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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 Feynman
짐 오타비아니 지음, 이상국 옮김, 릴런드 마이릭 그림 / 서해문집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파인만.



  중학교 때는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에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의 네 분야가 한 권의 책으로 묶여서 있었지만, 고등학교에서는 각각의 과목이 다 따로 나뉘고 전문화되었었습니다. 뭐, 대학교에서는 더욱 더 세분화되었었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어쨌든 그렇게 고등학교에 처음 올라가서 물리를 공부했을 때 느꼈던 감정은 정말.. 지금도 표현하기가 힘들군요. 강의를 들으면 무슨 이론인지 알 것 같았었는데 막상 문제에 적용시키려고 하니깐 잘 안 되는 겁니다. 운동량이 어떻고, 마찰력이 어떻고.. 왜 그렇게 고려해야만 할 공식들이 많은지.. 게다가 수학과 마찬가지로 물리는 공식만 외워서 되는 과목은 아니잖습니까, 한 유형의 문제를 푸는 만능 공식을 외워두어도 조금만 문제를 바꾸면 다시 또 수렁에서 헤엄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어느 고등학교에나 제물포가 한 명 정도는 있었겠지요.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 제물포는 지명 제물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쟤 때문에 물리 포기 했다, 라는 말의 준말입니다. 마침 우리를 지도하시던 선생님은 제물포였고, 학생들은 이 선생님 강의가 되면 이제 한숨을 쉬면서 책을 쳐다보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물포 선생님이 강의를 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대였지요. 그러나 강의를 잘한다고 해서, 그 강의 내용이 우리 머리에 모두 남는 것은 아니었고, 결국에 남게 되던 것은 공식들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일단은 수능을 쳐야 되니깐, 말이지요. 그런데 공식을 열심히 외워서 점수가 잘 나온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지요. 원리를 모르니 조금만 응용해도 문제를 틀리게 되니깐 말입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긴데, 라는 생각이 들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가장 쉬운 이야기가 가장 지키기 어려운 이야기니깐 말입니다, 삶이든, 시험문제든. 어쨌든 그렇게 문제를 틀리게 되면 점수가 낮게 나오고, 나는 물리에 재능이 없어.. 하는 생각을 품게 되고, 그러면 물리가 재미가 없어지게 되고, 그러면 더욱 더 물리의 기본 원리를 익히기 싫어하게 되고, 이윽고 물리를 포기하게 되는 겁니다. 고백하건데 저도 물리는 별로 점수가 높지 않았습니다. 저 또한 저런 악순환을 거쳐서 거의 물리를 포기해버렸으니깐 말이지요.

그런데 저와 달리 고등학교 동기 중에 물리학과를 선택한 학생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고등학교때 제 눈에는 상당히 물리에 재능이 있는 것처럼 보였었지만, 요즘 가끔씩 연락하면 학교 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합니다.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니었는지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말입니다. 가끔씩 학과에서 잘 하는 학생들에게 도대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푸냐고 물어보면, 그 학과의 우등생들은 한결 같이 고개를 저으면서 잘 모르겠는데요, 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처음엔 이 학생들이 그저 비법을 가르쳐주기 싫어서 이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만, 몇 번이고 질문을 해도 알 수 없다는 이야기만 반복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물리학에 있어서는 잘 설명하지도 못하는 것을 평가하고 거기에 대해서 토론을 나누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지요. 저기 저 학생들은 어쩌면 직관적으로 답을 깨달을 수는 있었을 겁니다. 굳이 저 직관이라는 말을 설명하자면 우리가 하나 더하기 하나를 수식으로 1+1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2라는 답을 도출해내는 반면에 그들은 공간에서 돌덩이 두 개를 떠올리고 2라는 답을 도출해내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일종의 재능이고, 물리에 있어서 사실 재능의 중요성을 경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직관적으로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 곧 아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풀 수 있지만 그것이 왜 이렇게 되는지 설명할 수가 없는 그런 현상에 빠지게 되지요.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 리처드 파인만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양자 역학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동료 교수에게 ‘안되겠어요, 이 양자 역학을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에게 도저히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을 도저히 못 찾겠어요. 이는 우리가 아직 양자 역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는 말을 뜻해요’ 라고 말이지요. 그의 말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런 아인슈타인 이후의 최고의 천재, 라는 이름이 붙은 학자마저도 두 손을 들고 자신들이 잘 모르는 것을 공부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라면, 현대 물리학은, 아니 그 기초가 되는 대학교 과정에서마저도 잘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렇게 모래로 된 성을 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저는 물리학이 마음에 듭니다. 고등학교때는 물리를 거의 포기하다시피했지만 말입니다. 그러고보면 막상 물리학과를 택한 제 고등학교 동기는 취업이라는 난에 부딪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고민을 하고 있지만 물리학과와는 한 발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저는 어쩌면 만용일지도 모르겠지만, 물리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꿈을 조심스럽게 키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사실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 바로 이 책에서 다루는 인물 때문에 촉발되었지요.

이 책은 그래픽 노블이라는 이점을 잘 살려 파인만의 여러 일화들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맨하탄 계획에 참여했을때, 결혼했을때, 그리고 이윽고 QED를 재규격화해서 완성한 일화, 노벨상을 타기 싫어서 끙끙거리다가 피하면 도리어 더 이슈가 될 것이라는 말에 받으러 가는 이야기에다가 마지막으로 그의 죽음까지. 그런데 적어도 제 생각에는 이 책에서 가장 깊이 있게, 성의를 다하여 다루고 있는 부분은 파인만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물리학 강의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파인만이 여러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왔지만 그 근본에는 언제나 물리학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는 것을 잘 드러내어 주는 장치임과 동시에, 일반인들에게 물리학의 아름다움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이 이런 그래픽 노블이라는 매체를 만나 얼마만큼 효과를 거두었나, 라는 질문에 대하여 답을 하는 과정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러나 사실 많은 효과를 거두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얼핏 다른 서평들을 읽어보아도 그의 물리학 강의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사실 이 책의 내용만으로는 그의 QED강의를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습니다. 사실 이 책이 그런 강의의 기초로 삼고 있는 것은 파인만의 다른 책 ‘일반인을 위한 파인만의 QED강의’입니다. 그 책을 읽어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데 하물며 그 내용을 대폭 줄여서 그리 길지 않은 지면에 넣은 만화를 읽고 이해를 하다니요. 읽히기 쉽다고 그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그의 그런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다른 물리학 이론은 사실 수식만 보아도 진절머리가 나고, 정말 전공자가 아니면 다루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깁니다. 맥스웰 전자기 방정식이나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던 뉴턴의 운동방정식과는 복잡성에서 그 궤를 달리합니다. 그러나 파인만이 만들어낸 파인만 다이어그램을 보면 왠지 우리와 같은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의 강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강의가 수많은 수식을 바탕으로 논리의 탑 위에서 이론은 전개해나간다면 그는 수식을 쓰지 않고 비유를 통하여, 그리고 실험으로 도출된 눈에 보이는 결과를 통해서 그의 이론을 이해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저 스스로도 파인만처럼 물리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스티븐 호킹이 그의 저서 ‘시간의 역사’의 머리말에서 이런 말을 했었던가요, 자신의 편집자가 수식 하나가 들어갈 때마다 책의 판매수가 절반으로 줄어들 거라고 했었다고 말이지요. 반은 우스개소리겠지만 그만큼 대중들은 수식에 민감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파인만의 QED강의를 이렇게 그래픽 노블로 옮긴 것은 (물론 파인만의 강의 원본에서도 일반인을 위한 강의에서는 수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어느 날 우리 인류가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지식이 소실되어버리는 상황이 생긴다고 하고, 후세에 단 하나의 명제만을 물려줄 수 있다고 한다면, 파인만은 그 하나의 명제로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있다’ 라는 말을 고르겠다고 합니다. 나머지 모든 지식은 단순해 보이는 이 명제에서 모조리 도출될 수 있을 거라며 말이지요. 원자보다 더 작은 입자들의 세계에서부터 원자보다 더 큰 물질들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이런 도출 과정에서 파인만은 과학적 상상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도출된 실험결과와 유리된 상상력은 공상에 지나지 않으니 실험결과와 합치되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실험결과에만 얽매이지 않는 그런 창의적인 상상력 말입니다. 여기서 이야기를 조금 돌려서, 앞서 말했던 물리학과를 택했던 제 동기는 취업을 조금씩 고민하게 되었지요. 사실 그렇습니다, 비단 물리학과의 문제만이 아니라 공학계열이나 다른 이과계통의 학문을 택한 경우 상위권 성적을 가진 경우에는 연구실이나 다른 취업 자리를 어떻게든 구할 수 있게 되지만 하위권에서 중위권에 이르는 경우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경우도 많고 이윽고 자신의 전공과는 전혀 다른 직업을 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입학했을 때는 각종 물리학적인 아이디어가 번쩍이던 학생들이 졸업할 때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봅니다. 이 모든 것을 물리학에 대한 재능이 부족해서 그렇다, 라는 말로는 돌릴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는 학과 커리큘럼이 파인만이 강조하는 저 ‘과학적 상상력’을 짓누르는데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상상력을 하는데 있어서는 당연히 과학적인 기초를 잘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못지않게 자유스러움, 자유분방함도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지요. 마치 파인만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어중간한 통섭은 피해야 하겠습니다. 창의적 사고를 한다는 명목 하에 개념 몇 개를 알고는 그것이 지금껏 알아낸 과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범위를 너무 넓혀서 적용하는 상황은 정말 그르겠지요. 하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파인만의 이름은 몇 세대를 지나도 끝까지 남겠지요. 자유스러운 삶과 그 삶에서 기반을 둔 번뜩이는 재치를 가진 과학자로.

