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적인 도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의 사적인 도시 - 뉴욕 걸어본다 3
박상미 지음 / 난다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짧은 시간 안에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일들과 마주칠 때면 아직 오지도 않은 가까운 미래를 향해 심통 사나운 노크를 해대곤 한다. 물론 그 시발점은 언제나 나의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말이다. 예컨대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날, 한동안 미루기만 했던 방청소를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거나, 몇 개 되지도 않는 밥그릇을 적당히 돌려가며 사용하다가 이제는 그마저도 어렵게 되었다고 판단될 때, 우렁각시도 기대할 수 없는 나는 내 손으로 직접 설거지며, 빨래며, 청소 등등을 말끔하게 끝마치고 식탁에 느긋하게 앉아 냉커피 한 잔을 달게 마시는 장면을 상상하곤 한다. 이를테면 나는 김칫국부터 마시는 셈인데 그렇게 하고 나면 이따금 움직거릴 힘이 나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긴 기다림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야금야금 아껴가며 취해야 할 대상인 듯 여겨져 상상도 가끔 미안해진다. 내가 상상한다고 그 달콤한 기분이 쉬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인 동시에 예술가로도 이름이 난 박상미를 알게 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을 좋아하는 나는 번역을 맡았던 그녀에게 큰 빚을 진 셈이었다. 게다가 나는 번역 문체를 꼼꼼히 따지는 까탈스러운 독자가 아니던가. 박상미 작가는 줌파 라히리의 소설에서 풍기는 차분하고도 따뜻한 느낌을 무리없이 제법 잘 표현했었다. 영어로 씌어진 작품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이 영어만 잘한다고 생각처럼 쉽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작가로서의 기질과 섬세한 감성뿐 아니라 뛰어난 한글 실력이 덧붙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신작 <나의 사적인 도시>를 읽는 내내 여동생 생각이 났다. 1996년 대학을 졸업한 후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는 작가와는 달리 여동생은 그보다 늦은 2003년에 단순히 그곳에 살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 같은 도시에 살고는 있지만 그 큰 도시에서 동생과 작가가 서로 안면이 있을 것이다 장담할 수만은 물론 없다. 애 둘을 키우며 이제는 완전한 미국 아줌마의 태가 나는 동생은 지난해 있었던 아버지의 장례식에 뒤늦게 참석했었다. 그 자리에서 동생은 꺽꺽 울음을 삼키며 대상도 없는 누군가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되내었었다.

 

작가가 말하는 '사적인 도시' 뉴욕은 그야말로 '사적'이다. '사적인 도시'를 나는 '고향'과 '여행지'의 중간쯤으로 인식한다. 그것은 삶의 권태와 익숙함에으로부터 살짝 벗어난 낯섦과 긴장감이 상존하는 공간일 터이다. 작가에게 뉴욕은 딱 그런 곳이다. 삶의 무게는 느껴지지 않지만 여행자의 외경과도 사뭇 거리가 있는... 동생이 사는 뉴욕은 또 다른 '삶의 기착지'였다. 서울에서 뉴욕으로 주소와 우편번호만 바뀌었을 뿐 달라진 건 없었다. 작가에게 뉴욕은 취미 생활을 하는 어느 공간처럼 가볍고 분주하다. 살짝 긴장감이 묻어나지만 진득한 땀냄새는 없는, 매일매일이 소풍을 가는 어느 봄날처럼 설레는 그런 곳이다.

