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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 읽기 - 전체주의의 탐험가, 삶의 정치학을 말하다 산책자 에쎄 시리즈 8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 산책자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아렌트 읽기.


1.


  개인적으로 저는 어렸을 때 판타지 소설, 요즘 말로 하면 장르 소설을 많이 읽어왔었습니다. 거창하게 반지의 제왕, 실마릴리온, 얼음과 불의 노래.. 이런 소설들을 읽은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판타지들을 읽어왔었지요. 아, 자생이라는 말이 좀 어울리지 않는 듯 하지만 그 이상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대로 쓰렵니다. 1세대 판타지로는 역시나 가즈 나이트, 퇴마록, 더 로그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제가 읽기 시작했었을 때가 거의 1세대 판타지의 태동기였으니깐 말입니다. 이 글을 읽게 되신 분들 중에도 의외로 저런 책들을 읽어보신 분들도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뜬금없이 인문 서적의 서평을 쓰는데 판타지 소설의 이야기를 하다니, 여기에 대해 당황스러워 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고 글을 대충 보아하니 판타지 소설에서 인문 서적의 내용을 접합시켜서 글을 풀어나가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러면 인문 서적의 어떤 격을 떨어뜨리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내심 하시는 분도 계실 듯 합니다. 그런 분들께는 심심한 사과를 드리며, 굳이 변명하자면 사실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판타지 내용을 접목시키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렌트 읽기' 를 중간쯤 읽어나가는 순간, 마치 기억의 창을 발로 뻥, 하고 걷어차면서 뛰어들어오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정말 좋아하던 판타지 소설에 대한 기억이었습니다. 바로 '드래곤 라자' 였지요.


드래곤 라자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스토리 라인은 단순합니다. 판타지 소설답게 드래곤이 나오고, 이 드래곤이 한 마을을 핍박합니다. 드래곤이 보석을 좋아한다는 것은 '던전 앤 드래곤' (TRPG : Talk Role Playing Game) 에서부터 널리 알려진 설정이지요. 이 소설도 그 설정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드래곤이 금은 보화를 요구합니다, 마을을 무사히 놓아두는 대가로 말이지요. 그런데 그 가난한 마을이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일종의 원정대를 조직해서 국왕에게 돈을 달라고 부탁하러 갑니다. 소설의 나머지 내용은 국왕에게 돈을 받으러 가는 중에 벌어지는 일과 모험을 그리고 있습니다. 단순히 돈을 구하러 가는 중인데 괴물들을 만나고 엘프도 만나고 전설의 마법사의 이야기를 조각 조각 모으게 되고, 이윽고 평범한 소년이었던 주인공은 느낀 바가 있어서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이 주인공만큼이나 비중있는 존재로 그려지는 존재가 바로 저 전설의 마법사, '핸드레이크' 입니다.


2.


  작중의 핸드레이크는 인류 역사상 최강의 마법사로 그려집니다. 드래곤 로드, 드래곤들의 지배자를 암살하러 가는가 하면 열 두 마리의 드래곤과 싸워서 그들의 이빨을 뽑아버립니다. 그리고 그 소설 속의 가장 강력한 전사들과 싸워서 모두 굴복시키지요. 그런 그는 이상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옛날에 인간에게 전해주었다는 8개의 신성한 보석을 구해서 모든 종족의 불평등을 없애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그 보석들은 드래곤 로드가 가지고 있었기에 필연적으로 드래곤 로드와 대립각을 세울 수 밖에 없었지요. 드래곤 로드가 그 자신의 지배를 위해서 보석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는 단수가 아니다’ 라는 말입니다. 얼핏들으면 문법적으로 어긋난 말 같습니다. 나, 라는 존재는 일단 단수입니다. 어법상에서도 당연히 단수로 취급되고 영문법에서도 I 뒤에 오는 be동사는 단수형을 씁니다. 그런데 그 나, 가 단수가 아니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드래곤 라자의 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저는 이렇게 해석을 하겠습니다.


