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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예전에 읽은 글 중에 좋은 서평이란 무엇일까, 에 관한 글이 있었습니다. 그 글에 따르면 좋은 서평이라는 것은 어떤 책이 좋으니 꼭 읽어라, 라고 말해주는 글이거나 이 책은 읽지 말고 피해라, 라는 글이라던가, 혹은 그 책의 내용을 잘 정리해서 읽지 않고도 읽은 척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글이라지요. 제가 지금껏 서평들이 감히 좋은 서평에 속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지금껏 제가 써 온 서평을 저기 있는 좋은 서평의 기준에 맞춰보자면 아마 첫 번째 유형에 거의 비슷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완전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책이 완전하기란 어려운 일이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간하면 다른 사람의, 혹은 다른 책들의 결점보다는 장점을 주로 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지요. 이 책은 어느 부분이 나쁘지만 그래도 이러 저러한 장점이 있기 때문에 한번 읽어보시라, 와 같이 말입니다. 사실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이 제가 성격이 좋아서는 아닙니다. 지금껏 저는 이렇게 신간평가단에 들기 전에는 제가 관심이 가는 책들만 읽어왔으며 글을 쓰고 싶은 책들만 골라서 써왔습니다. 정말 한숨만 나오는 책이라면 중간쯤 읽고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내던져 버릴 수도 있었지요.

하지만 평가단을 하면서 상황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신간을 추천하고, 그 추천에 대한 책임을 다합니다. 이 말은 추천의 결과로 뽑힌 책이라면 설령 그 책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 책에 관한 리뷰를 꼭 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저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내가 추천한 책이 안 될 수도 있구나, 나는 분명 이 책이 좋아보였는데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네, 나의 관점과 다른 사람의 관점이 다를 수 있구나, 다른 사람은 어떤 심정에서 이 책을 추천했을까? 평가단을 하고 서평을 쓰면서 내내 저런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지금껏 글을 써오면서 조금 마음에 안 드는 책도 있었고, 좀 많이 마음에 안 드는 책도 있었었지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제가 쓴 서평은 여전히 저기 위의 좋은 서평의 분류 중 첫 번째를 따르고 있습니다. 설령 제가 마음에 안 드는 책이라도 이 책을 추천한 사람들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까, 그리고 내가 생각이 짧아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내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으니 글을 이렇게 쓰자, 등으로 말이지요. 차라리 제가 추천해서 뽑힌 책이라면 냉정하게 이 부분은 그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분들이 추천한 책이지만 두 번째 유형에 치우친 서평을 한 번 써보고자 합니다. 이 책은 읽지 마라, 라고 설득하는 글말입니다. 읽지 마라, 라고 단언하는 것은 너무 거칠게 말하는 것이네요, 엄밀히 말하면 그리 추천은 못하겠다, 정도가 적절한 말이 될 듯 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지금부터 살펴볼 책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택광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습니다. 이택광씨의 블로그에 꽤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지요. 처음에는 그의 사유에 대단하다, 라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지만 이택광씨의 블로그에서 일어난 몇 몇 일들을 계기로 더 이상 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느 이십대 에세이스트에 관련된 일부터 시작해서 정체도 불분명한 라캉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보이는 글을 읽은 것들 등이 바로 그런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신간평가단에서 이 책이 추천되었을 때 매우 난감했습니다. 분명 라캉의 개념을 빌려와서 문화를 비평하고 있다고 할 텐데, 라는 생각에서부터 (라캉주의자라는 말이 얼마나 모호한 개념인지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글 전체가 너무 혼란스러워질 테니 뒤로 미루겠습니다.) 블로그에서 쓴 글들을 묶어서 내는 책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고, 한편으로는 그래, 내가 지금껏 오해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의 책을 읽어보면 블로그의 글과 또 다른 관점으로 생각을 전개해나가겠지, 그리고 예전보다 훨씬 그의 논리가 조리가 있겠지,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랐습니다. ‘철학과 비평 사이’, ‘사회와 정치 사이’ 그리고 ‘문화와 인물 사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목차만 보았을 때는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경계를 넘어서 사유하려고 노력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었지요. 하지만 책을 받고 첫째 주제, ‘철학과 비평 사이’를 읽고는 그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나를 깨달았습니다. 물론 고개가 끄덕여지는 글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말 아무리 읽어도 앞 뒤 문맥이 맞지 않는 글들이 있는가 하면, 사상가들의 이름과 그들의 말을 빌려서 완성한 글도 있었습니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이렇게 되겠지요. 그의 글은 텅 빈 기표와 같아서 수많은 사상가들이 그의 글을 채워주지 않는 한 무한히 기의에 도달하려는 과정에 있고 그 과정에서 그의 글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말입니다.

