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꽝 멸종 프로젝트 - Dr.심의 몸 개그, 그것이 알고 싶다
심현도.이형진 지음, 성낙진 그림 / 청춘스타일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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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침운동은 내게 일상처럼 흔한 일이 되었지만, 간혹 알람이 서너 번 이상 울릴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오늘만 쉬어' 라고 말하는, 너무나도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어찌나 달콤한 유혹인지 나는 금세 '고마워'라고 대답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요즘처럼 아침 기온이 영하로 곤두박질 치는 겨울날이나 생각만으로도 끈적끈적한 땀이 배는 것 같은 여름날에는 더더욱.

 

내가 이렇듯 아침운동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건강을 유지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내 나무'를 만나는 즐거움이 그 무엇보다 크기 때문이다. 내가 아침마다 오르는 산에는 참나무와 소나무가 많다. 등산로 옆으로 우거진 나무들을 볼 때마다 나는 푸근한 느낌이 들곤 하는데 그것은 마치 몇 십년지기 친구를 만나 잠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비슷하다. 시간에 쫓기는 탓에 대개의 나무들과는 눈인사만 주고받지만 등산로에 인접한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만큼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포옹을 하듯 한 번씩 안아보곤 한다. 가슴에 꼭 끌어안고 가만히 귀를 대보면 물관에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오늘 아침에도 운동을 나갔었다. 쌀쌀한 날씨 탓이었는지 산에서 단 한 명의 사람밖에 만나지 못했다. 가을에 보았던 구 많던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간 것인지... 내가 이렇게 근 이십여 년이 넘는 동안 꾸준히 아침운동을 이어 올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달리 비결이랄 것도 없는데 말이다. 나의 아침 시간은 비교적 단순하다. '알람이 울린다. - 일어난다. - 옷을 입는다. -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 산에 올라 운동을 한다. - 내려온다. - 샤워를 한다. - 아침을 먹는다.' 이게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하는 행동의 전부이다. 나는 이런 일련의 행동에 대해 '왜?'라고 묻거나 '오늘도?'라고 토를 달지 않는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행한다. 나는 인간이 어떤 고상한 목적을 가져야만 행동한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로봇처럼 아무 생각이 없어야 싫은 일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최근에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읽었다기 보다는 보았다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책의 제목은 <몸꽝멸종 프로젝트>. 웹툰 형식의 책인지라 짧은 시간에 다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필요한 부분은 다시 펼쳐볼 수도 있겠지만. 재미있는 것은 부록으로 딸려온 '스킨 폴드 캘리퍼'였다. 그게 뭐냐고? 말하자면 피하 지방 측정계이다. 그렇다고 거창한 기계는 아니다. 플라스틱에 눈금이 그어진, 버어니어 캘리퍼스나 마이크로미터를 연상케 하는 도구이다. 이 도구를 이용하여 피부의 피하지방을 측정하고, 측정된 값을 통하여 자신의 비만도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힘들게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인바디 측정을 하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든 간단히 측정할 수 있다는 말씀 되시겄다.

 

이 책은 스스로 자신의 몸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맞는 다이어트와 운동법을 찾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책이다. 다이어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참고할 만한 책이다.이 책의 저자인 심현도가 말하기를 러닝머신만 내내 달리다 오는 아주머니들, 잘못된 운동법으로 체형이 나빠지는 젊은이들 등 실제적으로 피트니스 센터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인구는 30%도 안 된단다. 그러므로 이 책에 소개되는 필살 홈짐 운동법은 주로 집에서 하는 운동법으로 몸 전체의 밸런스를 끌어올리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가끔 어려운 이론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뭐 그 정도야 눈 딱 감고 건너뛰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살이 빠지는 게 주목적이니까.

 

나는 사실 다이어트에는 그닥 관심이 없다. 체중이 늘거나 줄지도 않는다. 부작용이라면 한번 산 옷을 소매가 헤질 때까지, 혹은 무릎에 구멍이 뚫릴 때까지 입는 까닭에 의류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부터 본의 아니게 '공공의 적'이 되는 것이지만 그 반대로 좋은 점도 있다. 건강검진을 받을 때 내 또래의 사람들은 마치 아우슈비츠에라도 끌려가는 듯 다들 사색이 되곤 하지만 나는 맘 편하게 드나들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다이어트에는 왕도가 없다. 다만 꾸준함만이 있을 뿐이다.