 

"내가 태어난 도시가 아니라 내가 살기로 선택한 도시, 뉴욕은 나라는 개인에게 매우 사적인 은유였다. 내가 자라나며 불만을 품었던 중산층적 가치들의 전복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 안정과 위생과 효율보다 도전과 거침과 우회가 인정되는 곳. 불가능하게 치솟은 빌딩처럼 위대함이 꿈꾸어지고 시도되는 장소로서의 은유. 뉴욕은 내 삶의 변명들을 뭔가 다른 것으로 바꾸어가는데 필요한 나만의 내면적 장치였다." (p.87~p.88)

 

<나의 사적인 도시>는 삶의 진실성보다는 약간의 겉멋을 부린 그런 책이다. 몸빼 바지가 아닌 원피스와 스카프로 한껏 멋을 부린 어느 여인이 연상되는.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2005년 11월부터 2010년 6월까지 4년 반의 시간 동안 뉴욕에서 써 내려간 블로그의 포스트를 간추리고 재구성해 묶은 산문집이라고 한다. 지인들은 물론 다수를 차지하는 익명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블로그에서 포스팅 주제로 쓰기에는 땀내 풀풀 나는 일상보다는 오히려 공연과 전시회와 문학이 더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에도 우아함을 잃지 말라고, 누군가 내게 그렇게 말해주었다고 상상할 때가 있다. 뜻은 높고, 판단과 실행은 군더더기 없이 단순해야 하고, 태도는 부드러워야 한다고. 외롭고 외로운 여왕이나 장군을 떠올리라고. 영예로운 뜻과 반듯한 말과 생각, 칼날 같은 실행이 있다 해도 관용이나 인간적 연민이 없다면 우아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곧음만을 자랑하던 직선이 몸을 살짝 구부려 공간을 품을 때 비로소 우아한 곡선이 된다. 베라자노 브리지는 브루클린의 한 지점에서 스태튼 아일랜드의 한 지점까지 그렇게 건너간다." (p.237)

 

어느 곳에서 산들 한 점 삶의 애환이 어찌 없을까. 나도 안다. 너무나도 잘 안다. 반짝거리는 빌딩의 유리에도 칙칙한 삶의 시간이 주책없이 달라붙는다는 사실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뉴욕, 그곳이라고 삶의 번잡함이 왜 없으랴. 작가라고 이방인의 슬픔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이 책에서 작가는 예술과 문학과 공연과 전시회와 자신의 일과 만남만 이야기할 뿐 보편적 삶이 수놓는 저지대의 풍경은 그리지 않는다. 내가 공감할 수 없었던 까닭은 거기에 있다. 나는 내가 사는 지구위 어느 곳의 또다른 삶이 아닌, 다른 우주의 한 귀퉁이를 보고 있는 듯했다. 나는 이 책을 읽어내기 위해 마지막 페이지를 읽는 나의 모습을 수백 번 상상해야만 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각이 나서 - 152 True Stories & Innocent lies 생각이 나서 1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귀가가 늦은 날이면 라면 생각이 난다. 출출하다는 것과, 헛헛하다는 것과, 종종 외롭다거나 급기야 사무치는 느낌으로 라면을 삶는다. 내 영혼이 현실로부터 반쯤 밀려난 시각, 떨어져 있는 아내와 아들 녀석이 깊이 잠들어 있을 그 시간에 나는 라면을 삶고 약간의 슬픔으로 간을 한다. 짭쪼름한 면발을 한 젓가락 삼키며 TV 볼륨을 높인다. 저만치 밀려나는 침묵과 자동반사에 의지한 채 운전을 했던 바로 전 귀갓길의 희미한 기억들이 화면 속에서 푸른 빛으로 번진다. 불어터진 라면 면발을 보면 식욕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 식탁 한켠으로 밀려난 냄비를 멀뚱히 지켜본다.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든 무력감은 말하자면 나의 수면제. 여전히 잠은 오지 않는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생각할수록 이물질처럼 단단해진 현실감이 나를 깨운다. '책이라도 좀 읽자' 생각한다.

