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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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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가지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겠다. 신간 평가단을 하게 되면 처음에는 누구나 책을 추천하면서 자신이 추천한 책이 되기를 바라게 되지만, 어느 정도 흐른 뒤에는 자신이 추천한 책이 꼭 선정되리라는 법은 없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자각을 겪게 된 뒤에는 책들을 훑어보면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다. '아, 제발 이번에는 이 책만은 되지 않았으면.' 라고. 그러나 세상에는 머피의 법칙, 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다보면 원치않게 자신이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책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 경우에는 평가단 리뷰어는 두 가지 과정을 밟게 된다. 하나는 자신의 기존의 편견 - 책의 소개말로 미루어 짐작했을때의 - 을 깨고 이 책은 좋은 책이다, 라고 판단하게 되거나, 혹은 자신의 원래 인상이 맞았어, 라고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게 되거나. 이번의 이 책, 일베의 사상, 이 나에게는 바로 그랬다. 책의 소개글, 아니 제목을 보자마자, 이 책만은 선정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일베에 사상이 있다고? 저자는 일베에 들어가본적은 있는 건가? 고작 몇 개월 일베에 있었던 것 가지고 사상을 찾겠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머피의 법칙, 처럼 이 책은 선정되었고, 나는 체념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체념하고 있을수는 없는 법, 이 책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고, 인터뷰 기사까지도 읽어보았다. 그러면서 조금씩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이 책에 대하여 불필요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라고. 사실 애초에 선정되지 않았으면, 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편견이었다. 그걸 자각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면서 나는 이 책에 대하여 조금씩 중립적 인상을 가지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이 책을 배송받았을 무렵에는 도리어 호감을 가질 정도가 되었달까. 그 호감은 책을 한 번 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저자가 상당히 아는 것도 많은 것 같고,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적재적소에 잘 사상가들을 배치하는 것 같다. 생각보다 글이 그럴 듯 하다, 가 첫 번째 읽을 때의 내 생각이었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읽어나갔다.

 

만약 저 시점에서 리뷰를 썼다면 이 책에 대하여 상당한 호평을 하면서 써내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너무 생각할 것들이 많아서, 잠깐 이 책을 내버려둘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완전히 잊어버린 뒤에 다시 넘겨본 이 책은 오류가 너무나 많았다. 결국 처음의 나의 첫인상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이를 두고 다시 편견으로 돌아갔다고도 이야기할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의 편견과 지금의 생각은 분명히 다르다. 처음 읽을때에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읽어나갔었는데, 내가 분명 같은 책을 보고 있는 것일까, 생각이 들 정도로. 연필을 들고 줄을 그어나가면서 읽어나가기 시작하자 책 여백에는 여러 노트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건 말이 안되지 않을까, 앞 뒤가 맞지 않다, 근거가 없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내가 지적하는 사항이 모두 옳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나는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수많은 사상가들에 대하여 전혀 정통하지 않다. (단 한명, 루소에 대해서는 조금 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정통하지 않은 것을 떠나서, 다시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연필을 든 나는 도대체 이 책에서 왜 그렇게 수많은 사상가들이 나와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 책의 내용을 이 책에 나오는 사상가들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 등장한 순서대로 나열된 이들 사상가들의 말들은 대부분 이 책에서 사용한 설명을 그대로 가져왔다. (이 부분은 중요하다. 실제로 이 사상가들이 인용된 개념을 책에서 쓰인 뜻으로 이야기했는지는 알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마르셀 모스, 의 경우 조금 자의적으로 문장을 합쳤다. 헤겔, 의 경우에는 실제로 이 책에 헤겔, 이라는 이름은 거의 나오지 않지만, 생사를 건 인정투쟁, 이라는 용어를 볼때 앞의 인정, 도 헤겔의 용어라고 판단을 내렸다. 따라서 인정투쟁, 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문장의 뜻을 좀 더 명료하게 만들었다. 하버마스의 경우에는 다 쓰는 것 보다 인용한 책을 쓰는게 나을 것 같다고 여겼다. 그 외에는 이 책에 쓰인 문장을 그대로 가져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사상가들로 정리한다는 취지에 맞게 자연스럽게 읽어나갈수 있도록 앞부분에 접속사를 넣었다.

 

 

 

조지 레이코프 : 사람들에게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라고 해도 여전히 코끼리가 생각나는 것 처럼 일베는 생각하지 마, 라고 해도 여전히 일베가 생각이 나기 마련이다.