수학에서는 증명이 완전히 끝났을때 뒤에 QED를 붙이곤 합니다. 이는 Quod erat demonstrandum의 약자로, '이와 같이 증명이 되었다.' 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지금껏 파인만이 다뤄온 Quantum Electro Dynamics도 그 준말이 QED입니다. 비록 양자전기동역학이 자연계에서 찾아낸 법칙을 적용시킨 이론 중 가장 정확하다고 하지만 아직 그의 QED, 양자전기동역학이 좀더 재구성되어야 할 부분이 남아있겠지요. QED뿐만이 아니라 양자역학 전반적으로도 아직 물음표로 남겨둔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세대에서, 혹은 우리 이후의 세대에서라도 그의 재치와 자유분방함을 이어받아 과학적 상상력을 발전시켜나간다면 QED가 QED가 되어 '이와 같이 증명이 끝났다' 라고 선언할 날이 오래지 않아 찾아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p. s. 에휴... 글이 잘 안써져서 정말 힘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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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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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1.


  요즘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로 읽고 있는 책들의 거의 대부분이 외국 서적을 번역한 것이라는 점이었지요. 외국 책을 읽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읽게 되는 시간이 문제입니다. 보통 번역을 하는데 적어도 3년은 걸린다고 가정한다면 제가 2011년도에 나온 신간을 읽는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2008년의 책을 읽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출판사의 사정으로 인해서 더 늦게 나온다면 거의 5년 가까이의 세월이 지나야만 번역된 책을 읽을 수 있지요. 그러면 원래는 2006년도에 이미 외국에서 읽혀졌었던 책을 지금에 이르러 읽는 형세가 되어버립니다. 외국에서는 새로운 다른 책이 이슈가 되어있을텐데 말입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지요. 이 말도 옛말입니다. 요즘 처럼 생각의 속도가 빨리진 시대에는 10년은커녕 1년만 지나도 사람들의 생활모습과 사상이 달라져갑니다. 쉽게 IT에서만 예를 들어보아도 그 누가 스마트폰이 이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짐작했겠습니까. 애플에서 아이폰을 내놓기 전에는 거의 생각도 못했었지요.

저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학을 열심히 공부하면 된다, 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학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전문적인 지식이 담긴 텍스트를 완전히 독해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리나라에 사는 이상 접할 수 있는 책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을 조금 전환해보면, 반대로 우리나라의 책은 우리가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그 시대의 생각을 가장 빠르게 습득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줄 거라는 이야기도 됩니다. 우리나라의 책은 당연히 우리의 모국어, 한글로 쓰이다보니 읽기에도 쉽고, 딱딱한 번역을 벗어나기에 자연스럽게 우리 의식에 녹아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강남좌파’ 라는 책은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큰 이슈인 대선과 관련된 여러 인물들을 어색하지 않게 저자인 강준만 그 자신의 생각으로 쉽게 풀어나간 책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글은 많이 써볼수록 좋다고 했던가요, 펴낸 단행본만 200권이 넘는다는 그의 다작에서 우러나온 매끄러운 문장과 반박에 대비한 논리는 정교합니다.


2.


  제가 대학에 갓 입학하여 강의를 들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토론 수업이었는데, 주제가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내용이었지요. 한 쪽은 박정희와 그의 정책을 찬성하는 쪽, 그리고 반대쪽에는 반대하는 쪽으로 나누어 관련 자료를 찾아서 토의하는 형식의 수업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실소를 머금을 일이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모두다 박정희 대통령을 찬성하는 쪽의 편에 서고 싶어 하였습니다. 저 또한 다를 바 없었습니다. 저는 결국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반대하는 쪽의 논지를 펴게 되었지만 거의 울며 겨자 먹기로 한 것에 다름없었지요. 그런데 왜 그때는 그렇게 박정희를 찬성하는 쪽에 서고 싶어 했을까요?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대하는 점들을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요.

그러면 그 어렸던 시절에는 제가 사회를 보는 눈이 미숙해서 그랬던 걸까요? 물론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공도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겠지만 그 공만큼이나 과가 높이 쌓여있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이제는 의식이 어느 정도 깨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저는 그렇다고 쳐도 다른 학생들은 왜 그렇게 모두 박정희를 옹호하는 쪽을 택하고 싶어 했을까요? 그들도 사회를 보는 눈이 미숙했기 때문일까요? 아직 계몽이 덜 된 걸까요?

저렇게 개인의 미숙함을 근거로 들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요즘 계속 생각을 거듭해 본 결과 저는 개인의 미숙함보다도 주변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위의 계몽이 덜 되었다, 혹은 미숙하다, 라는 말은 사실 폭력에 가깝습니다. 그들이 그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것을 부정할 방법은 외부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쉽지만 그렇게 믿는 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가슴에 닿도록 설명을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몽이라는 말이나 미숙하다, 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말을 하는 자신도 반대편에서 본다면 그런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도덕적 우위가 뒷받침된다고 믿어서 전개되는 낮은 수준의 화법이겠지요. 따라서 저는 주변 환경에 주목해보고자 했었습니다. 여기서 마치 고해하듯이 털어놓는다면 저 또한 이 ‘강남 좌파’ 라는 책에서 다루는 ‘강남’ 의 이미지에 약간은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네, 저 또한 책에서 다루는 강남 좌파들처럼 그럭저럭 학벌은 나쁘지 않습니다. 끝끝내 학벌이 나쁘지 않다, 라고 적어두는 것은 나보다 더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과, 학벌은 사실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라는 위선 아닌 위선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나온 것이겠지요. 그리고 저처럼 ‘그럭저럭 학벌이 나쁘지 않은’ 아이들의 초기 선택은 박정희 옹호로 대표되는 우파적 경향이었지요. 그러면 이렇게 학벌이 나쁘지 않은 아이들을 이루어 낸 환경을 살펴봅시다. 과외, 학원, 부모의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지위.. 물론 예외도 있지만, 저도 사실 어떻게 보면 예외에 가까운 편이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고 학교를 다닐 때 과외를 받은 학생들이 많았지요. 그리고 학교를 원하는 곳에 가지 못했을 때 재수를 해서라도, 심지어 삼수를 해서라도 원하는 대학에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은 대개 갖추고 있었습니다. 혹은 그런 재력이 없더라도 빚을 내서라도 고학벌을 가지게 만들려는 부모들의 열의는 있었지요. 바로 이것이 이 학생들의 우파적 경향을 빚어낸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봅니다. 기존의 위계, 학벌로 따지면 스, 카, 이로 대표되는 전통에 속하고 있고 속하려는 그리고 속하게 만들려는 그런 환경이 말입니다.


3.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보니 저런 경향이 변해갔습니다. 박정희를 옹호하던 학생들 중에서 어느 순간 한나라당은 싫어, 라는 말을 심심찮게 내뱉기도 하고, 이전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김문수가 되자 김문수를 향해서 에잇 하면서 비난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지요. 그들 대부분의 사회적 환경이 바뀌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럭저럭 괜찮은 학벌의 소유자이고 그들의 부모님들의 수입이 떨어졌다거나 갑자기 더 늘어났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젊은 세대들은 어느 순간 기존 보수세력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이야말로 경제력을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체제에 가장 잘 순응하고 있는 집단일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이런 모습은 이 ‘강남 좌파’에서 강남 좌파로 규정된 세력들을 설명하는 것과 연관됩니다. 강남 좌파는 좌파적 이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생활양식에서는 기득권적인 면모를 보이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지금껏 냉소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생활이 그들의 사상과 일치되지 않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정말 약자를 위할까, 위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앞서게 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강남 좌파를 긍정합니다. 좌파라고 해서 그들의 욕망을 버려야 되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이 그들의 능력을 이용하여 높은 지위를 가지고 돈을 벌고 하는 것은 긍정할 수 있다, 라는 것이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말이지요. 그렇게 따진다면 우리 주변의 수많은 강남 좌파들은 모두 용인 가능한 범주입니다. 동시에 저 또한 저 구절이 저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면죄부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생각을 품은 것은 저 뿐만이 아니겠지요.


4.


  그런데 강남 좌파인 시민들은 저렇게 면죄부를 줄 수 있다고 해도 강남 좌파인 정치인들까지도 과연 저렇게 용인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강남 좌파로 불릴만한 정치인들인 노무현, 문국현, 조국,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을 다루고, 거기에 대비하여 박근혜와 오세훈을 다룹니다. 저 중에서 특히 강남 좌파적인 면모를 보이는 사람은 조국 교수이겠지요. 세련된 면모에 학벌도 좋고, 현재 직업도 S대 법대 교수, 거기에 이념마저도 좌파라니. 정말 완벽합니다. 좌파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는, 이제 점퍼를 입고 쟁의에 나서는 모습은 구식이라고 주장하는 듯 한 모습입니다. 이 책에서도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 조국에 대한 비판은 온건한 편입니다. 저자는 조국 교수의 딸이 외고 진학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고 있는 것에 관하여 강한 반박을 합니다. 그런 비판은 반위선 근본주의이며, 사라져야 할 태도라고 말입니다. 이를 볼 때 강준만은 정치인들에게도 시민들과 마찬가지의 기준을 적용한다고 여겨집니다. 좌파라고 해서, 그들의 욕망마저도 부정할 수 없다, 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반론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강남 좌파인 시민들은 시민이기 때문에 그들의 괴리, 그러니깐 총론 진보, 각론 보수의 모습을 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들의 머리가 이념을 지향을 하든 안하든 적어도 그들의 생활은 욕망을 충족시키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혹은 정치에 가까운 지도층들은 그래서는 안 되지 않겠나, 무릇 정치란 사람들을 이끄는 일이고, 그들이 다른 사람을 이끌기 위해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머리도 이념을 따르고 그들의 행동도 이념에 쫓아가야만 하는 게 옳으리라고 말입니다.