아렌트 읽기, 에서 저자가 끌어온 아렌트의 저서 ‘인간의 조건’ 에서는 탄생성과 다수성, 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탄생성은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과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탄생성만 지나치게 강조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그, 혹은 그녀가 탄생성만으로 사회를 살아가려고 한다면 수많은 반대와 고난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회는 간단히 말해서 나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다수성이라는 개념이 나타납니다. 이 다수성은 탄생성을 한정시킵니다. 좀 더 명확히 말하면 다수성은 다른 사람과 내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일컫습니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 라는 말은 이 개념에 정말 어울리는 말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나는 나 혼자 이 세상에 존재하지는 않는다, 나는 나와 다른 너와 있고, 이윽고 우리가 되어 세상을 살아간다, 라는 의미 말이지요. 실제로 ‘드래곤 라자’ 의 작가가 이런 생각으로 저 문장을 썼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종족들, 드래곤, 엘프, 드워프 등과의 화합을 중시했던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 그게 황인종이든 백인종이든 흑인종이든 상관없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영역으로서의 정치를 생각했었던 아렌트와는 비슷한 점이 있어 보입니다.


3.


  이 책 ‘아렌트 읽기’ 는 인용한 책에 따라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그리고 ‘정신의 삶’ 이 바로 그것인데, 각각의 책은 아렌트의 사유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는 대표적인 저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의 조건’ 에서 단수성, 다수성과 함께 언급되는 개념은 바로 ‘용서’입니다. 그런데 이 용서를 우리가 그냥 생각하는 그런 용서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아렌트는 ‘진주조개를 깨는 사람’ 이라는 이명에 걸맞게 우리가 쓰는 용어를 꼼꼼히 살펴보고 그 용어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서 새롭게 재정의합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용서는 ‘인간의 움츠러든 탄생성을 다시 펴주는’ 것입니다. 아렌트 읽기, 에서는 남아프리카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 에서 이 개념을 다시 불러옵니다. 이렇게 저서를 선정하고 개념을 추출하여 거기에서 현대적으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해내는 일이야말로 아렌트의 수제자였던 저자에게 정말 적합한 일이라 봅니다.


저자가 이렇게 아렌트를 초혼(招魂)하는 부분은 저 대목뿐만이 아닙니다. ‘전체주의의 기원’ 을 다룬 부분에서도 그녀의 통찰력은 빛을 발합니다. 전체주의의 구성 요소를 네 가지 파악해보자면 이데올로기, 공포, 사적 영역의 박탈, 관료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체주의가 사라지지 않고 가장 대척점에 서 있다고 자부해오던 미국 내부에 침투해 있다는 것을 저자는 밝혀냅니다. 미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원자폭탄으로 받아내던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아직도 자신들의 힘이 건재하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다른 나라에 대한 무력 시위로 이어지는데 그 결과가 아프가니스탄과 탈레반 정권입니다. 이라크전도 마찬가지이지요. 테러주의를 없애기 위해서 그들은 더한 테러Terror를 사용합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미국 관료주의이고 그들의 뒤를 굳건히 받치는 것은 '우리는 자유를 실현하는 국가다' 라는 자기 최면과도 같은 이데올로기입니다. 이윽고 전체주의를 공격하던 미국 내부에 그 싹이 스며들어갑니다. 이는 비유하자면 괴물을 잡기 위해서 동굴로 뛰어간 전사가 이윽고 본인도 괴물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4.


  그러고 보면 사실 한나 아렌트, 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개념은 ‘악의 평범성’입니다. 정말 큰 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실제로 그 본인은 그렇게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경우가 있지요. 유대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처형시키던 아이히만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이 책 ‘아렌트 읽기’ 에서는 저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아렌트의 다른 저서 ‘정신의 삶’ 을 끌어옵니다. 정신의 삶, 에서의 중심 개념은 사유, 의지, 판단입니다. 각각의 개념은 아렌트가 소크라테스, 아우구스티누스, 칸트에게서 이어온 것들이지요. 이를 쉽게 물건에 비유하면 사유는 우리가 물건을 늘어놓는 것이며 의지는 우리가 거기서 한 물건을 택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판단은 내가 택한 이 물건이 과연 제대로 택한 것인가 반성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저 아이히만에서는 인간 정신의 세 가지 구성 요소인 사유, 의지, 판단 중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확인할 수 있겠지요. 바로 사유, 부분입니다. 처음에는 그 스스로도 반발했을지 모르지만 이윽고 거대한 나치라는 기계 내부의 부품이 되어가면서 결국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생각을 그만둔 것이지요. 조금만 더 생각했었더라면 그는 다른 가능성들이 있었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이 듭니다. 과연 정말 그럴까, 라는 의문 말이지요. 만약에 저기 저 아이히만이 사유를 통하여 다른 선택지들을 찾아내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는 과연 다른 선택지를 택할 수 있을까요?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 또한 불순분자로 몰려서 유대인들과 함께 처형당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으로 끝나면 다행이지요, 가족의 목숨까지도 담보가 되어서 그에게 명령에 따르라고 한다면 과연 그는, 혹은 또 다른 아이히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아렌트는 저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책 '아렌트 읽기' 의 저자는 저런 질문에 대해서 다시금 '왜 아렌트가 의미를 가지는가' 에 관하여 구술하면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아렌트의 사랑, 이라는 개념을 부활시키면서 말이지요. 사실 저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유 다음의 단계인 의지에서 내려질 수도 있을 겁니다. 사유의 선택지를 하나로 좁혀서 강요하더라도 나의 의지로 나는 바른 길을 택하겠다, 라고. 그러면 그 의지마저도 꺾어버리는 거대한 억압 앞에서는? 그때는 그 다음 단계인 판단에서 '나' 자신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결론을 내리겠다, 라고 할까요? 그래서는 끝이 없습니다. 끝없는 의문만 남길 뿐입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단순하지만 가장 명료한 진리인 '세계 사랑' 입니다.


