 순간 고기를 먹고 불을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에 인간은 불에 타죽은 고기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죽은 생고기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고기의 맛을 알게 된 인간의 조상은,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고기를 먹기 위하여 사냥을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한 명보다는 두 명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으리라. 초기의 집단은 혈연으로 매개되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혈연이 집단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아이를 놓기만 하면 집단이 될 수 있다.) 여기에는 자손이 집을 떠나지 않는다는 행동에 관한 개체 수준의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혈연 수준의 집단은 다른 혈연 수준의 집단과 함께 더 큰 집단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모닥불을 피워서 둥글게 둘러앉아있는 큰 집단을 생각해보라.

 

여기에 도달할 때 이 큰 집단은 굳이 혈연만으로 형성된 집단은 아닐 것이다. 이 커다란 집단이 계속 살아남으려면 결국에는 이타주의적인 심성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윌슨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이타주의적 유전자가 이기주의적 유전자 풀을 막아설 수 있게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라. 이렇게 큰 사회는 결국 이타주의적인 심성을 가진 사람들로 유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좀 더 명료하게 이야기하자면 희생을 먹고 자란다는 이야기이다. 큰 집단을 유지하려면 개인의 희생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상태가 된다. 결국 집단 자체가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집단이 그대로 지금까지 전해졌다면, 이런 집단을 계승한 우리 사회는 어쩔 수 없이 억압적인 모습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개인을 사회를 위하여 희생으로 내모는 그런 모습 말이다. 이런 해석을 내릴 수 있다면 개체 자신이 이기적 유전자의 운반자에 불과하다는 관점보다 더 끔찍하다면 더 끔찍했지 덜 끔찍하게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윌슨은 앞서 통섭에 대하여 말해왔듯이 인간 전체에 대한 애정과 완전한 이해를 추구한다. 도킨스든 윌슨이든 인간은 특별한 존재다, 라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강조하지만, 윌슨의 경우에는 도킨스보다 좀 더 인간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그런 특별한 존재를 해석하기 위하여 집단선택론을 다시 가져오게 된 것은 아닐까? 쉽게 말해서 진정한 이타주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 존재가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무의식적인 소망을 위해서 집단선택론을 짜맞춘 것은 아닌가? 당장 오컴의 면도날을 통과시켜보라. (물론 오컴의 면도날이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왕이면 더 단순한 설명을 선호하는 경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두 번의 선택을 거치는 것과 한 번의 선택을 거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간단하게 설명이 가능할 것인가. 아마 후자인 개체 선택이 아닐까? 하지만 개체 선택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문제점들이 있기에 다수준 선택을 버릴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윌슨의 다수준 선택과 개체 선택을 두고 어떤 관점에서 이타적 행동의 진화를 바라보아야 할 것일까? 사실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약간 다른 관점이며 나 스스로의 가설 수준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바라볼 수가 있다. 윌슨은 근연도 r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버린 것이라고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인간의 유전자는 같은 종인 이상 일부를 공유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인간으로 있으려면 적어도 일부의 변이는 있되 큰 수준에서는 비슷한 표현형을 보이는 유전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런 부분을 편의상 r<0.5로 두고, r>0.5가 될 때 혈연관계를 드러낸다고 보면, 결국 r값은 0.5이상과 이하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0.5란 수치는 임의로 잡은 것이다.) r<0.5인 부분인 비혈연부분을 집단선택으로 바꾸게 되면 전체 r값에서는 다수준 선택이 된다.

 

이런 식으로 해석할 때 어떤 장점이 있는가? 일단 호혜적 이타주의에 기대지 않더라도 한 사람이 전혀 혈연 관계도 없으며 집단에 속해있지도 않는 다른 사람을 구하러 뛰어드는 이타주의적 행동들을 설명할 수 있다. 또한 더 나아가 한 종이 아예 다른 종을 구하는 행위를 설명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왜 사람이 원숭이를 위해서 물에 뛰어들고 고양이를 위해서 도로에 뛰어들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비슷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단점도 있다. 단적인 예로 침팬지가 사람과 98퍼센트 정도 비슷하다는 말은 매우 허술한 말이다. 보통 두 종이 유전적으로 비슷하다, 라는 이야기는 생물학적인 연구방법 중 BLAST법을 사용하여 정렬하고는 확인해낸다. 그런데 이 확인한다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유연관계가 높을 것이다, 라는 것만 보장할 뿐이다. 그렇게 기반 자체가 허술한데 어떻게 종 내부의 이타주의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종 내부의 이타주의를 설명할 수 없는데 하물며 종 간의 이타주의는 오죽하겠는가.

 

이런 가설들이나 논쟁은 접어두고 이렇게 글 말미에 고백하자면 나 또한 불가능해보이는 꿈을 꾼다. 나 또한 돈키호테와 다를 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윌슨의 이론에 호의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앞서 길게 말한 것처럼 다수준 선택과 통섭 이론에 대하여 조금 부정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런 다수준 선택을 통하여 인류의 문화가 유전자들과 공진화해왔다는 것이 제대로 밝혀진다면 통섭에 큰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통섭을 바라고 있고, 인문학적인 견지에서의 빅히스토리big history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방법이든지 하나의 묶음으로 이루어지는 그런 꿈을 꾸고 있다. 물론 이런 불가능해보이는 꿈을 꾸는 사람들 앞에는 풍차가 거인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주변 모두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단적으로 이번 책에 대하여 도킨스가 내린 평가를 보라.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다’ 라고 말하지 않는가? 하지만 윌슨은 계속 자신의 작업에 대하여 거대한 그림을 그려왔고 일관성을 가지고 계속 학문을 연구해나가고 있다. 그 집대성이 바로 이 책이며, 그가 내린 결론과 연구의 결과는 인간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 쓰일 것이다. 다수준 선택이 옳든 그렇지 않든 적어도 이 자세 - 현실에 굴하지 않고 돈 키호테처럼 이상을 쫓는 자세는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꼭 배워야 하지 않을까.

 

   

 

 

 

p. s. 아주 흥미로운 가설이 떠올라 논문을 써볼까 생각중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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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1-23 02:02   좋아요 0 | URL
다 알고서 봤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이 책을 쓴 사람이 하려고 하는 게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구나 하는 것은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렵다고 해도 그런 것은 마음 쓰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하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그런 사람이 있었기에 여러가지가 나왔을 테죠 돈키호테가 없었다면, 지금은 이런 사람을 뭐라고 했을까요^^

사람이 자신과는 다른 종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목숨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윌슨은 근연도 r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고 생각하는 거 맞을 것 같아요

논문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희선

가연 2014-01-26 22:04   좋아요 0 | URL
ㅎㅎㅎ 사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일단 좀 더 지켜봐야될 것 같아요. 뭐랄까 저자의 태도는 본받을 만 하지만 집단선택론은 좀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분이랄까.

yamoo 2014-01-23 12:58   좋아요 0 | URL
오,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이 책 한 번 훑어보고 구입해야 겠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가연 2014-01-26 22:09   좋아요 0 | URL
ㅎㅎㅎ저자의 모든 책들을 모두 총집결한 느낌을 주는 책이라.. 제가 볼때는 읽어야 할 책 같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 저자의 주장 자체를 받아들이기는... 리뷰에서는 직접적으로 이런 저런 부분을 지적하지는 않았지만요. ㅎㅎㅎ 평가가 갈릴 수 있으니 한 번 직접 훑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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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2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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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바람의 화원, 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된 적 있다. 해원 신윤복이 만약에 여자였다면? 이라는 가정으로부터 시작한 그 드라마는 단원 김홍도와 신윤복이 만나는 장면과, 신윤복이 어떻게 조선의 뛰어난 화가로 우뚝 서게 되는지를 세밀하게 그려내었다. 물론 배우들의 열연도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김홍도의 경우에는 파리의 연인, 쩐의 전쟁 등과 같은 드라마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박신양이 맡았고, 해원 신윤복의 경우 당시만 해도 국민 여동생, 이라는 말이 전혀 부끄럽지 않던 문근영이 맡았다. 박신양은 (개인적인 평이지만) 비록 이전의 자신의 캐릭터 - 버럭 소리 지르며 윽박지르는 모습이 강한 - 에서 크게 벗어난 모습은 보이지 못했지만, 자유로운 김홍도를 그려내는데 성공했으며 문근영은 문채영과의 소위 말하는 ‘닷냥 커플’ 에피소드를 통하여 실제로 배우자신이 미소년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남장여인의 모습을 잘 그려내었다. 그 이후로 문근영이 남장이 너무 어울려 버리는 바람에 도리어 캐릭터가 굳어져버린 감이 있다는 것은 논외로 하고서 말이다. (실제로 ‘불의 여신 정이’ 와 같은 드라마에서도 남장을 했다.)

 

물론 아쉽게도 드라마 자체는 그 당시 비슷한 시간대에 방영했었던 베토벤 바이러스, 라는 강풍을 만나서 조금 휘청거렸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베토벤 바이러스의 김명민은 그야말로 본인이 강마에 자신이 된 것처럼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연기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나 또한 TV에서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면서 ‘똥덩어리’ 라는 욕을 먹은 첼로연주자가 그런 곤욕에서 벗어나 리베라탱고를 첼로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는 베토벤 바이러스만큼이나 바람의 화원에 관심이 많았다. 베토벤 바이러스에 강마에가 있었다면 바람의 화원에는 버럭 김홍도와 닷냥 커플이 있었다. 아까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을 이야기했었으니 바람의 화원에서도 기억에 남는 장면을 이야기하여야 공평할 듯싶다. 사실 지금도 그 드라마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극 말미에 두 화가, 혜원과 단원은 그림을 통하여 승패를 가르게 된다.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계략에 빠져 생겼던 것 같다. 그 ‘결투장’에서 혜원은 두 여인의 검무를 담은 ‘쌍검대무’ 라는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검색해서 보면 알겠지만 역동적 모습과 뛰어난 색감은 가히 일절이라고 불릴만하다. 여기에 대응하여 단원이 그린 작품은 ‘씨름’ 이다. 마찬가지로 주변의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그대로 화폭에 담은 그림이다. 금방이라도 한쪽으로 넘어갈 것 같지만 넘어가지 않고, 씨름을 하는 당사자들만 초조한 것이 아니라 지켜보는 구경꾼들도 점차 초조해지고 계속 손에 땀을 쥐게 된다. 이런 작품들이 서로 맞붙었으니 승패를 가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승패를 가리기 위하여 판정하는 사람들이 각각의 더 나은 점을 찾아내려고 하고, 김홍도의 작품인 씨름, 에서의 실수를 찾아내고 (이 부분은 드라마적인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있는 부분이다. 물론 관점에 따라 의견이 다르지만 말이다. 혹시나 흥미가 생긴다면 직접 찾아보기를 바란다.) 결국에는 화려한 혜원의 그림에 손을 들어주려고 했지만 김홍도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직 기다려보라고, 끝난 것이 아니라고.

