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 여자 불편해
최영미 지음 / 이미출판사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9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흔하디 흔한 삶의 권태가 공원 벤치 위에 무더기로 버려진 아메리카노의 빈 용기처럼 뒹굴고, 삶의 권태로 답답한 일상의 흐린 시야를 통해 삶의 희망, 활력, 용기, 의지 등 상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온갖 단어들을 끄집어내는 일은 작은 기적과도 같습니다. 나는 손에 든 수필 한 권이 부끄러워 이따금 주변을 살피고, 때로는 내 것이 아닌 양 벤치 위에 멀찍이 내려놓기도 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책을 좋아하는 이의 비애는 그처럼 사소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소중한 지면을 제공한 신문사와 잡지사 등 여러 매체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기록하지 않으면 허공에 흩어졌을 시간들이 번듯한 형체를 갖추어 책이 되어 나왔으니, 문장이 모여 삶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  (p.218 '책을 내면서' 중에서)


최영미 시인의 산문집 <난 그 여자 불편해>를 불편한 자리에 앉아 불편한 시선을 받으며 그예 다 읽고 말았습니다. 시인의 산문집을 유독 좋아하는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 책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책의 정서가 꽤나 불편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에서 미투 운동이 활발하던 당시 최영미 시인 역시 자신을 괴롭혔던 한 원로 시인을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게 마련이지만 현실을 넘어 미래를 직시할 줄 모르는 인간은 자신이 가진 권력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의 슬픈 단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 거북했던 그 언론사와 지금은 잘 지낸다. 생애 최초의 재판에서 절반의 승리를 거둔 뒤 내가 내린 결론은 '앞으로 재판은 하지 않는다'였다. 재판은 시간을 오래 잡아먹는다. 최종 결론이 나기까지 몇 년간 나는 글다운 글을 쓰지 못했고, 언론사와 적이 되면서 책이 팔리지 않는 등 손해가 막심했다."  (p.54)


얼마 전 나는 인근의 작은 사찰에 들렀다가 난데없는 벌의 공격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예고도 없이 날아든 벌은 내 손등에 벌침을 꽂고는 이내 사라졌지만, 벌독으로 퉁퉁 부어오른 손등은 며칠 동안 나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벌에 쏘인 나의 고통이 이럴진대 하물며 시인이 겪었을 고통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최영미 시인은 그저 담담하게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지난 월요일 아침부터 고은 시인의 문단 복귀에 대한 의견을 묻는 기자들의 문자와 이메일이 쏟아졌다. 등단 65주년 기념 시집과 대담집을 출간하며 "5번의 가을을 보내는 동안 시의 시간을 살았다"고 고은 시인은 지난 5년을 회고했다고 한다. 고은은 2018년 여름 나를 상대로 뻔뻔스럽게도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였고 1, 2심에서 내가 모두 승소했다. 원고 고은의 대법원 상고 포기로 나의 승소가 확정되었으나, 2019년 겨울에 재판이 끝나기까지 나는 두 번의 가을을 보내며 고통의 시간을 살았다. 나는 진실을 말했지만, 진실만으로는 부족했다. 진실을 증명해야 했다."  (p.64)


코로나 시국을 겪는 동안 여러 매체에 발표되었던 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이 책은 시간의 순서대로 글을 배치한 까닭에 마치 시인의 일기를 몰래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합니다. 1부 '어떤 싸움의 기록'은 미투 재판 사회문제를 다루는 논쟁적인 글들을 모아 놓았으며, 2부 '인간은 스포츠 없이 살 수 없다'는 축구 야구 수영 등 스포츠 칼럼을, 3부 '어렵다고 생각한 일이 가장 쉽더라'는 유년의 추억, 사업자가 된 사연, 집수리 등 시인의 일상을 담은 글들이 대부분입니다.