덧붙이는 말 : 이 책의 리뷰를 제대로 쓰려면 포토 리뷰가 제격이지만 나는 예전부터 동영상이나 사진을 올리는 일에 알레르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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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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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아침나절에는 언뜻언뜻 햇빛이 비추는데 생선 비늘 같이 마른 눈이 내렸다. 무게도 없이 떠다니는 가는 눈발을 보면 왠지 모를 처연한 느낌이 들곤 한다. 세상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는 실체는 언제나 쓸쓸하다. 나는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를 손에 쥐고 실체도 불분명한 마른 눈발을 하염없는 시선으로 좇고 있었다. 어디쯤 왔는지 알 수 없는 인생의 한낮처럼 소설의 시작은 가벼웠다.

 

탈리스 가의 장녀인 세실리아에게는 병약한 어머니와 고위직 공무원인 아버지, 은행원인 오빠와 소설가를 꿈꾸는 열세 살의 어린 여동생이 있다. 그리고 가족은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함께 성장한 로비 터너가 있다. 그는 탈리스 가의 파출부인 그레이스 터너의 아들이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다시 의대 입학을 준비하고 있던 로비 터너에 대한 세실리아의 감정은 미묘하다. 가족처럼 함께 뒹굴며 성장했던 로비가 남자로 느껴지는 한편 그녀와 로비 사이의 계급적 거리감과 가족적인 친밀감을 끝내 떨쳐버릴 수도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 오후, 세실리아는 정원 손질을 하던 로비와 정원의 분수대 앞에서 마주친다. 그 동안 쌓인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감정이 폭발한 세실리아는 로비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고 분수대로 뛰어들고, 건물 위층 창가에서는 상상력 풍부한 어린 브리오니가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세실리아의 오빠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은 로비는 세실리아에게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한 사과의 편지를 쓴다. 몇 번을 고치고 다시 썼으나 결국 봉투에 담긴 것은 그가 장난삼아 썼던 버려진 편지였다. 시간에 쫓겼기 때문이다. 로비는 길에서 만난 브리오니에게 그 편지를 언니인 세실리아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브리오니는 언니의 편지를 허락도 없이 열어서는 먼저 읽는다. 그리고 로비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순화되지 않은 표현에 적잖이 놀란다.

 

편지가 잘못 담겼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로비는 몹시 걱정한다. 그러나 로비의 걱정과는 달리 그 편지로 인해 세실리아는 오히려 자신과 로비의 진심을 확인하게 된다. 세실리아의 아버지 잭 탈리스의 서재에서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던 두 사람의 모습이 브리오니에게 또 다시 목격된다. 탈리스 가에는 이혼한 이모의 아이들이 와 있다. 열다섯 살의 롤라와 쌍둥이 동생이. 철부지인 쌍둥이 형제가 편지를 써놓고 가출을 하는 바람에 저녁 식사 자리는 엉망이 된다. 다들 쌍둥이를 찾아 집을 나서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만 같았던 세실리아와 로비의 관계에도 불행이 찾아든다.

 

동생을 찾아나섰던 롤라가 누군가에게 강간을 당하자 그날 로비의 행동을 미심쩍게 바라보았던 브리오니는 로비를 강간범으로 지목한다. 그것은 순전히 브리오니의 상상에 의한 진술이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의대 진학을 꿈꾸던 로비는 강간범으로 수감되고 로비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던 세실리아의 운명도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소설의 1부와는 다르게 2부의 시작은 무겁다.

 

"공포에 떨 일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밀려와 쉽사리 떨쳐지지 않는 공포는 예상치도 못했던 작은 일에서 비롯되었다." (p.269)

 

강간 혐의로 복역하는 동안 로비의 유일한 여성 면회자는 그의 어머니 그레이스 터너였다. 세실리아는 가족 모두와 의절하고 간호사가 된다. 간호사를 준비하던 세실리아는 감옥에 있는 로비에게 많은 편지를 보낸다. 로비와 세실리아를 지탱하는 힘은 추억이었다. 이후 로비는 군에 징집되어 2차 대전이 한창이던 전쟁터로 보내진다. 작가 자신이 뒤에서 쓰고 있지만 이언 매큐언은 1940년 당시의 여러 문서와 책을 참고하여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연합군이 마지노 선에서 퇴각하여 됭케르크까지 철수하는 아비규환의 상황과 폭격의 공포, 본국으로 떠날 배가 없어서 절망에 처한 병사들이 저지르는 집단적 폭력이 그려진다.