 

실제로 총칼을 휘두른 대결은 아니었지만, 정신적 혈투는 그 이상이었으리라. 판정하는 동안 시간은 점심을 지나 저녁으로 지나갔다. 이윽고 저녁이 되어 해가 뉘엿뉘엿 서쪽하늘로 건너갈 때, 갑자기 김홍도는 자신의 그림에 햇살을 비추어보라고 권한다. 과연 그랬다! 김홍도의 씨름, 은 햇살에 따라 그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그림이었던 것이다. 저녁놀에 따라 황토색으로 화폭은 타오르고 이윽고 씨름의 역동성이 더욱 살아 숨쉬게 되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찬탄을 금치 못하고 이윽고 다시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니, 그들은 어쩌면 자신들의 비평 능력의 한계를 느꼈으리라. 결국 그 승부는 무승부가 되었다.

 

사실은 이랬다. 신윤복과 김홍도는 수많은 수수께끼들을 자신들의 그림에 숨겨 결국에는 서로의 대결을 무승부로 만들 생각이었다. 비록 서로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가 그렇게 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왜? 그들은 화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누구보다도 서로의 능력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들은 서로를 인정했고, 그만큼이나 예술에 있어서 고하를 가르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또다른 ‘원’을 가진 오원 장승업은 생각이 좀 달랐던 모양이다. 장승업은 이렇게 말한다. ‘단원, 혜원만 원園이냐? 나도 원이다(吾園)’ 그리하여 오원이라는 호를 가지게 되었다. 장승업은 위의 단원과 혜원과는 달리 호승심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위의 단원과 혜원의 대결은 실제로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그들의 그림에서는 일종의 여유가 느껴진다. 하지만 오원의 작품들, 특히나 책 명작 순례, 에 실린 쏘가리, 를 보면 이 책의 저자 유홍준은 ‘화면에 신선한 멋과 유머를’ 느낄 수 있다, 고 이야기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에라 모르겠다, 빨리 그려주자, 라는 느낌을 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시간에 쫓겨 그린 것 같다, 라는 느낌이랄까. 비록 장승업의 모든 작품들이 다 이렇지는 않고, 실제로 그의 명작은 따로 있다고 하나, 그에게서 기행을 빼고 자유분방함을 제외한다면 단원이나 혜원과 같이 ‘원’이라는 호칭을 붙여주기에는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앞서 말했든 예술에 고하를 가르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마 단원이나 혜원이 내가 멋대로 내린 결론인 ‘오원은 원이라고 붙이기에는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를 들으면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말이다. 하지만 나처럼 눈이 뜨이지 않고, 마음으로 즐기지 못하여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늘 서열을 매기며 감정을 무두질한다. 그리고 누구나 인정한다고 알려진, 소위 평판이 좋은 작품을 보면서 멋진 감정을 느낀 척, 만들어진 감탄사를 내뱉는다. 머리로는 고하를 가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으로까지 와 닿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변명을 하자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책 유홍준의 명작 순례, 를 읽어보면 중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남태응이라는 조선 시대의 문인이 비평을 남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명국은 신품이며 태어나면서 아는 자, 윤두서는 배워서 아는 자이며 묘품이고, 이징은 노력해서 아는 자로 법품이다’ 여기에 뒤의 견해 (남태응은 말한다, 세 사람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자고 한다면 이징은 맨 뒤를 달리리라고.) 를 종합하여 세 명의 예술적 경지를 따지자면 그의 생각으로는 쉽게 말해서 김명국>윤두서>(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징이라는 이야기이다.

 

김명국의 달마도는 누구나 한 번쯤 본 적 있을 터이고, 윤두서의 자화상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이징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징의 작품은 바로 떠오르는 작품이 없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이징이 최고일지도 모른다. 이는 자신의 안목에 달린 일이다. 바꿔서 이야기하자면, 아직 눈이 뜨이기 전에는 비평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일단 그림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되면 그 이후에는 본인이 기준이 되어 그림을 살피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위의 의견에 반하여 이징이 가장 뛰어나다,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를 두고 유한준이라는 조선 시대의 사람은 말한다. 그림에는 그것을 아는 자, 사랑하는 자, 보는 자, 모으는 자, 가 있는데 이윽고 경지에 이르러 그림의 법도와 형태, 조화를 잘 ‘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렇게 사랑하게 되면 참되게 보게 되며, 참되게 보게 되면 모으게 된다고 말이다. 이 말만큼 이 책 ‘명작 순례’ 의 목적을 잘 드러내는 말은 없으리라.

 

무엇보다도 책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글귀는 능호관 이인상, 에 대하여 저자인 유홍준이 적은 부제목이다. 능호관 이인상은 몇 명의 벗들과 함께 수많은 시회를 가졌고, 그 시회에서는 글과 그림이 춤을 추었다. 만약에 그런 시회가 없었더라면, 그런 모임들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껏 명작이라고 일컫는 '수하한담도' 가 탄생하지 못했으리라. 수하한담도는 저자 유홍준의 말을 빌리자면 '계곡은 그윽하고 나뭇잎은 무성하여 시원스러운 그늘을 보이며 그리하여 그 서정이 자못 그윽한' 그림이다. 하지만 나는 그림의 기법을 보면서 평가를 내릴 입장은 못되고, 다만 능호관이 이 그림에 적은 연유로 이 그림이 걸작이라고 판단할 따름이다. 능호관은 자신의 그림에 이렇게 적는다.

 

이번에는 남이 그림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를 쓴다.

 

능호관에게는 임매라는 친구가 있었으나, 그 친구는 성품이 너그러워 그림을 주변에 다 나누어주고만다. 그게 능호관에게는 조금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그림을 억지로라도 그에게 주기 위하여 그림의 한쪽에 저렇게 적어놓는다. 즉, 다음과 같은 말이다. 이 책의 저자인 유홍준이 이 주제에 붙인 부제처럼 '이 그림은 그대를 위해 그린다고 미리 적어놓노라', 라고. 어찌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일수도 있고, 어린 아이들처럼 치기 어린 이야기일수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상대에게 주기 위하여 일종의 '찜'을 해놓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만큼 순수했던 능호관과 임매의 관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렇게 '찜'해놓지라도 않으면 주변에 다 나누어줄 친구를 그렸으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은 일종의 '찜'이다. 저자 유홍준은 이야기한다. 왜 책을 펴내느냐면, 그게 스스로가 세상에 진 빚이라고 생각한 것을 갚아나가는 과정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라고. 이 책은 문화재와 우리 미술사에 무관심했던 우리를 위한 책이다. 미술사적인 지식을 통하여 우리의 안목은 넓어질 수 있을 것이고, 높아질 것이라고 여기기에 쓴 책이다. 마치 위의 임매와 능호관의 관계와 흡사하지 않는가? 이번에는 그대가 꼭 알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 책을 썼노라, 라고.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쳐 참되게 알게 되면 우리는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되게 보게 되고, 이윽고 모으고 관심을 가지게 될테며, 우리의 기준을 세워 고전 그림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아무쪼록 저자의 기대대로 이 책이 우리미술사에 관심을 환기시키기를 바랄 따름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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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1-21 01:02   좋아요 0 | URL
바람의 화원, 저는 책도 드라마도 못 봤습니다 그런데 라디오 방송에서 읽어줄 때 조금 들었습니다 다는 아니지만 대충 알게 되었습니다 띄엄띄엄 안다고 할 수 있군요 언젠가 책을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나라 미술에 관심을 갖고 잘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겠죠 그래서 다른 나라에 빼앗기기도 하고, 누군가는 몰래 팔기도 했을 테죠 이런 것이 생각나다니... 처음에는 잘 몰라도 보다보면 조금은 알지도 모르죠 이 책이 그런 도움을 주겠군요^^


희선

가연 2014-01-30 00:09   좋아요 0 | URL
저도 요즘은 거의 안봐서ㅎㅎㅎ 이 책은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요ㅎㅎ 우리 나라 관련하여서 다룬 책이 글쎄.. 잘 모르겠네요

2014-01-21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30 0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루토 크라트]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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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뭐 했어요?"

 

"마그나 카르타를 샀어."

 

사모펀드의 거물 데이비드 루벤스타인은 짐짓 덤덤한 체 표정을 굳히고 있었지만, 실제 그의 내면은 떨리고 있었다. 마치 초등학생으로 돌아가 숙제를 보여주는 기분이랄까. 지금껏 자신은 아내의 저런 일상적인 질문에 일상적인 답변으로 일관해왔었다. 예를 들자면 '오늘은 김-치, 라는 음식을 먹었어.' 라던가, 혹은 '알잖아, 내 직장. 사모펀드에서 투자자 모집하였다구.' 정도로 응대해왔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마그나카르타, 라니. 자신이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미국, 미국 자체의 근간을 이루는 문서나 다름없는 그 마그나카르타, 를 자신이 구입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것을 꺼내 자신의 아내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위의 짧은 일화는 내가 이 책, 플루토크라트, 를 읽으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이야기에 적당히 살을 붙여 만들어낸 창작이다. 실제로 루벤스타인이 김치를 먹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위 일화의 주인공 데이비드 루벤스타인은 2012년 기준으로 포브스 추정 28억 달러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인맥도 대단한데, 그가 공동으로 설립한 그룹에서 전 대통령인 조지 H. W. 부시가 선임 고문으로 활동하기까지도 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정도로 부와 권력이 많은 사람이라면 김치정도는 먹어보지 않았을까? 크리스티아 프릴랜드가 지은 플루토크라트, 에서는 스스로의 제목이기도 한 플루토크라트, 를 이렇게 정의한다. 플루토 - 부유함, 크라트 - 권력. 부유함과 권력을 모조리 갖춘 계층이라고 말이다. 위의 루벤스타인이라면 분명 이 책에서 말하는 것 처럼 '진정한 플루토크라트' 라고 불릴 수 있으리라.

