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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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가 바라다보이는 암스테르담의 멋진 식당에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앉아 있어요. 음, 연인이거나 방금 전 첫눈에 반한 사람이거나. 아무튼 당신 앞의 그 사람으로부터 '나는 아직 당신의 아름다움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당신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어쩌면 당신은 당신의 기분을 숨긴 채 도도한 척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노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커플이 당신과 당신의 연인이 아닌 말기 암을 앓고 있는 한 소녀와 골육종으로 한 쪽 다리를 잃은 소년의 대화라면, 운하 위로 미끄러지듯 석양이 흐르고 있다면...

 

존 그린의 소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는 드라마나 소설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비극적 스토리를 다룬, 말하자면 특별하지 않은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죽음을 앞둔 십대의 시각에서, 고통 속에서 남들보다 먼저 수동적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삶에서 그들이 발견해야 하는 사랑과 죽음의 의미를 소설로 옮기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이 소설이 다른 소설과 구분되는 점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제가 '노력'이라고 썼던 이유를 굳이 설명하자면 소아암을 앓는 대부분의 십대들이 죽음이나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기도 전에 세상과 결별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그런 무의미한 죽음을 맞는 꼴은 원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이 깨달았거나 희미하게 눈치채고 있는 삶의 비의를 그들을 통하여 내보이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난 지상에서 잊히는 게 두려워. 하지만 내 말은, 우리 부모님처럼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난 사람이 영혼을 갖고 있다고 믿고, 영혼 간의 대화를 믿어. 망각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거야. 내가 목숨을 잃는 대가로 아무것도 내놓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게 두려운 거지. 위대한 선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면, 최소한 위대한 선을 위해서 죽어야 하지 않겠어? 난 내 삶도 죽음도 그렇게 의미있지 않을까 봐 두려워." (p.178)

 

소설에 등장하는 헤이즐은 열세 살에 4기 갑상선 암 판정을 받았고 암세포가 폐로 전이된 상태입니다.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는 헤이즐이 걱정이 되었던 헤이즐의 엄마는 그녀에게 서포트 그룹 집회에 참석할 것을 권합니다. 그 모임은 암을 앓고 있는 십대들의 모임이었죠. 그곳에서 헤이즐은 맘에 드는 남자 아이를 만납니다. 그 소년의 이름은 어거스터스 워터스. 그는 비디오 게임을 좋아하고, 헥틱 글로우 밴드의 노래를 즐겨 듣는 열일곱 살의 소년으로서 여느 십대의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요. 농구 선수였던 그는 골육종을 앓는 바람에 다리 하나를 잃었습니다. 어거스터스는 헤이즐이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여주인공 나탈리 포트만을 닮았다며 자신의 집에서 영화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헤이즐에게 비디오 게임을 소설화한 <새벽의 대가>를 빌려주고 자신도 헤이즐이 좋아하는 <장엄한 고뇌>를 빌려 읽게 됩니다.

 

"제 이름은 헤이즐이에요. 어거스터스 워터스는 제 인생의 운명적이고 위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저희의 사랑은 웅장한 러브 스토리였고 아마 그 이야기를 한 마디라도 한다면 여기가 온통 눈물바다가 될 거예요. 거스도 알고 있어요. 알고 있죠. 전 저희들의 사랑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진짜 사랑 이야기가 그렇듯 이건 저희와 함께 사라질 거고, 그래야 마땅하니까요. 전 그가 절 위해 추모사를 읽어 주길 바랐어요. 왜냐하면 달리 그래 주길 바라는 사람이 없으니까......" (p.272)

 

위에 인용한 문장은 헤이즐이 어거스터스의 장례식에서 읊었던 추모사입니다. 그들의 운명적이고 위대한 사랑은 아마도 은둔 작가 피터 반 호텐이 쓴 <장엄한 고뇌>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미완성으로 끝난 <장엄한 고뇌>를 헤이즐이 특히 좋아했던 이유는 작가 피터 반 호텐이 죽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죠. 헤이즐은 <장엄한 고뇌>의 뒷부분이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그런 그녀를 위해 거스(어거스터스의 애칭)는 작가가 살고 있는 암스테르담으로의 여행을 성사시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난 피터 반 호텐은 술에 의지하여 사는 배뷸뚝이 아저씨에 불과했고, 그로부터 소설의 뒷이야기는 결코 들을 수 없었지요.