이런 반론도 저자는 가볍게 막아냅니다. 애초에 이런 반론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입니다. 이런 반론이 성립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정치 행태가 인물중심주의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흐름을 깨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때 진정으로 제대로 된 정치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극단적인 당파싸움을 지양하고, 1극이나 3극 체제가 아닌 수많은 다극체제로 가자는 것이 저자의 사유 끝에 나온 변론이자 이 책의 결론이지요.

사실 이 책의 결론은 명료합니다. 그리고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강준만의 논리 전개도 매우 유려합니다. 주장을 제기하고, 거기에 반론을 예상해서 반론의 반론을 제시합니다. 혹은 현상의 해석에 대한 반론도 제기합니다. 그리고 끝에는 본인의 제안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그 모든 문장은 그냥 쓰이지 않았고 신문 사설, 심지어 인터넷에서 보이는 글들까지도 인용해서 근거를 확보합니다. 이는 조국 교수에 대한 글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위의 정치인들을 다룰 때마다 그 정치인들 모두에게 적용이 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에서부터 조국 교수에 관한 글은 강남 좌파, 라는 개념에 대한 일관성을 보여주는 반면에 손학규부터 시작해서 유시민을 다룬 부분이나 문재인을 다룬 부분은 좀 흐름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이들을 다룬 부분은 감히 말하건대 이 책에서 빼도 괜찮을 정도이지요. 각각의 글만 놓고 본다면 크게 흠잡을 부분은 없습니다. 손학규의 자산이자 그 자신을 베는 칼날이 될 수 있는 것이 그 자신의 인맥이라고 결론지은 부분이라거나, 유시민이 너무 벼랑 끝 전술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문재인에 대해서는 그의 저서인 ‘문재인의 운명’을 거론하면서 그가 청렴할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정치인으로서 적합할까, 하는 의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이 글들은 과연 강남 좌파, 라는 제목에 묶여서 나올만한 글인지는 의문이 남습니다.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제목과 상관없이 대중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일종의 포퓰리즘적 요소를 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지요.


5.


  그러고 보면 제가 이렇게 글을 쓰면서 ‘좌파’라는 말은 많이 사용했지만 ‘진보’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이 책에서는 좌파와 진보를 거의 같은 것으로 취급하여서 혼재한 상태로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강남 좌파’ 대신에 ‘강남 진보’라고 쓸 수 있겠느냐, 라고 말입니다. ‘진보’라는 개념은 사실 보수 속에서도 숨어 있을 수 있고, 흔히 쓰는 진보, 라는 말 속에도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간단히 생각해보아도 현재보다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려는 노력이 진보가 아니겠습니까. 다만 좌파적 진보는 그 속력이 빠르게 되기를 바라고, 우파적 진보는 그 속력이 너무나 느릴 뿐이겠지요.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좌파는 진보, 우파는 보수로 굳어져 있는 게 사실이기는 합니다만 이 책의 저자가 정말 좌파와 우파를 뛰어넘는 어떤 비전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그것은 좌파에 향한 비판들(상대방을 비판하는 그 기준을 그들 스스로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살아있을때는 그를 극복하려고 하더니 떠나고 난 뒤에는 그 그늘로 다시 들어가려고 한다 등)보다도 이런 개념에서부터 시작했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저런 개념에서부터 인물중심주의를 극복하자, 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보기에 말입니다. 물론 저 비판들에는 좌파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요.

그리고 강남 좌파의 의미 자체는 예전부터 있어왔습니다. 그것이 강남 좌파, 라는 말로 개념화되지 않았을 뿐 ‘언어의 좌향좌, 현실의 우향우’와 같은 문제 제기는 끊임없이 되어왔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개념화 된 말의 문제점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현상도 일종의 유사성만 보이면 그 개념으로 고착화시킨다는 점입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우리가 토끼를 보고 ‘토끼’ 라고 개념화시키게 되면 귀가 길고 눈이 빨갛지만 실제로 다른 동물을 ‘토끼’라고 칭하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강남 좌파’라는 개념 자체의 무용론을 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강남 좌파를 아홉 가지 유형을 들면서, 복잡한 사회적 현상을 이 단어 하나에 포괄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들게 하였습니다. 물론 저자도 그런 비판을 염두에 둔 듯, 현실에서는 상호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고 덧붙이기는 하였지만 말입니다.

아쉬운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는 앞서 말한 면죄부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자, 저는 어쩌면 강남 좌파에 가까울 지도 모릅니다. 좌파는 모르겠지만, 강남의 이미지에는 한 발짝 가까이 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저는 강남에 살고 있지도 않고 고향도 서울이 아니지만 ‘강남성’의 핵심인 학벌은 그것에 근접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나는 과연 욕망을 추구하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가, 라고 말이지요. 제가 좌파가 아니라고 해도 저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이전에 어느 대학교에 잠시 몸담고 있을 때 어느 교수가 라이벌 대학교를 가리키면서 딱 하나 본받을 것이 있다고 말한 적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은 그 라이벌 대학교가 총장이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비정규직들을 모두 잘라버렸다는 것이었지요. 우리는 그러지 못해서 지금 비정규직 문제로 골머리 앓고 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굳이 그런 화제를 더 이상 언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침묵은 저의 학벌을 그대로 유지시켜주고(‘강남’을 유지시켜주고) 한편으로는 나는 당신에 동의하지 않는다, 라는 침묵이 되어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해주었습니다. (‘좌파’라는 허영이 저를 감싸게 놓아두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속으로는 생각합니다. 이건 옳지 않은 일일지도 몰라, 하지만 저는 끝끝내 소리 내어서 이야기를 하지 못합니다. 아마 슬픈 이야기이겠지만 앞으로도 각을 세우며 비정상적인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못하겠지요. 반은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 때문에, 반은 지금의 생활을 무너뜨리기가 싫기에. 하지만 이러한 괴리는 커져가기만 합니다. 마치 진화론을 발견하고도 그것을 20년 동안 비밀공책에다 끄적거리기만 했던, 그러면서도 진화론을 부정하는 상류층 친구들과 지내야만 했던 다윈처럼 말이지요. 강남 좌파인 시민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거리낄 것이 없는가, 하는 점에 이르면 적어도 저는 아닌 것 같다, 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욕망을 추구하되 그것을, 그리고 그 욕망의 결과로 오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저는 사람이 위대할 수 있는 이유는 개인의 능력이 모두 다르더라도 아래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두 손으로 그 사람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것에 있다고 믿습니다. 비록 위에 있는 사람이 있으면 아래에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 세속의 진리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6.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제외하고서는 이 책은 확실히 이슈가 될 만한 요소들을 잘 잡았기에 요즘 시기에 읽기 좋으리라고 짐작됩니다. 그러고 보면 최근 오세훈 서울 시장이 사퇴를 선언했지요. 이 책이 오세훈 서울 시장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보면 저자의 통찰력이 새삼 대단하게 보입니다. 이 책이 출간될 때는 아직 무상급식이 어떻게 흘러갈지 불투명한 상태였지요. 결국 투표함은 열지도 못한 채 무상급식 투표는 부결되었고 이 책은 예상이라도 한 듯 오세훈에 대한 글 중 한 단락을 ‘오세훈의 무상급식 주민투표 도박’ 이라는 제목을 붙여놓았습니다. 과연 그의 행보는 도박과 같아서 잭팟을 터뜨리지 못하고 쌓아올려왔던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다른 인물들에 대한 평들도 그들의 행보도 책과 어느 정도 들어맞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사실 인물 중심주의를 경계하자는 책인데도 불구하고 인물의 행보가 더 궁금해집니다. 아직 새벽이 오기에는 멀었나봅니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런 고질적인 병폐들, 인물중심주의, 무리 짓기, 증오의 정치 등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자가 마지막장에 언급하듯이 ‘정치인들이 존경받는’ 그런 꿈이 단순히 꿈만으로 그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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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 읽기 - 전체주의의 탐험가, 삶의 정치학을 말하다 산책자 에쎄 시리즈 8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 산책자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아렌트 읽기.


1.


  개인적으로 저는 어렸을 때 판타지 소설, 요즘 말로 하면 장르 소설을 많이 읽어왔었습니다. 거창하게 반지의 제왕, 실마릴리온, 얼음과 불의 노래.. 이런 소설들을 읽은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판타지들을 읽어왔었지요. 아, 자생이라는 말이 좀 어울리지 않는 듯 하지만 그 이상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대로 쓰렵니다. 1세대 판타지로는 역시나 가즈 나이트, 퇴마록, 더 로그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제가 읽기 시작했었을 때가 거의 1세대 판타지의 태동기였으니깐 말입니다. 이 글을 읽게 되신 분들 중에도 의외로 저런 책들을 읽어보신 분들도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뜬금없이 인문 서적의 서평을 쓰는데 판타지 소설의 이야기를 하다니, 여기에 대해 당황스러워 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고 글을 대충 보아하니 판타지 소설에서 인문 서적의 내용을 접합시켜서 글을 풀어나가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러면 인문 서적의 어떤 격을 떨어뜨리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내심 하시는 분도 계실 듯 합니다. 그런 분들께는 심심한 사과를 드리며, 굳이 변명하자면 사실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판타지 내용을 접목시키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렌트 읽기' 를 중간쯤 읽어나가는 순간, 마치 기억의 창을 발로 뻥, 하고 걷어차면서 뛰어들어오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정말 좋아하던 판타지 소설에 대한 기억이었습니다. 바로 '드래곤 라자' 였지요.