 

그런데 이런 일화에서 루벤스타인의 아내가 어떤 표정을 지엇을런지는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만약에 아내가 마그나카르타가 어떤 것인지 모른다면 그 판본을 보고도 그저 덤덤하게 '뭐에요, 당신. 고작 그런 문서나 사려고 돈을 2130만 달러나 썼어요?'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는 위의 일화에서 루벤스타인이 기대했던 반응인 '어머나, Oh, My, God, 정말 말도 안돼, 지금 내 눈 앞의 이 문서가 마그나카르타라구요?' 라고 반응했었을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떤 반응을 보였을런지는 당장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아예 정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 따르면 플루토크라트들은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과 결혼할 가능성이 높다. 이 말은 루벤스타인이 마그나카르타를 알 정도로 교육을 받았다면, 자신의 아내도 그 정도 교육은 받았으리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루벤스타인이 처음 경매에서 마그나카르타를 보고 느꼈던 감정을 그의 아내도 받았을 가능성이 높으리라. 그런 점에서 볼때 아마도 후자의 반응인 'Oh, My, God'을 외쳤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리라.

 

이 뿐만이 아니다. 이런 플루토크라트라고 불리는 계층의 높은 교육 수준은 단순히 남편과 아내 서로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결론부에서 예시로 드는 루스 시먼스 - 아이비 리그 대학인 브라운 대학의 총장 - 와의 대화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손녀가 남았거든요,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무슨 때가 아니라는 이야기인가? 동문들의 자녀들에게 특혜를 주는 입학 시스템의 폐지에 대하여 질문을 했을 때 나온 말이다. 즉, 아직 특혜를 주는 시스템을 폐지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며, 이 말은 곧 자신의 손녀도 브라운 대학에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게 하겠다는 이야기이다. 아들이나 딸로도 모자라서 손녀까지 해당된다. 이런 교육을 받은 손녀는 자라서 자신 또한 비슷한 위치에서 비슷한 일을 할 것이다. 글자 그대로 '세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플루토크라트들이 세습을 받으며 자신의 계층을 유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그 선조가 있듯, 플루토크라트들도 처음부터 부와 권력을 모두 가지며 생활을 하던 사람은 아니었으리라. 그렇다면 그런 플루토크라트들은 어떤 배경에서,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을까, 라는 궁금증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혹시나 우리가 - 내일을 걱정하고 모레를 걱정하는 - 플루토크라트처럼 돈과 권력, 아니 적어도 둘 중 하나라도 가질 수 있는 그런 방법이 있다변 귀가 솔깃해지지 않겠는가. 바로 그 지점을 이 책의 저자 크리스티아 프릴랜드는 돋보기로 들여다본다. 물론 저자는 단순히 '플루토크라트가 되는 가장 쉬운 방법' 따위의 책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 책의 시작지점에서 이런 말을 한다. 이 책은 '부자와 유명인의 라이프스타일' 이라는 프로그램도 아니며, '누구의 죄인가' 의 리메이크버전도 아니라고. 다만 새로운 현실을 직시하겠다는 의미에서 책을 쓰는 것이라고 말이다.

 

플루토크라트가 생겨난 배경은 도금시대다. 특히 현대의 도금시대는 쌍둥이 도금시대라고 일컫어지는데, 신흥 개발도상국들이 자신의 도금시대에 이르게 되었을 때, 선진국들도 자신들의 도금시대에 도달하게 된 오늘날의 시대를 뜻한다. 신흥 시장의 경우 첫 번째로 겪는 것이고, 서구의 경우 두 번째로 겪는 것이다. 도금시대라는 말이 잘 입에 와닿지 않을텐데, 간단히 이야기하면 부의 축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시대라고 생각하면 얼추 들어맞을 것이다. 그런데 이 쌍둥이 도금시대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때문이라고 이 책에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기술 혁명, 세계화, 워싱턴 컨센서스(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미국식 발전 모델)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요인들은 도금 시대를 부채질시키고 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하지만 위기는 항상 기회와 함께 온다고 하던가, 방금 전 부의 축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시대가 도금시대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축적된 부들은 어디로 가겠는가? 그것은 운과 재능으로 기회를 붙잡은 사람들의 몫이 된다.

 

단순히 운으로만 플루토크라트들의 위치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고 운만으로 그들의 모든 요소가 설명된다면 그보다 더 불합리하면서, 동시에 언급할 필요조차도 없는 설명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플루토크라트들을 형성하는데 있어 운의 요소를 빼놓을 수는 없지만, 그만큼이나 그들의 특질에 대하여 언급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 책의 저자가 플루토크라트들을 관찰하면서 확인하게 된 그들의 성향은 다음과 같다. 먼저 그들은 일하는 부자, 라는 점이다. 그들은 불로소득에는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이들은 혁신가이다. 시대가 변하더라도 그 격랑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대응한다. 초기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 자수성가, 라는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의 힘만으로 아득바득 올라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만' 신경쓰면 된다는 이야기이도 하다. 동업을 하거나, 어떤 조직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면 전체를 신경써야만 하겠지만, 첫 번째 도금시대라는 파도를 타던 플루토크라트들은 그저 자신의 주머니만 벌릴만큼의 스스로의 혁신에만 힘을 쓰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러니깐 첫 번째 도금시대가 지나고 두 번째 쌍둥이 도금시대가 찾아왔을때에는 자수성가만으로는 한계가 생기게 되었다. 두 개의 도금시대가 서로 공명하면서 더욱 더 큰 파랑을 일으키기 때문이었다. 이때 플루토크라트가 가지는 특징이 하나 더 드러난다. 이들은 '냄새' 를 잘 맡는다. 책에 소개된 다음과 같은 일화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술 업계의 거물인 엘리엇 슈라지는 아이들에게 앞으로 어떤 분야를 택하게 해야 할지 질문을 받았을 때 주저없이 통계학을 꼽았다. 위 일화가 2009년에 있었던 일임을 감안하면 2013년인 현재, 슈라지가 얼마나 혜안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정보량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것을 처리하는 통계가 더욱 중요하게 된 것이다. 저자 또한 플루토크라트들의 저런 '냄새' 를 잘 맡는 능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면서 언급을 보탠다. '노벨상 수상에 있어서 얼마나 연구를 깊게 하느냐 뿐만 아니라 어떤 주제를 택하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라고. 수상자들을 플루토크라트에 비유하자면, 그들은 어떤 주제를 연구하면 노벨상을 탈 수 있을지 일종의 감각이 있었던 것이리라.

 

이런 상황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성격을 부여한다. 먼저 그들에게 자본주의를 일종의 해방신학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들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는 나쁘다. 오랜 실험에 거쳐 결국 자본주의에게 공산주의는 패배한 것이다. 만약에 공산주의가 계속 유지되었다면 러시아의 올리가르히 - 플루토크라트 - 들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붕괴와 함께 찾아온 기회를 그들은 놓치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자본주의는 일종의 해방신학이다. 이런 성격만 부여받은 것이 아니다. 저런 변화에서 한 몫을 잡을 수 있었으니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성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플루토크라트들은 저런 해방신학의 바람을 타고 자신들을 선하다, 라고 여기게 된다. 이 관념은 그들에게 있어서 거의 강박관념에 가까운데, 결국 박애 자본주의, 라는 신조어까지 만들게 된다. 이들 '새로운 박애주의자들은 오늘날 급변하는 세상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제공함으로써 자선 활동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고 확신한다.' 또한 이들은 열성적으로 '그들 자신의 재단과 연구소를 설립'하고 자신들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 초점' 을 맞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들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마셜효과, 로젠효과, 마틴효과, 마태효과 등의 네 개의 효과다. 마셜효과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일종의 부의 낙수효과다. 한 명의 부자가 생겼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아침마다 된장찌개를 끓여먹는다. 부자가 된 뒤에도 이 사람이 아침마다 된장찌개를 여전히 찾는다면? 맛있는 된장찌개를 먹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돈을 지출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부담을 느끼지는 않으리라. 맛있는 된장찌개를 사먹는 것에서 시작해서 조리장을 직접 자신의 집으로 - 웃돈을 주고서라도 - 부르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조리장입장에서는 부자의 돈이 자신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부의 낙수효과가 일어나는 것이다. 단순히 음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노래를 듣고 싶다면? 6개월만에 완벽한 조각근육을 만들고 싶다면? 부자의 욕구와 그가 원하는 서비스에 따라 흐름이 생기게 된다. 이런 부의 흐름은 부자들, 특히 최상위 플루토크라트들이 자신들이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선하다, 라는 그런 확신을 부채질한다.

 

로젠효과는 이런 것이다. 당신이 180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가정해보자. 어느 날 당신의 머리에 영감이 떠올라 후대에 컴퓨터라고 불리는 것을 개발해내었다. 그런데 당신의 아내는 당신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니 이따위 고철덩위가 무슨 쓸모가 있어요? 당장 가서 돈을 벌어와요' 그래서 당신은 이 획기적인 물건을 팔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경우 당신은 이 물건을 얼마나 팔 수 있을 것인가? 모르긴 몰라도 거의 팔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런가? 아직 시대 수준이 충분히 무르익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1800년의 시대상으로 미루어볼때 컴퓨터를 멀리 운반을 못할텐데 기껏해야 이웃에 팔려고 노력하는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리고 컴퓨터가 얼마나 효용이 있는지 알려지지도 않았다. 이를 2013년인 오늘날과 비교해본다면, 오늘날에는 저런 문제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충분히 시기도 무르익었고, 적어도 컴퓨터가 무거워서 판매를 못한다, 라는 이야기는 하지 못하리라. 거칠게 말해서 당신이 어느 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구매할 방법이 있으리라. 이를 바꿔서 이야기하자면, 오늘날의 시장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다. 더 팔 기회가 많아진 것이다. 특히나 이런 경향은 최상위에서 더 강해지는데 플루토크라트들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사업을 펼친다.

