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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2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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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바람의 화원, 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된 적 있다. 해원 신윤복이 만약에 여자였다면? 이라는 가정으로부터 시작한 그 드라마는 단원 김홍도와 신윤복이 만나는 장면과, 신윤복이 어떻게 조선의 뛰어난 화가로 우뚝 서게 되는지를 세밀하게 그려내었다. 물론 배우들의 열연도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김홍도의 경우에는 파리의 연인, 쩐의 전쟁 등과 같은 드라마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박신양이 맡았고, 해원 신윤복의 경우 당시만 해도 국민 여동생, 이라는 말이 전혀 부끄럽지 않던 문근영이 맡았다. 박신양은 (개인적인 평이지만) 비록 이전의 자신의 캐릭터 - 버럭 소리 지르며 윽박지르는 모습이 강한 - 에서 크게 벗어난 모습은 보이지 못했지만, 자유로운 김홍도를 그려내는데 성공했으며 문근영은 문채영과의 소위 말하는 ‘닷냥 커플’ 에피소드를 통하여 실제로 배우자신이 미소년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남장여인의 모습을 잘 그려내었다. 그 이후로 문근영이 남장이 너무 어울려 버리는 바람에 도리어 캐릭터가 굳어져버린 감이 있다는 것은 논외로 하고서 말이다. (실제로 ‘불의 여신 정이’ 와 같은 드라마에서도 남장을 했다.)

 

물론 아쉽게도 드라마 자체는 그 당시 비슷한 시간대에 방영했었던 베토벤 바이러스, 라는 강풍을 만나서 조금 휘청거렸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베토벤 바이러스의 김명민은 그야말로 본인이 강마에 자신이 된 것처럼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연기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나 또한 TV에서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면서 ‘똥덩어리’ 라는 욕을 먹은 첼로연주자가 그런 곤욕에서 벗어나 리베라탱고를 첼로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는 베토벤 바이러스만큼이나 바람의 화원에 관심이 많았다. 베토벤 바이러스에 강마에가 있었다면 바람의 화원에는 버럭 김홍도와 닷냥 커플이 있었다. 아까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을 이야기했었으니 바람의 화원에서도 기억에 남는 장면을 이야기하여야 공평할 듯싶다. 사실 지금도 그 드라마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극 말미에 두 화가, 혜원과 단원은 그림을 통하여 승패를 가르게 된다.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계략에 빠져 생겼던 것 같다. 그 ‘결투장’에서 혜원은 두 여인의 검무를 담은 ‘쌍검대무’ 라는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검색해서 보면 알겠지만 역동적 모습과 뛰어난 색감은 가히 일절이라고 불릴만하다. 여기에 대응하여 단원이 그린 작품은 ‘씨름’ 이다. 마찬가지로 주변의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그대로 화폭에 담은 그림이다. 금방이라도 한쪽으로 넘어갈 것 같지만 넘어가지 않고, 씨름을 하는 당사자들만 초조한 것이 아니라 지켜보는 구경꾼들도 점차 초조해지고 계속 손에 땀을 쥐게 된다. 이런 작품들이 서로 맞붙었으니 승패를 가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승패를 가리기 위하여 판정하는 사람들이 각각의 더 나은 점을 찾아내려고 하고, 김홍도의 작품인 씨름, 에서의 실수를 찾아내고 (이 부분은 드라마적인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있는 부분이다. 물론 관점에 따라 의견이 다르지만 말이다. 혹시나 흥미가 생긴다면 직접 찾아보기를 바란다.) 결국에는 화려한 혜원의 그림에 손을 들어주려고 했지만 김홍도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직 기다려보라고, 끝난 것이 아니라고.