 

농밀해진 침묵 간간이 책장 넘기는 소리. 황경신의 <생각이 나서>. 언제 어떤 이유로 접어두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어느 페이지 앞에서 나의 시선이 멎는다. '하염없음'과 '속절없는 우울'을 그 야심한 시간에 얹어놓은 채 빈 시간만 흘려보낸다. '조금만 더 읽고 자야지' 생각한다. 시계의 초침소리가 날카롭게 재촉한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가며 읽어야 할 책이 있다. <생각이 나서>도 그런 책이다. 느낌만으로 그냥 지나치기에는 뭔가 아쉬운.

 

"우리 이렇게 나란히 목매달고 있다가, 사람이나 사랑이나 여하튼 그런 것에 매달려 있다가, 작은 진동에도 떨리며 부딪치다가, 그때마다 불안하고 투명한 소리를 내다가, 그 소리 참 아름답다 추억하며 그리워하다가, 다시 한 번 가까이 가려 하다가, 너무 가까이 가면 깨어질까 다칠까 두려워한다. 친구가 친구를 불러내고, 그 친구가 또 친구를 불러내고, 둘이 셋이 되고 셋이 넷이 되었던 어느 밤. 매달린 사랑 하나 가만히 내려 조심조심 향긋한 시간을 따른다. 유리처럼 투명한 마음을 주고받는다." (p.27)

 

왜 오래된 기억들은 밤에만 깨어나는지, 왜 사소한 기억들은 올망졸망 두서없는지, 왜 그리움 저편 기억들은 슬픈 것인지, 밤이 깊을수록 기억의 세계는 점점 투명해지는지... 작가의 기억 속으로 내 영혼이 한뼘쯤 다가간 시간. 152편의 짧은 이야기들이 내 영혼 속으로 한 모금 녹아들던 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전하고 싶었던 그 순간에 나는 이유도 없이 슬펐다.

 

"기다리는 답이 오기를 기다리다

나도 누군가에게 기다리는 답을 기다리게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자 오래전에 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대답 없음도 대답이다' 中에서)

 

마음결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가가 있다. 그런 글이 있다. 이슬 맺힌 나뭇가지를 살포시 흔들고 날아가는 작은 새의 움직임처럼 독자의 감성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그런. 황경신 작가는 그런 사람이다. 사랑의 언저리에서, 이별의 언저리에서, 동경과 희망의 언저리에서, 때론 죽음의 언저리에서 날이 밝을 때까지 한동안 바라보다 섬세한 언어로 일상을 기록하는 그런 작가이다.

 

"괜찮으냐고 묻지마.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물어보면 나는 괜찮다고밖에 대답할 수가 없잖아. 괜찮지 못하다는 말은 배운 적이 없으니. 힘내라고 하지 마. 이미 힘을 내고 있잖아. 그러고 있는데 또 그러라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울어버리고 싶은걸. 모든 게 잘될 거라고 말하지 마. 잘되지 않았으니 이렇게 된 거잖아. 잘되지 않았고 잘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신은 내 곁을 지켜주겠다고만 말해줘. 울고 싶으면 울라고 해줘. 슬퍼하고 속상해하고 아파하라고 해줘. 내가 위로를 구할 때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함께 있어줘. 그것으로 나는 감사해. 그 힘으로 나는 걸을 거야. 어쩌면 무엇인가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거야." (p.1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해발고도 500m 이상의 고지대에 단 한 번이라도 살아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햇살의 질감이 저지대의 그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언제였던가.  내가 저지대의 도시로 처음 나와 살게 되었을 때 척척 감겨오는 햇살의 감촉에 나는 저으기 놀랐었다.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살짝 부담을 느꼈는지도.  나는 왜 그 겨울의 헤살거리던 햇살을 부담스러워만 했던가.  모를 일이다. 익숙함은 언제나 변화에 저항하는 속성이 있다.  사춘기였고 호기심과 저항이 나의 이성을 반반씩 지배하던 시기였다.