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아마 제가 이렇게 묻지 않았다면 글을 읽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고쳐서 물어보겠습니다. 위의 말의 의미는 놓아두고서라도 제가 긍정적 의도로 저 말을 했을까요, 부정적 의도로 저런 말을 했을까요? 물론 문맥상 당연히 부정적 의도로 말을 했겠지요. 하지만 저 말만 떼어놓고 보자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입니다. 저 말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택광씨의 글쓰기는 저것과 거의 동일합니다. 어떤 주장을 하면서 적당히 사상가를 끌어들이고 그 사상가가 한 개념을 이렇게 적용했다고 말하면 글이 하나 뚝딱 만들어집니다. 첫째 주제의 글 중 ‘생존지상주의’ 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글의 일부를 가져오겠습니다.


...이론적으로 맬서스와 다윈은 ‘최적자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상부상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맬서스의 영향을 받은 다윈의 진화론을 통해 맬서스 자신의 인구론 또한 과학적 근거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진하론의 기본 개념은 사회적 진보와 자연적 진화를 하나로 보는 것이다...


앞 뒤 없이 잘라왔기에 부연 설명을 하자면, 저 문장들의 앞에서는 다윈에서부터 시작해서 맬서스를 언급함으로서 끝났고, 뒤에서는 스펜서의 이야기로만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결국 다윈과 스펜서가 만나는 부분은 바로 저 문장들뿐인데 찬찬히 살펴봅시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도대체 무엇을 증명하는 것일까요? 맬서스와 다윈이 상부상조한 것을 증명한 것일까요, 다윈의 진화론이 맬서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까요, 맬서스의 인구론이 과학적 근거를 획득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까요? 저기 뒤에 나오는 문장을 보면 더 놀랍습니다. 스펜서의 이론에서 핵심적인 것이 ‘살아남을 자만 살아남아야 한다’ 라는 논리라는데, 이 논리가 맬서스의 인구론과 다윈의 진화론의 만남에서 이끌어진 발상이라고 하지요. 이것을 보면 이택광씨의 글에서는 거칠게나마 이런 도식이 성립합니다. 다윈+맬서스=스펜서, 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다윈과 맬서스의 만남으로 나타난 스펜서의 논리가 도리어 다윈과 맬서스를 증명한다니, 이는 수학 문제를 풀때 답을 가져와서 끼워 맞추고 이 문제를 증명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외에도 이런 글도 있습니다. 여전히 첫 번째 주제의 ‘냉소주의 시대의 인문학자’ 라는 글입니다. 이 글은 부분적으로 옳습니다.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너무나 냉소적입니다. 누가 무엇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 정도는 나도 알 수 있어’ 라는 태도로 일관합니다. 사실 인터넷이 있는데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대형 포털 사이트의 커뮤니티모임이나 어느 사상이나 과학을 주제로 글을 써놓은 페이지를 보면 수많은 댓글들이 ‘나도 이 사람이 무엇을 주장했는지 잘 알고 있지’ 라는 식으로 달려져 있습니다. 그 주제가 비트겐슈타인이든 하이데거든 사람들은 상관안합니다. 왜냐하면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적어도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불릴 만한 것은 대부분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크레타 섬의 미노타우르스가 정말 괴물이었는지 미노스 섬의 타우르스라는 사람이었는지, 그런 것들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이런 것도 있지’ 하면서 아는 척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요즘처럼 ‘아는 체’ 와 ‘아는 것’ 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면 해질수록 사람들은 냉소주의에 빠져들기만 합니다. 그래서 현대 사회가 냉소주의에 빠져있다는 이택광씨의 진단은 정확합니다. 하지만 그 진단에서부터 이끌어낸 결론은 책을 다 읽고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실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냉소주의가 만들어낸 현실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대중들의 세계다. 이 세계는 존재할 수 없지만, 존재하고 있는 이상한 공간이다. 공간만이 남아 있고,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마땅할 이 모순의 조건에서 지식인의 글쓰기는 아무런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결국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이런 앎을 넘어선 앎, 또는 계몽에 대한 재계몽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천천히 읽어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지요. 하지만 그가 문맥상으로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자신은 (대중들에게) 계몽에 대한 재계몽을 하겠다, 라고. 