 

마틴효과는 컨설턴트이자 경영대학원 학장인 로저 마틴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효과이다. 능력과 자본이 서로 경쟁할 때 그 중심점이 인재, 플루토크라트 쪽으로 기울어진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어떤 뜻인가? 우리는 여기서 어느 시장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이 시장에는 자본이 흘러다니며, 그 자본과 인재가 경쟁을 서로 벌이게 된다. 이들 경쟁에 따라 상황은 변하며, 저 긴장상태에서 탈산업화의 자본주의가 꽃을 피우게 된다. 쉽게 이야기하면 인재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인재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지적인 능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이를 플루토크라트에 적용해보자. 플루토크라트들은 대부분 높은 학력을 가지고 있다. 소위 말하는 HYPMC에 학적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H : Havard, Y : Yale, P : Princeton, M : MIT, C : Caltech) 이들은 가장 빨리 변화가 일어나는 최첨단에 서서, 이론의 중심에서 좋은 환경을 바탕으로 교육을 받는다. 물론 미국의 대학교는 우리 나라와 달라서, 학부에 따라서 뛰어난 대학이 있을 수 있다. (의학의 존스 홉킨스 대학이 바로 그 예시다.) 하지만 저들 대학이 세계적으로 이론과 변화의 중심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리라. 이들 대학에서 고등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획득하는 과정을 통하여 플루토크라트들은 남들보다 한걸음 앞서서 변화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기업인들은 서로가 서로의 인맥이 되며, 앞선 지식에 힘입어 결국 더 좋은 거래 조건을 형성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마태효과다. 아마 저 네가지 효과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효과가 바로 마태효과이리라. 지그문트 바우만, 의 우리는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에도 핵심적으로 인용되는 효과이기도 한데,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된다. '있는 자는 받아서 더욱 풍족해지지만,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마저 빼앗기게 된다.' 너무나 명징한 문장이라서 더 덧붙일 이야기는 없지만, 그래도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 수 있다. 우리는 미국의 맨하탄 계획을 떠올릴때면 가장 먼저 오펜하이머를 생각하지만, 실제로 저 맨하탄 계획은 수많은 과학자들이 집결된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인지도에서 총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만 이름이 오르내리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주요' 대학에서 연구하고 발표를 하는 과학자들이, 동일 수준의 연구 성과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보다 '덜주요' 한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들보다 더 높은 인정을 받는다고 말이다. 이런 일들이 플루토크라트와 우리들 사이의 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플루토크라트들은 돈이 있기 때문에 그 돈을 통하여 인지도를 쌓고 다시금 돈을 벌어들인다. 단적인 예로 패리스 힐튼을 보라. 그녀는 자신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자서전까지 쓰지 않았던가.

 

이런 효과들을 후광으로 업은 플루토크라트들이지만 그런 그들에게도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불행한 성장 패러독스' 이다. 불행한 성장 패러독스, 는 에두아르도 로라 - 행복 지수에 대하여 연구를 한 연구원 - 와 캐럴 그레이엄 - 브루킹스 연구소 행복연구원 - 이 사용한 용어인데, 이 용어를 이해하기 위하여 이 책에서 든 예를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 '농부들이 도시로 넘어가면서 더 잘 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농촌에 살 때보다 소득에 대하여 불만을 더 많이 느끼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누구도 여기에 대해서 뚜렷한 대답은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현상이 모든 계층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플루토크라트와 그 밑의 계층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플루토크라트들을 억만장자라고 편의상 부르고, 그 밑의 계층을 편의상 백만장자라고 부르도록 하자. 둘다 일반적으로 소득을 버는 사람들의 범주에 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서도 미묘한 긴장관계가 형성이 되는데, 그것은 백만장자의 억만장자에 대한 질투에 기인한다. 소득 수준 10퍼센트의 백만장자는 하위 90퍼센트보다 더 '금전적으로 잘 산다.' 하지만 이 10퍼센트들은 위의 1퍼센트의 억만장자들을 보면서 자신들의 재산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게 된다. 백만장자들은 스스로에게 늘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저들과 내가 어떤 차이가 있기에 이렇게 소득 차이가 크게 되었을까?

 

이런 현상은 플루토크라트들에게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준다. 현명한 플루토크라트들이라면 알 것이다. 피라미드 형태가 계속 유지되려면 아래 계층 - 특히 받침 부분 - 이 잘 살아야 된다. 그렇지 않다면 피라미드는 무너져버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플루토크라트들은 강박적으로 자신들을 선한 쪽으로 포장하면서 사회적 환원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이 책에 따르면 '20세기는 포용적인 사회의 시대가 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말은 아래 계층들이 듣기에는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래 계층이 플루토크라트들이 던져주는 떡이나 받아먹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해버렸다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좀 더 생각을 진행시킨다면 앞서 말한 백만장자의 억만장자에 대한 질투는 결국 질투로 그칠 수 밖에 없다. 억만장자들은 자신들의 이미지까지 자선 사업을 통하여 바꾸려 노력할 수 있지만, 백만장자들은 억눌린 아래 계층의 '불행한 성장 효과' 에 따른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야 할테니 말이다.

 

플루토크라트들이 꾸준히 사회적 환원이라던가, 포용력을 길러 아래 계층의 성장을 돕는다고 하지만, 쌍둥이 도금시대인 현대를 돌이켜보면, 사실 그 사회적 환원이 꼭 자국의 환원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계 시민에 가깝고, 자신이 영향력을 가장 크게 미칠 수 있는 곳에 자신의 자본을 사용하겠다는 그들의 생각으로 볼때, 그런 자선 행위들마저도 자신의 자본을 극대화시키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쌍둥이 도금시대는 신흥시장과 서구시장으로 이루어진 시대이다. 그렇다면 좀 더 발전가능성이 높아보이는 신흥시장에 자본을 투입하는 것이 자신의 자산을 증진시키는데도 훨씬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상황이 반복됨에 따라 점차 백만장자들은 사라지고, 세계 곳곳의 중산층 계급의 대두로 결론이 날 가능성이 높게 된다. 이렇게 되어 플루토크라트의 아성에 도전하는 백만장자들은 분쇄된다. (드물게 운좋은, 혹은 재능이 뛰어난 몇 몇 백만장자들은 이런 흐름에서 자본을 재빠르게 흡수하여 억만장자로 뛰어 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앞으로도 여전히 플루토크라트들이 자신들의 계층을 지키며 유지될 것인가? 이미 상류층인 사람들은 영원히 상류층으로 남고, 하류층이었던 사람들은 영원히 하류층으로 남을 것인가? 이런 플루토크라트에 대한 가호는 어디까지 지속될까? 그들의 운은? 그들의 재능은 어디까지 지속될 것인가?

 

 이 책의 저자는 자본주의 자체를 긍정하는 관점에서 쓰고 있기에 그로 인하여 도출되는 결론 자체는 온건한 편이다. 그 결론은 플루토크라트들이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아야 한다, 정도가 될 것이다. 그들은 항상 자신들에게 번영을 안겨준 사회 자체를 무너뜨릴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운명을 저들 플루토크라트의 손에 맡겨야 한다니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결국은 그들의 자비로 세계가 유지될지도 모른다, 는 이야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워렌 버핏을 필두로 한 슈퍼 리치들이 모여 지진 구호활동에 나서는 소설이 있다. 워렌 버핏의 전기인 스노볼, 에 소개되는 일화인데, 저 소설을 보고 워렌 버핏은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물론 워렌 버핏이라면 '착한 부자'에 속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착하든 말든 실제 현실이 저 소설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우리에게 씁쓸한 맛을 안겨준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없고 열리지 않는 문은 없다. 그리고 플루토크라트들 자신들도 깨닫고 있겠지만 끝나지 않는 운은 없으며 영원한 축복은 없는 것이다. 앞으로의 세계는 이미 상류층인 사람들이 자신들의 계층에 다른 사람이 진입하는 것을 막을 것이기에 사회적 유동성이 한쪽으로만 커져만 갈 것이며, 이렇게 유동성이 큰 사회에서 아래로 추락한다는 것은 다시는 위로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쪽으로만 작용하는 유동성이기에 아래로 추락하는 계층만 존재할 뿐,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잡는 사람은 거의 등장하지를 못한다. 이런 과정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결국 위의 계층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는 플루토크라트들 자신들도 바라는 결과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떤 방안을 세울 것인가? 하지만 플루토크라트들도, 우리들도 마땅한 방안을 바로 내놓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만은 짐작할 수 있다. 이 방안을 구상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을.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인류가 개발한 최고의 시스템' 이라는 저자의 말에서 조금만 벗어난다면 단순히 그들의 자비에만 기대는 것이 아닌, 지금 플루토크라트들이 휩쓸고 있는 소설같은 현실을 극복할 방안을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대로 한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사회적 유동성을 막을 궁리를 할 수 있을테고, 플루토크라트들은 플루토크라트대로 유동성을 양방향으로 만들려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을 위해서 플루토크라트들과 플루토크라트들이 아닌 '우리'들이 머리를 맞대어 궁리할 때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p. s. 임재범의 다시 사랑할 수 있는데, 를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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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2-25 00:01   좋아요 0 | URL
얼마전에 도서관에서 이 책 봤습니다 글을 보니 플루토크라트야말로 저와 상관없는 세상 사람들이군요^^ 그런데 부자들이 자선사업을 하는 것이 결국 자신을 위해서였군요 하긴 보통 사람이 자원봉사를 하는 것도 결국은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런 일을 해서 얻는 기쁨이 있으니까요 그래도 보통 사람은 그저 기쁨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게 조금 다르군요 아니, 엄청난 부자들도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로 기쁨을 느끼겠지요 꼭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하는 것만은 아닐 거예요 이런 생각을...^^

사실 평소에는 플라토크라트 같은 사람 생각하지 않는데, 이 글을 보니 플라토크라트인 사람과 아닌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지금만 이렇게 말하는 것일지도...

멋진 성탄절이기를 바랍니다^^


희선

가연 2014-01-03 22:13   좋아요 0 | URL
ㅎㅎ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플루토크라트가 상관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희선님 말씀대로 누군가를 돕는 일로 기뻐하는 사람들도 존재하겠지만.. 여기서 조금만 생각을 돌려본다면 그렇게 기쁜 일로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그거야말로 일석 이조가 아니겠습니까, 풋.

희선 2014-01-01 00:01   좋아요 0 | URL
저는 언제나 하루가 지나가고 다음날을 빨리 맞이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많은 사람이 저와 같지 않을까요 아쉽게 한해를 보내고 기쁘게 새해를 맞이했겠지요 가연 님은 어떠신가요

아쉬움 남기지 않게 보내야 할 텐데 언제나 아쉽군요 올해는 아쉬움이 덜하도록 보내야겠습니다 가연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늘 건강하게 지내세요 건강해야 뭐든 하죠^^


희선

가연 2014-01-03 22:14   좋아요 0 | URL
크리스마스 인사도, 새해 인사도 모두 이제야 합니다. 정말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좋은 서재 이웃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풋.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4-01-23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26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베의 사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몇 가지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겠다. 신간 평가단을 하게 되면 처음에는 누구나 책을 추천하면서 자신이 추천한 책이 되기를 바라게 되지만, 어느 정도 흐른 뒤에는 자신이 추천한 책이 꼭 선정되리라는 법은 없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자각을 겪게 된 뒤에는 책들을 훑어보면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다. '아, 제발 이번에는 이 책만은 되지 않았으면.' 라고. 그러나 세상에는 머피의 법칙, 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다보면 원치않게 자신이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책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 경우에는 평가단 리뷰어는 두 가지 과정을 밟게 된다. 하나는 자신의 기존의 편견 - 책의 소개말로 미루어 짐작했을때의 - 을 깨고 이 책은 좋은 책이다, 라고 판단하게 되거나, 혹은 자신의 원래 인상이 맞았어, 라고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게 되거나. 이번의 이 책, 일베의 사상, 이 나에게는 바로 그랬다. 책의 소개글, 아니 제목을 보자마자, 이 책만은 선정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일베에 사상이 있다고? 저자는 일베에 들어가본적은 있는 건가? 고작 몇 개월 일베에 있었던 것 가지고 사상을 찾겠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머피의 법칙, 처럼 이 책은 선정되었고, 나는 체념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체념하고 있을수는 없는 법, 이 책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고, 인터뷰 기사까지도 읽어보았다. 그러면서 조금씩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이 책에 대하여 불필요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라고. 사실 애초에 선정되지 않았으면, 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편견이었다. 그걸 자각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면서 나는 이 책에 대하여 조금씩 중립적 인상을 가지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이 책을 배송받았을 무렵에는 도리어 호감을 가질 정도가 되었달까. 그 호감은 책을 한 번 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저자가 상당히 아는 것도 많은 것 같고,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적재적소에 잘 사상가들을 배치하는 것 같다. 생각보다 글이 그럴 듯 하다, 가 첫 번째 읽을 때의 내 생각이었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읽어나갔다.