드래곤 라자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스토리 라인은 단순합니다. 판타지 소설답게 드래곤이 나오고, 이 드래곤이 한 마을을 핍박합니다. 드래곤이 보석을 좋아한다는 것은 '던전 앤 드래곤' (TRPG : Talk Role Playing Game) 에서부터 널리 알려진 설정이지요. 이 소설도 그 설정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드래곤이 금은 보화를 요구합니다, 마을을 무사히 놓아두는 대가로 말이지요. 그런데 그 가난한 마을이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일종의 원정대를 조직해서 국왕에게 돈을 달라고 부탁하러 갑니다. 소설의 나머지 내용은 국왕에게 돈을 받으러 가는 중에 벌어지는 일과 모험을 그리고 있습니다. 단순히 돈을 구하러 가는 중인데 괴물들을 만나고 엘프도 만나고 전설의 마법사의 이야기를 조각 조각 모으게 되고, 이윽고 평범한 소년이었던 주인공은 느낀 바가 있어서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이 주인공만큼이나 비중있는 존재로 그려지는 존재가 바로 저 전설의 마법사, '핸드레이크' 입니다.


2.


  작중의 핸드레이크는 인류 역사상 최강의 마법사로 그려집니다. 드래곤 로드, 드래곤들의 지배자를 암살하러 가는가 하면 열 두 마리의 드래곤과 싸워서 그들의 이빨을 뽑아버립니다. 그리고 그 소설 속의 가장 강력한 전사들과 싸워서 모두 굴복시키지요. 그런 그는 이상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옛날에 인간에게 전해주었다는 8개의 신성한 보석을 구해서 모든 종족의 불평등을 없애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그 보석들은 드래곤 로드가 가지고 있었기에 필연적으로 드래곤 로드와 대립각을 세울 수 밖에 없었지요. 드래곤 로드가 그 자신의 지배를 위해서 보석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는 단수가 아니다’ 라는 말입니다. 얼핏들으면 문법적으로 어긋난 말 같습니다. 나, 라는 존재는 일단 단수입니다. 어법상에서도 당연히 단수로 취급되고 영문법에서도 I 뒤에 오는 be동사는 단수형을 씁니다. 그런데 그 나, 가 단수가 아니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드래곤 라자의 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저는 이렇게 해석을 하겠습니다.


아렌트 읽기, 에서 저자가 끌어온 아렌트의 저서 ‘인간의 조건’ 에서는 탄생성과 다수성, 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탄생성은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과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탄생성만 지나치게 강조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그, 혹은 그녀가 탄생성만으로 사회를 살아가려고 한다면 수많은 반대와 고난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회는 간단히 말해서 나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다수성이라는 개념이 나타납니다. 이 다수성은 탄생성을 한정시킵니다. 좀 더 명확히 말하면 다수성은 다른 사람과 내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일컫습니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 라는 말은 이 개념에 정말 어울리는 말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나는 나 혼자 이 세상에 존재하지는 않는다, 나는 나와 다른 너와 있고, 이윽고 우리가 되어 세상을 살아간다, 라는 의미 말이지요. 실제로 ‘드래곤 라자’ 의 작가가 이런 생각으로 저 문장을 썼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종족들, 드래곤, 엘프, 드워프 등과의 화합을 중시했던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 그게 황인종이든 백인종이든 흑인종이든 상관없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영역으로서의 정치를 생각했었던 아렌트와는 비슷한 점이 있어 보입니다.


3.


  이 책 ‘아렌트 읽기’ 는 인용한 책에 따라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그리고 ‘정신의 삶’ 이 바로 그것인데, 각각의 책은 아렌트의 사유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는 대표적인 저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의 조건’ 에서 단수성, 다수성과 함께 언급되는 개념은 바로 ‘용서’입니다. 그런데 이 용서를 우리가 그냥 생각하는 그런 용서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아렌트는 ‘진주조개를 깨는 사람’ 이라는 이명에 걸맞게 우리가 쓰는 용어를 꼼꼼히 살펴보고 그 용어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서 새롭게 재정의합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용서는 ‘인간의 움츠러든 탄생성을 다시 펴주는’ 것입니다. 아렌트 읽기, 에서는 남아프리카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 에서 이 개념을 다시 불러옵니다. 이렇게 저서를 선정하고 개념을 추출하여 거기에서 현대적으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해내는 일이야말로 아렌트의 수제자였던 저자에게 정말 적합한 일이라 봅니다.


저자가 이렇게 아렌트를 초혼(招魂)하는 부분은 저 대목뿐만이 아닙니다. ‘전체주의의 기원’ 을 다룬 부분에서도 그녀의 통찰력은 빛을 발합니다. 전체주의의 구성 요소를 네 가지 파악해보자면 이데올로기, 공포, 사적 영역의 박탈, 관료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체주의가 사라지지 않고 가장 대척점에 서 있다고 자부해오던 미국 내부에 침투해 있다는 것을 저자는 밝혀냅니다. 미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원자폭탄으로 받아내던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아직도 자신들의 힘이 건재하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다른 나라에 대한 무력 시위로 이어지는데 그 결과가 아프가니스탄과 탈레반 정권입니다. 이라크전도 마찬가지이지요. 테러주의를 없애기 위해서 그들은 더한 테러Terror를 사용합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미국 관료주의이고 그들의 뒤를 굳건히 받치는 것은 '우리는 자유를 실현하는 국가다' 라는 자기 최면과도 같은 이데올로기입니다. 이윽고 전체주의를 공격하던 미국 내부에 그 싹이 스며들어갑니다. 이는 비유하자면 괴물을 잡기 위해서 동굴로 뛰어간 전사가 이윽고 본인도 괴물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4.


  그러고 보면 사실 한나 아렌트, 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개념은 ‘악의 평범성’입니다. 정말 큰 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실제로 그 본인은 그렇게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경우가 있지요. 유대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처형시키던 아이히만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이 책 ‘아렌트 읽기’ 에서는 저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아렌트의 다른 저서 ‘정신의 삶’ 을 끌어옵니다. 정신의 삶, 에서의 중심 개념은 사유, 의지, 판단입니다. 각각의 개념은 아렌트가 소크라테스, 아우구스티누스, 칸트에게서 이어온 것들이지요. 이를 쉽게 물건에 비유하면 사유는 우리가 물건을 늘어놓는 것이며 의지는 우리가 거기서 한 물건을 택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판단은 내가 택한 이 물건이 과연 제대로 택한 것인가 반성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저 아이히만에서는 인간 정신의 세 가지 구성 요소인 사유, 의지, 판단 중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확인할 수 있겠지요. 바로 사유, 부분입니다. 처음에는 그 스스로도 반발했을지 모르지만 이윽고 거대한 나치라는 기계 내부의 부품이 되어가면서 결국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생각을 그만둔 것이지요. 조금만 더 생각했었더라면 그는 다른 가능성들이 있었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이 듭니다. 과연 정말 그럴까, 라는 의문 말이지요. 만약에 저기 저 아이히만이 사유를 통하여 다른 선택지들을 찾아내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는 과연 다른 선택지를 택할 수 있을까요?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 또한 불순분자로 몰려서 유대인들과 함께 처형당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으로 끝나면 다행이지요, 가족의 목숨까지도 담보가 되어서 그에게 명령에 따르라고 한다면 과연 그는, 혹은 또 다른 아이히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아렌트는 저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책 '아렌트 읽기' 의 저자는 저런 질문에 대해서 다시금 '왜 아렌트가 의미를 가지는가' 에 관하여 구술하면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아렌트의 사랑, 이라는 개념을 부활시키면서 말이지요. 사실 저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유 다음의 단계인 의지에서 내려질 수도 있을 겁니다. 사유의 선택지를 하나로 좁혀서 강요하더라도 나의 의지로 나는 바른 길을 택하겠다, 라고. 그러면 그 의지마저도 꺾어버리는 거대한 억압 앞에서는? 그때는 그 다음 단계인 판단에서 '나' 자신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결론을 내리겠다, 라고 할까요? 그래서는 끝이 없습니다. 끝없는 의문만 남길 뿐입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단순하지만 가장 명료한 진리인 '세계 사랑' 입니다.


이 사랑은 끝없는 간극 - 의지와 비의지, 사유와 무사유, 판단과 판단하지 못함 - 을 메우는 사랑입니다. 아렌트 본인은 사랑에 대해서 많은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사랑에 관한 글들은 사랑이라고 할때 떠오르는 대표적인 글들에 속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을 되살려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사랑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은 공영역에서 제 역할을 하며 그것을 보전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러면 저기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겠습니다. 네, 사실 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우리는 억압이 주어질 때 어떻게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에 주목해서는 안됩니다. 억압을 주는 사람이 저 사랑이라는 말을 안다면 그는 억압을 주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계급의 차이, 신분의 차이 등 그 모든 차별을 넘어서 모두가 사랑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5.


  어느 분께서 과속 방지턱, 이라고 비유하셨던가요, 책의 수동태 어구의 번역은 정말로 과속 방지턱처럼 흘러가는 의식을 한 번씩 뒤흔들고 속도를 줄이게 합니다. 그래서 한 챕터를 읽을 때 여러 번 읽은 적도 있고 뒤의 역자 해제의 도움도 많이 받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을 읽을 때는 역자 해제를 먼저 읽고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지요. 그러나 이런 것들은 너무 사유를 방해하지는 않는 한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것보다도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사실 위의 말들은 이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책에서 데리다를 언급하면서 해체 이후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라고 주장하였던가요, 그러나 사실 아렌트가 세계 사랑, 이라고 이름붙이고 싶어했던 '인간의 조건' 그리고 끝내 미완성으로 남겨진 '정신의 삶' 등도 현재 문제의 분석에서는 탁월하지만 대안의 제시에서는 미흡한 것이 사실입니다 앞서의 드래곤 라자 이야기로 돌아가면, 인간은 끝내 드래곤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인간화, 시켜버리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두가 만족할만한 사랑을 서로에게서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리고 포용할 수 있었더라면 '악의 평범성' 이라는 명제가 주목을 끌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가장 쉬운 말이 가장 행동하기는 어려운 말이지요. 그래서 아직도 세계에는 전체주의의 잔재가 남아서 어둠속에서 출몰하고 심지어 조그만 중고등학교 교실에서도 또 다른 작은 아이히만들이 눈치를 보면서 춤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있다고 해서 이 책의 의미가 반감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알아야 답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해결과정에서 처음에는 50점짜리 답안을 내어놓더라도 그 시도 끝에 끝내 만점짜리 답안을 내놓게 되는 것이지요. 오히려 이런 상황을 되돌이켜서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금 아렌트의 가치에 불을 지피게 한 이 책은 정말 원제 그대로 '아렌트가 왜 현재 중요한가' 를 잘 말해준다고 여겨집니다.