 

실제로 총칼을 휘두른 대결은 아니었지만, 정신적 혈투는 그 이상이었으리라. 판정하는 동안 시간은 점심을 지나 저녁으로 지나갔다. 이윽고 저녁이 되어 해가 뉘엿뉘엿 서쪽하늘로 건너갈 때, 갑자기 김홍도는 자신의 그림에 햇살을 비추어보라고 권한다. 과연 그랬다! 김홍도의 씨름, 은 햇살에 따라 그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그림이었던 것이다. 저녁놀에 따라 황토색으로 화폭은 타오르고 이윽고 씨름의 역동성이 더욱 살아 숨쉬게 되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찬탄을 금치 못하고 이윽고 다시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니, 그들은 어쩌면 자신들의 비평 능력의 한계를 느꼈으리라. 결국 그 승부는 무승부가 되었다.

 

사실은 이랬다. 신윤복과 김홍도는 수많은 수수께끼들을 자신들의 그림에 숨겨 결국에는 서로의 대결을 무승부로 만들 생각이었다. 비록 서로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가 그렇게 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왜? 그들은 화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누구보다도 서로의 능력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들은 서로를 인정했고, 그만큼이나 예술에 있어서 고하를 가르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또다른 ‘원’을 가진 오원 장승업은 생각이 좀 달랐던 모양이다. 장승업은 이렇게 말한다. ‘단원, 혜원만 원園이냐? 나도 원이다(吾園)’ 그리하여 오원이라는 호를 가지게 되었다. 장승업은 위의 단원과 혜원과는 달리 호승심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위의 단원과 혜원의 대결은 실제로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그들의 그림에서는 일종의 여유가 느껴진다. 하지만 오원의 작품들, 특히나 책 명작 순례, 에 실린 쏘가리, 를 보면 이 책의 저자 유홍준은 ‘화면에 신선한 멋과 유머를’ 느낄 수 있다, 고 이야기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에라 모르겠다, 빨리 그려주자, 라는 느낌을 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시간에 쫓겨 그린 것 같다, 라는 느낌이랄까. 비록 장승업의 모든 작품들이 다 이렇지는 않고, 실제로 그의 명작은 따로 있다고 하나, 그에게서 기행을 빼고 자유분방함을 제외한다면 단원이나 혜원과 같이 ‘원’이라는 호칭을 붙여주기에는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앞서 말했든 예술에 고하를 가르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마 단원이나 혜원이 내가 멋대로 내린 결론인 ‘오원은 원이라고 붙이기에는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를 들으면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말이다. 하지만 나처럼 눈이 뜨이지 않고, 마음으로 즐기지 못하여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늘 서열을 매기며 감정을 무두질한다. 그리고 누구나 인정한다고 알려진, 소위 평판이 좋은 작품을 보면서 멋진 감정을 느낀 척, 만들어진 감탄사를 내뱉는다. 머리로는 고하를 가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으로까지 와 닿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변명을 하자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책 유홍준의 명작 순례, 를 읽어보면 중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남태응이라는 조선 시대의 문인이 비평을 남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명국은 신품이며 태어나면서 아는 자, 윤두서는 배워서 아는 자이며 묘품이고, 이징은 노력해서 아는 자로 법품이다’ 여기에 뒤의 견해 (남태응은 말한다, 세 사람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자고 한다면 이징은 맨 뒤를 달리리라고.) 를 종합하여 세 명의 예술적 경지를 따지자면 그의 생각으로는 쉽게 말해서 김명국>윤두서>(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징이라는 이야기이다.

 

김명국의 달마도는 누구나 한 번쯤 본 적 있을 터이고, 윤두서의 자화상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이징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징의 작품은 바로 떠오르는 작품이 없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이징이 최고일지도 모른다. 이는 자신의 안목에 달린 일이다. 바꿔서 이야기하자면, 아직 눈이 뜨이기 전에는 비평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일단 그림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되면 그 이후에는 본인이 기준이 되어 그림을 살피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위의 의견에 반하여 이징이 가장 뛰어나다,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를 두고 유한준이라는 조선 시대의 사람은 말한다. 그림에는 그것을 아는 자, 사랑하는 자, 보는 자, 모으는 자, 가 있는데 이윽고 경지에 이르러 그림의 법도와 형태, 조화를 잘 ‘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렇게 사랑하게 되면 참되게 보게 되며, 참되게 보게 되면 모으게 된다고 말이다. 이 말만큼 이 책 ‘명작 순례’ 의 목적을 잘 드러내는 말은 없으리라.