 

만약 저 시점에서 리뷰를 썼다면 이 책에 대하여 상당한 호평을 하면서 써내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너무 생각할 것들이 많아서, 잠깐 이 책을 내버려둘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완전히 잊어버린 뒤에 다시 넘겨본 이 책은 오류가 너무나 많았다. 결국 처음의 나의 첫인상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이를 두고 다시 편견으로 돌아갔다고도 이야기할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의 편견과 지금의 생각은 분명히 다르다. 처음 읽을때에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읽어나갔었는데, 내가 분명 같은 책을 보고 있는 것일까, 생각이 들 정도로. 연필을 들고 줄을 그어나가면서 읽어나가기 시작하자 책 여백에는 여러 노트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건 말이 안되지 않을까, 앞 뒤가 맞지 않다, 근거가 없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내가 지적하는 사항이 모두 옳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나는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수많은 사상가들에 대하여 전혀 정통하지 않다. (단 한명, 루소에 대해서는 조금 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정통하지 않은 것을 떠나서, 다시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연필을 든 나는 도대체 이 책에서 왜 그렇게 수많은 사상가들이 나와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 책의 내용을 이 책에 나오는 사상가들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 등장한 순서대로 나열된 이들 사상가들의 말들은 대부분 이 책에서 사용한 설명을 그대로 가져왔다. (이 부분은 중요하다. 실제로 이 사상가들이 인용된 개념을 책에서 쓰인 뜻으로 이야기했는지는 알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마르셀 모스, 의 경우 조금 자의적으로 문장을 합쳤다. 헤겔, 의 경우에는 실제로 이 책에 헤겔, 이라는 이름은 거의 나오지 않지만, 생사를 건 인정투쟁, 이라는 용어를 볼때 앞의 인정, 도 헤겔의 용어라고 판단을 내렸다. 따라서 인정투쟁, 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문장의 뜻을 좀 더 명료하게 만들었다. 하버마스의 경우에는 다 쓰는 것 보다 인용한 책을 쓰는게 나을 것 같다고 여겼다. 그 외에는 이 책에 쓰인 문장을 그대로 가져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사상가들로 정리한다는 취지에 맞게 자연스럽게 읽어나갈수 있도록 앞부분에 접속사를 넣었다.

 

 

 

조지 레이코프 : 사람들에게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라고 해도 여전히 코끼리가 생각나는 것 처럼 일베는 생각하지 마, 라고 해도 여전히 일베가 생각이 나기 마련이다.

마르셀 모스 : 원시 사회는 증여와 답례, 라는 호수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교환양식은 수평적 사회질서의 유지에 도움을 준다.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권위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책의 저자는 북아메리카 서해안의 인디언의 예를 가져온다.) 이런 양상을 우리는 인터넷 짤방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 사람이 인터넷 짤방을 제작한다. 이는 일종의 증여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는 곧이어 몰려오는 수많은 2차 짤방에 의하여 답례를 받는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1차 제작자의 권위는 사라지고 수평적 질서가 유지된다.

헤겔 1 : (이 책에는 헤겔, 이라는 직접적 이름은 단 한번 등장하지만 인정투쟁, 은 헤겔의 용어다.) 과거에는 인터넷 바깥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와 존재의의를 인정받고자 하는 인정욕구가 기반이 되었는데, 일베의 인정투쟁은 인터넷 바깥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내부로 향한다. 자신의 존재의의를 인터넷 안에서 인정받는 것이 유일한 관건이 된 것이다. 일베에서는 인터넷 고유의 상호인정의 방식을 끝까지 밀고나간다.

헤겔 2 : 오늘날 북한이 상상적인 인정투쟁의 상대가 되어버린다. 무슨 말인가 하니, 정상국가, 의 도래가 일어나면, 그 국가에서는 나 자신이 인정받을 것이고, 나 자신의 욕망이 실현될 것이다, 라는 이야기이다. 이런 정상국가는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질 수 있는데, 오늘날의 경우에는 연평도 포격, 등을 겪으면서 '북한에 큰 소리치는 나라' 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논리실증주의자 : 위의 환경을 바탕으로 하여, 오늘날 네티즌들은 일종의 아마추어 논리실증주의자처럼 행동한다. 수많은 정보들이 있어도 반드시 자신의 눈으로 검증한 뒤에 받아들인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경향은 특히 상대방과 논쟁을 벌일 때 두드러지는데, 상대방의 과거를 뒤져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확인한 뒤 사실 관계가 어긋나는 것들을 보면 일종의 '감성팔이' 에 가깝다고 본다. 여기서 일베의 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몰이상의 이상이라는 것이다. 다시는 속지 않겠다, 라는.

바움가르텐 : 저런 몰이상의 이상은 바움가르텐이 말한 이성에 대한 감성의 우위, 라는 미학으로 뒷받침 된다. 직관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미시마 유키오, 알베르트 카뮈 : 여기서 낭만적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부연하자면 자신이 생각한 이상과 전혀 다르게 행동하고 마는, 자신을 메타레벨 위에서 내려다보는 또 하나의 초월론적인 의식을 불러온다. 일베를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인터넷에서는 병맛스럽게 행동하더라도 인생은 실전, 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그런 병맛스러운 자신을 냉정히 내려다보는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 : 저게 미학이라고? 솔직히 일베는 방약무인하고 일탈행위를 일삼는 존재들 아닌가. 그래서 미학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미학이다. 원래 미학은 불편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학이라는 것은 무엇이 이상이고 무엇이 몰이상인지 구별할 수 있는 식별 체제에서 발생한 혼란스러운 변동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더 이상 자명한 것이 아나게 된다. 예술적 자율성과 비예술적 공동성의 연결성 자체가 미학적, 이다.

하버마스 : 인터넷은 공론장인가? 그렇다면 하버마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밖에 없다. 공론장의 구조변동, 사실성과 타당성,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참조하라.

아즈마 히로키 : 근데 사실 인터넷은 하버마스의 공론장으로 여기는 것 보다는 데이터베이스에 가깝다. 이상적 공론장에서 담화로 형성된 숙의민주주의는 이상이다.

루소, 아즈마 히로키 : 일반의지를 아즈마 히로키는 오늘날 인터넷에서 본다. 그에게 있어서 일반의지는 한 인격이 아니라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가시화된 집합적 무의식이다.

맑스, 헤겔 : 결국 아즈마 히로키의 주장도 완전하지는 않다. 여기서 낡은 개념을 가져온다. 인터넷에서의 화해 불가능한 갈등도 본연의 맑스적 의미에서의 계급투쟁이다. 이는 다양한 대중 분파와 지배세력 분파 사이의 갈등과 협력관계의 모습으로 진치되고 응축된다. 이러한 전치와 응축 과정에서 일어나는 생사를 건 인정투쟁 자체가 계급투쟁인 것이다.

 

 

대략 이정도가 이 책의 내용이다. 300페이지 남짓한 책이지만, 이 책은 사실 이런 사상가들에게서 인용하고, 거기에 본인의 생각을 개진한 부분을 제외하면 100페이지가 안될 것이다. 결국 저런 사상가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위의 과정을 밟아가면서 세 줄 요약을 적는다.

 

 

1. 일베는 2002년부터 시작된 촛불의 사상을 계승한다.

2. 일베는 현실의 국가, 현실의 시민사회에 대한 요구를 단념하고 인터넷 내에서의 인정투쟁 방식을 현실로 끌고 오는 새로운 유형의 젊은 우파다.

3. 이러한 일베의 사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광장, 인터넷에 모인 사람들이 이후에도 각자의 일상적 공간에서 자신의 이상을 작게나마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대략적으로 책 내용을 살펴보았다. 물론 이 책에서는 분명 옳은 분석도 존재한다. '주류 사회는 억압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와 같은 분석은 옳은 분석이다. 그러나 옳지 않은 부분들이 존재한다. 이제 저 사상가들이 맞게 쓰였는지 처음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다. 가장 먼저 이 책을 읽으면서 눈에 보이는 것은 개념들을 굳이 사상가들의 이름을 들먹일 것도 없이 일차적인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다음 문제는 실제 인터넷 상황을 자신의 이론에 억지로 끼워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부분만 취사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조지 레이코프를 시작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조지 레이코프가 한 말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조지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라고 말했다. 보수 프레임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도리어 그 프레임을 계속적으로 사회에 환기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이야기이다. 코끼리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라고 하더라도 계속 코끼리가 생각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보수의 프레임에 대하여 진보는 아예 독자적 프레임을 개발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보수의 프레임 자체에 대해서는 굳이 공격을 할 필요가 없다. 독자적 사상이 중요한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기본적으로 레이코프의 요점을 일간 베스트에라는 커뮤니티에도 적용할 수 있다' 고 말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일베를 완전히 떠나서 새로운 커뮤니티의 지평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오히려 일베는 생각하지 마, 라는 금기를 깨고 일베의 사상을 내재적으로 사고하여야 한다' 고 말이다. 레이코프의 요점을 적용한다면 차라리 일베는 생각하지 마, 라는 관점을 따르는 것이 훨씬 옳을텐데 말이다. 도리어 이런 접근은 일베에 대한 프레임만 더 지속적으로 환기하는데 관여할 것이다. 만약에 일베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책의 방향으로 삼았다면 조지 레이코프가 아닌 다른 사상가의 이야기를 가져오는게 낫지 않았을까?

