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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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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1.


  요즘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로 읽고 있는 책들의 거의 대부분이 외국 서적을 번역한 것이라는 점이었지요. 외국 책을 읽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읽게 되는 시간이 문제입니다. 보통 번역을 하는데 적어도 3년은 걸린다고 가정한다면 제가 2011년도에 나온 신간을 읽는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2008년의 책을 읽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출판사의 사정으로 인해서 더 늦게 나온다면 거의 5년 가까이의 세월이 지나야만 번역된 책을 읽을 수 있지요. 그러면 원래는 2006년도에 이미 외국에서 읽혀졌었던 책을 지금에 이르러 읽는 형세가 되어버립니다. 외국에서는 새로운 다른 책이 이슈가 되어있을텐데 말입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지요. 이 말도 옛말입니다. 요즘 처럼 생각의 속도가 빨리진 시대에는 10년은커녕 1년만 지나도 사람들의 생활모습과 사상이 달라져갑니다. 쉽게 IT에서만 예를 들어보아도 그 누가 스마트폰이 이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짐작했겠습니까. 애플에서 아이폰을 내놓기 전에는 거의 생각도 못했었지요.

저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학을 열심히 공부하면 된다, 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학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전문적인 지식이 담긴 텍스트를 완전히 독해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리나라에 사는 이상 접할 수 있는 책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을 조금 전환해보면, 반대로 우리나라의 책은 우리가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그 시대의 생각을 가장 빠르게 습득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줄 거라는 이야기도 됩니다. 우리나라의 책은 당연히 우리의 모국어, 한글로 쓰이다보니 읽기에도 쉽고, 딱딱한 번역을 벗어나기에 자연스럽게 우리 의식에 녹아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강남좌파’ 라는 책은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큰 이슈인 대선과 관련된 여러 인물들을 어색하지 않게 저자인 강준만 그 자신의 생각으로 쉽게 풀어나간 책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글은 많이 써볼수록 좋다고 했던가요, 펴낸 단행본만 200권이 넘는다는 그의 다작에서 우러나온 매끄러운 문장과 반박에 대비한 논리는 정교합니다.


2.


  제가 대학에 갓 입학하여 강의를 들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토론 수업이었는데, 주제가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내용이었지요. 한 쪽은 박정희와 그의 정책을 찬성하는 쪽, 그리고 반대쪽에는 반대하는 쪽으로 나누어 관련 자료를 찾아서 토의하는 형식의 수업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실소를 머금을 일이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모두다 박정희 대통령을 찬성하는 쪽의 편에 서고 싶어 하였습니다. 저 또한 다를 바 없었습니다. 저는 결국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반대하는 쪽의 논지를 펴게 되었지만 거의 울며 겨자 먹기로 한 것에 다름없었지요. 그런데 왜 그때는 그렇게 박정희를 찬성하는 쪽에 서고 싶어 했을까요?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대하는 점들을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요.

그러면 그 어렸던 시절에는 제가 사회를 보는 눈이 미숙해서 그랬던 걸까요? 물론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공도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겠지만 그 공만큼이나 과가 높이 쌓여있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이제는 의식이 어느 정도 깨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저는 그렇다고 쳐도 다른 학생들은 왜 그렇게 모두 박정희를 옹호하는 쪽을 택하고 싶어 했을까요? 그들도 사회를 보는 눈이 미숙했기 때문일까요? 아직 계몽이 덜 된 걸까요?

