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두꺼운 외투가 조금 부담스러운 따뜻한 날씨였는데 오늘 너는 무엇을 하며 보냈을까?
점심을 먹은 후 나는 잠깐의 산책을 즐겼단다.
햇볕이 더할 수 없이 좋지 않았겠니?  이런 날 서둘러 사무실로 들어간다면 오후 내내 후회할 것만 같았단다.  때 이른 개나리꽃이라도 볼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나른한 봄날의 오후는 가던 발걸음도 붙잡을만큼 여유롭더구나.

아들아

너는 지난 일요일 할아버지와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왔었지.
네 손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의 모형을 만들 수 있는 <뜯어만드는 세상>이 들려 있더구나.
할아버지께서 네게 선물로 사주신 것이겠지만 너는 그것을 빨리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에 현관을 들어서며 신발부터 벗기에 바빴었지.
너의 한껏 들뜬 표정을 보며 나도 행복했단다.

아들아

나는 오늘 산책을 하며 한가지 고민거리를 어떻게 처리할까 생각했단다.
지난 주에 틱장애를 가진 아이의 어머니가 나를 찾아오지 않았겠니?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과 그분의 아이가 같이 공부할 수 없겠냐며 조심스럽게 물었었단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다음주에 연락을 드리겠노라며 그 결정을 미루었구나.
내가 너무 냉정했지?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단다.
지금 내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이 그 아이 하나로 인해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틱장애를 가진 그 아이는 더 깊은 상처를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나는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단다.

아들아

누구나 항상 올바른 판단만 하는 것은 아니란다.
세상에 완벽한 판단도 존재하지 않음을 나는 잘 알고 있지만, 먼저 결정하고 부딪쳐 해결할 일이 있고, 한번 더 심사숙고해야 할 일도 있음을 알아야 한단다.
너의 행복했던 얼굴과 나를 찾아왔던 그 어머니의 초췌한 얼굴이 오후 내내 나의 머리속에 맴돌더구나.

아들아

너도 조금 더 자라면 작든 크든 수시로 선택의 문제와 마주하게 된단다.
그럴 때, 쉽게 결정하고 용기를 내어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네 마음에서 그 답을 찾아보렴.  마음의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가장 현명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단다.  비록 그 해결책이 네게 작은 시련을 안겨줄지라도 지나고 나면 그것이 옳았음을 자연스레 알게 되는 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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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오늘은 너의 아홉 번째 생일!
2011년이 시작될 때,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한해를 시작하고 싶었단다.
그런데 20여일이나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네게 편지를 쓰게 되었구나. 
네게 생일 축하 메일을 보내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단다.  
너와 함께 보냈던 소중한 추억들, 그리고 너와 떨어져 살고 있는 현실의 안타까움 등 생각이 끝도 없이 이어져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더구나.
평일에 너와 함께 지내지 못하는 미안함을 이 한통의 편지로 상쇄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지만 너를 늘 가슴 한켠에 두고 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이라도 내보이면 내게는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듯도 싶었단다.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제 초등 2학년이 되는 네게는 아마 어려운 일이겠지?

아들아

2주 전 일요일이었지.
습관처럼 분당의 한 대형서점에 들러 책을 읽는데 너의 엄마가 내게 밖에서 차 한 잔 하자고 하더구나.  네게 양해를 구하고 우리는 서점 밖으로 나갔었지.  바람도 불고 몹시 추운 날이었잖니?  서점 안에 혼자 남은 너도 걱정되고 날씨도 추웠던지라 우리는 근처의 커피숍으로 향했단다.  너의 엄마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나는 무슨 말을 듣게 될지 은근히 불안하더구나.  차마 너 앞에서는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꺼내며 눈물을 보이던 네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가슴이 아팠단다.  떨어져 살며 육아의 책임을 전적으로 너의 엄마에게 일임했던 나는 참 무책임한 가장이었단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네게 다시 돌아왔을 때 너는 <사람은 누구나 평등해요>라는 제목의 책을 읽고 있더구나.