 

마르셀 모스의 경우를 살펴보자. 마르셀 모스의 말을 가져오고, 그 모스의 이론을 인터넷에 적용시킨 논문을 가져왔지만, 근본적인 조건은 놓아둔 채, 증여와 답례, 그리고 호수성이라는 개념에만 너무 얽매여 있다. 마르셀 모스의 이론은 위에도 적어두었다시피 원시사회에서의 이론이다. 그렇다면 '인터넷이 원시사회란 말인가?' 책에서 개념을 사용하는데 별다른 제한을 두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전제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나, 혹은 무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자라면 오류가 생기게 되고, 후자라면 굳이 마르셀 모스, 라는 이름을 가져올 필요도 없다. 그냥 증여와 답례, 라는 개념을 쓰면 된다. 또한 저런 분석틀을 이용하여 옳은 분석을 했는가? 거기에 대해서도 고개를 갸웃거릴수 밖에 없다. 저자는 짤방을 일종의 증여와 답례의 형식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 결과 수평적 평등이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짤방의 일차저작자가 짤방을 만들어내었다고 그 권위가 소실되거나 사라지지는 않는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가면 네임드Named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한 두명씩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네임드들의 권위는 적어도 자신이 만들어낸 짤방에 있어서는 절대적이다. EXCF의 보노보노라던가, 고두익 등의 네임드를 보면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예를 든 엉덩국, 만 해도 그렇다. 엉덩국의 홍콩행 게이바, 라는 작품 이후, 수많은 패러디가 나왔지만, 그리고 수많은 짤방이 제작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엉덩국의 자신의 작품에 대한 권위가 줄어들거나 사라지지는 않았다. 누구나 저 홍콩행 게이바, 라는 작품의 패러디를 보면 가장 먼저 원작을 떠올릴 것이다. 아, 이것 재밌네, 라고 2차 패러디물 자체만으로 향유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권위의 이동이 일어나겠는가? 증여와 답례라는 형식이 맞다고 가정한다고 할지라도 이 세계에서는 마르셀 모스가 이야기한 것 처럼 수평적인 권위의 이동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도리어 인터넷 세상에서의 짤방의 2차저작은 그 원작자에게 힘을 보태어준다. 마치 판타지소설에서 드라큘라가 자신의 일족을 늘리면 늘릴수록 본인의 힘이 더 커지는 것 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언제 1차저작자가 자신의 권위를 잃는가? 그것은 1차 저작자의 짤방이 아무런 변용없이 그대로 퍼질 경우다. 무제한적으로 복제가 잃어나게 되면 될수록 도리어 1차 저작자의 작품의 후광은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증여와 답례틀로는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헤겔에 대해서는 본의아니게 인정투쟁, 생사를 건 인정투쟁 등의 단어를 헤겔사전을 통하여 알아보기는 했지만 사실 잘 아는 편은 아니다. 나로서는 앞서도 말했지만 생사를 건 인정투쟁, 이라는 용어로 미루어 판단할 때 인정투쟁을 헤겔의 용어로 판단했지만, 실제로 이 책에서 헤겔의 용어를 사용한 것인지조차 불확실하다. 하지만 건너뛰고는 자크 랑시에르에 관한 이야기는 조금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는 '미학은 원래 불편한 것이다' 라는 말을 하며 자크 랑시에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사실 자크 랑시에를 이해함에 있어 필수적인 것은 그는 바로 '정치철학자' 라는 점이다. 책의 저자가 예시로 들고 있는 '미학안의 불편함' 의 소개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랑시에르는 기본적으로 정치철학자다.' 결국 랑시에르를 이야기하면서 정치에 관한 그의 관점을 제외시키고 미학에 대한 관점만 취사선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이야기이다. 당장 랑시에르의 기본 생각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술에 있어서 창작자, 수용자로 나눠서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창작자와 수용자는 스승과 제자, 라는 관계로 변용되며 위계적 위치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런 구분을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랑시에르에 따르면 이런 감성적 영역에도 정치가 작용한다고 한다.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정치, 라는 것은 '자원의 효율적 분배' 행위를 뜻하는데, 미학 또한 보고 말하는 것, 작가가 만든 예술품과 그것을 경험하는 관객을 분배하기에 정치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라는 이야기이다. 미학이 보고 말하는 것을 분배하는데 기여한다는 말에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의문을 가질만한 것은 또 아니다. 회화, 연극 등의 예술 및 생산품들은 무엇이 지각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학은 이런 뜻에서 지극히 정치적이다.

 

이런 랑시에르의 관점을 따르면 민주주의를 거대한 불일치, 로 판단하게 된다. 합치라는 것은 숨막힐 듯한 개념이다. 불합치만이 민주주의를 오롯이 구현하는 개념이다. 앞서 말했던 스승과 제자, 창작자와 수용자, 를 가져오자. 미학은 이들 분리의 지점 '위'에 존재하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A와 B가 하나로 붙어있다고 하자. A와 B가 속한 지평에서는 이들을 분리할 방법이 없다. 더 높은 곳에서 이들을 내려볼때만 이들이 붙어있다고 판단할 수 있고, 이들을 분리시킬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미학 안의 불편함, 이라는 책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미학의 불편함이 아니라는 것에 유의하라.

 

하지만 저자는 랑시에르의 저런 정치철학적 면모는 제외하고 오직 미학에 대한 이야기만 가져와서 적용시키고 있다. 미학이 무엇이 몰이상이며, 무엇이 이상인지 구별할 수 있는 식별체제의 혼란, 이라는 말은 미학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라는 랑시에르의 말에 비추어 보았을 때 옳은 분석이라고 하기 어렵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분배, 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점은 랑시에르의 사상에서 미학, 이라는 부분만 취사선택하였기 때문에 뒤의 사상가와 상충되는 점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랑시에르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란 불일치, 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일베를 분석하면서 가져온 하버마스나 아즈마 히로키 등은 결과적으로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전제로 두고 이야기하고 있다. 논의를 통하여 합의점을 찾는 숙의민주주의와 거대한 불일치 사이에는 크나큰 간극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루소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아즈마 히로키는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을 인터넷 세상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아즈마 히로키가 보는 일반의지는 일종의 경향성이다. 얼핏 난잡하게만 보이는 검색어들이지만, 그 검색어들을 하나로 모으면 흐름을 이루고 있다고 말이다. 여기서 아즈마 히로키는 프로이트를 가져온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여기다가 적용시키는 것이다. 인터넷 기저에 깔려있는 그런 경향성, 혹은 흐름은 일종의 집단적 무의식이 되고, 그 무의식을 일반의지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 일반의지는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일종의 '분위기' 가 되고, 이런 분위기는 어떤 논의를 시작하기 전의 조건으로 작용하여 논의의 합의에 훨씬 수월하게 이르게 된다.

 

아즈마 히로키의 착상 자체는 신선하다. 저런 집단적 무의식을 일종의 분위기로 판단하여 논의가 지나치게 넓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제동 장치, 혹은 통제 조건으로 판단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발상이다. 하지만 저런 집단적 무의식을 일반의지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다. 일반의지는 말 그대로 의지, 이지 경향성이 아니다. 아즈마 히로키의 저런 일반의지론은 경향성에 따라 결국에는 수많은 일반의지, 들로 나누어질 뿐이지만, 실제로 일반의지는 오직 하나로 존재한다. 일반의지는 개인의 자유로운 계약을 통하여 형성된 공적 인격의 의지라고들 알려져 있다. 연구서 투명성과 장애물, 이라는 책에 따르면 일반의지를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은 신 엘로이즈, 에 있다. 신 엘로이즈에서 두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은 한 마을에서 한가로이 노래를 부르며 전원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한가로이 마을에서 음악이 연주되고 달콤하게 열린 과실을 주인공들은 맛본다. 그들은 어떻게 저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이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마을 축제가 열리는데, 저들 주인공들도 축제에 참가하기 위하여 준비를 하게 된다. 하나의 목표 - 축제, 라는 것에 대한 개개인들의 노력하는 모습 자체가 일종의 일반의지가 되는 것이다. 개인들이 저 축제, 라는 것에 대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는가? 자신들만의 특별한 이익을 취하려 하는가? 그런 특수의지는 저 축제의 장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민사회의 총의는 집단적 경향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집단적 경향은 무의식적인 데이터베이스에 '체현'(이 책의 말을 빌리자면)되어 있을 수 있지만, 총의는 인터넷의 무의식적 데이터베이스에 체현되어있지 않다. 일반의지는 인격도 아니지만 가시화된 집합적 무의식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일반의지는 하나의 목표와 그 목표를 이루려고 하는 구성원들이 동시에 '발생'할때 함께 발생한다. 순차적으로 무의식에서 사회를 거쳐 국가를 거쳐 발현된다고는 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이론에는 이런 헛점이 존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즈마 히로키가 자신의 일반의지, 에 관한 책의 부제에 '프로이트' 를 넣은 것이리라. 하지만 이 책에서는 프로이트에 관한 이야기는 또 제외되어 있다. 프로이트에 대한 설명도 없이 무의식, 일반의지 등을 그대로 이용하려고 하니 분석에서 어딘가 고리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이야기한다. 사실 '2008년 촛불시위의 아젠다가 근본적으로 모호했다' 고 말이다. 물론 이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촛불시위를 분석하는데 있어 수많은 담론들이 쏟아져 나왔었고, 도리어 그렇게 분석이 많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어느 하나도 딱 떨어지는 분석은 없었다, 라는 말이 될 것이다. 저런 분석은 2002년의 촛불 시위에 오히려 들어맞다고 이야기하면서 두 번의 촛불시위를 명확히 구분짓는다. 여기서 저자는 발상의 전환을 해낸다. 일베는 2008년의 촛불 시위의 굴절된 모습이라고 말이다. 촛불 시위의 일종의 몰이상성 - 외치고 싶은 것을 외치는 - 은 일베 사이트에서 몰이상성으로 구현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부분에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촛불 시위와 일베를 동일한 몰이상성은 다르다. 단순히 촛불 시위를 어디 일베따위와 비교하냐, 라는 그런 감정에서 쓰는 말이 아니다. (여담이지만 나는 다중multitude로 촛불 시위를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촛불의 몰이상성은 현실에서 말해질 수 있는 몰이상성이다. 하지만 일베의 몰이상성은 현실에서는 말할 수 없는, 주류 사회에서는 억압할 수 밖에 없는 은밀한 몰이상성이다.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 이는 인터넷 공간의 특징이다. 인터넷은 어떤 욕구가 즉물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구현되어지고 찾아지는 곳이다. 예를 들어 내가 리베라탱고, 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자. 이것을 언어로 구현시켜서 검색할 때 이 지점에서 인터넷이라는 곳이 이 욕구 '리베라탱고가 무엇이지?' 를 즉각적으로 구현시킨다. 그런데 이런 욕구충족이 바로 일어나지 않으면 짜증이 나게 된다. 거칠게 말하면 당장 인터넷을 하다가 검색이 너무 느리게 일어난다고 하자. 그러면 짜증이 나겠는가, 안나겠는가? 이런 경향은 검색에서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타인에 대한 판단, 감정, 생각도 마찬가지이고, 타인의 나에 대한 판단, 감정,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여기서 일베가 왜 저렇게 날선 비속어들을 사용하는지 떠올릴 수 있다. 그들은 상대에 대한 즉각적 반응을 이끌어내고 싶은 것이다. 욕을 하면 참을 수 없게 되어 대응을 하게 된다. 그 대응을 하게 되면 또 다른 비난이 따른다. 이는 또다른 논란을 부르고 더 크게 눈덩이처럼 쌓이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해서 일베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가장 먼저 조지 레이코프가 말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관심을 주지 마, 라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저자의 소개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반 다크 홈과 마이 리틀 포니를 좋아함, 좌우명은 딥 다크 판타지와 프렌드십 이즈 매직. 일베에 전하고 싶은 말 : '일게이들아 이정도면 ㅍㅌㅊ?' 라는데 여기에 대해서 아마 잘 모르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아서 조금 주석을 단다. 반 다크 홈은 게이 포르노 배우다. 그가 인기를 끌게 된 것은 'Lords of the lockerroom'이라는 포르노 때문인데, 이 포르노에서 반 다크 홈은 명대사를 남긴다.