마르셀 모스 : 원시 사회는 증여와 답례, 라는 호수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교환양식은 수평적 사회질서의 유지에 도움을 준다.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권위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책의 저자는 북아메리카 서해안의 인디언의 예를 가져온다.) 이런 양상을 우리는 인터넷 짤방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 사람이 인터넷 짤방을 제작한다. 이는 일종의 증여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는 곧이어 몰려오는 수많은 2차 짤방에 의하여 답례를 받는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1차 제작자의 권위는 사라지고 수평적 질서가 유지된다.

헤겔 1 : (이 책에는 헤겔, 이라는 직접적 이름은 단 한번 등장하지만 인정투쟁, 은 헤겔의 용어다.) 과거에는 인터넷 바깥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와 존재의의를 인정받고자 하는 인정욕구가 기반이 되었는데, 일베의 인정투쟁은 인터넷 바깥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내부로 향한다. 자신의 존재의의를 인터넷 안에서 인정받는 것이 유일한 관건이 된 것이다. 일베에서는 인터넷 고유의 상호인정의 방식을 끝까지 밀고나간다.

헤겔 2 : 오늘날 북한이 상상적인 인정투쟁의 상대가 되어버린다. 무슨 말인가 하니, 정상국가, 의 도래가 일어나면, 그 국가에서는 나 자신이 인정받을 것이고, 나 자신의 욕망이 실현될 것이다, 라는 이야기이다. 이런 정상국가는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질 수 있는데, 오늘날의 경우에는 연평도 포격, 등을 겪으면서 '북한에 큰 소리치는 나라' 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논리실증주의자 : 위의 환경을 바탕으로 하여, 오늘날 네티즌들은 일종의 아마추어 논리실증주의자처럼 행동한다. 수많은 정보들이 있어도 반드시 자신의 눈으로 검증한 뒤에 받아들인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경향은 특히 상대방과 논쟁을 벌일 때 두드러지는데, 상대방의 과거를 뒤져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확인한 뒤 사실 관계가 어긋나는 것들을 보면 일종의 '감성팔이' 에 가깝다고 본다. 여기서 일베의 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몰이상의 이상이라는 것이다. 다시는 속지 않겠다, 라는.

바움가르텐 : 저런 몰이상의 이상은 바움가르텐이 말한 이성에 대한 감성의 우위, 라는 미학으로 뒷받침 된다. 직관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미시마 유키오, 알베르트 카뮈 : 여기서 낭만적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부연하자면 자신이 생각한 이상과 전혀 다르게 행동하고 마는, 자신을 메타레벨 위에서 내려다보는 또 하나의 초월론적인 의식을 불러온다. 일베를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인터넷에서는 병맛스럽게 행동하더라도 인생은 실전, 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그런 병맛스러운 자신을 냉정히 내려다보는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 : 저게 미학이라고? 솔직히 일베는 방약무인하고 일탈행위를 일삼는 존재들 아닌가. 그래서 미학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미학이다. 원래 미학은 불편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학이라는 것은 무엇이 이상이고 무엇이 몰이상인지 구별할 수 있는 식별 체제에서 발생한 혼란스러운 변동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더 이상 자명한 것이 아나게 된다. 예술적 자율성과 비예술적 공동성의 연결성 자체가 미학적, 이다.

하버마스 : 인터넷은 공론장인가? 그렇다면 하버마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밖에 없다. 공론장의 구조변동, 사실성과 타당성,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참조하라.

아즈마 히로키 : 근데 사실 인터넷은 하버마스의 공론장으로 여기는 것 보다는 데이터베이스에 가깝다. 이상적 공론장에서 담화로 형성된 숙의민주주의는 이상이다.

루소, 아즈마 히로키 : 일반의지를 아즈마 히로키는 오늘날 인터넷에서 본다. 그에게 있어서 일반의지는 한 인격이 아니라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가시화된 집합적 무의식이다.

맑스, 헤겔 : 결국 아즈마 히로키의 주장도 완전하지는 않다. 여기서 낡은 개념을 가져온다. 인터넷에서의 화해 불가능한 갈등도 본연의 맑스적 의미에서의 계급투쟁이다. 이는 다양한 대중 분파와 지배세력 분파 사이의 갈등과 협력관계의 모습으로 진치되고 응축된다. 이러한 전치와 응축 과정에서 일어나는 생사를 건 인정투쟁 자체가 계급투쟁인 것이다.