앞의 글들을 가져와서 좀 더 설명하자면 저널리즘에 익숙해진 독자들을 실증적 논박에서 벗어나서 불경한 상상력을 삽입함으로서 재계몽시키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얼핏 보면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가 이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삽입시키고자 하는 불온한 상상력은 그저 그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뒤의 인문좌파란 무엇인가, 라는 글에서 두드러집니다) 그리고는 그것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특히나 저런 냉소주의에 빠진 젊은 20대들에게) 대응이라도 하듯 ‘인터넷 세대는 문어체의 글을 잘 읽어내지 못한다는 것이 중론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어떤 비판하는 글을 이렇게 몰아붙이기는 쉬운 일입니다. 게임을 보고 즐기려면 최소한 그 게임의 규칙 정도는 알고 즐겨야 되지 않느냐, 멀뚱히 규칙도 모르는 게임을 보면서 ‘아 저 게임 재미없어’ 라고 말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고 말입니다. 최소한 규칙을 알려고 노력은 해야 되지 않겠냐고 말입니다. 인문학에서 이야기를 하자면 너희는 슬라보예 지젝은 알고 있냐? 루카치는 들어봤어? 그 정도는 좀 알려고 노력을 해야 이 글이 읽히지 않겠냐? 정도로 거칠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게임이 보편성을 가지는 다른 사람도 보고 즐길 수 있는 게임이 되기 위해서는 규칙도 명료하여야 하고 최소한 다른 게임의 규칙을 바탕으로 추측은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인만, 혹은 아는 몇 명만 즐기는 게임이라면, 게다가 그 게임이 규칙을 알았는데도 재미조차도 없거나 발견하고 발견해도 규칙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게임이라면 그게 무슨 의미를 가지겠습니까. 그런 경우가 의미를 가지는 경우는 단 하나, 자연에 대한 물리학의 몸부림뿐입니다. 이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라는 책은 글을 어렵게 쓴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익숙하지 않아서 이 글이 어렵게 느껴지는 거야, 라고 말을 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대응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냉소주의에 빠진 현실에서 인문학자가 해야 할 일은 그런 냉소를 날리는 대중에 대한 재계몽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현대 사회에서의 인문학자가 해야 할 일은 ‘아는 체’와 ‘아는 것’의 경계를 다시 넓히는 것에 있습니다. 참된 앎이 무엇인가, 에 대한 고찰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자연스레 냉소주의가 해소됩니다.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를 주입하는 것을 불온한 상상력 운운하면서 재계몽한다고 여기는 것은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자는 사회현상에서 정치적 의미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합니다. 이 책에서 예를 들자면 특히 두드러지는 것이 ‘인문좌파란 무엇인가’ 라는 글입니다. 다른 부분은 다 놓아두고서라도 2008년의 촛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문좌파에 대한 요청이 현실화한 것이라고 말이지요. 좌파적인 문제를 주체화의 관점에서 사유하자는 의미에서 쓰인 용어가 인문좌파라면, 이런 말이 성립됩니다. 촛불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좌파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잠재적 혹은 실질적 좌파들이라고 말이지요. 이는 촛불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의 다양성과 개성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두루뭉술하게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촛불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각자 노래를 부르고 음식을 나눠먹기도 하면서 정말 일반적인 시위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였었지요. 그런 촛불에 대한 이보다 더 나은 설명은 한나 아렌트의 ‘콘서트화’ 라는 개념이나 조정환씨의 ‘다중’ 이라는 개념이 더 적절하겠습니다. 결국 인문좌파에 대한 저런 담론은 주체화의 관점에서 생각하려는 시도였겠지만 동시에 생각을 가진 주체의 개성을 매몰시킨 채 다시금 좌파와 우파의 대립관계라는 틀로 현상을 옭아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책을 읽으면서 또 당황스러웠던 것은 두 번째 주제인 ‘사회와 정치 사이’ 의 ‘불륜드라마, 우리 시대의 리얼리즘’ 이라는 글이었습니다.


...오늘날 불륜 드라마는 현실의 가부장제를 넘어가려는 중간계급의 (여성) 판타지다..... 오히려 중요한 건 이런 드라마가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것을 감추기 위해 발명된 스크린이라는 것이다. 그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것을 감추려는 상황이 불륜의 징조를 유발한다. 그 차마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란 ‘사랑의 부재’를 정언하는 자본주의의 물질주의다...