 

Xuckyou

 

저자의 말에서 딥 다크 판타지, 가 무슨 의미인지도 궁금할 것이다. 저 말은 반 다크 홈의 인터뷰에서 나왔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자 그는 자신은 욕망을 채워주는 일을 한다면서 덧붙인다.

 

Their Deep♂dark♂fantasies

 

포니는 이 책에도 친절히 주석까지도 달려있으니 넘어가겠다. 말그대로 만화영화다. 마이 리틀 포니, 라는.

 

사실 이런 것들은 개인 취향이기는 하다. 하지만 소개말에 이런 말들을 넣어야 했을까, 라는 것은 조금 의문이기는 하다. 구글 검색을 통하여 들어가 본 일베의 사상, 에 대한 일베에서의 반응은 이런 식이었다. 'ㅍㅌㅊ 라니, 저자가 일베를 오래하다가 일베인이 된듯.' '형형색색의 변들을 모아서 쥐어짜니깐 뭐가 제대로 나오던?ㅋㅋㅋ' 이런 반응을 볼 때 이런 식의 접근은 지나치게 자신의 책 전체를 희화화시키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일베라는 거대한 사이트에 대하여 이런식으로나마 분석을 시도한 것은 처음이기에 그 점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요즘 좀 정신이 너무 없어서... 겨우 힘겹게 글을 쓰네요...

 

댓글 달아주신분들께는 감사하지만 나중에 좀 정신이 들면 답글을 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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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2-17 00:57   좋아요 0 | URL
저는 아주 모르는 세상 이야기 같기도 하군요 일베, 가 무엇인지 몰랐거든요(제가 모르는 게 이것만은 아니겠습니다^^) 조금(정말 아주 조금, 다른 분이 쓴 글) 살펴보니, 짧은 기간 동안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더군요 잘 모르지만 가연 님이 말한 것처럼 그곳을 바라본 것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많은 사상가들의 말을 빌려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군요 제목이 사상이어서일까요

가연 님은 참 많이도 아시는군요


희선

가연 2014-01-03 22:16   좋아요 0 | URL
요즘 세상은 워낙 복잡하고 다양한 사건이 발생해서.. 사실 굳이 일베가 무엇인가를 아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이 책 덕분에 저도 여러 사상가들을 뒤적거렸던 기억이 나네요, 풋.

2013-12-17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03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7 0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03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1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03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 다락방의 책장에서 만난 우리들의 이야기
이유경 지음 / 다시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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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기롭게 리뷰를 쓰겠다, 장담했지만, 정작 다읽고 나니 어떻게 리뷰를 써야 될지 잘 모르겠다. 이 서재를 둘러보면 알다시피 에세이에 관한 리뷰는 없다. 소설에 관한 리뷰도 몇 개 없다. 그러고보면 옛날에 신간평가단 담당자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왜 과학/인문 계열과 소설 계열에 동시에 지원을 못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는데, '과학/인문 계열 쪽에 쓰이는 리뷰와 소설을 쓸때의 리뷰는 다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는 것이 그 대답의 요지였었다. 그때는 그렇구나, 라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넘겼지만, 시간이 지난 뒤 돌이켜보면 저 말이 근거가 있다고 생각이 드는게, 당장 지금도 이렇게 막상 원래 쓰던 분야의 리뷰가 아닌, 다른 분야의 리뷰를 쓰려고 하면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써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이런 막막함을 타파하고자, 컨닝이라도 한 번 해보려고 에세이에 대한 리뷰를 쓰는 분들의 글을 읽어보았다. 컨닝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참조가 되겠지, 라고 생각하고는 신간평가단서재에서 찾아서 들어갔다. 신간평가단은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분야가 에세이/소설 등등으로 나누어져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목조차도 잘 모르는 에세이들을 검색하는 것 보다는 분류에 따라서 들어가 읽어보면 나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렇게 글들을 조금씩 읽어보았지만, 더욱더 막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 분들은 이런 책들에 대하여 어떻게 이렇게 리뷰를, 그것도 양질의 리뷰를 편하게 써내려가는걸까?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면서 말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자면, 나는 저런 책들, 예를 들어 법륜스님의 인생수업, 과 같은 책들을 저렇게 리뷰를 쓰지 못할 것이다. 만약에 나에게 인생수업, 에 대한 리뷰를 쓰라고 한다면 나는 이런 식으로 쓸 것이다. 먼저 법륜 스님에 대한 정보를 조사한다. 당장 떠오르는 것을 들자면 예능 프로그램에 나왔던 것들, 즉문즉설강의를 했던 것들을 다시금 확인해본다. 그리고 법륜 스님의 말들이 지리멸렬하지는 않는지 혹은 이상적이지는 않는지 등을 검토해본다. 다음 단계는 그런 사전 정보와 이 책을 비교해나가면서 법륜 스님이 자신의 말에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지 확인할 것이다. 만약에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지 않는다면 이 또한 지적할 점이 된다. 마찬가지로 멘토라 불리는 혜민스님을 법륜 스님에 비교하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확인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법륜 스님, 이라고 했을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즉문즉설, 에 대하여 예를 들어가며 의문을 제기할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 즉문즉설과 언어유희와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나한테는 우상도 없고, 멘토도 없다. 그리고 성역도 없고, (무엇보다도 당장은 여자친구도 없기 때문에) 당장 감정에 사로잡힐 일도 적다. 결국 어느 책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데 그다지 거리낄 것이 없다. 물론 책의 저자를 생각할때면, 그리고 그 저자가 정말 낮은 확률을 뚫고 내 리뷰를 볼때를 생각하면 막무가내로 비판할 수는 없겠지만, (칼로 흥한자 꼭 칼로 망한다.) 적어도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상대방의 말이 지리멸렬하지는 않는가, 발화하고자 하는 내용이 작용하고자 하는 '현실'에 제대로 옳은가, 와 같은 기준 등을 꼭 적용해본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어떤 식으로 글을 써야 할지 얼개가 잡혀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에세이 쪽은 좀 다른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접근할 글들이 아닌 것 같달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는 나도 좋아하고 많이 읽어보았지만, 그런 글들에 대하여 리뷰를 쓰려고 생각해본적은 없다. 마찬가지로 이번 이 책, 다락방님의 책에 대한 리뷰도 만약에 리뷰를 쓰겠다, 라는 그런 이야기를 이전에 쓰지 않았었다면 영영 쓰여지지 않았을 글이리라. 그렇기에 이 글은 읽으며 느낀 점들을 정리해서 쓰는 글에 다름아니다.

 

책을 읽다보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이 내가 읽지 않은 책들이 이렇게 많다니, 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 저 독서공감, 에 나오는 책의 90퍼센트는 읽지 않았다. 당장 첫머리를 장식하는 빅토르 위고, 의 웃는 남자는 들어보지도 못한 책이다. 두 번째는 다행히 어슐러 르 귄의 책이다. 오, 아는 책이야. 세 번째는 하트의 전쟁? 이건 무슨 책이지? 네 번째는 19세고 다섯 번째는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라는데 다섯 책을 소개하는 중 겨우 한 권만 알고 있다. 이전에 다락방님의 서재를 들르며 독서 취향이 정말 많이 다르구나, 라고 여겼었지만 이렇게까지 다를 거라고는 사실 상상도 못했다. 알고 있는게 없으니 글을 읽을때 쓸만한 사전정보가 없다. 그렇다고 이 책들에 대해 다 검색을 시행하면서 내용을 파악하는 것도 웃긴 일인 것 같고, 결국에는 반쯤 체념하다시피 그저 글에 눈을 맡기게 된다.

 

두 번째 감상은 바로 위 지점에서 시작한다. 내용을 하나도 모르는데, 글을 읽는데 지장이 없다. 예를 들어 인문학적인 책을 한 권 본다고 가정하자. 내가 좋아하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를 가져와보면, 우리는 저 논고, 를 한 번 읽기 위해서 버트런드 러셀의 수학원리에 쓰이는 기호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며, 당시의 철학 사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저 책이 이후의 논리실증주의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그리고 그런 논리실증주의자들에 대하여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말을 하는가, 등을 살펴보아야한다. 그렇다고 바로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안내서가 필요하다. 레이 몽크의 책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걸로 끝인가? 아니다. 번역본들도 여러가지가 있다. 원어를 읽지 못하는 이상 몇 권을 함께 보아야 한다.. 등등등. 한 권의 책을 읽기 위하여 정말 수많은 책들과 수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게 없다.

 

반대로 말하면 이 독서에세이는 다루고 있는 책의 내용에 그다지 무게를 두고 있지는 않다, 라는 이야기이다. 언젠가의 어느 날 썼을 이 책의 한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삼겹살이 주메뉴인 을지로의 한 식당에서는 파절이 위에 계란 노른자를...