 

3부에서는 수련 간호사가 된 브리오니의 일상으로 시작된다. 안락한 가정환경을 버리고 간호사로 자원한 브리오니는 부상을 입은 군인들을 돌보며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속죄'하려 애쓴다. 롤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강간하고 그 모든 비극을 몰고 왔던 장본인인 폴 마셜과 결혼식을 올리고, 브리오니는 자신의 잘못을 빌고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언니인 세실리아를 찾아간다. 그 여름밤의 사건 이후 집을 나가 브리오니보다 먼저 간호사로 일하고 있있던 언니의 하숙집에서 브리오니는 뜻밖에도 로비와 마주친다. 그리고 자신이 저질렀던 그 엄청난 잘못과 전쟁의 참화도 두 사람을 결코 갈라놓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한편으로 안도하며, 또 한편으로는 쓸쓸한 마음으로 런던에 돌아온다.

 

"참으로 평온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약간 슬프긴 했다. 실망해서일까?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느낌은 향수에 가까웠다. 그리워할 집도 없는데 그리움이 일었다. 언니를 떠나는 것이 슬펐다. 그녀가 그리워하는 것은 집이 아니라 언니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로비와 함께 있는 언니였다. 그들의 사랑이었다. 브리오니도 전쟁도 그들의 사랑을 파괴하지는 못했다. 이 사실이 도시 아래로 더 깊숙이 가라앉고 있는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다" (p.490~p.491)

 

 

소설의 반전은 마지막에 있었다. 소설 속의 브리오니는 더이상 브리오니가 아닌 '나'로 변한다. 사실은 로비가 1940년에 패혈증으로 죽고 같은 해에 세실리아는 폭격으로 죽었었다. 그리고 '나', 즉 소설 속 브리오니는 그들을 만난 적도 없었다. 그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는 전쟁박물관 문서보관소에 있었다. 혈관성 치매를 앓고 있는 '나'는 속죄의 의미로 행복한 결말의 소설을 썼을 뿐이다.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p.521)

 

별것도 아닌 일로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오늘의 날씨처럼 말이다. 오전 내내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더니 오후가 되자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었다. 변덕스러운 날씨도 날씨려니와 오후의 갑작스러운 햇살이 나로 하여금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토록 했다. 기대보다는 의무가 더 크게 느껴지는 시기가 되면, 혹은 느슨해진 손아귀에서 자신의 삶이 스르르 미끄러지고 있음을 느끼는 나이가 되면, 별것도 아닌 인생이라 여겼던 젊은 날의 오만이 슬몃 부끄러워진다. 어쩌면 인생의 팔 할은 별것도 아닌 일들로 채워지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별것도 아닌 일들이 오해를 낳고, 점점 부풀려지고, 어느 날 펑하고 터져버리는 순간 우리는 겨자씨보다도 작았던 별것도 아닌 그 일을 기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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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인간 - 분석심리학자가 말하는 미래 인간의 모든 것
이나미 지음 / 시공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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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성당에 가면 미사 중에 신자들끼리 평화의 인사를 주고받는다. 미사를 주재하는 신부님이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면, 신자들이 한 목소리로 '또한 사제와 함께' 한다. 그리고 양 옆과 앞뒤 좌석에 있는 신자들을 향해 서로 가벼운 목례를 하며 '평화를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 인사를 하게 되는데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이든, 처음 본 사람이든 모두 그렇게 한다.

 

다소 엉뚱하지만 나는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를 받을 때마다 '고독을 빕니다.'로 해석하곤 한다. 상대방의 발음이 부정확하거나 내 귀가 어두워서 그렇게 듣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귀가 어두워도 '평화'를 '고독'으로 알아들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나는 다만 평화와 고독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갈등이 없이 평온한 상태를 우리는 '평화'라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위험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서의 인간은 '연대(連帶)'의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평화가 지속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속력은 약해지게 마련이다. 새로운 관계의 추구나 기존 관계의 유지도 느슨해질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한 권의 책을 선물 받았다. 책의 제목은 <다음 인간>. 신경정신과 전문의이자 분석심리학자인 이미나의 신작이다. 딱히 관심이 가는 책도 아니었고, 그닥 재미있는 책도 아닌 듯하여 며칠 동안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랬더니 웬걸, 나에게 책을 준 분과 우연히 마주쳤는데 나보고 다 읽었느냐 묻는 게 아닌가. 뜨끔했었다. 내가 우물쭈물 답변을 흐리자 재미있는 책인데 뭐 그렇게 오래 걸리느냐 타박 아닌 타박을 하셨다.