 

p. s. 이번엔 특이한 리뷰를 적어보려고 했는데.. 아니, 충분히 특이한가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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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08-31 20:45   좋아요 0 | URL
꼼꼼한 리뷰 잘 봤습니다. 읽다가 낙오하는 줄 알았습니다..ㅎㅎ

첨에 퇴마록, 드래곤라자....ㅎㅎ

드래곤라자의 리뷰도 잘 봤어요..ㅋㅋ

가연 2011-09-03 09:56   좋아요 0 | URL
ㅋㅋㅋ 원래 쓰려던 글은 훨씬 특이한... 형식이었지만... 솔직히 이 글은 좀 부끄럽네요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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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예전에 읽은 글 중에 좋은 서평이란 무엇일까, 에 관한 글이 있었습니다. 그 글에 따르면 좋은 서평이라는 것은 어떤 책이 좋으니 꼭 읽어라, 라고 말해주는 글이거나 이 책은 읽지 말고 피해라, 라는 글이라던가, 혹은 그 책의 내용을 잘 정리해서 읽지 않고도 읽은 척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글이라지요. 제가 지금껏 서평들이 감히 좋은 서평에 속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지금껏 제가 써 온 서평을 저기 있는 좋은 서평의 기준에 맞춰보자면 아마 첫 번째 유형에 거의 비슷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완전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책이 완전하기란 어려운 일이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간하면 다른 사람의, 혹은 다른 책들의 결점보다는 장점을 주로 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지요. 이 책은 어느 부분이 나쁘지만 그래도 이러 저러한 장점이 있기 때문에 한번 읽어보시라, 와 같이 말입니다. 사실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이 제가 성격이 좋아서는 아닙니다. 지금껏 저는 이렇게 신간평가단에 들기 전에는 제가 관심이 가는 책들만 읽어왔으며 글을 쓰고 싶은 책들만 골라서 써왔습니다. 정말 한숨만 나오는 책이라면 중간쯤 읽고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내던져 버릴 수도 있었지요.

하지만 평가단을 하면서 상황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신간을 추천하고, 그 추천에 대한 책임을 다합니다. 이 말은 추천의 결과로 뽑힌 책이라면 설령 그 책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 책에 관한 리뷰를 꼭 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저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내가 추천한 책이 안 될 수도 있구나, 나는 분명 이 책이 좋아보였는데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네, 나의 관점과 다른 사람의 관점이 다를 수 있구나, 다른 사람은 어떤 심정에서 이 책을 추천했을까? 평가단을 하고 서평을 쓰면서 내내 저런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지금껏 글을 써오면서 조금 마음에 안 드는 책도 있었고, 좀 많이 마음에 안 드는 책도 있었었지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제가 쓴 서평은 여전히 저기 위의 좋은 서평의 분류 중 첫 번째를 따르고 있습니다. 설령 제가 마음에 안 드는 책이라도 이 책을 추천한 사람들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까, 그리고 내가 생각이 짧아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내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으니 글을 이렇게 쓰자, 등으로 말이지요. 차라리 제가 추천해서 뽑힌 책이라면 냉정하게 이 부분은 그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분들이 추천한 책이지만 두 번째 유형에 치우친 서평을 한 번 써보고자 합니다. 이 책은 읽지 마라, 라고 설득하는 글말입니다. 읽지 마라, 라고 단언하는 것은 너무 거칠게 말하는 것이네요, 엄밀히 말하면 그리 추천은 못하겠다, 정도가 적절한 말이 될 듯 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지금부터 살펴볼 책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택광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습니다. 이택광씨의 블로그에 꽤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지요. 처음에는 그의 사유에 대단하다, 라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지만 이택광씨의 블로그에서 일어난 몇 몇 일들을 계기로 더 이상 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느 이십대 에세이스트에 관련된 일부터 시작해서 정체도 불분명한 라캉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보이는 글을 읽은 것들 등이 바로 그런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신간평가단에서 이 책이 추천되었을 때 매우 난감했습니다. 분명 라캉의 개념을 빌려와서 문화를 비평하고 있다고 할 텐데, 라는 생각에서부터 (라캉주의자라는 말이 얼마나 모호한 개념인지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글 전체가 너무 혼란스러워질 테니 뒤로 미루겠습니다.) 블로그에서 쓴 글들을 묶어서 내는 책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고, 한편으로는 그래, 내가 지금껏 오해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의 책을 읽어보면 블로그의 글과 또 다른 관점으로 생각을 전개해나가겠지, 그리고 예전보다 훨씬 그의 논리가 조리가 있겠지,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랐습니다. ‘철학과 비평 사이’, ‘사회와 정치 사이’ 그리고 ‘문화와 인물 사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목차만 보았을 때는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경계를 넘어서 사유하려고 노력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었지요. 하지만 책을 받고 첫째 주제, ‘철학과 비평 사이’를 읽고는 그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나를 깨달았습니다. 물론 고개가 끄덕여지는 글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말 아무리 읽어도 앞 뒤 문맥이 맞지 않는 글들이 있는가 하면, 사상가들의 이름과 그들의 말을 빌려서 완성한 글도 있었습니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이렇게 되겠지요. 그의 글은 텅 빈 기표와 같아서 수많은 사상가들이 그의 글을 채워주지 않는 한 무한히 기의에 도달하려는 과정에 있고 그 과정에서 그의 글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말입니다.

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아마 제가 이렇게 묻지 않았다면 글을 읽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고쳐서 물어보겠습니다. 위의 말의 의미는 놓아두고서라도 제가 긍정적 의도로 저 말을 했을까요, 부정적 의도로 저런 말을 했을까요? 물론 문맥상 당연히 부정적 의도로 말을 했겠지요. 하지만 저 말만 떼어놓고 보자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입니다. 저 말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택광씨의 글쓰기는 저것과 거의 동일합니다. 어떤 주장을 하면서 적당히 사상가를 끌어들이고 그 사상가가 한 개념을 이렇게 적용했다고 말하면 글이 하나 뚝딱 만들어집니다. 첫째 주제의 글 중 ‘생존지상주의’ 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글의 일부를 가져오겠습니다.


...이론적으로 맬서스와 다윈은 ‘최적자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상부상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맬서스의 영향을 받은 다윈의 진화론을 통해 맬서스 자신의 인구론 또한 과학적 근거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진하론의 기본 개념은 사회적 진보와 자연적 진화를 하나로 보는 것이다...