 

무엇보다도 책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글귀는 능호관 이인상, 에 대하여 저자인 유홍준이 적은 부제목이다. 능호관 이인상은 몇 명의 벗들과 함께 수많은 시회를 가졌고, 그 시회에서는 글과 그림이 춤을 추었다. 만약에 그런 시회가 없었더라면, 그런 모임들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껏 명작이라고 일컫는 '수하한담도' 가 탄생하지 못했으리라. 수하한담도는 저자 유홍준의 말을 빌리자면 '계곡은 그윽하고 나뭇잎은 무성하여 시원스러운 그늘을 보이며 그리하여 그 서정이 자못 그윽한' 그림이다. 하지만 나는 그림의 기법을 보면서 평가를 내릴 입장은 못되고, 다만 능호관이 이 그림에 적은 연유로 이 그림이 걸작이라고 판단할 따름이다. 능호관은 자신의 그림에 이렇게 적는다.

 

이번에는 남이 그림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를 쓴다.

 

능호관에게는 임매라는 친구가 있었으나, 그 친구는 성품이 너그러워 그림을 주변에 다 나누어주고만다. 그게 능호관에게는 조금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그림을 억지로라도 그에게 주기 위하여 그림의 한쪽에 저렇게 적어놓는다. 즉, 다음과 같은 말이다. 이 책의 저자인 유홍준이 이 주제에 붙인 부제처럼 '이 그림은 그대를 위해 그린다고 미리 적어놓노라', 라고. 어찌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일수도 있고, 어린 아이들처럼 치기 어린 이야기일수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상대에게 주기 위하여 일종의 '찜'을 해놓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만큼 순수했던 능호관과 임매의 관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렇게 '찜'해놓지라도 않으면 주변에 다 나누어줄 친구를 그렸으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은 일종의 '찜'이다. 저자 유홍준은 이야기한다. 왜 책을 펴내느냐면, 그게 스스로가 세상에 진 빚이라고 생각한 것을 갚아나가는 과정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라고. 이 책은 문화재와 우리 미술사에 무관심했던 우리를 위한 책이다. 미술사적인 지식을 통하여 우리의 안목은 넓어질 수 있을 것이고, 높아질 것이라고 여기기에 쓴 책이다. 마치 위의 임매와 능호관의 관계와 흡사하지 않는가? 이번에는 그대가 꼭 알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 책을 썼노라, 라고.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쳐 참되게 알게 되면 우리는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되게 보게 되고, 이윽고 모으고 관심을 가지게 될테며, 우리의 기준을 세워 고전 그림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아무쪼록 저자의 기대대로 이 책이 우리미술사에 관심을 환기시키기를 바랄 따름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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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1-21 01:02   좋아요 0 | URL
바람의 화원, 저는 책도 드라마도 못 봤습니다 그런데 라디오 방송에서 읽어줄 때 조금 들었습니다 다는 아니지만 대충 알게 되었습니다 띄엄띄엄 안다고 할 수 있군요 언젠가 책을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나라 미술에 관심을 갖고 잘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겠죠 그래서 다른 나라에 빼앗기기도 하고, 누군가는 몰래 팔기도 했을 테죠 이런 것이 생각나다니... 처음에는 잘 몰라도 보다보면 조금은 알지도 모르죠 이 책이 그런 도움을 주겠군요^^


희선

가연 2014-01-30 00:09   좋아요 0 | URL
저도 요즘은 거의 안봐서ㅎㅎㅎ 이 책은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요ㅎㅎ 우리 나라 관련하여서 다룬 책이 글쎄.. 잘 모르겠네요

2014-01-21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30 0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