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헤어질 결심


근 한 달 만에 쓰는 일기입니다. 그동안 나는 내 말이라면 껌뻑 죽는 똥광 멧돼지를 소문 관리 위원장으로 임명하였고, 내가 속한 '멧돼지의 힘' 만찬회에 참석하여 연설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나의 똘마니들과 함께 모여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술을 퍼마신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참, 잊을 뻔했습니다만 그 사이에 나의 아버지 멧돼지가 세상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수컷 멧돼지의 세계가 늘 그런 것처럼 나와 아버지 멧돼지의 사이도 그리 돈독한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멧돼지 또한 살 만큼 살았고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날리면 멧돼지의 초청에 응했던 것입니다. 기시감 멧돼지도 참석한 자리라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억지 미소를 지어가며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탄생과 더불어 죽음을 향해 쉼없이 달려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불현듯 삶의 덧없음이 파도처럼 밀려오곤 합니다. 지금 나는 멀리 인도에 와 있습니다. 날리면 멧돼지와 기시감 멧돼지 역시 참석한 자리인지라 오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마음 같아서는 집에서 편하게 앉아 마른 오징어 안주에 소주잔이나 기울이고 싶었습니다. 나를 지지하는 멧돼지들도 이따금 이런 질문을 합니다. "도대체 왜 기시감 멧돼지에게 그토록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까? 우리나라의 일반 멧돼지들의 여론과 상관없이 매번 일방적으로 기시감 멧돼지의 편만 드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라는 질문입니다. 여기에는 나만의 비밀이 있습니다.


리더 멧돼지에 당선된 후 1년이 지날 즈음이었습니다. 나는 문득 퇴임 후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고, 누가 나 다음의 차기 리더 멧돼지가 되더라도 내가 감옥에 가는 건 피할 수가 없겠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아내 멧돼지 역시 이를 감지한 듯 최근에는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하여 보고 있습니다. 물론 멧돼지 세계와 영화 속 인간의 세계는 엄연히 다른 것이겠지만 영화를 관람하는 아내 멧돼지의 눈빛은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영화의 제목은 박해일, 탕웨이 주연의 '헤어질 결심'입니다. 어쩌면 나는 퇴임과 동시에 효용가치 제로인 쓸모없는 멧돼지로 전락할지도 모릅니다. 아내 멧돼지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아내 멧돼지에게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닐 듯합니다. 나를 추종하는 똘마니들도 비슷한 생각이겠지요. 결국 나는 누군가에게 퇴임 이후의 삶을 의탁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어쩌면 기시감 멧돼지가 될 수도 있겠다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리더 재임기간 동안 나는 기시감 멧돼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것이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대한민국으로부터 너무나 멀고 낯선 나라 인도에 와 있습니다. 소맥 생각이 간절하지만 곁에 있는 똘마니들조차 극구 말리는 바람에 억지로 참고 있습니다. 언젠가 나는 아내 멧돼지로부터 혹은 나의 똘마니들로부터 비참하게 버려질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나와 '헤어질 결심'을 굳혀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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