 

고지대의 햇살은 공격적이다.  계절에 상관없이 그렇다.  뜨거운 여름이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수천 수만의 햇살이 가닥가닥 풀어져 빛의 화살처럼 내려 꽂힌다.  찰나지간에 모공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온 몸을 헤집어 놓고는 다른 방향으로 유유히 빠져 나갈 것만 같은 느낌.  그러나 저지대의 햇살은 뭉근하게 풀어진 수프처럼 올올이 흩어지는 법이 없다.  그저 저항하는 대상을 은근히 감싸다가 서서히 풀어질 뿐이다.  군불에 달구어진 황토방의 열기처럼 발원을 알 수 없는 열감이 한동안 머물다 흩어지곤 한다.

 

오가와 요코의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고 불현듯 들었던 생각이다.  수학을 소재로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풀어낼 수도 있구나 감탄했다.  이질적인 두 대상이 만나 하나로 융합되는 과정은 경이롭다.  내가 두 지역의 햇살을 한 몸으로 살아낸 것처럼.

 

"물질이나 자연현상, 또는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영원한 진실은 보이지 않는 법이야.  수학은 그 모습을 해명하고, 표현할 수 있어.  아무것도 그걸 방해할 수는 없지."  배가 고픈 것을 참아가면서 사무실 바닥을 닦고 루트를 걱정하고 있는 내게는 박사가 말하는 영원하고 옳은 진실이 필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실감이 필요했다.  넓이도 없이 장엄하게 어둠을 뚫고 한없이 뻗어나가는 한 줄기 진실한 직선.  그 직선이야말로 내게 잠시의 말을 떠올리면서 나는 어둠을 응시했다."    (p.164 ~ p.165)

 

소설의 내용은 최근에 읽었던 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 유>를 떠올리게 한다.  박사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해 기억이 80분을 넘지 못한다.  80분 이전의 기억은 금세 사라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박사를 미망인이 된 형수가 돌본다.  교통사고 이전에는 천재 수학자였던 박사는 이제 수학 저널에 실린 수학 문제나 풀며 하루하루를 소일하는 신세가 되었다.  형수는 집의 안채에서 박사는 별채에서 개별적인 노년을 견디고 있다.

 

최근 수년간 9명이나 되는 가정부를 갈아치운 박사에게 싱글맘인 쿄코가 10번째 가정부로 등장한다.  다음 날이면 가정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박사는 자신이 입은 양복 소매에 메모를 붙여 잃었던 기억을 되찾으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쿄코에게 10살 먹은 아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박사는 아이를 집에 홀로 두어서는 안 된다며 학교가 파한 후 자신의 집에 들르도록 당부한다.  박사는 아들이 모든 수를 포용할 수 있는 루트 기호와 닮았다고 '루트'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80분의 기억이 허락되는 한도에서 박사는 루트를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늘 외롭게만 지냈던 루트는 박사의 무한한 사랑 앞에서 할아버지의 따스한 정을 느낀다.  쿄코는 대인 기피증이 있는 박사를 이끌고 미장원을 방문하기도 하고, 교통사고 이전에 야구에 열광했던 박사를 위해 루트와 함께 야구장을 찾기도 한다.  야구장에 다녀온 후 고열에 시달리는 박사를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어 쿄코와 루트는 박사의 집에 머문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쿄코는 해고된다.

 

박사를 통하여 수식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의미를 배워나가던 쿄코와 루트는 박사를 몹시 그리워 한다.  교통사고 전에 박사는 형수를 사랑했었다.  그야말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형수는 자신의 남편이 죽고 미망인이 되었지만 기억과 젊음을 상실한 채 살아야 하는 박사를 차마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수학 잡지의 현상문제를 풀어 리포트 용지에 깨끗하게 옮겨 쓰고서 다시 한 번 훑어볼 때면 박사는 자신이 도출해낸 해답에 만족하면서 중얼거렸다.  "아아, 조용하군."  정답을 얻었을 때 박사가 느끼는 것은 환희나 해방이 아니라 조용함이었던 것이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장소에 정확하게 자리하여, 덜고 더할 여지 없이 오랜 옛날부터 거기에 한결같이 그렇게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있으리란 확신에 찬 상태.  박사는 그런 상태를 사랑했다."    (p.93)

 

쿄코는 결국 다시 복직된다.  수와 관련된 박사의 사상과 철학을 배우는 생활이 한동안 지속된다.  중학 중퇴의 학력이 전부인 쿄코도 초등학생인 루트도 박사의 설명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고독한 수인 소수를 사랑하는 박사를 통하여 수식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의미를 배운다.