이 사랑은 끝없는 간극 - 의지와 비의지, 사유와 무사유, 판단과 판단하지 못함 - 을 메우는 사랑입니다. 아렌트 본인은 사랑에 대해서 많은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사랑에 관한 글들은 사랑이라고 할때 떠오르는 대표적인 글들에 속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을 되살려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사랑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은 공영역에서 제 역할을 하며 그것을 보전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러면 저기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겠습니다. 네, 사실 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우리는 억압이 주어질 때 어떻게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에 주목해서는 안됩니다. 억압을 주는 사람이 저 사랑이라는 말을 안다면 그는 억압을 주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계급의 차이, 신분의 차이 등 그 모든 차별을 넘어서 모두가 사랑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5.


  어느 분께서 과속 방지턱, 이라고 비유하셨던가요, 책의 수동태 어구의 번역은 정말로 과속 방지턱처럼 흘러가는 의식을 한 번씩 뒤흔들고 속도를 줄이게 합니다. 그래서 한 챕터를 읽을 때 여러 번 읽은 적도 있고 뒤의 역자 해제의 도움도 많이 받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을 읽을 때는 역자 해제를 먼저 읽고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지요. 그러나 이런 것들은 너무 사유를 방해하지는 않는 한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것보다도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사실 위의 말들은 이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책에서 데리다를 언급하면서 해체 이후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라고 주장하였던가요, 그러나 사실 아렌트가 세계 사랑, 이라고 이름붙이고 싶어했던 '인간의 조건' 그리고 끝내 미완성으로 남겨진 '정신의 삶' 등도 현재 문제의 분석에서는 탁월하지만 대안의 제시에서는 미흡한 것이 사실입니다 앞서의 드래곤 라자 이야기로 돌아가면, 인간은 끝내 드래곤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인간화, 시켜버리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두가 만족할만한 사랑을 서로에게서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리고 포용할 수 있었더라면 '악의 평범성' 이라는 명제가 주목을 끌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가장 쉬운 말이 가장 행동하기는 어려운 말이지요. 그래서 아직도 세계에는 전체주의의 잔재가 남아서 어둠속에서 출몰하고 심지어 조그만 중고등학교 교실에서도 또 다른 작은 아이히만들이 눈치를 보면서 춤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있다고 해서 이 책의 의미가 반감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알아야 답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해결과정에서 처음에는 50점짜리 답안을 내어놓더라도 그 시도 끝에 끝내 만점짜리 답안을 내놓게 되는 것이지요. 오히려 이런 상황을 되돌이켜서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금 아렌트의 가치에 불을 지피게 한 이 책은 정말 원제 그대로 '아렌트가 왜 현재 중요한가' 를 잘 말해준다고 여겨집니다.



 

p. s. 이번엔 특이한 리뷰를 적어보려고 했는데.. 아니, 충분히 특이한가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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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08-31 20:45   좋아요 0 | URL
꼼꼼한 리뷰 잘 봤습니다. 읽다가 낙오하는 줄 알았습니다..ㅎㅎ

첨에 퇴마록, 드래곤라자....ㅎㅎ

드래곤라자의 리뷰도 잘 봤어요..ㅋㅋ

가연 2011-09-03 09:56   좋아요 0 | URL
ㅋㅋㅋ 원래 쓰려던 글은 훨씬 특이한... 형식이었지만... 솔직히 이 글은 좀 부끄럽네요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