여담이지만 저 식당이 어디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나름 서울 시티즌이었다) 모를 것 같기도 한데, 갑자기 삼겹살이 먹고 싶다는 것은 놓아두고서라도, 삼겹살이 주제가 될만한 책은 그다지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 다락방님이 여기에 대하여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확인하자.

 

나는 계란 두 개를 꺼내 프라이를 했다. 당연히 반숙으로 한다. 접시에 건져 내어 소금을 살살 뿌리고 포크를 들어 노른자를 톡 터뜨린다. 그리고는 접시를 턱에 대고 후루룩 계란을 마신다.

삽겹살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계란에 관한 이야기였다. 젠장, 방심했어! 삼겹살이라면 돈이 없다는 핑계를 대서라도 참을 수 있지만 계란 정도는 프라이해먹을 수 있지 않는가. 저런 묘사를 보면 그날 반드시 계란 프라이를 해먹어야만 할 것 같다. 그런데 독서 에세이 아니었던가? 책은 계란 프라이와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회색 영혼, 이라는 책에서 그 등장인물 중 한 명이 계란 반숙을 그렇게 좋아한단다. 책 내용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있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이 글에서는 부차적인 이야기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계란 반숙이다. 계란 반숙 정도는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어도 그냥 떠올릴 수 있으니깐. 이 책의 글들은 이런 식이다. 등장인물의 조그만 습관들, 그 중에서도 우리 또한 일상적으로 가질 수 있는 그런 습관들이나 음식이 계기가 되어 우리를 이끈다. 책 내용도 제대로 말하지 않는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나는 회색 영혼, 이라는 책을 (앞으로도 읽게 될런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일상적으로 계란 프라이를 하려고 계란을 깨는 순간, 나는 분명 저 책을 떠올리지 않을까. 그런 조그만 계기가 쌓이고 쌓여서 결국 책으로 나를 이끌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저자는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저자 소개에서도 적혀 있는데,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한국의 독서율이 낮은 이유는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처음에는 사실 이 문장을 보고 조금 실소를 머금었다. 문장을 보면 동어반복이다. 독서율이 낮다, 라는 말 안에 책을 안읽는다, 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A는 A다, 라고 하는 문장은 어떤 새로운 정보를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동어반복적인 문장임에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독서율이 왜 낮은 걸까?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왜 안 읽는걸까? 시간이 없다고? 물론 오늘날을 살아가다보면 정말 시간이 없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는 것보다도 더 큰 원인은 '우리를 책으로 이끄는 요인이 없기 때문이다.' 재미를 원하는가? TV를 틀어 예능프로그램들을 보라. 스릴을 원하는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봐도 좋고 게임을 하면서 느껴도 좋다. 삶의 어려움을 잊어버리고 싶은가? 소주에 맥주를 타서 마셔라. 급하게 교양이 필요한가? 인터넷으로 검색해라. 도무지 이 순환 속에서는 책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는 책을 읽고자 하는 요인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만하다. 당장 앞서 예로 든 결코 잊지 못할 회색 영혼, 의 계란 프라이부터 소시지, 도넛 등 수많은 음식에서 저자는 책들을 떠올리고, 그 책들의 등장인물들을 떠올린다. 이는 일견 요네하라 마리가 자신의 에세이들에서 음식들을 소개하는 것에 비견할만하다. 음식에만 국한되는가? 아니다. 인터넷으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 블로그를 하면서 알게 된 사람과 극장에서 만나자고 했던 에피소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만들었다 - 지하철을 타고 내리고, 직장 상사와 동료에 얽힌 이야기까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에서 저자는 매듭을 만든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상황을 겪었을 때 자신의 글을 떠올리면서 그 매듭을 풀도록 한다. 이런 경우, 위에서 말한 저런 악순환 속에 책이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게 된다.

 

잠깐 이야기를 돌려서, 나는 판타지 소설을 정말 많이 읽었다. 물론 최근에 발매된 판타지들은 또 그다지 읽지 않았지만, 몇 년 전 판타지의 중흥기때,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자작소설을 올리는 공간으로 형성되어갈때, 나 또한 그 시류에 동참하면서 읽어나갔었다. 이영도의 책들은 그야말로 성전이었고, 이우혁의 책이 나올때마다 손에 땀을 쥐었다. 그런데 이런 판타지 작가들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크게 드리우는 여류작가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전민희였다. 전민희는 그녀를 스타덤으로 올렸던 세월의 돌, 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의 룬의 아이들 시리즈를 히트시켰다. 물론 한참 독서공감, 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판타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이런 질문이 들어올 것이다. 응? 전민희와 이 독서공감, 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세월의 돌, 은 슬픈 사랑이야기이다. 주인공인 파비안과 여주인공인 유리카는 수백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서로 만나게 되어, 여행을 같이 다니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물론 사랑이라는 것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또 아닌지라, 저 둘은 그들을 적대하는 세력들에게 쫓겨 생사의 위기를 넘기도 하고, 때로는 납치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을 힘들게 했던 것은 가장 마지막의 시련이었다. 저 둘은 어떤 의식을 완성해야만 했는데, 원래라면 아무런 일 없이 끝났을 의식이지만, 적대하는 세력으로 인하여 의식을 완성하려면 어쩔 수 없이 여주인공의 희생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러 사건으로 인하여 눈을 잃어버린 남주인공에게 그녀는 자신의 눈을 하나 주고는 의식을 마무리짓는다. 그런데 한 가지 다행, 혹은 불행이 있었다면 저들과 함께 여행하던 동료 중 한 명이 그 의식에서 여주인공을 어떻게든 영향을 받지 않도록 봉인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남주인공에게 말한다. 자신은 이 봉인을 푸는 방법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넓으니 언젠가는 이 봉인을 푸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그녀의 곁에 있을 자신이 있냐고. 어떤 일이 있어도 기다리겠냐고. 결국 여주인공은 봉인되고, 남주인공은 그 봉인석을 들고 세상을 방황한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남주인공은 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을 보게 된다. 그 음유시인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더욱 받게 된 음유시인은 새로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노래에서, 남주인공이 지금까지 여주인공과 함께 지내온 일들이 노래로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결국 그 예언시는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결국 영겁의 세월을 두고 헤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끝이 난다. 바로 그때 남주인공은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한다. 아니라고, 그들은 그렇게 헤어지게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수많은 방황속에서 서로 함께 있게 되었다고. 비록 봉인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옆에 있고, 자신은 그녀를 봉인에서부터 풀겠다는 그런 마음이 담긴 한마디였다. 음유시인에서부터 다른 사람들까지, 낭랑한 목소리로 반론하는 그를 보면서 무슨 상황인지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남주인공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목소리를 높인다.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되나요?

 

마치 마법같은 그 한마디에 다시금 음유시인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 다음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아직 현실이 버틸만하다는 이야기이다. 남자주인공은 자신의 사랑을 봉인석 속에 차갑게 가둘 수 밖에 없었고, 어쩌면 자신의 평생을 바쳐도 그녀를 다시 밖으로 깨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잃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 설령 헛되게 보이는 희망일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이런 마음에서 이 책은 독서 공감, 과 만난다. 우리는 앞으로도 힘들게 살아갈 것이고, 쉽게 변하지 않는 순환의 바퀴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돌려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삶 속에서라도 그 다음을 그릴 수 있다면, 아직은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독서 공감, 에서는 그런 그 다음, 을 그리는 에세이들이 가득 차 있다. 자연스럽게 독서 편력을 삶에 끼워넣으면서 그런 독서를 통하여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 또한 마지막장을 넘기며 이 책의 저자에게 이렇게 묻게 되는 것이다. 이 다음은, 이 다음에 읽은 책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책을 읽고 어떤 하루를 보내었나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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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2-06 01:37   좋아요 0 | URL
세월의 돌, 은 읽어본 적 없지만 <츠바사 크로니클>이 생각나기도 하는군요 사쿠라의 날개(이게 어떻게 나타났는지 다 잊어버렸지만, 깃털이라고 해야 할지도)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기억이 담겨 있었는데 그것이 어떤 일이 일어나서 여기저기 다른 세계로까지 모두 흩어져 버립니다 그렇게 돼서 사쿠라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을 샤오랑과 사쿠라 그리고 다른 사람과 하나씩 찾으러 다녀요 그게 쉽지 않은 일이더군요

뒤가 더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마지막으로 본 것에서 샤오랑이 둘이나 있었어요 지금까지 함께 깃털을 찾아다니던 샤오랑은 진짜가 아니고 복제된 샤오랑이었습니다 이럴 때는 진짜가 나타났으니 진짜와 다녀야 할지, 지금까지 함께 있어온 사람이 진짜라고 여겨야 할지... 그때 함께 다니던 샤오랑이 조금 이상해져서 어딘가로 가 버렸어요 그 뒤는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군요 진짜가 따로 있다고 해도 지금까지 본 사람한테 정이 들어버려서...

츠바사 크로니클에는 클램프에서 만든 만화에 나오는 사람이 많이 나오기도 합니다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에서 만드는 만화 자체가 세계는 하나가 아니고 같은 사람(얼굴이 같다고 해야겠군요)이 다른 세계에 산다고도 하죠 평행우주와 비슷할까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군요^^
그런데 카드캡터 사쿠라는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에 나오는 사쿠라와 샤오랑이 좀 큰 게 츠바사 크로니클에 나오는 것인데... 이것은 저도 나중에 알았습니다


생활과 책을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다면 더 오래 기억하고 그런 글을 보는 사람은 한번쯤 그 책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그렇게 못 쓰지만...^^


희선

가연 2014-01-03 22:21   좋아요 0 | URL
ㅋㅋㅋ 츠바사 크로니클.. 클램프가 그린 만화 아니었던가.. 카드캡터 사쿠라도 다 같은 세계관이었던 것 같은데, 하하하... 희선님께서도 담담히 글을 잘 쓰시던데요, 풋. 다들 글 쓰는 성격이 다르기도 하고..

희선 2013-12-06 01:42   좋아요 0 | URL
하나 더 생각났는데 예전에 라디오 방송에서 시를 어떻게 쓰면 좋을까 하는 말에, 어떤 시인(이름 잊어버렸습니다)이 자기 것이면서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이 말 맞습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웃기도 울기도 하지 않을지...

이 책에는 그런 점이 많이 있겠습니다


희선

가연 2014-01-03 22:22   좋아요 0 | URL
책을 받고 바로 읽어나갔었던 기억이 나네요.. 빌려줬다가 이제 받았습니다, 풋. 이 책은 자기 것이면서도 모두의 것이어야 될 책들을 많이 소개해주고 있었던 것 같네요.

2013-12-09 0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03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