 

그날 저녁에 나는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이 책을 쓴 저자의 의도는 단순했다.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우리 인간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미래의 인간상인 '다음 인간'은 어떤 모습일지 추측하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에 따른 생활상의 변화 또는 소비패턴의 변화 등 실생활과 밀접한 외부 환경의 변화를 추측하는 책은 많았지만 인간 내면의 변화를 예측하는 책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우리의 관심도 뒤떨어졌던 게 사실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래의 인간상에 대해 다소 비관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요즘 청소년들의 행태만 보아도 충분히 그렇게 예측할 수 있지만 말이다. 예컨대 무감동과 타성에 젖은 사람들, 사이코패스, 관계의 해체, 감정이 부족한 R 세대의 출현, 에볼라 바이러스 같은 전염병의 세계화 등을 예상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음 세대의 인간상을 예측해 보고 문제의 해결책을 함께 고민해보자는 이야기이다.

 

"오늘날 빈부의 격차는 점점 더 심해지고 신자유주의가 세습자본주의로 정착되면서 젊은이들은 패기를 잃었고 노인들은 여유를 잃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기 힘들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물론 정치나 경제의 구조적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회 구성원들이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도 필요하다." (p.15)

 

그러나 나는 위 대목에서 저자와 의견을 달리 한다. 우리 청소년들에게 발생하는 문제는 어떤 제도나 시스템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물질적 풍요와 평화의 지속에서 오는 문제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삶에 대한 애착이나 결속의 필요성은 결핍이나 생명의 위협이 증가할 때 나타나는 인간 심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는 전쟁이나 기아, 범죄와 질병 등 인간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요소들이 많았다. 이러한 문제는 개개인이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인간 관계의 중요성, 사회 공동체나 국가 공동체를 통한 결속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가족 구성원에 대한 사랑,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에 따른 위험 요소의 감소는 물질적 풍요와 육체적 편리를 가져다 준 반면 적극적인 인간 관계의 도모, 꿈과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열정, 가족 구성원과 국가 구성원에 대한 애정과 감사는 상대적으로 약해지게 된다. 필연적으로 말이다. 먹고 살 걱정이 없는데 굳이 일을 할 필요도 없고, 전쟁의 위협이 없는데 굳이 내 나라를 고집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미디어의 발전은 최소한의 인간 관계를 유지 가능하도록 만들어 준다. 애써 노력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죽음과 종교에 대한 문제만 해도 그렇다. 저자는 종교의 쇠퇴와 종교인의 파산을 예측하면서 통합 종교의 출현도 예고하고 있다. 자살클럽의 증가와 잉여 살해를 돕는 비밀 조직의 등장도 말한다. 이것이 과연 사회 시스템이나 구조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오히려 물질적 풍요, 평화의 지속에서 오는 삶의 '권태'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생명에 대한 위험 요소가 많을 때에는 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지지만 그러한 요소가 사라졌을 때는 오히려 삶은 따분하고 권태롭기만 한 것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참치를 잡으면 냉동 상태로 반입되지만 냉동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참치를 살려서 들여와야만 했다. 원양어선에서 잡은 참치를 국내에 반입할 때까지 더 많이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던 중 참치 수조에 상어 새끼 한 마리를 넣어 두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참치만 담아 왔을 때는 폐사율이 높았지만 천적을 한 마리 넣어 둠으로 해서 폐사율이 현격히 떨어졌다고 한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칠 수밖에 없었으므로.