 

"물질이나 자연현상, 또는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영원한 진실은 보이지 않는 법이야.  수학은 그 모습을 해명하고, 표현할 수 있어.  아무것도 그걸 방해할 수는 없지."  배가 고픈 것을 참아가면서 사무실 바닥을 닦고 루트를 걱정하고 있는 내게는 박사가 말하는 영원하고 옳은 진실이 필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실감이 필요했다.  넓이도 없이 장엄하게 어둠을 뚫고 한없이 뻗어나가는 한 줄기 진실한 직선.  그 직선이야말로 내게 잠시의 말을 떠올리면서 나는 어둠을 응시했다."    (p.164 ~ p.165)

 

여름 한낮의 저층에 깔린 해묵은 기억을 가을 햇살처럼 선명하게 되살리는 일은 쉽지 않다.  박사처럼 기억 상실증에 걸리지 않은 사람도 그렇다.  우리는 어쩌면 저지대의 햇살처럼 사랑의 열감만을 간직한 채 평생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세세한 기억이 아니라 그때의 느낌만으로 말이다.  박사도 루트도 도타워졌던 사랑의 열감이 삶을 지탱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들아

 

네가 태어난 이후 내게 1월은 예전보다 훨씬 선명한 색채로 다가왔단다.

마치 내 삶이 네가 태어나기 전과 태어난 후로 양분되듯이.

그럼에도 그 빛나는 1월에 나는 네게 단 한 통의 편지도 쓰지 못한 채 한 달을 무의미하게 흘려 보냈단다.  지나고 보면 언제나 후회와 아쉬움만 남곤 하지.

 

아들아

 

지난  며칠은 기록적인 한파가 이어졌었지.

내가 유일하게 돌보는 화분(군자란)이 그 한파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고 말았지 뭐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단다.  전화로 소식을 들었던 너도 진심으로 아쉬워했고.  잘 돌보지 못한 내 불찰이 컸단다.  지난 달인가? 네가 돌보는 금붕어에게 먹이를 너무 많이 주는 바람에 세 마리 중 두 마리가 죽었던 것이.   너는 슬퍼서 엉엉 소리내어 울기까지 했다는 소식을 네 엄마로부터 들었던 것이 오래지 않은데, 공교롭게도 나는 한파가 온다는 일기예보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물을 주지 않았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넘치도록 물을 주고 말았구나.

 

아들아

 

생각해 보렴.

너나 나나 모두 선의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그 결과는 최악이었구나.  이것이 비단 우리가 기르고 돌보는 동식물에게만 일어나는 일이겠니?  그렇지 않단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이보다 더한 일들도 비일비재 하단다.  내가 비록 선의로 행한 일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결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지.  나는 선의였으니 내 책임은 아니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만 그렇다고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란다.

 

아들아

       

굶주림이 심할수록 굶주림을 참고 더 천천히 먹어야 탈이 없듯, 식물도 추위가 닥칠 때는 목마름을 참아야 한단다.  그렇게 대비하지 않으면 막상 추위가 몰려 올 때 곧 얼어 죽고 말 거야.  사람도 이와 같단다.  위기가 닥칠 것을 대비하여 자신의 욕심을 반쯤 내려놓지 않으면 어려움을 견딜 수 없는 법이란다.  갈증을 견디지 못한 식물이 추위에 얼어 죽듯, 욕심이 많은 사람은 위기에 직면해서 좌절과 분노를 견디지 못한 채 쉽게 파멸하고 말 거야.