앞 뒤 없이 잘라왔기에 부연 설명을 하자면, 저 문장들의 앞에서는 다윈에서부터 시작해서 맬서스를 언급함으로서 끝났고, 뒤에서는 스펜서의 이야기로만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결국 다윈과 스펜서가 만나는 부분은 바로 저 문장들뿐인데 찬찬히 살펴봅시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도대체 무엇을 증명하는 것일까요? 맬서스와 다윈이 상부상조한 것을 증명한 것일까요, 다윈의 진화론이 맬서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까요, 맬서스의 인구론이 과학적 근거를 획득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까요? 저기 뒤에 나오는 문장을 보면 더 놀랍습니다. 스펜서의 이론에서 핵심적인 것이 ‘살아남을 자만 살아남아야 한다’ 라는 논리라는데, 이 논리가 맬서스의 인구론과 다윈의 진화론의 만남에서 이끌어진 발상이라고 하지요. 이것을 보면 이택광씨의 글에서는 거칠게나마 이런 도식이 성립합니다. 다윈+맬서스=스펜서, 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다윈과 맬서스의 만남으로 나타난 스펜서의 논리가 도리어 다윈과 맬서스를 증명한다니, 이는 수학 문제를 풀때 답을 가져와서 끼워 맞추고 이 문제를 증명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외에도 이런 글도 있습니다. 여전히 첫 번째 주제의 ‘냉소주의 시대의 인문학자’ 라는 글입니다. 이 글은 부분적으로 옳습니다.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너무나 냉소적입니다. 누가 무엇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 정도는 나도 알 수 있어’ 라는 태도로 일관합니다. 사실 인터넷이 있는데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대형 포털 사이트의 커뮤니티모임이나 어느 사상이나 과학을 주제로 글을 써놓은 페이지를 보면 수많은 댓글들이 ‘나도 이 사람이 무엇을 주장했는지 잘 알고 있지’ 라는 식으로 달려져 있습니다. 그 주제가 비트겐슈타인이든 하이데거든 사람들은 상관안합니다. 왜냐하면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적어도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불릴 만한 것은 대부분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크레타 섬의 미노타우르스가 정말 괴물이었는지 미노스 섬의 타우르스라는 사람이었는지, 그런 것들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이런 것도 있지’ 하면서 아는 척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요즘처럼 ‘아는 체’ 와 ‘아는 것’ 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면 해질수록 사람들은 냉소주의에 빠져들기만 합니다. 그래서 현대 사회가 냉소주의에 빠져있다는 이택광씨의 진단은 정확합니다. 하지만 그 진단에서부터 이끌어낸 결론은 책을 다 읽고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실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냉소주의가 만들어낸 현실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대중들의 세계다. 이 세계는 존재할 수 없지만, 존재하고 있는 이상한 공간이다. 공간만이 남아 있고,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마땅할 이 모순의 조건에서 지식인의 글쓰기는 아무런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결국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이런 앎을 넘어선 앎, 또는 계몽에 대한 재계몽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천천히 읽어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지요. 하지만 그가 문맥상으로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자신은 (대중들에게) 계몽에 대한 재계몽을 하겠다, 라고. 앞의 글들을 가져와서 좀 더 설명하자면 저널리즘에 익숙해진 독자들을 실증적 논박에서 벗어나서 불경한 상상력을 삽입함으로서 재계몽시키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얼핏 보면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가 이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삽입시키고자 하는 불온한 상상력은 그저 그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뒤의 인문좌파란 무엇인가, 라는 글에서 두드러집니다) 그리고는 그것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특히나 저런 냉소주의에 빠진 젊은 20대들에게) 대응이라도 하듯 ‘인터넷 세대는 문어체의 글을 잘 읽어내지 못한다는 것이 중론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어떤 비판하는 글을 이렇게 몰아붙이기는 쉬운 일입니다. 게임을 보고 즐기려면 최소한 그 게임의 규칙 정도는 알고 즐겨야 되지 않느냐, 멀뚱히 규칙도 모르는 게임을 보면서 ‘아 저 게임 재미없어’ 라고 말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고 말입니다. 최소한 규칙을 알려고 노력은 해야 되지 않겠냐고 말입니다. 인문학에서 이야기를 하자면 너희는 슬라보예 지젝은 알고 있냐? 루카치는 들어봤어? 그 정도는 좀 알려고 노력을 해야 이 글이 읽히지 않겠냐? 정도로 거칠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게임이 보편성을 가지는 다른 사람도 보고 즐길 수 있는 게임이 되기 위해서는 규칙도 명료하여야 하고 최소한 다른 게임의 규칙을 바탕으로 추측은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인만, 혹은 아는 몇 명만 즐기는 게임이라면, 게다가 그 게임이 규칙을 알았는데도 재미조차도 없거나 발견하고 발견해도 규칙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게임이라면 그게 무슨 의미를 가지겠습니까. 그런 경우가 의미를 가지는 경우는 단 하나, 자연에 대한 물리학의 몸부림뿐입니다. 이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라는 책은 글을 어렵게 쓴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익숙하지 않아서 이 글이 어렵게 느껴지는 거야, 라고 말을 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대응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냉소주의에 빠진 현실에서 인문학자가 해야 할 일은 그런 냉소를 날리는 대중에 대한 재계몽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현대 사회에서의 인문학자가 해야 할 일은 ‘아는 체’와 ‘아는 것’의 경계를 다시 넓히는 것에 있습니다. 참된 앎이 무엇인가, 에 대한 고찰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자연스레 냉소주의가 해소됩니다.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를 주입하는 것을 불온한 상상력 운운하면서 재계몽한다고 여기는 것은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자는 사회현상에서 정치적 의미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합니다. 이 책에서 예를 들자면 특히 두드러지는 것이 ‘인문좌파란 무엇인가’ 라는 글입니다. 다른 부분은 다 놓아두고서라도 2008년의 촛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문좌파에 대한 요청이 현실화한 것이라고 말이지요. 좌파적인 문제를 주체화의 관점에서 사유하자는 의미에서 쓰인 용어가 인문좌파라면, 이런 말이 성립됩니다. 촛불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좌파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잠재적 혹은 실질적 좌파들이라고 말이지요. 이는 촛불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의 다양성과 개성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두루뭉술하게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촛불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각자 노래를 부르고 음식을 나눠먹기도 하면서 정말 일반적인 시위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였었지요. 그런 촛불에 대한 이보다 더 나은 설명은 한나 아렌트의 ‘콘서트화’ 라는 개념이나 조정환씨의 ‘다중’ 이라는 개념이 더 적절하겠습니다. 결국 인문좌파에 대한 저런 담론은 주체화의 관점에서 생각하려는 시도였겠지만 동시에 생각을 가진 주체의 개성을 매몰시킨 채 다시금 좌파와 우파의 대립관계라는 틀로 현상을 옭아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책을 읽으면서 또 당황스러웠던 것은 두 번째 주제인 ‘사회와 정치 사이’ 의 ‘불륜드라마, 우리 시대의 리얼리즘’ 이라는 글이었습니다.


...오늘날 불륜 드라마는 현실의 가부장제를 넘어가려는 중간계급의 (여성) 판타지다..... 오히려 중요한 건 이런 드라마가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것을 감추기 위해 발명된 스크린이라는 것이다. 그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것을 감추려는 상황이 불륜의 징조를 유발한다. 그 차마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란 ‘사랑의 부재’를 정언하는 자본주의의 물질주의다...


첫 문장을 해석해보면 계급상승을 위한 중간계급의 판타지가 헤메다 막다른 곳에서 찾아낸 길이 바로 불륜이라는 겁니다. 가부장제라는 것은 남성 중심주의를 뜻하며 여성은 그 남성 중심주의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추락해버리는 그런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물론 꼭 여성이 주인공이어야 하는가, 남성이 주인공인 불륜 드라마가 정말 없었나, 하는 반론도 제기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찌 보면 지엽적인 반론에 지나지 않고 그 이외에는 일견 논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것’이 문단을 나락으로 빠뜨립니다. 여기서 왜? 라는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왜 자본주의의 물질주의가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것인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의 물질주의를 주제로 드라마를 쓰면 시청률이 잘 안 나와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자본주의에 관해서 드라마를 쓰면 어느 높으신 분이 방송금지처분을 내리는 걸까요. 여기서 책의 저자는 억지로 불륜을 자본주의에 연결시키느라 논리적 비약을 범하고 있습니다. 꼭 저런 기저 문제가 깔려있지 않더라도 불륜은 그 자체로 충분히 ‘불길한 징조’ 이며 말초적입니다. 그 드러낼 수 없는 것을 감추는 행위에서 유발되는 긴장 때문에 우리가 불륜드라마를 보면서 ‘아 진짜 이 드라마 욕하면서 본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란 겁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라캉입니다. 책의 저자는 라캉주의적(사실 적절하지 못한 단어입니다. 생전의 라캉은 책을 별로 남기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그나마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에크리, 정도입니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라캉을 접하게 된 사람들은 이차적인 저작물로 접하게 된 경우가 많기에 엄밀히 라캉주의다, 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의 저자인 이택광씨는 에크리 등을 읽어보셨을 수도 있으니 확언하기는 힘들지만 말입니다.) 성향이 있습니다. 왜 글쓴이의 라캉주의적 성향을 언급하느냐면 일단 우리나라에서 라캉은 이차적으로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보니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소비되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심리학이면 심리학, 의학이면 의학, 과학이면 과학... 등으로 말입니다. 물론 이 책의 저자가 하는 것처럼 문화비평에도 쓰일 수 있지요. 하지만 이는 옳은 일이 아닙니다. 라캉주의자들은 그들이 속하는 경계를 자의적으로 재정의함으로써 비난을 피해갑니다. 쉽게 말하면 철학적인 질문으로 논쟁을 벌이게 되면 어느 순간 과학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공격을 방어하며, 과학의 거센 공격을 받게 되면 철학이기 때문에 과학과 거리를 두어야 된다고 외칩니다. 문화비평에서 라캉의 개념을 적용시킨다면? 어느 순간 문화비평에서 심리학으로 경계를 침범하거나 정신분석학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정신분석학에 상당한 호의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저 뿐만은 아니겠지요. 누구나 사람의 정신을 분석하는 학문과 거기서 나오는 방어기제들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현대 정신의학은 많은 부분을 약물 치료에 의존을 하고 있으며 정신분석학이 차지하는 부분은 실제로는 정말 미미합니다. 그럼에도 정신분석학은 그의 몸을 신비함이라는 보석이 달린 휘장으로 둘러싸 그 보석에서 나오는 빛으로 관중들의 눈을 멀게 합니다. 하지만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정신분석학을 어디까지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는 저는 상당히 엄격한 태도를 취하고 싶습니다. 정신분석학은 과학이 아닙니다. 리처드 파인만의 말을 빌리자면 ‘주술’에 가깝습니다. 파인만의 저 말의 원문은 ‘정신분석학은 어느 부족의 주술사가 부리는 주술에 가깝지만 만약에 그 부족에 속해있는 당신이 병에 걸리면 나는 그 주술사를 찾아가보라고 권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주술사가 가장 병에 해박할 테니 말이다.’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더 해박한 의사가 있다면, 그래도 여전히 주술사를 찾아가겠습니까? 적어도 파인만의 대답은 확실하겠네요. ‘아니오’ 라고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문화비평을 하는데 왜 굳이 라캉의 기표, 기의, 대타자, 오브제 아 등의 개념을 끌어와야 될까요? 정치현상과 사회현상, 문화 모든 부분에 다 끼어들 수 있다고 해서 그 모든 부분을 다 통합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라캉의 사상이 바로 그러한데, 모든 부분에 다 끼어들 수 있지만 막상 그것들을 모두 연결시켜서 하나의 원류를 이끌어내는 데에는 한참 부족합니다. 만능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한 번 쓰면 문의 자물쇠를 망가뜨리는 그러한 것이었다, 와 같은 맥락입니다. 문을 제대로 열려면 그 문에 적합한 열쇠를 들고 있어야 하며, 진실된 문화비평은 만능키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열쇠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열쇠고리와 같은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정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라는 제목에 걸맞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오랜 공부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 책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라캉의 개념의 섣부른 적용은 도리어 그 진정한 원류를 찾지 못하고 모든 부분을 라캉의 사상으로 회귀시켜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모든 부분이 비판할 것으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닙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생각의 방향에 동의하고 고개를 끄덕인 것도 적지 않습니다. 셋째 주제 ‘문화와 인물 사이’ 부분이 특히 그러했습니다. 한류에서부터 케이블방송까지 저자의 사유는 종횡무진 합니다. 특히 신해철에 대해서 비평한 글에서는 상황을 정말 정확히 바라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탈권위적 솔직성이 신해철을 진보 인사로 만들었다’라는 주장은 정말 정곡을 찌르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일단 비난을 받든 비판을 받든 어떤 대상에 대해서 다른 무엇인가와 연관 지어서 사유하려는 자세는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수학적 계산과 달라서 하나와 하나를 더했을 때 꼭 하나만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와 하나를 더하면 새로운 커다란 하나가 될 수 있고 그 커다란 하나가 쪼개져 둘, 셋 등으로 나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택광씨의 문화비평도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커다란 하나를 만들고 그 하나에서 여럿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의 문화비평은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고 그동안 인터넷 상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들의 이면을 바라보려는 시도입니다. 이는 그가 블로그를 운영한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을 듯 합니다. 누구나 하나의 일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으니 그 양면을 주의 깊게 보라는 말은 쉽게 합니다. 그러나 막상 무슨 일이 벌어지면 마녀사냥 하듯이 우르르 몰려가 한쪽면만 바라보고 한쪽의 이야기만 듣고 제멋대로 판단을 내립니다. 이 책은 그런 사회에 하나의 경종을 울리는 역할도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여기 있다, 라는 외침에 다름 아니지요.