 

"미래에 대한 비전은 안팎으로 곤경에 빠졌을 때 포기하려는 나를 격려해주고, 때로는 건강하게 타협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일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다시 시도해볼 수 있게 도와준다. 청사진을 갖고 씩씩하게 무언가를 시작했지만 도중에 크고 작은 실패에 좌절해 자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싶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은 다시 한 번 자신을 추스리게 만든다. 이것이 이 책에서 미래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펼친 가장 중요한 이유다." (p.238)

 

요즘 아이들에게 결핍이나 생명의 위협을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따금 지구의 어느 곳에서 내전이나 자연재해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기사가 전해지기는 하지만 그것은 개별적이고도 직접적인 죽음은 아니다. '살아야겠다' 또는 '열심히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는 풍요와 평화가 인간의 내면을 심하게 부패시킨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평화를 빕니다'는 인사는 '고독을 빕니다'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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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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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에 무슨 대작이 있겠습니까마는 몇 년째 준비하면서도 끝내 쓰지 못했던 책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몇 달도 아닌 몇 년째. 남들이 들으면 내가 마치 신춘문예에 출품할 작품이라도 구상하고 있으려니 생각하겠지요. 부끄럽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나는 다만 책을 읽고 느꼈던 그 충만한 감동을, 그 순간의 내 솔직한 감정을, 언어 밖의 풍경으로 그려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허섭스레기와 같은 글을 몇 줄 쓰다가 지우고,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생각나서 또 쓰고 하기를 몇 년째 반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짝사랑하는 연인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마냥 쭈볏거리기만 하는 숫총각의 마음과 같았습니다.

 

나는 작품 속 하나하나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의미를 되새기고, 부풀어 오른 감상에 젖어 확대해석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름의 생각을 끄적거려보기도 했지만 낙서는 낙서로만 존재할 뿐 그것이 추구하는 최종 목표, 하나의 완성된 문장, 마음에 흡족한 글로 재탄생하지는 못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글로 옮긴다는 게 어찌나 어려운 일이던지요. 거칠고 미욱한 나 자신을 탓해본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답답하고 속만 뒤집히는 것을요.

 

아무튼 나는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 마냥 시간만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어떻게든 매듭을 짓고 넘어가야 겠다 마음 먹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무척이나 각별했던 책, <그리스 인 조르바>는 그런 책입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입니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고등학교 시절, 대학 캠퍼스를 오가며 짬이 날 때마다 읽고 또 읽었던 대학 시절, 힘든 사회 생활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고 지쳐갈 때마다 문득문득 생각나서 이곳저곳을 펼쳐 보곤 했던 멀지 않은 과거, 책을 붙들고 씨름을 하듯 처음부터 다시 읽었던 근래의 날들을 생각하면 나는 왠지 눈물이 솟을 것만 같습니다.

 

"......산다는 게 곧 말썽이오. ......죽으면 말썽이 없지. 산다는 것은...... 두목, 당신,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p.159)

 

위의 인용문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 풀리지 않는 화두 하나를 받아든 느낌이었죠. 산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던 그 시기에 '산다는 게 말썽'이라는 한마디 말은 왜 나를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게 했던 것일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소설의 얼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관념에 사로잡힌 서른다섯 살의 젊은이와 순간순간의 삶을 사랑했던 예순다섯 살의 노인이 크레타 섬에서 펼치는 한 판의 춤사위, 관념과 실재가 어우러진 한 편의 서사시 정도로 해두어야 겠군요.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두 허깨비들이오." (p.86)

 

"부드럽게 비가 내리는 시각에 그 비가 내부의 슬픔을 일깨운다는 것은 얼마나 관능적으로 즐거운 일인가! 그럴 때면 의식의 심연에 숨어 있던 쓰디쓴 추억, 친구와의 이별, 사라져 버린 여자의 미소, 날개를 잃고 다시 구더기가 되어 버린 나방의(구더기는 내 심장으로 기어오르며 심장을 갉아먹고 있었다) 덧없는 희망 같은 쓰디쓴 추억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p.141)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삶의 본질을 꿰뚫는 나 나름의 시각을 배웠던 셈입니다. 한때 철학에 매료되어 현실적인 이상이나 꿈보다는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 도덕적 관념이나 불변하는 진리를 추구했던 나에게 있는 그대로의 삶을 열정적으로 붙잡으려 했던 조르바의 태도는 충격적이다 못해 말을 잃게 할 정도였습니다. 단지 인식의 차원에서 머물렀던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가 심장 가까이로 '쿵'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한 번뿐인 삶이기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헌신짝처럼 버린다는 게 상식적으로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인간 본질은 야만스럽고, 거칠며 불순한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과 육체와 불만의 호소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승화시켜 보라. 정신의 도가니 속에서 연금술의 과정을 쫓아 순화시키고 증발시켜 보라." (p.209)