 

아들아

 

오늘은 입춘.  나는 어느 시인의 시구를 내 가엾은 화초에게 들려주련다.

"해도 입춘이 넘으면 양지바른 둔덕에는 머리칼풀의 속움이 트는 것이다.
그러기에 입춘만 들면 한겨울내 친했던 창애와 썰매와 발구며 꿩 노루 토끼에 멧돼지며 매 멧새
출출이들과 떠나는 것이 섭섭해서 소년의 마음은 흐리었던 것이다.
높고 무섭고 쓸쓸하고 슬픈 겨울이나 그래도 가깝고 정답고 흥성흥성해서 좋은 겨울이 그만
입춘이 와서 가버리는 것이라고 소년은 슬펐던 것이다
."(立春/백석)

 

아들아

 

너와 나는 이 겨울 작은 미물을 통하여 소중한 가르침을 얻었구나.

욕심에 이끌리어 산다면 죽음이 가깝다는 것을.

그리고 생명을 돌보는 일에는 항상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들아
 

네게 편지를 쓰는 것도 참 오랜만이구나.
블로그에는 딱 6개월이 지난, 소인도 찍히지 않은 편지가 미래의 편지 주인을 기다리며 손을 내밀고 있다.  어느새 가을이란다.  망각의 속도가 미래의 두려움보다 늘 한발 앞서는 네게, 언제나 현재는 달콤한 배추 속고갱이 같은 네게 이렇게 한 통의 편지를 쓰는 일이 내게는 명상처럼 고요한 평화요, 나무 울창한 숲그늘이었단다.
 

아들아
 

어제는 네가 태어나 처음으로 안경을 맞춘 날이었지.  네 시력이 더 나빠지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나와 네 엄마의 마음과는 달리 너는 잘 보여서 너무 좋다고 하더구나.  그래도 땀이 나면 불편하겠지 하는 네 말은 들뜬 목소리 탓이었는지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의 염려라고는 믿기지 않았단다.  한결 마음이 놓이더구나.  초등학교 2학년인 네가 벌써부터 안경을 끼고 생활한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어쩌겠니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레고와 독서를 부모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그마저 금할 수 있는 절대권력이 주어진 것은 아니지 않겠니?
 

아들아
 

오늘은 너와 '삶'에 대해 말하고 싶구나.  무거운 주제라고?  그렇구나.  하지만 가을이잖니.  이 편지를 이해할 수 있으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성급한 나는 이렇게 미래의 너에게 한 통의 편지를 쓰게 된단다.  어쩌면 삶은 한 편의 추리소설을 읽는 것과 같단다.  네가 요즘 푹 빠져 있는 <스파이 가이드북>을 읽는 것이라면 이해가 빠를까?  삶의 곳곳에 숨어있는 힌트를 찾아,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을 때 너만을 위해 준비한 하느님의 질문에 답하면 된단다.
 

아들아
 

네가 잘 알지 못하는 미래를 염려할 필요는 없단다.  지금처럼 너는 현실의 기쁨을 소중히 껴안고 문득 떠오르는 지난 일에서 질문의 힌트를 발견하면 된단다.  그 질문을 아직 받아본 적이 없는 나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란다.  정답에 대해 네게 살짝 귀띔을 하자면(이것은 어쩌면 천기누설로 벌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이렇단다.  너는 모든 문제에 "행복"이라는 단어를 꾹꾹 눌러 쓰면 정답이 될 듯 싶구나.
 

아들아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이, 유난히 비가 많았던 이 여름이 지난 며칠 사이에 저만치 물러가고 있구나.  파란 가을 하늘에 깔깔대는 네 웃음이 양털구름처럼 걸려있단다.  이 소중한 시간에 너를 그리며 편지를 쓰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 아니 할 수 없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