아들아

세상에서 가장 비싼 사치품이 시간이라는 말을 그렇게 절절히 느꼈던 적이 없었단다.
너와 함께 보내지 못한 많은 시간들, 그리고 공유할 수 없는 추억들...
나는 너를 통하여 지금껏 배우지 못했던 사랑을 뒤늦은 나이에 배우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헤어질 때마다 번번이 눈물을 흘리던 네 모습을 생각하면 그 순수한 마음이 저리도록 느껴지곤 한단다. 
그리고 약한 몸으로 너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네 엄마의 고충을 들었을 때 그간 공감하지 못하고 마음으로 보듬지 못했던 내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아들아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렴.
나도 하지 못하는 것을 네게 말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지만, 그래서 더욱 너는 그렇게 살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더불어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네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했으면 좋겠구나.
어려서부터 나는 그 소중한 것을 배우지 못하며 자랐었단다.
살아가면서 정작 필요한 것은 네 나이 때에 모두 배우는 것인데도 말이지.
나이가 들어서는 어색하고 쑥스러워 자신을 변화시키기 어려운 법이란다.
행복은 가장 가까운 곳에,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음을 꼭 기억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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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지난 주에는 네가 아데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온 가족을 가슴 철렁하게 만들었지.
너는 두 번이나 토하고, 결국 학교도 하루를 결석하며 이틀이나 앓았더구나.
아픈 너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곁에서 지켜주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엄마에 비하면 나는 마음으로만 걱정했을 뿐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었단다.
전화를 하면 한달음에 달려와 반가운 목소리를 전해주던 네가 아파서 누워있다는 말을 엄마로부터 들었을 때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아들아

어제 아침에는 너와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미고 아파트 공터에서 축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  깔깔거리며 웃는 너의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단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가 멀지 않았구나.  내가 어렸을 때는 크리스마스는 그저 그들만의 작은 기념일이었는데 요즘은 연말과 더불어 한껏 들뜬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겠더구나.
오후에 너와 함께 강남역 근처의 서점을 방문했을 때, 거리는 온통 성탄절 상징물들로 가득하여 너는 수시로 걸음을 멈추고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지.
네게 슈톨렌이나 파네토네를 사주고 싶었지만 너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더구나.

아들아

추억이란 언제나 사소한 것임을 네가 알았으면 좋겠구나.
어느 곳으로 여행을 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여행지에서 네가 했던 말과 너의 표정, 너의 작은 몸짓이 기억에 남을 뿐이란다.
어쩌면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도 있을 수 있는 것이 추억이지만 유독 작고 사소한 것만 기억에 남게 되는 것인지 그 까닭을 나도 모르겠구나.
아마도 미래와 연결된 그리움의 통로는 아주 작아서 커다란 것은 현재에 머물고 미래에는 아주 작은 것들만 모이는 것은 아닐까?

아들아

나도 네 엄마와 통화할 적에 자주 지적을 받는 것이 있단다.
통화를 하면서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이지.  몇 차례 지적을 받은 듯한데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구나.  시간이 지나면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나는 늘 나중에 기억되지도 않을 신기루에만 관심을 쏟고 있단다.  아마도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겠지.

아들아

바로 지금 어떤 것이 미래로 연결된 그리움의 통로를 통과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에는 작고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고르렴.
지금 비록 커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오래지 않아 기억에서 사라진다면 그것은 결코 소중한 것이 아니란다.  누군가의 말을 진심을 다해 들어주는 것, 순간순간의 작은 표정들, 그리고 마음으로 전해 오는 따뜻함은 네가 어른이 되어서도 언제든 기억되고, 소중한 추억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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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살다 보면 소형 승합차가 코너를 돌 때처럼 균형을 잡지 못하고 흔들릴 때가 있단다.
지금의 일상이 못 견딜만큼 힘든 것은 아니지만, 몸으로 견디는 것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견뎌야 한다는 의무감이란다.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양치를 강조하는 네 엄마의 원칙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한번쯤 그것을 어기고 잠자리에 들었던 어느날 아침, 불안한 마음으로 거울에 네 입 안을 구석구석 비춰 보아도 구멍이 크게 뚫린 이(齒)를 전혀 발견할 수 없을 때, 너는 양치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양치를 하는 그 순간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알았을거야.
이런 생각이 들더구나.
산다는 것은 `의무감으로 가득한 별난 놀이터’에서 맘껏 놀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것과 같다.
우리는 선뜻 어떤 놀이기구에도 손을 얹을 수가 없단다.
늘 언저리에서 맴돌며 주저하다가 누군가의 결정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아들아