글은 마음의 창이라고 합니다. 똑 부러지는 시인의 성격답게 문장은 정갈하여 지나치게 감성적이거나 불필요한 수사가 덧붙여진 문장은 찾기 어렵습니다. 마치 어느 칼럼니스트가 쓴 글처럼 말입니다. 무릇 시인이라 함은 일반의 평범한 사람들보다 공감 능력이 배는 뛰어난 족속인 까닭에 스스로를 통제하거나 절제하지 않으면 표현에 있어서도 다소 부풀려지거나 자칫 샛길로 빠지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최영미 시인의 글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런저런 고통을 감내하면서 얻은 단단함 때문일 테지요.


"지구 온난화를 막자고 말만 하지 말고 실천을 하자. 우리 사회는 에너지를 절약하는 노력을 너무 안 한다. 밤늦은 시각, 텅 빈 거리에 미친 듯 환하게 깜빡이는 전광판 네온사인들.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생활 에너지 부족에 허덕일지도 모른다."  (p.194)


새벽녘에 쏟아지던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반짝 맑은 하늘을 보여주더니 오후가 되자 다시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렇듯 변덕스러운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다만 우리가 속이지 않고 솔직하기만 하다면 삶이 조금 변덕스럽더라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날씨처럼 말입니다. '가을비 한 번에 내복 한 벌'이라는데 오가는 계절을 준비하듯 우리의 삶에도 따뜻한 위로가 스몄으면 좋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2. 헤어질 결심


근 한 달 만에 쓰는 일기입니다. 그동안 나는 내 말이라면 껌뻑 죽는 똥광 멧돼지를 소문 관리 위원장으로 임명하였고, 내가 속한 '멧돼지의 힘' 만찬회에 참석하여 연설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나의 똘마니들과 함께 모여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술을 퍼마신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참, 잊을 뻔했습니다만 그 사이에 나의 아버지 멧돼지가 세상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수컷 멧돼지의 세계가 늘 그런 것처럼 나와 아버지 멧돼지의 사이도 그리 돈독한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멧돼지 또한 살 만큼 살았고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날리면 멧돼지의 초청에 응했던 것입니다. 기시감 멧돼지도 참석한 자리라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억지 미소를 지어가며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탄생과 더불어 죽음을 향해 쉼없이 달려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불현듯 삶의 덧없음이 파도처럼 밀려오곤 합니다. 지금 나는 멀리 인도에 와 있습니다. 날리면 멧돼지와 기시감 멧돼지 역시 참석한 자리인지라 오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마음 같아서는 집에서 편하게 앉아 마른 오징어 안주에 소주잔이나 기울이고 싶었습니다. 나를 지지하는 멧돼지들도 이따금 이런 질문을 합니다. "도대체 왜 기시감 멧돼지에게 그토록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까? 우리나라의 일반 멧돼지들의 여론과 상관없이 매번 일방적으로 기시감 멧돼지의 편만 드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라는 질문입니다. 여기에는 나만의 비밀이 있습니다.