 

"최후의 인간은 자신을 비운 인간이다. 그 몸에는 씨앗도 똥도 피도 없다. 모든 것은 언어가 되고, 언어의 집합은 음악이 되어도 최후의 인간은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절대의 고독 속에서 음악을 침묵으로, 수학적인 방정식으로 환원시킨다." (p.209)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은 후회를 양산하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실재하지도 않는관념과 도덕에 얽매어 자신의 삶을 출구가 없는 한 귀퉁이로 몰고, 종국에는 손과 발을 옥죄어 엉뚱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요.

 

"나는,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지식도, 미덕도, 선도, 승리도 아닌, 보다 위대하고 보다 영웅적이며 보다 절망적인 것, 즉 신성한 경외감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p.415)

 

"어릴 때부터 나는 초인(超人)에 관한 야망과 충동에 사로잡혀 이 세상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조용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神的)인 것을 가르고 내 연(鳶)을 놓치지 않도록 꼭 붙잡았다." (p.463)

 

너무나 이질적인 두 사람의 만남은 결국 시간의 궤도를 달려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한의 영역으로 말입니다. 그 어둠의 영역에서 우리가 태어났고 다시 그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인지, 무한광대의 우주 속으로 어느 날 갑자기 '나'라는 생명체가 뚝 떨어졌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한 사람이 살다간 핏방울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길 뿐입니다. 진정으로 삶을 사랑했던 어느 자유인의 절규를 오래도록 기억할 뿐입니다.

 

"꺼져가는 불 가에 홀로 앉아 조르바가 한 말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의미가 풍부하고 포근한 흙 냄새가 나는 말들이었다.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한 그런 말들이 따뜻한 인간미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리. 내 말들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내 말들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것이었다. 말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 말이 품고 있는 핏방울로 가늠될 수 있으리." (p.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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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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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느끼는 고독감은 그 속의 옅은 감미로움으로 인해 자기 도취에 이르는 실핏줄처럼 가는 숨구멍이 돼주곤 한다. 며칠 전 내려 녹다 만 잔설과 알싸한 추위가 마치 잘 조합된 피아노 협주곡처럼 겨울의 풍미를 더하는 휴일 아침에 나는 이언 매큐언의 소설 <체실 비치에서>를 읽었다. 작가의 섬세한 필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먼 이국의 어느 바닷가로 나를 안내한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은 어느것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게 없지만 나는 유독 <체실 비치에서>를 좋아한다. 그것은 마치 내 젊은 시절의 벌거벗은 열정을, 인내와 절제로 갈무리되지 않았던 무모함의 실체를, 부풀 대로 부풀었던 자존심의 상흔을 하나하나 훑어내는 것만 같다. 솜이불 속에 박제된 여름날의 더위를 반추하는 것처럼. 나는 칼에 베인 듯 아팠을 젊은 시절의 사랑을, 그리고 실체가 없이 사라진 그 시간의 그림자를 하릴없이 좇고 있다.

 

소설은 스물두 살 동갑내기 신혼부부의 첫날밤을 매듭 삼아 이들 삶의 앞과 뒤를 조명한다. 로큰롤을 좋아하는 런던대 역사학도 에드워드와 현악 사중주단을 열정적으로 이끄는 왕립음악대학 학생 플로렌스는 그들이 자라온 환경만큼이나 다르지만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에드워드는 뇌손상을 입어 정신착란에 빠진 어머니와 쌍둥이 여동생, 그리고 집안일과 직장일에 지쳐 있던 아버지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네 살에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어머니가 보통의 어머니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에드워드는 대학에 진학하여 집을 떠날 결심을 굳히고 공부에만 매진한다. 언제나 손님처럼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반면에 플로렌스는 성공한 사업가인 아버지와 대학교수 어머니를 둔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났다. 체면과 격식을 중시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란 플로렌스. 그녀는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섹스 자체를 혐오한다. 상반된 환경에서 자라난 두 남녀는 각자 다른 이유로 서로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결혼에 이르지만 막상 신혼 첫날밤에 대한 두려움은 둘 사이에 묘한 기류를 형성한다.