지난 주말에는 엄마와 함께 `제23회서울국제유아교육전’에 다녀왔다지?
동행하지 못했던 나는 괜한 죄책감과 함께,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임무를 방기한 채 모든 것을 네 엄마에게만 떠맡기고 있다는 미안함으로 고개를 떨구었단다.
초등학교 1학년인 네게는 더없이 즐거운 시간이었겠지만, 번잡함을 싫어하는 엄마는 그닥 유쾌한 시간은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아들아

어제와 달리 오늘은 가을 햇살이 무척이나 좋았었단다.
네가 자라 어른이 되면 어쩔 수 없는 의무감으로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지겠지만 그래도 너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구나.
빛나는 가을볕처럼 여유롭고 따뜻한 시선이면 더 좋을테고.
너는 가을을 향해 쏟아져 나오는 저 한 무리의 유치원생들 마음으로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간절한 마음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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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어제는 네가 처음으로 기차여행을 했다지?
점심을 서둘러 먹고 이모부와 사촌 여동생 이렇게 셋이 떠났던 깜짝 여행.
너는 내게 설명할 것이 참 많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왜 그렇지 않았겠니.
네 흥분된 목소리에 나도 덩달아 들뜨게 되더구나.  하지만 조금은 늦은 시각이라 아쉬움을 뒤로 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어야만 했단다.
비록 하루 동안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네가 들려준 평택 마린센터 14층 전망대의 모습은 동행하지 못한 나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겠더구나.


아들아

요즘 나는 '삶이 깜짝파티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순간순간 기쁜 일들만 이어져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물론 아니란다.
때로는 시시하고 따분한 일도, 때로는 슬프거나 화나는 일도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이 내 앞에 처음으로 펼쳐진 깜짝 파티가 아니겠니?
"에이, 그게 뭐 깜짝파티예요?  그렇다면 나는 보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할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눈을 조금 더 크게 뜨고 다시 한번 바라보렴.
세상을 살면서 똑같은 경험은 두번 다시 하지 못하는 법이란다.  네가 자주 듣는 엄마의 잔소리도 그때그때마다 모두 다를뿐 아니라 그 순간의 하늘과, 그 순간의 바람과, 그 순간의 태양도 모두 새로운 것이란다.


아들아

우리가 다음에 일어날 일을 미리 예상하거나 이러이러하게 되리라 기대한다면 아무리 기쁜 일도 그 기쁨은 반감되거나 시큰둥한 일이 돼 버린단다.
그리고 네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너를 위해 최상의 깜짝파티를 준비하고 있음을 믿어야 한단다.  네가 화내거나 짜증낸다면 너는 상대방의 행동을 미리 예상했거나 네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기를 은근히 기대했기 때문이란다.  상대방이 너의 예상이나 기대에 못 미치면 너는 너의 기대감 때문에 실망하게 되는 것이지 상대방이 잘못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단다.
이렇게 생각하면 네가 만나는 상대방이 비록 화를 낼지라도 너는 담담히 또는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상대방이 네게 준비한 깜짝파티를 즐길 수 있는 것이란다.
언젠가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을 맞는다 해도 너는 다음 순간에 다가올 깜짝파티에 대한 설레임으로 큰 슬픔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아들아

네가 조금 더 자라 나의 말을 이해할 나이가 되면 너와 와인을 같이 나누며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건배사를 들려주고 싶구나.
레치얌!
히브리어로 '삶을 위하여!'라는 뜻이라는구나. 
나이 든 할아버지가 어린 손녀와 잔을 부딪히며 외쳤던 말이라는데 근사하지 않니?
나는 그날을 위해 좋은 와인 한병을 준비하마.  내 아들의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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