 

 

대략 이정도가 이 책의 내용이다. 300페이지 남짓한 책이지만, 이 책은 사실 이런 사상가들에게서 인용하고, 거기에 본인의 생각을 개진한 부분을 제외하면 100페이지가 안될 것이다. 결국 저런 사상가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위의 과정을 밟아가면서 세 줄 요약을 적는다.

 

 

1. 일베는 2002년부터 시작된 촛불의 사상을 계승한다.

2. 일베는 현실의 국가, 현실의 시민사회에 대한 요구를 단념하고 인터넷 내에서의 인정투쟁 방식을 현실로 끌고 오는 새로운 유형의 젊은 우파다.

3. 이러한 일베의 사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광장, 인터넷에 모인 사람들이 이후에도 각자의 일상적 공간에서 자신의 이상을 작게나마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대략적으로 책 내용을 살펴보았다. 물론 이 책에서는 분명 옳은 분석도 존재한다. '주류 사회는 억압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와 같은 분석은 옳은 분석이다. 그러나 옳지 않은 부분들이 존재한다. 이제 저 사상가들이 맞게 쓰였는지 처음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다. 가장 먼저 이 책을 읽으면서 눈에 보이는 것은 개념들을 굳이 사상가들의 이름을 들먹일 것도 없이 일차적인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다음 문제는 실제 인터넷 상황을 자신의 이론에 억지로 끼워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부분만 취사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조지 레이코프를 시작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조지 레이코프가 한 말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조지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라고 말했다. 보수 프레임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도리어 그 프레임을 계속적으로 사회에 환기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이야기이다. 코끼리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라고 하더라도 계속 코끼리가 생각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보수의 프레임에 대하여 진보는 아예 독자적 프레임을 개발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보수의 프레임 자체에 대해서는 굳이 공격을 할 필요가 없다. 독자적 사상이 중요한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기본적으로 레이코프의 요점을 일간 베스트에라는 커뮤니티에도 적용할 수 있다' 고 말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일베를 완전히 떠나서 새로운 커뮤니티의 지평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오히려 일베는 생각하지 마, 라는 금기를 깨고 일베의 사상을 내재적으로 사고하여야 한다' 고 말이다. 레이코프의 요점을 적용한다면 차라리 일베는 생각하지 마, 라는 관점을 따르는 것이 훨씬 옳을텐데 말이다. 도리어 이런 접근은 일베에 대한 프레임만 더 지속적으로 환기하는데 관여할 것이다. 만약에 일베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책의 방향으로 삼았다면 조지 레이코프가 아닌 다른 사상가의 이야기를 가져오는게 낫지 않았을까?

 