 

칠월 중순의 어느 날 그들은 체실 비치의 외딴 호텔에 있다. 남편과 아내의 자격으로. 소설은 그렇게 시작된다. 일 년여의 연애 기간 동안 깊은 관게로 발전하지 못했던 것이 불만이었던 에드워드는 결혼이 “교구 목사의 축복까지 받은 음탕하고 유쾌한 벌거벗은 자유”라고 생각했지만, 플로렌스에게는 하나를 허락하면 또 다른 욕망을 갈구하는, 지속적인 압박 속에 가해지는 “끝없는 갈취”로만 여겨졌다.

 

소설은 두 사람의 감정 선을 따라 진행된다. 마치 세심한 연주자의 깊고 정확한 연주처럼. 소설의 무게중심은 에드워드보다는 플로렌스에게 있는 듯한데 여성의 심리를 어찌나 잘 묘사했던지 작가가 혹 여성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세밀하다. 섹스를 혐오하면서도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려 했던 플로렌스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 채 에드워드의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반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며 첫날밤만을 기다려왔던 에드워드는 아내와의 결합을 서두르다 결국 삽입도 하지 못한 채 플로렌스의 배 위에 사정을 하고 만다. 그 기분 나쁜 경험을 끔찍하게 생각했던 플로렌스는 에드워드를 방에 남겨둔 채 뛰쳐 나간다. 그리고 플로렌스의 행동을 지켜본 에드워드는 오히려 자신이 모독을 당했다고 느낀다.

 

이러한 과정의 심리 변화를 아주 세밀하게 묘사한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플로렌스를 찾아 나선 에드워드와 그를 피해 달아났던 플로렌스의 재회 장면이었다. 플로렌스는 자신의 감정과는 반대되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마치 우리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엄마의 전화를 받으면서 퉁명스런 말투로 응대하는 것처럼. 자신의 불안 심리를 낮추기 위해, 또는 자신의 동기를 숨기기 위해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욕구나 감정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심리학의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을 작가는 아주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해변에서 등을 돌리고 떠나는 자신을 붙잡아주기를 간절히 바려면서 그녀는 에드워드의 곁을 떠난다. 그리고 그녀는 가방을 싸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그들은 결국 파경을 맞는다.

 

"그의 분노가 그녀 자신의 분노를 일깨웠고, 그녀는 갑자기 그들의 문제가 뭔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너무 예의발랐고, 너무 경직됐고, 너무 소심했고, 까치발을 든 채 서로의 주위를 빙빙 돌며 중얼거리고 속삭이고 부탁하고 동의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침묵에 가까운, 사교적인 배려라는 담요가 그들을 결속하는 만큼이나 그들의 차이를 덮어버리고 그들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제나저제나 의견 차이가 날까봐 두려워했고, 이제 그의 분노가 그녀를 그런 두려움에서 해방시키고 있었다." (p.174~p.175)

 

플로렌스와 헤어진 에드워드는 백발의 통통한 노인네가 될 때까지 “반쯤 잠든 상태”에서 살다가, 그제서야 그들 사이에 필요했던 게 ‘사랑과 인내’였음을 깨닫는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어느 날 갑자기 성인이 된 에드워드와 어렸을 때의 나쁜 기억을 품은 채 체면과 격식을 따지는 엄격한 환경에서 자의식 강한 여성으로 성장한 플로렌스는 어쩌면 자신이 갖지 못한 모습을 서로에게서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의 결합은 로큰롤과 클래식의 결합만큼이나 어려웠던 것이었을 게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체실 비치에서 그는 큰 소리로 플로렌스를 부를 수도 있었고,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그는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제 그를 잃을 거라는 확신에 고통스러워하면서 그에게서 도망쳤을 때, 그때보다 더 그를 사랑한 적도, 아니 더 절망적으로 사랑한 적도 결코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그녀에게는 구원의 음성이었을 것이고, 그 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을 거라는 사실을." (p.197)

 

나는 지난 여름의 달뜬 열기가 생각날 때마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 <체실 비치에서>를 떠올리곤 한다. 인내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대지에 내리 쬐던 뜨거운 열기도 이 겨울의 추위 속에서는 한낱 한줌의 추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체실 비치의 자글거리는 몽돌 소리와 함께 환청처럼 되새기고 있다. 한겨울에 읽는 <체실 비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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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9 21: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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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4 14: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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