저렇게 개인의 미숙함을 근거로 들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요즘 계속 생각을 거듭해 본 결과 저는 개인의 미숙함보다도 주변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위의 계몽이 덜 되었다, 혹은 미숙하다, 라는 말은 사실 폭력에 가깝습니다. 그들이 그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것을 부정할 방법은 외부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쉽지만 그렇게 믿는 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가슴에 닿도록 설명을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몽이라는 말이나 미숙하다, 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말을 하는 자신도 반대편에서 본다면 그런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도덕적 우위가 뒷받침된다고 믿어서 전개되는 낮은 수준의 화법이겠지요. 따라서 저는 주변 환경에 주목해보고자 했었습니다. 여기서 마치 고해하듯이 털어놓는다면 저 또한 이 ‘강남 좌파’ 라는 책에서 다루는 ‘강남’ 의 이미지에 약간은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네, 저 또한 책에서 다루는 강남 좌파들처럼 그럭저럭 학벌은 나쁘지 않습니다. 끝끝내 학벌이 나쁘지 않다, 라고 적어두는 것은 나보다 더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과, 학벌은 사실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라는 위선 아닌 위선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나온 것이겠지요. 그리고 저처럼 ‘그럭저럭 학벌이 나쁘지 않은’ 아이들의 초기 선택은 박정희 옹호로 대표되는 우파적 경향이었지요. 그러면 이렇게 학벌이 나쁘지 않은 아이들을 이루어 낸 환경을 살펴봅시다. 과외, 학원, 부모의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지위.. 물론 예외도 있지만, 저도 사실 어떻게 보면 예외에 가까운 편이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고 학교를 다닐 때 과외를 받은 학생들이 많았지요. 그리고 학교를 원하는 곳에 가지 못했을 때 재수를 해서라도, 심지어 삼수를 해서라도 원하는 대학에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은 대개 갖추고 있었습니다. 혹은 그런 재력이 없더라도 빚을 내서라도 고학벌을 가지게 만들려는 부모들의 열의는 있었지요. 바로 이것이 이 학생들의 우파적 경향을 빚어낸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봅니다. 기존의 위계, 학벌로 따지면 스, 카, 이로 대표되는 전통에 속하고 있고 속하려는 그리고 속하게 만들려는 그런 환경이 말입니다.


3.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보니 저런 경향이 변해갔습니다. 박정희를 옹호하던 학생들 중에서 어느 순간 한나라당은 싫어, 라는 말을 심심찮게 내뱉기도 하고, 이전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김문수가 되자 김문수를 향해서 에잇 하면서 비난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지요. 그들 대부분의 사회적 환경이 바뀌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럭저럭 괜찮은 학벌의 소유자이고 그들의 부모님들의 수입이 떨어졌다거나 갑자기 더 늘어났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젊은 세대들은 어느 순간 기존 보수세력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이야말로 경제력을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체제에 가장 잘 순응하고 있는 집단일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이런 모습은 이 ‘강남 좌파’에서 강남 좌파로 규정된 세력들을 설명하는 것과 연관됩니다. 강남 좌파는 좌파적 이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생활양식에서는 기득권적인 면모를 보이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지금껏 냉소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생활이 그들의 사상과 일치되지 않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정말 약자를 위할까, 위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앞서게 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강남 좌파를 긍정합니다. 좌파라고 해서 그들의 욕망을 버려야 되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이 그들의 능력을 이용하여 높은 지위를 가지고 돈을 벌고 하는 것은 긍정할 수 있다, 라는 것이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말이지요. 그렇게 따진다면 우리 주변의 수많은 강남 좌파들은 모두 용인 가능한 범주입니다. 동시에 저 또한 저 구절이 저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면죄부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생각을 품은 것은 저 뿐만이 아니겠지요.


4.


  그런데 강남 좌파인 시민들은 저렇게 면죄부를 줄 수 있다고 해도 강남 좌파인 정치인들까지도 과연 저렇게 용인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강남 좌파로 불릴만한 정치인들인 노무현, 문국현, 조국,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을 다루고, 거기에 대비하여 박근혜와 오세훈을 다룹니다. 저 중에서 특히 강남 좌파적인 면모를 보이는 사람은 조국 교수이겠지요. 세련된 면모에 학벌도 좋고, 현재 직업도 S대 법대 교수, 거기에 이념마저도 좌파라니. 정말 완벽합니다. 좌파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는, 이제 점퍼를 입고 쟁의에 나서는 모습은 구식이라고 주장하는 듯 한 모습입니다. 이 책에서도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 조국에 대한 비판은 온건한 편입니다. 저자는 조국 교수의 딸이 외고 진학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고 있는 것에 관하여 강한 반박을 합니다. 그런 비판은 반위선 근본주의이며, 사라져야 할 태도라고 말입니다. 이를 볼 때 강준만은 정치인들에게도 시민들과 마찬가지의 기준을 적용한다고 여겨집니다. 좌파라고 해서, 그들의 욕망마저도 부정할 수 없다, 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반론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강남 좌파인 시민들은 시민이기 때문에 그들의 괴리, 그러니깐 총론 진보, 각론 보수의 모습을 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들의 머리가 이념을 지향을 하든 안하든 적어도 그들의 생활은 욕망을 충족시키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혹은 정치에 가까운 지도층들은 그래서는 안 되지 않겠나, 무릇 정치란 사람들을 이끄는 일이고, 그들이 다른 사람을 이끌기 위해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머리도 이념을 따르고 그들의 행동도 이념에 쫓아가야만 하는 게 옳으리라고 말입니다.