리더 멧돼지에 당선된 후 1년이 지날 즈음이었습니다. 나는 문득 퇴임 후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고, 누가 나 다음의 차기 리더 멧돼지가 되더라도 내가 감옥에 가는 건 피할 수가 없겠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아내 멧돼지 역시 이를 감지한 듯 최근에는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하여 보고 있습니다. 물론 멧돼지 세계와 영화 속 인간의 세계는 엄연히 다른 것이겠지만 영화를 관람하는 아내 멧돼지의 눈빛은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영화의 제목은 박해일, 탕웨이 주연의 '헤어질 결심'입니다. 어쩌면 나는 퇴임과 동시에 효용가치 제로인 쓸모없는 멧돼지로 전락할지도 모릅니다. 아내 멧돼지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아내 멧돼지에게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닐 듯합니다. 나를 추종하는 똘마니들도 비슷한 생각이겠지요. 결국 나는 누군가에게 퇴임 이후의 삶을 의탁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어쩌면 기시감 멧돼지가 될 수도 있겠다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리더 재임기간 동안 나는 기시감 멧돼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것이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대한민국으로부터 너무나 멀고 낯선 나라 인도에 와 있습니다. 소맥 생각이 간절하지만 곁에 있는 똘마니들조차 극구 말리는 바람에 억지로 참고 있습니다. 언젠가 나는 아내 멧돼지로부터 혹은 나의 똘마니들로부터 비참하게 버려질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나와 '헤어질 결심'을 굳혀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평생 돈 버는 비즈니스 글쓰기의 힘 - 한 줄 쓰기부터 챗GPT로 소설까지
남궁용훈 지음 / 리텍콘텐츠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구나 글을 쓴다. 글을 쓰는 목적은 각기 다르겠지만 말이다. 짧게는 어떠한 용도의 문서에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는 서명에서부터 길게는 장문의 보고서나 장편소설에 이르는 전문적인 글쓰기에 이르기까지 그 분량에 있어서도 다양하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글쓰기는 평생 이어지며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좋든 싫든. '에이, 서명이 뭔 글쓰기야?' 하면서 우리가 하는 원초적인 글쓰기의 행태를 부정하는 사람도 더러 있을지 모르지만, 프랑스 시인 쥘 르나르가 쓴 '뱀'이라는 시를 보면 "뱀, 너무 길다"가 고작이니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글쓰기에는 너무 많은 편견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지란지교를 꿈꾸며'로 유명한 유안진 시인의 시 '옛날 애인'은 '봤을까?/날 알아봤을까?'가 시의 전문(全文)이다.


"글쓰기는 인간이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익혀야 할 사칙연산과 같은 지식이며 기능입니다. 글쓰기를 예술의 틀에 가둬 놓으니 글 쓰는 사람들은 나와 다른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또한 "내가 무슨 문학이야." 하며 스스로 깎아내렸습니다. 여기까지 괜찮습니다. 문제는 다음입니다. 겁을 먹은 사람들은 글쓰기를 배우는 것 자체를 아예 포기했습니다. 이 책으로 이런 편견을 깨고 비즈니스 글쓰기로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고 꿈을 성취하세요."  (p.25)


큐레이션 전문작가 남궁용훈의 저서 <평생 돈 버는 비즈니스 글쓰기의 힘>은 어쩌면 글쓰기에 대한 현대인의 의식을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또한 저자는 인공지능 시대에 비즈니스 글쓰기로 인생의 변화를 이뤄낼 방법을 알려준다. 일찍이 글쓰기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저자는 한 줄 쓰기부터 도전하여 변화된 인생과 경제적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다고 하며,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저자는 글쓰기 초보자에서부터 전문적인 글쓰기를 추구하는 고난도 작업 수행자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글쓰기 종사자가 고민하는 글쓰기 스킬을 지금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줄 저자 자신만의 노하우를 이 책에 적고 있다.


"기계식 키보드와 게이밍 의자를 준비하라 같은 내용도 있지만, 핵심 내용은 바른 습관을 지니라는 것에 있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 스마트폰 보는 시간을 줄이고, 술 마시는 시간을 줄이고, 식습관을 바르게 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바른 습관을 만드는 것이 우선입니다."  (p.196)


나는 사실 비즈니스 글쓰기는 지양하는 편이고, 그럴 만한 계제도 되지 못하지만 십수 년 동안 블로그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글쓰기를 통해 뭘 해보겠다는 목표가 없으니 글쓰기 실력이 늘 같은 자리에서 맴을 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름 만족하고 있다. 때로는 글을 쓰는 일이 스트레스가 될 때도 더러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책을 통해서 혹은 경험이나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배우고 깨달았던 바를 기록하는 일이 꽤 만족스러운 까닭에 오랫동안 블로그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글쓰기는 나에게 삶의 원동력이자 정신건강의 모체인 셈이다.