예전에 조선시대의 개국공신이었던 정도전의 책을 약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정도전이 유배를 당하여 낙후된 곳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그때 정도전의 종과 그 곳의 어느 지나가던 사람이 나눈 대화가 있습니다. 정도전의 종에게 이렇게 그 사람이 묻습니다. ‘자네의 주인은 왜 낙향했는가? 입안의 혀처럼 권력자들에게 굴다가 낙향했는가, 아니면 겉보기에는 초연한 척 했지만 뒤로는 나쁜 일들을 저지르다가 그것이 발각되어 낙향했는가? 그것도 아니면 정말 청렴결백하게 행동해서 낙향했는가?’ 그러자 종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의 주인은 정말로 어지시고 청렴결백하신 분이오.’ 이 말을 들은 과객은 이렇게 답합니다. ‘본인이 어질다고 떠들면 주위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본인이 지혜롭다고 떠들면 어려울 때 주위에서 돕지 않는다.’라고 말이지요. 이 책 ‘이것이 문화비평이다’에 가장 아쉬운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많은 사상가들과 그들의 사상의 인용은 이 책의 가치를 스스로 낮추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이 책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외치는 형세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하나를 가져오지만 그 다른 하나에 대한 설명은 끝끝내 없습니다. 그의 블로그의 글에는 그에게 대항하는 비로그인 댓글들만이 달려있는 경우가 많으며 이 비로그인 댓글들은 그를 일종의 새로운 권위주의로 보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타파하려고 합니다. 인문좌파를 지향하고 권위주의를 싫어하는 그에게 닥친 아이러니입니다. 대중들이 ‘정치인이나 지식인을 혐오하면서도 무엇인가를 바라는’ 상황에 놓여있다면 그들이 바라는 것은 어깨에 가득 힘이 들어간 사상가들의 편력이 아닙니다. 사회 현상을 유식한 말로 반지성주의와 관념의 물화 등을 섞어가면서 말하는 것은 처음에는 감탄을 자아낼 수 있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냉소주의에 가득 찬 대중들에게 외면당하고 맙니다. 현자는 쉬운 말로 진리를 설명한다고 합니다. 너희들을 재계몽시키겠다, 이렇게 말하기 전에 좀 더 대중들에게 다가갈 마음을 가지고 책을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p. s. 제목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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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31 2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데리다 평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데리다 평전 -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
제이슨 포웰 지음, 박현정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데리다 평전.
 

 


1.


  몇 년 전 개정된 고등학교 수학 교과과정은 이런 저런 논란이 많았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인문계열을 공부하는 사람은 더 이상 ‘미분과 적분’ 과정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지요. 그 외에 소소한 변화들도 있었는데, 이름이 바뀐 것도 들 수 있겠습니다. 예전에 ‘공통 수학’ 이라고 불리던 과목은 ‘수학 10-가, 수학 10-나’ 로 개정되었습니다. 중학교 교과 과정도 8학년, 9학년으로 바뀌었기에, 연속성을 중시하는 ‘수학’ 이라는 과목에게는 제법 적합한 변화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중학교 수학과 고등학교 수학이 별개가 아니고, 마치 계단과 같이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그런 과정이라고 주장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

저 ‘수학 10-가’와 ‘수학 10-나’의 단원 중 특히 제 눈을 잡아끌었던 것은 바로 ‘자취의 방정식’ 이라는 단원이었습니다. 자취의 방정식에 대해서 잠깐 언급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취에 대해서 말을 해야겠군요. 자취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어떤 조건이 주어졌을 때 그 조건을 만족하는 점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자취의 방정식은 그 자취를 나타내는 식이 되겠습니다. 애초에 자취를 그려내는 저 ‘조건’을 식으로 표현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네요. 골치 아픈 단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자취의 방정식을 열심히 공부해두면 그 외에 다른 곡선들의 방정식을 기하학적으로 좌표 상에 그려내는데 도움이 많이 될 것이라고 여겨져서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저는 그리 수리에 밝지 못해서 좋은 결과는 얻지 못했지만요.

이 ‘데리다 평전’에서 제가 계속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저 ‘자취의 방정식’ 이었습니다. 데리다 본인을 미지수 X로 두면 그 미지수 X의 조건은 주변 환경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데리다가 유대인이었고,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사람이었으며 정작 본인의 국가에게서는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그 외의 다른 국가들에게서 ‘해체’ 라는 신선한 개념을 퍼뜨린 사람이라는 것들 말입니다. 그리고 이 ‘데리다 평전’은 감히 말하건대 자취 그 자체와 같아서 저 환경들 각각에 대한 미지수 X의 점들의 궤적을 그려나갑니다.


2.

  데리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사실 다른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정신분석학의 선구자인 프로이트를 다룬 책이었는데, 그 책에서는 프로이트를 설명하다가 갑자기 문학의 비판적 읽기에 대해서 설명하더니 데리다의 ‘산종(dissemination)’ 개념을 가지고 이론을 전개하였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당시의 저는 왜 저자가 데리다 이야기를 가져왔는지 전혀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 책을 읽어도 쉽게 이해는 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덕분에 저는 데리다의 산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됬지요.

산종은 하나의 기호에 대해서 우리는 절대로 모든 의미를 알 수 없다는 절망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에서 그 의미가 시작합니다. 저 기호는 문자가 될 수도 있고 언어가 될 수도 있으며 몸짓도 될 수도 있겠으며 혹은 간단하게 언어학자인 소쉬르가 도입한 개념인 ‘기표’ 로 치환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기표는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 쓰는 일종의 도구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기표를 어떤 속이 빈 실용적인 항아리라고 생각해봅시다. 감상을 위한 미술품으로서의 항아리를 제외하면 항아리의 역할은 내용물을 보존하거나, 옮기는데 있다고 할 때, 그 항아리의 내용물을 우리는 ‘기의’ 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가 항아리에 어떤 내용물을 집어넣을 때 이 항아리에는 반드시 이것만 집어넣어야 돼, 라고 생각하면서 집어넣지는 않지요. 다만 어떤 항아리에 생선을 넣었다면 그 항아리에 다른 내용물, 예를 들어서 과일을 넣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넣자면 넣을 수는 있지만 넣었다가 비린내 등이 과일에 묻게 될 테니깐 말이지요. 그래서 과일을 넣기 위해서는 다른 항아리를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단어도 이런 빈 항아리와 내용물의 관계와 비슷해서 각각의 기표는 그 기의에 적합한 쪽으로 일종의 사회적 약속처럼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이 예를 조금 확장시켜서 단어가 아닌 문장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문장은 정말 명확한 ‘저건 연필이다’ 등과 같은 문장을 제외하고는 단지 하나의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독해법에 따라서 수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그 문장이 단순히 단어들의 연쇄에 불과하다면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물론 각각의 문장에 가장 최적화된 의미가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비린내가 나는 과일을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생선을 담은 항아리에 과일을 넣을 수도 있지요. 자신은 이렇게 읽었는데 이 의미가 정말 옳지 않느냐,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그르다고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산종의 의미가 발현됩니다. 산종은 씨를 뿌린다, 라는 의미 그대로 하나의 기호에 대해서 수많은 해석 방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다양한 가능성을 통해서 절망을 극복하려는 것이지요. 문학작품에 적용하자면 일부러 ‘낯설게 보기’ 를 통해서 그 작품의 새로운 가치를 이끌어내는 행위를 포함하겠습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모든 해석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그것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는 결국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결국엔 처음 극복하고자 했던 명제와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됩니다. 여기서 데리다는 하나 더 개념을 가져옵니다. 바로 대립이라는 개념입니다.


3.


  예를 들어서 어머니, 라는 단어가 있다면, 우리는 저 단어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요? 데리다는 어머니와 대립하는 단어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대립이라는 개념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며, 문맥상으로 혹은 환경적으로 마주 서는 개념입니다. 하나의 단어는 그 단어의 대립 쌍으로만 그 의미가 정립될 수 있다는 겁니다. 어머니와 대립하는 단어는 아버지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와 대립하는 단어는 자녀를 들 수도 있겠습니다. 또 그 자녀들과 대립하는 단어로 그 자녀들의 친구를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연쇄가 계속 반복됩니다. 그러나 그 의미가 끝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에는 원점으로 돌아와서 원환의 순환이 반복될 테니 말입니다. 이는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과 유사합니다. 그러고 보면 데리다에게 큰 영향을 준 사상가들을 들라면 니체, 하이데거, 프로이트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니체나 하이데거, 프로이트의 사상을 답습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저 셋의 영향을 받아서 ‘기호는 오직 실종된 신, 부재하는 존재와 같은 비현전적인 중심 또는 기원만을 명명할 수 있다고’ 말하게 되었지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부재하는 존재’는 항상 도래를 예기하지만 그 도래는 무한히 지연되며 기호의 의미는 그 기원에 무한히 접근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데리다의 가장 중심적 사상인 차연(differ'a'nce)입니다.