첫 문장을 해석해보면 계급상승을 위한 중간계급의 판타지가 헤메다 막다른 곳에서 찾아낸 길이 바로 불륜이라는 겁니다. 가부장제라는 것은 남성 중심주의를 뜻하며 여성은 그 남성 중심주의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추락해버리는 그런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물론 꼭 여성이 주인공이어야 하는가, 남성이 주인공인 불륜 드라마가 정말 없었나, 하는 반론도 제기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찌 보면 지엽적인 반론에 지나지 않고 그 이외에는 일견 논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것’이 문단을 나락으로 빠뜨립니다. 여기서 왜? 라는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왜 자본주의의 물질주의가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것인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의 물질주의를 주제로 드라마를 쓰면 시청률이 잘 안 나와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자본주의에 관해서 드라마를 쓰면 어느 높으신 분이 방송금지처분을 내리는 걸까요. 여기서 책의 저자는 억지로 불륜을 자본주의에 연결시키느라 논리적 비약을 범하고 있습니다. 꼭 저런 기저 문제가 깔려있지 않더라도 불륜은 그 자체로 충분히 ‘불길한 징조’ 이며 말초적입니다. 그 드러낼 수 없는 것을 감추는 행위에서 유발되는 긴장 때문에 우리가 불륜드라마를 보면서 ‘아 진짜 이 드라마 욕하면서 본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란 겁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라캉입니다. 책의 저자는 라캉주의적(사실 적절하지 못한 단어입니다. 생전의 라캉은 책을 별로 남기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그나마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에크리, 정도입니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라캉을 접하게 된 사람들은 이차적인 저작물로 접하게 된 경우가 많기에 엄밀히 라캉주의다, 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의 저자인 이택광씨는 에크리 등을 읽어보셨을 수도 있으니 확언하기는 힘들지만 말입니다.) 성향이 있습니다. 왜 글쓴이의 라캉주의적 성향을 언급하느냐면 일단 우리나라에서 라캉은 이차적으로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보니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소비되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심리학이면 심리학, 의학이면 의학, 과학이면 과학... 등으로 말입니다. 물론 이 책의 저자가 하는 것처럼 문화비평에도 쓰일 수 있지요. 하지만 이는 옳은 일이 아닙니다. 라캉주의자들은 그들이 속하는 경계를 자의적으로 재정의함으로써 비난을 피해갑니다. 쉽게 말하면 철학적인 질문으로 논쟁을 벌이게 되면 어느 순간 과학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공격을 방어하며, 과학의 거센 공격을 받게 되면 철학이기 때문에 과학과 거리를 두어야 된다고 외칩니다. 문화비평에서 라캉의 개념을 적용시킨다면? 어느 순간 문화비평에서 심리학으로 경계를 침범하거나 정신분석학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정신분석학에 상당한 호의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저 뿐만은 아니겠지요. 누구나 사람의 정신을 분석하는 학문과 거기서 나오는 방어기제들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현대 정신의학은 많은 부분을 약물 치료에 의존을 하고 있으며 정신분석학이 차지하는 부분은 실제로는 정말 미미합니다. 그럼에도 정신분석학은 그의 몸을 신비함이라는 보석이 달린 휘장으로 둘러싸 그 보석에서 나오는 빛으로 관중들의 눈을 멀게 합니다. 하지만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정신분석학을 어디까지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는 저는 상당히 엄격한 태도를 취하고 싶습니다. 정신분석학은 과학이 아닙니다. 리처드 파인만의 말을 빌리자면 ‘주술’에 가깝습니다. 파인만의 저 말의 원문은 ‘정신분석학은 어느 부족의 주술사가 부리는 주술에 가깝지만 만약에 그 부족에 속해있는 당신이 병에 걸리면 나는 그 주술사를 찾아가보라고 권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주술사가 가장 병에 해박할 테니 말이다.’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더 해박한 의사가 있다면, 그래도 여전히 주술사를 찾아가겠습니까? 적어도 파인만의 대답은 확실하겠네요. ‘아니오’ 라고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문화비평을 하는데 왜 굳이 라캉의 기표, 기의, 대타자, 오브제 아 등의 개념을 끌어와야 될까요? 정치현상과 사회현상, 문화 모든 부분에 다 끼어들 수 있다고 해서 그 모든 부분을 다 통합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라캉의 사상이 바로 그러한데, 모든 부분에 다 끼어들 수 있지만 막상 그것들을 모두 연결시켜서 하나의 원류를 이끌어내는 데에는 한참 부족합니다. 만능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한 번 쓰면 문의 자물쇠를 망가뜨리는 그러한 것이었다, 와 같은 맥락입니다. 