"여러분이 글쓰기, 비즈니스 글쓰기를 한다고 해서 당장의 변화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고의 변화로 여러분이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쓰기 위해 읽어라, 읽었으면 써라." 고미숙 작가의 말처럼 읽었으면 써야 하고 쓰기 위해 읽어야 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고귀한 일은 읽기, 쓰기입니다."  (p.335 'epilogue' 중에서)


사실 어떤 대가나 목표가 없으면 한껏 게을러지는 게 인간이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일주일에 한두 편의 서평이나 짧은 글을 쓰는 일마저 거르기 일쑤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글쓰기와 영원히 결별하지 않는 이유는 글쓰기를 통해 내가 알게 모르게 얻는 것이 상당하기 때문일 터, 이 책의 저자가 권하는 것처럼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심정으로 글쓰기를 시도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인생에서 완벽한 타이밍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조건이 충족되면 다른 조건이 미진하기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어떤 일을 시작하기 위한 최적의 순간은 '바로 지금'일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자색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우아하게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도서관 이용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여인은 그게 전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책에서 눈길을 떼지 않는다. 이따금 꼬아 앉았던 다리를 풀어 방향을 바꿔 앉을 뿐이다. 그럼에도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꽤나 불편한 듯 곧게 편 허리에 힘이 들어간다. 경직된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하려는 듯.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이 자못 궁금하다. 그러나 알 길은 없다. 굳이 알고자 하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무례한 방법을 동원한다는 건 현 정권의 정치 모리배들이 하는 짓과 하등 다를 바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우아함은 우아한 대로 남겨둔 채 천박한 인간들을 개선하는 데 힘을 모으는 게 저들과 우리를 구분하는 척도가 될 테니까.


한 국가의 통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그 나라의 경제 지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윤석열 정권의 점수는 낙제점에 가깝다. 아무리 후하게 쳐줘도 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미안함이나 부끄러움을 표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은 채 오직 전 정권에 대한 탓으로만 돌린다. 이런 무도한 정권을 우리는 본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보기 어려울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 어느 해병대 장병에 대한 수사마저 자기들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공권력을 동원하여 압박을 가하기도 하고, 현 정권 들어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선생님들의 자살 소식에도 나 몰라라 뒷짐을 진 채 시간만 끌기도 하고, 핵 오염수를 방류한 일본의 천인공노할 만행 앞에서는 국민들을 협박하면서까지 덮어주는 데 열을 올리고, 동해를 일본해로 명명하며 노골적으로 일본 편들기에 앞장서고 있는 미국 바이든 정권에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마디 항의도 못하고,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독립투쟁에 앞장섰던 순국선열들을 공산당으로 몰면서까지 친일파들의 후손을 보호하려 하고...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는 현 정부의 뻘짓 앞에서 우리는 정치의 부재를, 국가의 부재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현 정권 들어 먹고사는 문제가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로 급부상하고 있는 마당에 '이념이 가장 중요하다.'고 외치는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는 국민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그를 대해야 할까. '저런 멍청한 자를 누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뽑았나?' 하는 자괴감이 밀려오지 않겠나. 우리는 오늘도 스스로 세상을 등진 어느 초등학교 교사의 발인 소식을 뉴스로 접하면서 휴일 오후의 나른함에 슬픔 한 스푼을 더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 밤, 세계에서 이 눈물이 사라진다 해도
이치조 미사키 지음, 김윤경 옮김 / 모모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심이 가득한 하늘이다. 한낮의 햇살은 여전히 뜨겁기만 한데 가을을 닮은 하늘에 사람들은 반색하고 있다. 우리네 삶의 시간을 영원히 앞서 가기만 할 뿐 그 시간의 뒷전으로는 영원히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던 여름도 못 이기는 척 순순히 제 자리를 내어주고는 저만치 멀어진 과거로 흩어질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부드러운 뭉게구름의 자태가 이쪽 하늘에 가득하다. 여름내 집 안에만 갇혀 살던 사람들을 집밖으로 끌어내려는 심산, 그 유혹의 자태가 뭉게구름에 배어 있는 것이다. 쪽빛 하늘에 꽃처럼 피어나는 구름.