마르셀 모스의 경우를 살펴보자. 마르셀 모스의 말을 가져오고, 그 모스의 이론을 인터넷에 적용시킨 논문을 가져왔지만, 근본적인 조건은 놓아둔 채, 증여와 답례, 그리고 호수성이라는 개념에만 너무 얽매여 있다. 마르셀 모스의 이론은 위에도 적어두었다시피 원시사회에서의 이론이다. 그렇다면 '인터넷이 원시사회란 말인가?' 책에서 개념을 사용하는데 별다른 제한을 두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전제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나, 혹은 무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자라면 오류가 생기게 되고, 후자라면 굳이 마르셀 모스, 라는 이름을 가져올 필요도 없다. 그냥 증여와 답례, 라는 개념을 쓰면 된다. 또한 저런 분석틀을 이용하여 옳은 분석을 했는가? 거기에 대해서도 고개를 갸웃거릴수 밖에 없다. 저자는 짤방을 일종의 증여와 답례의 형식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 결과 수평적 평등이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짤방의 일차저작자가 짤방을 만들어내었다고 그 권위가 소실되거나 사라지지는 않는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가면 네임드Named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한 두명씩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네임드들의 권위는 적어도 자신이 만들어낸 짤방에 있어서는 절대적이다. EXCF의 보노보노라던가, 고두익 등의 네임드를 보면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예를 든 엉덩국, 만 해도 그렇다. 엉덩국의 홍콩행 게이바, 라는 작품 이후, 수많은 패러디가 나왔지만, 그리고 수많은 짤방이 제작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엉덩국의 자신의 작품에 대한 권위가 줄어들거나 사라지지는 않았다. 누구나 저 홍콩행 게이바, 라는 작품의 패러디를 보면 가장 먼저 원작을 떠올릴 것이다. 아, 이것 재밌네, 라고 2차 패러디물 자체만으로 향유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권위의 이동이 일어나겠는가? 증여와 답례라는 형식이 맞다고 가정한다고 할지라도 이 세계에서는 마르셀 모스가 이야기한 것 처럼 수평적인 권위의 이동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도리어 인터넷 세상에서의 짤방의 2차저작은 그 원작자에게 힘을 보태어준다. 마치 판타지소설에서 드라큘라가 자신의 일족을 늘리면 늘릴수록 본인의 힘이 더 커지는 것 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언제 1차저작자가 자신의 권위를 잃는가? 그것은 1차 저작자의 짤방이 아무런 변용없이 그대로 퍼질 경우다. 무제한적으로 복제가 잃어나게 되면 될수록 도리어 1차 저작자의 작품의 후광은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증여와 답례틀로는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헤겔에 대해서는 본의아니게 인정투쟁, 생사를 건 인정투쟁 등의 단어를 헤겔사전을 통하여 알아보기는 했지만 사실 잘 아는 편은 아니다. 나로서는 앞서도 말했지만 생사를 건 인정투쟁, 이라는 용어로 미루어 판단할 때 인정투쟁을 헤겔의 용어로 판단했지만, 실제로 이 책에서 헤겔의 용어를 사용한 것인지조차 불확실하다. 하지만 건너뛰고는 자크 랑시에르에 관한 이야기는 조금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는 '미학은 원래 불편한 것이다' 라는 말을 하며 자크 랑시에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사실 자크 랑시에를 이해함에 있어 필수적인 것은 그는 바로 '정치철학자' 라는 점이다. 책의 저자가 예시로 들고 있는 '미학안의 불편함' 의 소개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랑시에르는 기본적으로 정치철학자다.' 결국 랑시에르를 이야기하면서 정치에 관한 그의 관점을 제외시키고 미학에 대한 관점만 취사선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이야기이다. 당장 랑시에르의 기본 생각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술에 있어서 창작자, 수용자로 나눠서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창작자와 수용자는 스승과 제자, 라는 관계로 변용되며 위계적 위치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런 구분을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랑시에르에 따르면 이런 감성적 영역에도 정치가 작용한다고 한다.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정치, 라는 것은 '자원의 효율적 분배' 행위를 뜻하는데, 미학 또한 보고 말하는 것, 작가가 만든 예술품과 그것을 경험하는 관객을 분배하기에 정치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라는 이야기이다. 미학이 보고 말하는 것을 분배하는데 기여한다는 말에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의문을 가질만한 것은 또 아니다. 회화, 연극 등의 예술 및 생산품들은 무엇이 지각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학은 이런 뜻에서 지극히 정치적이다.

 

이런 랑시에르의 관점을 따르면 민주주의를 거대한 불일치, 로 판단하게 된다. 합치라는 것은 숨막힐 듯한 개념이다. 불합치만이 민주주의를 오롯이 구현하는 개념이다. 앞서 말했던 스승과 제자, 창작자와 수용자, 를 가져오자. 미학은 이들 분리의 지점 '위'에 존재하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A와 B가 하나로 붙어있다고 하자. A와 B가 속한 지평에서는 이들을 분리할 방법이 없다. 더 높은 곳에서 이들을 내려볼때만 이들이 붙어있다고 판단할 수 있고, 이들을 분리시킬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미학 안의 불편함, 이라는 책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미학의 불편함이 아니라는 것에 유의하라.

 

하지만 저자는 랑시에르의 저런 정치철학적 면모는 제외하고 오직 미학에 대한 이야기만 가져와서 적용시키고 있다. 미학이 무엇이 몰이상이며, 무엇이 이상인지 구별할 수 있는 식별체제의 혼란, 이라는 말은 미학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라는 랑시에르의 말에 비추어 보았을 때 옳은 분석이라고 하기 어렵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분배, 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점은 랑시에르의 사상에서 미학, 이라는 부분만 취사선택하였기 때문에 뒤의 사상가와 상충되는 점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랑시에르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란 불일치, 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일베를 분석하면서 가져온 하버마스나 아즈마 히로키 등은 결과적으로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전제로 두고 이야기하고 있다. 논의를 통하여 합의점을 찾는 숙의민주주의와 거대한 불일치 사이에는 크나큰 간극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루소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아즈마 히로키는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을 인터넷 세상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아즈마 히로키가 보는 일반의지는 일종의 경향성이다. 얼핏 난잡하게만 보이는 검색어들이지만, 그 검색어들을 하나로 모으면 흐름을 이루고 있다고 말이다. 여기서 아즈마 히로키는 프로이트를 가져온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여기다가 적용시키는 것이다. 인터넷 기저에 깔려있는 그런 경향성, 혹은 흐름은 일종의 집단적 무의식이 되고, 그 무의식을 일반의지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 일반의지는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일종의 '분위기' 가 되고, 이런 분위기는 어떤 논의를 시작하기 전의 조건으로 작용하여 논의의 합의에 훨씬 수월하게 이르게 된다.

