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 여자 불편해
최영미 지음 / 이미출판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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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9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흔하디 흔한 삶의 권태가 공원 벤치 위에 무더기로 버려진 아메리카노의 빈 용기처럼 뒹굴고, 삶의 권태로 답답한 일상의 흐린 시야를 통해 삶의 희망, 활력, 용기, 의지 등 상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온갖 단어들을 끄집어내는 일은 작은 기적과도 같습니다. 나는 손에 든 수필 한 권이 부끄러워 이따금 주변을 살피고, 때로는 내 것이 아닌 양 벤치 위에 멀찍이 내려놓기도 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책을 좋아하는 이의 비애는 그처럼 사소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소중한 지면을 제공한 신문사와 잡지사 등 여러 매체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기록하지 않으면 허공에 흩어졌을 시간들이 번듯한 형체를 갖추어 책이 되어 나왔으니, 문장이 모여 삶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  (p.218 '책을 내면서' 중에서)


최영미 시인의 산문집 <난 그 여자 불편해>를 불편한 자리에 앉아 불편한 시선을 받으며 그예 다 읽고 말았습니다. 시인의 산문집을 유독 좋아하는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 책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책의 정서가 꽤나 불편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에서 미투 운동이 활발하던 당시 최영미 시인 역시 자신을 괴롭혔던 한 원로 시인을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게 마련이지만 현실을 넘어 미래를 직시할 줄 모르는 인간은 자신이 가진 권력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의 슬픈 단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 거북했던 그 언론사와 지금은 잘 지낸다. 생애 최초의 재판에서 절반의 승리를 거둔 뒤 내가 내린 결론은 '앞으로 재판은 하지 않는다'였다. 재판은 시간을 오래 잡아먹는다. 최종 결론이 나기까지 몇 년간 나는 글다운 글을 쓰지 못했고, 언론사와 적이 되면서 책이 팔리지 않는 등 손해가 막심했다."  (p.54)


얼마 전 나는 인근의 작은 사찰에 들렀다가 난데없는 벌의 공격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예고도 없이 날아든 벌은 내 손등에 벌침을 꽂고는 이내 사라졌지만, 벌독으로 퉁퉁 부어오른 손등은 며칠 동안 나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벌에 쏘인 나의 고통이 이럴진대 하물며 시인이 겪었을 고통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최영미 시인은 그저 담담하게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지난 월요일 아침부터 고은 시인의 문단 복귀에 대한 의견을 묻는 기자들의 문자와 이메일이 쏟아졌다. 등단 65주년 기념 시집과 대담집을 출간하며 "5번의 가을을 보내는 동안 시의 시간을 살았다"고 고은 시인은 지난 5년을 회고했다고 한다. 고은은 2018년 여름 나를 상대로 뻔뻔스럽게도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였고 1, 2심에서 내가 모두 승소했다. 원고 고은의 대법원 상고 포기로 나의 승소가 확정되었으나, 2019년 겨울에 재판이 끝나기까지 나는 두 번의 가을을 보내며 고통의 시간을 살았다. 나는 진실을 말했지만, 진실만으로는 부족했다. 진실을 증명해야 했다."  (p.64)


코로나 시국을 겪는 동안 여러 매체에 발표되었던 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이 책은 시간의 순서대로 글을 배치한 까닭에 마치 시인의 일기를 몰래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합니다. 1부 '어떤 싸움의 기록'은 미투 재판 사회문제를 다루는 논쟁적인 글들을 모아 놓았으며, 2부 '인간은 스포츠 없이 살 수 없다'는 축구 야구 수영 등 스포츠 칼럼을, 3부 '어렵다고 생각한 일이 가장 쉽더라'는 유년의 추억, 사업자가 된 사연, 집수리 등 시인의 일상을 담은 글들이 대부분입니다.


글은 마음의 창이라고 합니다. 똑 부러지는 시인의 성격답게 문장은 정갈하여 지나치게 감성적이거나 불필요한 수사가 덧붙여진 문장은 찾기 어렵습니다. 마치 어느 칼럼니스트가 쓴 글처럼 말입니다. 무릇 시인이라 함은 일반의 평범한 사람들보다 공감 능력이 배는 뛰어난 족속인 까닭에 스스로를 통제하거나 절제하지 않으면 표현에 있어서도 다소 부풀려지거나 자칫 샛길로 빠지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최영미 시인의 글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런저런 고통을 감내하면서 얻은 단단함 때문일 테지요.


"지구 온난화를 막자고 말만 하지 말고 실천을 하자. 우리 사회는 에너지를 절약하는 노력을 너무 안 한다. 밤늦은 시각, 텅 빈 거리에 미친 듯 환하게 깜빡이는 전광판 네온사인들.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생활 에너지 부족에 허덕일지도 모른다."  (p.194)


새벽녘에 쏟아지던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반짝 맑은 하늘을 보여주더니 오후가 되자 다시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렇듯 변덕스러운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다만 우리가 속이지 않고 솔직하기만 하다면 삶이 조금 변덕스럽더라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날씨처럼 말입니다. '가을비 한 번에 내복 한 벌'이라는데 오가는 계절을 준비하듯 우리의 삶에도 따뜻한 위로가 스몄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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