"그 말에 나는 아이처럼 안심했다. 안심 또한,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던 감정이었다. 어렸을 때 잃어버리고, 도루의 죽음으로 손에서 빠져나가 두 번 다시 손에 넣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세상은 빼앗아 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주기도 한다. 만남도, 좋아하는 마음도, 소중한 사람도. 전부 빼앗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주기도 한다."  (p.291)


세태가 세태이니 만큼 아름다운 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름다운 하늘도, 아름다운 꽃도, 아름다운 시도, 아름다운 사람도 그 어떤 대상에도 도통 눈길이 가지 않는다. 마음이 온통 메마르고 팍팍해진 까닭이다. 말랑말랑한 소설 한 편을 읽어도 별 감흥이 없다. 산다는 게 그저 그런 것이려니, 생각될 뿐이다. 이치조 미사키의 소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눈물이 사라진다 해도>를 읽었던 게 벌써 여러 날 전이다. 그럼에도 리뷰를 쓸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하나의 문장에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자신의 감정을 슬몃 얹어 놓을 수 있는 기술이 마치 외계의 언어처럼 혹은 어느 먼 과거의 원시 언어처럼 내가 닿을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쯤으로 여겨졌다.


"나는 내 방식으로 앞으로도 도루를 기억할 것이다. 과거에도 망각에도 넘겨주지 않겠다. 넘겨줄 리가 없지. 단 한 번의 첫사랑이다. 단 한 번의 실연이다. 나의 상처다. 아픔이다. 눈물이다. 전부 나의 보물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것이다."  (p.316)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의 후속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전작의 여주인공인 히노 마오리의 친구인 와타야 이즈미의 입장에서 쓰였다. 라이트 소설이 늘 그렇듯 책의 분량에 비해 등장인물이나 구성은 매우 단출하다. 전작에서 선행성 기억상실증이 있는 마오리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가미야 도루의 다정함과 성실함에 반해 자신도 모르게 도루를 사랑하게 되었던 와타야는 갑작스러운 도루의 죽음 이후 커다란 슬픔과 상실감에 빠진 채 대학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1년 후배인 나루세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이야기는 빠르게 전개된다. 죽은 도루를 잊지 못하고 있던 와타야에게 나루세의 세심한 배려는 오히려 더 큰 슬픔을 불러오게 되고 결국 와타야는 일방적인 이별을 선언한다.


"목표란 건 인생을 심플하게 해 주거든. 만약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자신을 잊을 정도로 그 일에 몰입해 보는 것도 좋을 거야.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가니까.  그러면 서서히 여러 가지 일이 과거가 되어가지. 잊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도 잊을 수 있을지  몰라."  (p.212)


와타야와 헤어진 후 나루세는 학교를 1년 휴학하고 자신이 좋아했던 사진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모전 준비에 매진한다. 와타야 또한 가미야 도루의 누나이자 유명 소설가인 기시카와 게이코의 적극적인 권유로 소설을 쓰게 된다. 와타야 역시 자신이 쓴 소설을 공모전 소설 부분에 응모한다. 나루세가 같은 공모전의 사진 부분에 응모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공모전 결과를 발표하는 수상자 명단에서 와타야는 낯익은 이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사진 부분 수상자인 가미야 도루. 수상 작품명은 '마지막 결빙'. 소설 부문 수상자가 되지 못했던 와타야는 기시카와 게이코의 도움으로 행사에 참석하게 되는데...


전체주의 체제로 급속히 회귀하는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 탓에 가슴 한 구석이 빠르게 화석화되는 느낌이다.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소설을 읽은 후에도 그에 합당한 리뷰를 쓰기도 어렵고, 소설을 읽는 동안 소설 속 등장인물의 감정에 빠져들기도 힘들다. 무미건조한 독서가 이어질 뿐이다. 가을을 닮은 하늘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비가 온다는데 여전히 푸르기만 한 가을 하늘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