 

아즈마 히로키의 착상 자체는 신선하다. 저런 집단적 무의식을 일종의 분위기로 판단하여 논의가 지나치게 넓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제동 장치, 혹은 통제 조건으로 판단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발상이다. 하지만 저런 집단적 무의식을 일반의지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다. 일반의지는 말 그대로 의지, 이지 경향성이 아니다. 아즈마 히로키의 저런 일반의지론은 경향성에 따라 결국에는 수많은 일반의지, 들로 나누어질 뿐이지만, 실제로 일반의지는 오직 하나로 존재한다. 일반의지는 개인의 자유로운 계약을 통하여 형성된 공적 인격의 의지라고들 알려져 있다. 연구서 투명성과 장애물, 이라는 책에 따르면 일반의지를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은 신 엘로이즈, 에 있다. 신 엘로이즈에서 두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은 한 마을에서 한가로이 노래를 부르며 전원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한가로이 마을에서 음악이 연주되고 달콤하게 열린 과실을 주인공들은 맛본다. 그들은 어떻게 저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이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마을 축제가 열리는데, 저들 주인공들도 축제에 참가하기 위하여 준비를 하게 된다. 하나의 목표 - 축제, 라는 것에 대한 개개인들의 노력하는 모습 자체가 일종의 일반의지가 되는 것이다. 개인들이 저 축제, 라는 것에 대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는가? 자신들만의 특별한 이익을 취하려 하는가? 그런 특수의지는 저 축제의 장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민사회의 총의는 집단적 경향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집단적 경향은 무의식적인 데이터베이스에 '체현'(이 책의 말을 빌리자면)되어 있을 수 있지만, 총의는 인터넷의 무의식적 데이터베이스에 체현되어있지 않다. 일반의지는 인격도 아니지만 가시화된 집합적 무의식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일반의지는 하나의 목표와 그 목표를 이루려고 하는 구성원들이 동시에 '발생'할때 함께 발생한다. 순차적으로 무의식에서 사회를 거쳐 국가를 거쳐 발현된다고는 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이론에는 이런 헛점이 존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즈마 히로키가 자신의 일반의지, 에 관한 책의 부제에 '프로이트' 를 넣은 것이리라. 하지만 이 책에서는 프로이트에 관한 이야기는 또 제외되어 있다. 프로이트에 대한 설명도 없이 무의식, 일반의지 등을 그대로 이용하려고 하니 분석에서 어딘가 고리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이야기한다. 사실 '2008년 촛불시위의 아젠다가 근본적으로 모호했다' 고 말이다. 물론 이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촛불시위를 분석하는데 있어 수많은 담론들이 쏟아져 나왔었고, 도리어 그렇게 분석이 많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어느 하나도 딱 떨어지는 분석은 없었다, 라는 말이 될 것이다. 저런 분석은 2002년의 촛불 시위에 오히려 들어맞다고 이야기하면서 두 번의 촛불시위를 명확히 구분짓는다. 여기서 저자는 발상의 전환을 해낸다. 일베는 2008년의 촛불 시위의 굴절된 모습이라고 말이다. 촛불 시위의 일종의 몰이상성 - 외치고 싶은 것을 외치는 - 은 일베 사이트에서 몰이상성으로 구현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부분에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촛불 시위와 일베를 동일한 몰이상성은 다르다. 단순히 촛불 시위를 어디 일베따위와 비교하냐, 라는 그런 감정에서 쓰는 말이 아니다. (여담이지만 나는 다중multitude로 촛불 시위를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촛불의 몰이상성은 현실에서 말해질 수 있는 몰이상성이다. 하지만 일베의 몰이상성은 현실에서는 말할 수 없는, 주류 사회에서는 억압할 수 밖에 없는 은밀한 몰이상성이다.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 이는 인터넷 공간의 특징이다. 인터넷은 어떤 욕구가 즉물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구현되어지고 찾아지는 곳이다. 예를 들어 내가 리베라탱고, 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자. 이것을 언어로 구현시켜서 검색할 때 이 지점에서 인터넷이라는 곳이 이 욕구 '리베라탱고가 무엇이지?' 를 즉각적으로 구현시킨다. 그런데 이런 욕구충족이 바로 일어나지 않으면 짜증이 나게 된다. 거칠게 말하면 당장 인터넷을 하다가 검색이 너무 느리게 일어난다고 하자. 그러면 짜증이 나겠는가, 안나겠는가? 이런 경향은 검색에서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타인에 대한 판단, 감정, 생각도 마찬가지이고, 타인의 나에 대한 판단, 감정,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여기서 일베가 왜 저렇게 날선 비속어들을 사용하는지 떠올릴 수 있다. 그들은 상대에 대한 즉각적 반응을 이끌어내고 싶은 것이다. 욕을 하면 참을 수 없게 되어 대응을 하게 된다. 그 대응을 하게 되면 또 다른 비난이 따른다. 이는 또다른 논란을 부르고 더 크게 눈덩이처럼 쌓이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해서 일베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가장 먼저 조지 레이코프가 말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관심을 주지 마, 라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저자의 소개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반 다크 홈과 마이 리틀 포니를 좋아함, 좌우명은 딥 다크 판타지와 프렌드십 이즈 매직. 일베에 전하고 싶은 말 : '일게이들아 이정도면 ㅍㅌㅊ?' 라는데 여기에 대해서 아마 잘 모르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아서 조금 주석을 단다. 반 다크 홈은 게이 포르노 배우다. 그가 인기를 끌게 된 것은 'Lords of the lockerroom'이라는 포르노 때문인데, 이 포르노에서 반 다크 홈은 명대사를 남긴다.