문을 제대로 열려면 그 문에 적합한 열쇠를 들고 있어야 하며, 진실된 문화비평은 만능키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열쇠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열쇠고리와 같은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정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라는 제목에 걸맞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오랜 공부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 책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라캉의 개념의 섣부른 적용은 도리어 그 진정한 원류를 찾지 못하고 모든 부분을 라캉의 사상으로 회귀시켜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모든 부분이 비판할 것으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닙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생각의 방향에 동의하고 고개를 끄덕인 것도 적지 않습니다. 셋째 주제 ‘문화와 인물 사이’ 부분이 특히 그러했습니다. 한류에서부터 케이블방송까지 저자의 사유는 종횡무진 합니다. 특히 신해철에 대해서 비평한 글에서는 상황을 정말 정확히 바라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탈권위적 솔직성이 신해철을 진보 인사로 만들었다’라는 주장은 정말 정곡을 찌르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일단 비난을 받든 비판을 받든 어떤 대상에 대해서 다른 무엇인가와 연관 지어서 사유하려는 자세는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수학적 계산과 달라서 하나와 하나를 더했을 때 꼭 하나만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와 하나를 더하면 새로운 커다란 하나가 될 수 있고 그 커다란 하나가 쪼개져 둘, 셋 등으로 나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택광씨의 문화비평도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커다란 하나를 만들고 그 하나에서 여럿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의 문화비평은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고 그동안 인터넷 상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들의 이면을 바라보려는 시도입니다. 이는 그가 블로그를 운영한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을 듯 합니다. 누구나 하나의 일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으니 그 양면을 주의 깊게 보라는 말은 쉽게 합니다. 그러나 막상 무슨 일이 벌어지면 마녀사냥 하듯이 우르르 몰려가 한쪽면만 바라보고 한쪽의 이야기만 듣고 제멋대로 판단을 내립니다. 이 책은 그런 사회에 하나의 경종을 울리는 역할도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여기 있다, 라는 외침에 다름 아니지요.


예전에 조선시대의 개국공신이었던 정도전의 책을 약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정도전이 유배를 당하여 낙후된 곳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그때 정도전의 종과 그 곳의 어느 지나가던 사람이 나눈 대화가 있습니다. 정도전의 종에게 이렇게 그 사람이 묻습니다. ‘자네의 주인은 왜 낙향했는가? 입안의 혀처럼 권력자들에게 굴다가 낙향했는가, 아니면 겉보기에는 초연한 척 했지만 뒤로는 나쁜 일들을 저지르다가 그것이 발각되어 낙향했는가? 그것도 아니면 정말 청렴결백하게 행동해서 낙향했는가?’ 그러자 종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의 주인은 정말로 어지시고 청렴결백하신 분이오.’ 이 말을 들은 과객은 이렇게 답합니다. ‘본인이 어질다고 떠들면 주위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본인이 지혜롭다고 떠들면 어려울 때 주위에서 돕지 않는다.’라고 말이지요. 이 책 ‘이것이 문화비평이다’에 가장 아쉬운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많은 사상가들과 그들의 사상의 인용은 이 책의 가치를 스스로 낮추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이 책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외치는 형세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하나를 가져오지만 그 다른 하나에 대한 설명은 끝끝내 없습니다. 그의 블로그의 글에는 그에게 대항하는 비로그인 댓글들만이 달려있는 경우가 많으며 이 비로그인 댓글들은 그를 일종의 새로운 권위주의로 보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타파하려고 합니다. 인문좌파를 지향하고 권위주의를 싫어하는 그에게 닥친 아이러니입니다. 대중들이 ‘정치인이나 지식인을 혐오하면서도 무엇인가를 바라는’ 상황에 놓여있다면 그들이 바라는 것은 어깨에 가득 힘이 들어간 사상가들의 편력이 아닙니다. 사회 현상을 유식한 말로 반지성주의와 관념의 물화 등을 섞어가면서 말하는 것은 처음에는 감탄을 자아낼 수 있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냉소주의에 가득 찬 대중들에게 외면당하고 맙니다. 현자는 쉬운 말로 진리를 설명한다고 합니다. 너희들을 재계몽시키겠다, 이렇게 말하기 전에 좀 더 대중들에게 다가갈 마음을 가지고 책을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p. s. 제목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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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31 2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