차이와 지연의 합성어인 차연은 이런 이미지를 떠올리시면 되겠습니다. 수학적인 개념 중 ‘점근선’ 이라는 개념이 있지요. 고등학교 때 쌍곡선의 방정식을 배우면서 점근선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이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한 곡선이 있고 그 곡선을 따라서 점이 무한히 뻗어나갈 때 그 점에서 한 직선과의 거리가 0에 한없이 가까워질 때 그 직선을 점근선이라고 부릅니다. 차연은 바로 그 곡선과 직선의 관계입니다.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는 한없이 0을 향하고, 그러나 그 차이는 영원히 좁혀지지 않습니다. 기원과 그 기원을 향한 몸부림에 이만큼 더 적절한 예를 찾기란 쉽지 않을 듯 합니다. 이런 차연에 의하여 앞서 말했듯 우리의 기호는 그 중심 의미, 기원이 여기 있다, 고 알려주는 표지점이 되는 동시에 그 절대적 의미의 현전이 도래하기를 무한히 기다리는, 혹은 무한히 방해하는 ‘흔적’ 이 됩니다.


4.


  데리다의 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은 아무래도 ‘그라마톨로지’ 가 되겠지요. 유일하게 제가 접한 데리다의 책도 바로 그라마톨로지입니다. 물론 끝까지 읽지는 못했고 얼마 읽지도 못하고 다른 책들을 보게 되었지만, 그때 처음 느꼈던 감정은 ‘생각보다 아주 어려운 책은 아니네’ 라는 감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이슨 포웰의 이 ‘데리다 평전’ 을 읽었을 때는 그런 자신감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책이 하는 일은 컨테이너 벨트에서 짐들이 차례로 내려지듯이 무심한 문장들을 차례로 우리 의식 속에 던져 넣는 일이었고 문장을 읽어도 이 문장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두세 번 읽어보아야만 했으며 인용한 사상가들은 어찌나 많은지 한숨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어쩌면 이 책은 여기서 인용한 사상가들을 당연히 다 알고 있을 만한 사람들을 위한, 거칠게 말하자면 그들만을 위한 책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 정도였지요.

그러나 끝까지 읽어나가면서 하나 느끼게 된 것이 있습니다. 만약에 이 책이 일전에 나온 루소의 평전처럼 세세하게 인물의 행적을 밟아나가면서 우리가 관심을 가질만한 흥미로운 뒷이야기들을 기술하고 그의 사상을 정제된 언어로 기록한다면, 물론 그것도 그 나름대로 의미 있고 재미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만, 결코 ‘데리다’ 라는 이름에 걸맞는 평전은 되지 못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데리다는 우리의 텍스트는 이윽고 ‘흔적’ 으로 남는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결국 그를 설명하려면 흔적 속에서만 오롯이 드러나게 기술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와 텍스트는 서로 상충되어버리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책은 전체적으로 무심하고 어쩌면 별로 친절하지도 않다고 여겨지지만, 도리어 그 태도는 데리다를 기술하는 데는 최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데리다 평전’ 은 그 의도를 충실히 따랐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의 전체적인 흐름은 데리다의 시간을 쫓아갑니다. 데리다의 출생에서부터 고등사범학교를 다닐때, 그리고 구조주의에 맞서고 데리다가 열정적이었던 시기에서부터 노년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그 순간순간에 데리다가 택한 좌표 값들을 마치 수학적으로 결과가 나오듯 보여줍니다. 그 좌표 값들이 모두 최적의 선택이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최적의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언제나 후회로 점철된 인생을 살게 될 테니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좌표 값들이 자신의 선택으로만 결정된 것이 아니며, 아니 대부분의 좌표 값들이 주변 조건에 의해서 결정된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자면 데리다가 유대인으로 태어나고 그가 살던 시기의 중심 사상이 구조주의였다는 것 등은 주변의 환경이자 자취의 방정식을 그리기 위한 조건들이겠지요. 이윽고 데리다는 그가 살던 시기의 중심 사상인 구조주의를 해체하게 되고 정말 이 책의 부제에 걸맞게 해체 후 ‘순수함’ 을 열망하게 됩니다. 기존 서구의 중심적 사상이었던 로고스 중심주의로는 한계가 있다고 외치며 말입니다.


5.


  이 책 ‘데리다 평전’ 은 데리다 본인은 아니나 그에게 무한히 다가가며, 동시에 ‘데리다’ 의 현현을 무한히 지연시키는 대리보충물의 역할을 톡톡히 해냅니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점도 있습니다. 먼저 너무 흔적에 치중한 나머지 글의 독해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책에 나오는 다른 사상가들과 그들의 개념은 너무 무책임하게 던져져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A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B를 보라, B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C를 보라, 등으로 일관되어있지요. 데리다를 불러내기 위해서는 이렇게밖에 불러낼 수 없을지라도 주석에서도 이런 무심한 태도가 연속된다는 것은 더욱 더 책의 독해를 쉽지 않게 만듭니다. 물론 저런 모습은 데리다의 개념 중 ‘대립’ 을 떠올리게 만들고, 이윽고 거대한 순환을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게 하겠지만 데리다의 생애나 그의 사상에 대한 대략적 이해를 위해서 집어든 독자들에게는 거리감을 주리라 여겨집니다. 어학을 배우기 위해서 초보반으로 짐작되는 클래스에 등록했는데 알고 보니 바로 응용에 들어가더라,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 한 가지 ‘데리다 평전’에서 저를 약간 당황스럽게 만든 점이 있습니다. 데리다를 언급할 때 이 책에서는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언급합니다. ‘데리다를 해체의 선구자이자 탁월한 후기 구조주의자로 만들었다.’, ‘고급문화가 가진 위대함을 넘어서는 더 순수한 순수함을 찾고자 한다’ 등으로 말입니다. 당연히 평전을 쓰는데 그 평전의 인물에 대해서 애정이 없으면 안 되겠지요, 그러나 어떤 문맥에서는 그 애정이 지나쳐서 데리다가 비판하는 사상가의 철학이 불완전하다는 느낌마저 주게 됩니다. 어떤 사상의 우열을 가르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며 실제로 데리다도 우열을 가르기 위해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인 발전을 지향하였겠지요. 그러나 무심하게 던져진 문장들은 비록 변증법적인 발전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읽는 독자들에게 저런 느낌을 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을 듯 합니다. 그리고 데리다가 살아오면서 그의 위상에 비해 ‘형편없이 초라한’ 직책만 정부가 맡겼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것도 데리다의 삶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기에, 글에서 그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지나쳐 보이는 예라고 들 수 있겠습니다. 원래 데리다는 이런 직책이 아니라 훨씬 더 높은 직책을 맡아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인데(‘데리다가 해외에서 제안된 다른 수많은 일자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꼭 언급해야겠다’) 외부에서 데리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프랑스 사회는 데리다의 접근법, 그의 이념들, 그의 글읽기 방식과 그의 엄청난 독창성, 말하자면 그의 에너지를 싫어했던 것 같다’) 초라한 직책만 맡게 되었다, 고 무심한 문장들은 우리의 의식으로 흘러내립니다.


6.


  양자역학의 대부로 불리는 하이젠베르크는 데리다의 스승이라면 스승이라고 볼 수 있는 하이데거와 친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이데거는 하이젠베르크에게서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았겠지만 결국 과학은 사유하지 않으며 하나의 경계가 있다고 관점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데리다는 그의 스승과는 다른 길을 걷습니다. 과학과 사유는 하나의 경계가 있을 수 있지만 그 경계는 깨어질 수 있다고 믿지요. 그러고 보면 제가 데리다의 사상을 언급하면서 ‘무한’ 이라는 말을 자주 쓴 듯 합니다. 이 무한, 이라는 개념이 엄밀하게 정립된 곳은 바로 수학입니다. 그의 해체는 과학과 맞서지 않습니다. 비록 그가 그의 다른 스승인 프로이트를 과학자가 아닌 철학자로 판단하여 읽어나갔더라도 말입니다.

말년의 아인슈타인은 통일장 이론에 몰두했습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네 가지 힘을 하나로 묶어보려는 이 이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많으며, 끝내는 완성시키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그런 시도가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데리다가 그에게 시간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혹시나 과학과 사유의 경계를 넘기 위해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해체를 통하여 그가 추구하였던 순수성은 과학의 잘 제련된 순수성과 어쩌면 접점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이 평전을 따라 쫓아간 그의 생애를 자취의 방정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수많은 조건들은 데리다와 함수 관계를 맺으며 책 전반에 걸쳐서 어떠한 곡선을 그려냅니다. 그 곡선은 잘 정리된 일대일 대응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식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지요, 삶의 무한한 조건에 대해서 일대일 대응을 이루는 생애를 살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테고, 차연과 산종을 주장해온 데리다 본인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을 테니.

  

 

 

 

p. s. 원래 글의 방향은 로고스 중심주의와 성경을 연관지어서.. 해체를 쓰려고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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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5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1-08-16 20:52   좋아요 0 | URL
도입부를 어떻게 쓸까 한 일주일을 고민했더랬죠ㅎ 완전 흥미끌려고 노린거죠 큭.. 도입부만 멋드러지게 쓰고 내용은 별로ㅠㅠ 생각했던만큼 안나와서 스스로 실망했어요. 정말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