이런 반론도 저자는 가볍게 막아냅니다. 애초에 이런 반론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입니다. 이런 반론이 성립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정치 행태가 인물중심주의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흐름을 깨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때 진정으로 제대로 된 정치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극단적인 당파싸움을 지양하고, 1극이나 3극 체제가 아닌 수많은 다극체제로 가자는 것이 저자의 사유 끝에 나온 변론이자 이 책의 결론이지요.

사실 이 책의 결론은 명료합니다. 그리고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강준만의 논리 전개도 매우 유려합니다. 주장을 제기하고, 거기에 반론을 예상해서 반론의 반론을 제시합니다. 혹은 현상의 해석에 대한 반론도 제기합니다. 그리고 끝에는 본인의 제안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그 모든 문장은 그냥 쓰이지 않았고 신문 사설, 심지어 인터넷에서 보이는 글들까지도 인용해서 근거를 확보합니다. 이는 조국 교수에 대한 글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위의 정치인들을 다룰 때마다 그 정치인들 모두에게 적용이 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에서부터 조국 교수에 관한 글은 강남 좌파, 라는 개념에 대한 일관성을 보여주는 반면에 손학규부터 시작해서 유시민을 다룬 부분이나 문재인을 다룬 부분은 좀 흐름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이들을 다룬 부분은 감히 말하건대 이 책에서 빼도 괜찮을 정도이지요. 각각의 글만 놓고 본다면 크게 흠잡을 부분은 없습니다. 손학규의 자산이자 그 자신을 베는 칼날이 될 수 있는 것이 그 자신의 인맥이라고 결론지은 부분이라거나, 유시민이 너무 벼랑 끝 전술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문재인에 대해서는 그의 저서인 ‘문재인의 운명’을 거론하면서 그가 청렴할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정치인으로서 적합할까, 하는 의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이 글들은 과연 강남 좌파, 라는 제목에 묶여서 나올만한 글인지는 의문이 남습니다.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제목과 상관없이 대중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일종의 포퓰리즘적 요소를 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지요.


5.


  그러고 보면 제가 이렇게 글을 쓰면서 ‘좌파’라는 말은 많이 사용했지만 ‘진보’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이 책에서는 좌파와 진보를 거의 같은 것으로 취급하여서 혼재한 상태로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강남 좌파’ 대신에 ‘강남 진보’라고 쓸 수 있겠느냐, 라고 말입니다. ‘진보’라는 개념은 사실 보수 속에서도 숨어 있을 수 있고, 흔히 쓰는 진보, 라는 말 속에도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간단히 생각해보아도 현재보다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려는 노력이 진보가 아니겠습니까. 다만 좌파적 진보는 그 속력이 빠르게 되기를 바라고, 우파적 진보는 그 속력이 너무나 느릴 뿐이겠지요.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좌파는 진보, 우파는 보수로 굳어져 있는 게 사실이기는 합니다만 이 책의 저자가 정말 좌파와 우파를 뛰어넘는 어떤 비전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그것은 좌파에 향한 비판들(상대방을 비판하는 그 기준을 그들 스스로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살아있을때는 그를 극복하려고 하더니 떠나고 난 뒤에는 그 그늘로 다시 들어가려고 한다 등)보다도 이런 개념에서부터 시작했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저런 개념에서부터 인물중심주의를 극복하자, 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보기에 말입니다. 물론 저 비판들에는 좌파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요.