 

Xuckyou

 

저자의 말에서 딥 다크 판타지, 가 무슨 의미인지도 궁금할 것이다. 저 말은 반 다크 홈의 인터뷰에서 나왔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자 그는 자신은 욕망을 채워주는 일을 한다면서 덧붙인다.

 

Their Deep♂dark♂fantasies

 

포니는 이 책에도 친절히 주석까지도 달려있으니 넘어가겠다. 말그대로 만화영화다. 마이 리틀 포니, 라는.

 

사실 이런 것들은 개인 취향이기는 하다. 하지만 소개말에 이런 말들을 넣어야 했을까, 라는 것은 조금 의문이기는 하다. 구글 검색을 통하여 들어가 본 일베의 사상, 에 대한 일베에서의 반응은 이런 식이었다. 'ㅍㅌㅊ 라니, 저자가 일베를 오래하다가 일베인이 된듯.' '형형색색의 변들을 모아서 쥐어짜니깐 뭐가 제대로 나오던?ㅋㅋㅋ' 이런 반응을 볼 때 이런 식의 접근은 지나치게 자신의 책 전체를 희화화시키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일베라는 거대한 사이트에 대하여 이런식으로나마 분석을 시도한 것은 처음이기에 그 점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요즘 좀 정신이 너무 없어서... 겨우 힘겹게 글을 쓰네요...

 

댓글 달아주신분들께는 감사하지만 나중에 좀 정신이 들면 답글을 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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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2-17 00:57   좋아요 0 | URL
저는 아주 모르는 세상 이야기 같기도 하군요 일베, 가 무엇인지 몰랐거든요(제가 모르는 게 이것만은 아니겠습니다^^) 조금(정말 아주 조금, 다른 분이 쓴 글) 살펴보니, 짧은 기간 동안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더군요 잘 모르지만 가연 님이 말한 것처럼 그곳을 바라본 것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많은 사상가들의 말을 빌려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군요 제목이 사상이어서일까요

가연 님은 참 많이도 아시는군요


희선

가연 2014-01-03 22:16   좋아요 0 | URL
요즘 세상은 워낙 복잡하고 다양한 사건이 발생해서.. 사실 굳이 일베가 무엇인가를 아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이 책 덕분에 저도 여러 사상가들을 뒤적거렸던 기억이 나네요, 풋.

2013-12-17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03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7 0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03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1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03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