그리고 강남 좌파의 의미 자체는 예전부터 있어왔습니다. 그것이 강남 좌파, 라는 말로 개념화되지 않았을 뿐 ‘언어의 좌향좌, 현실의 우향우’와 같은 문제 제기는 끊임없이 되어왔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개념화 된 말의 문제점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현상도 일종의 유사성만 보이면 그 개념으로 고착화시킨다는 점입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우리가 토끼를 보고 ‘토끼’ 라고 개념화시키게 되면 귀가 길고 눈이 빨갛지만 실제로 다른 동물을 ‘토끼’라고 칭하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강남 좌파’라는 개념 자체의 무용론을 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강남 좌파를 아홉 가지 유형을 들면서, 복잡한 사회적 현상을 이 단어 하나에 포괄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들게 하였습니다. 물론 저자도 그런 비판을 염두에 둔 듯, 현실에서는 상호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고 덧붙이기는 하였지만 말입니다.

아쉬운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는 앞서 말한 면죄부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자, 저는 어쩌면 강남 좌파에 가까울 지도 모릅니다. 좌파는 모르겠지만, 강남의 이미지에는 한 발짝 가까이 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저는 강남에 살고 있지도 않고 고향도 서울이 아니지만 ‘강남성’의 핵심인 학벌은 그것에 근접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나는 과연 욕망을 추구하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가, 라고 말이지요. 제가 좌파가 아니라고 해도 저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이전에 어느 대학교에 잠시 몸담고 있을 때 어느 교수가 라이벌 대학교를 가리키면서 딱 하나 본받을 것이 있다고 말한 적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은 그 라이벌 대학교가 총장이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비정규직들을 모두 잘라버렸다는 것이었지요. 우리는 그러지 못해서 지금 비정규직 문제로 골머리 앓고 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굳이 그런 화제를 더 이상 언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침묵은 저의 학벌을 그대로 유지시켜주고(‘강남’을 유지시켜주고) 한편으로는 나는 당신에 동의하지 않는다, 라는 침묵이 되어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해주었습니다. (‘좌파’라는 허영이 저를 감싸게 놓아두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속으로는 생각합니다. 이건 옳지 않은 일일지도 몰라, 하지만 저는 끝끝내 소리 내어서 이야기를 하지 못합니다. 아마 슬픈 이야기이겠지만 앞으로도 각을 세우며 비정상적인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못하겠지요. 반은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 때문에, 반은 지금의 생활을 무너뜨리기가 싫기에. 하지만 이러한 괴리는 커져가기만 합니다. 마치 진화론을 발견하고도 그것을 20년 동안 비밀공책에다 끄적거리기만 했던, 그러면서도 진화론을 부정하는 상류층 친구들과 지내야만 했던 다윈처럼 말이지요. 강남 좌파인 시민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거리낄 것이 없는가, 하는 점에 이르면 적어도 저는 아닌 것 같다, 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욕망을 추구하되 그것을, 그리고 그 욕망의 결과로 오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저는 사람이 위대할 수 있는 이유는 개인의 능력이 모두 다르더라도 아래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두 손으로 그 사람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것에 있다고 믿습니다. 비록 위에 있는 사람이 있으면 아래에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 세속의 진리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6.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제외하고서는 이 책은 확실히 이슈가 될 만한 요소들을 잘 잡았기에 요즘 시기에 읽기 좋으리라고 짐작됩니다. 그러고 보면 최근 오세훈 서울 시장이 사퇴를 선언했지요. 이 책이 오세훈 서울 시장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보면 저자의 통찰력이 새삼 대단하게 보입니다. 이 책이 출간될 때는 아직 무상급식이 어떻게 흘러갈지 불투명한 상태였지요. 결국 투표함은 열지도 못한 채 무상급식 투표는 부결되었고 이 책은 예상이라도 한 듯 오세훈에 대한 글 중 한 단락을 ‘오세훈의 무상급식 주민투표 도박’ 이라는 제목을 붙여놓았습니다. 과연 그의 행보는 도박과 같아서 잭팟을 터뜨리지 못하고 쌓아올려왔던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다른 인물들에 대한 평들도 그들의 행보도 책과 어느 정도 들어맞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사실 인물 중심주의를 경계하자는 책인데도 불구하고 인물의 행보가 더 궁금해집니다. 아직 새벽이 오기에는 멀었나봅니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런 고질적인 병폐들, 인물중심주의, 무리 짓기, 증오의 정치 등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자가 마지막장에 언급하듯이 ‘정치인들이 존경받는’ 그런 꿈이 단순히 꿈만으로 그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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