 

"물론 나도 피터 반 호텐이 제정신이기를 바라고는 있지만, 세상은 소원을 들어 주는 공장이 아니다. 중요한 건 문이 열렸다는 거고 내가『장엄한 고뇌 』 뒷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문지방을 넘어섰다는 거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p.193)

 

암스테르담으로 떠나기 전 사실 거스는 골육종이 재발한 상태였습니다. 같이 동행했던 헤이즐의 엄마와 집에 남아 있던 헤이즐의 아빠는 이미 거스의 부모님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그 사실을 헤이즐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스는 자신의 병을 숨긴 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헤이즐과의 특별한 여행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사람들은 암환자들의 용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도 그런 용기를 부정하지 않는다. 나 역시 몇 년이나 바늘로 찔리고 칼로 찢기고 약물을 투여당하면서 어떻게든 버텨왔으니까.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그런 순간마다 나는 매우, 대단히 기쁘게 죽어 버리고 싶었다." (p.114)

 

소설의 결말은 누구나 에측할 수 있는 시시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거스는 죽고 <장엄한 고뇌>의 뒷부분을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헤이즐을 위해 거스는 자신이 상상한 글을 작가 피터 반 호텐에게 보냅니다. 헤이즐의 추도문으로 말이죠. 죽어가면서도 거스는 홀로 남겨지게 될 헤이즐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소 우울하고 칙칙할 듯한 소아암 환자들의 사랑 이야기를 제가 조금 특별하게 읽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작가는 이 소설 내내 십대들의 언어와 행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죽음에서 풍기는 우울한 분위기를 걷어내려고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군데군데 작가의 생각이 드러나긴 하지만 말입니다. 가령 헤이즐의 아빠가 헤이즐에게 들려 준 다음과 같은 문장이 그런 예이겠지요.

 

"대학 시절 수학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단다. 작고 나이 든 여교수님이 가르치시는 굉장히 훌륭한 수학 수업이었지. 선생님께서는 푸리에 변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다가 말하던 중에 갑자기 멈추시고는 그러셨지. '가끔 우주는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곤 하는 것 같아.' 그게 내가 믿는 거란다. 난 우주가 자신을 알아채 주길 바란다고 믿는다. 우주가 의식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지 않고, 지성에 대해 어느 정도 보상을 해 준다고 생각한단다. 우주는 그 우아함을 사람들이 관찰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지. 그리고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내가 도대체 뭐라고 우주가, 최소한 내가 본 우주가 일시적인 거라고 말하겠니?" (p.236)

 

남들은 평생을 두고(대략 칠,팔십 년은 되겠지만) 천천히 배워가는 삶의 의미를 소아암 환자들은 불과 몇 년 만에 압축해서 깨달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마음이겠지요. 어쩌면 초등학생에게 미적분을 이해시키려 노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두 종류의 어른들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피터 반 호텐처럼 뭔가 상처를 줄 만한 존재를 찾아 세상을 헤집고 다니는 비참한 생명체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처럼 좀비처럼 세상을 돌아다니며 계속 걷기 위한 모든 일을 의무적으로 하는 어른들도 있다. 둘 중 어떤 미래도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이미 세상의 모든 순수하고 좋은 것들을 다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설령 죽음이 앞을 가로막지 않는다 해도 어거스터스와 내가 나눈 것 같은 종류의 사랑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p.289)

 

가을비가 소리도 없이 내리고 있군요. 괜스레 쓸쓸해집니다. 누군가의 죽음이, 그 사람으로부터 받았던 사랑으로 인해 다른 누군가의 삶에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치유되지 않는 깊은 상처로 남아 살아 있는 한 사람의 삶마저 파괴한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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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도시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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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소설과 다듬고 매만져 미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매끈해진 소설 중 어느 쪽이 더 현실감있게 느껴지나요?  나는 어떤 작품을 읽든, 그것이 소설이든, 시이든, 수필이든 '현실감'이라는 단어를 늘 생각하곤 합니다.  문학이 현실의 반영이라고 할 때. 우리는 종종 현실의 모습을 곧이곧대로 그린 작품이 더 현실감있지 않을까 착각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착각이죠.  실상 현실을 조금만 섞고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다듬어진 작품에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썽둥이처럼 닮았다고 느끼게 됩니다.

 

부끄러운 현실, 더럽고 추잡한 인간 군상, 그날이 그날 같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누군가의 작품 속에서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까닭이지요.  어쩌면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욕구가 투영된 글이라고 하겠습니다.  적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소설이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우리는 이따금 우리가 사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그닥 아름답지 못한 소설을 만나게 됩니다.  현실에서도 늘 보고 듣는 모습을 소설 속에서조차 또 마주한다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닐 것입니다.  지겨운 생각마저 들겠지요.  그런 게 내가 사는 현실이 아니다 부정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약간의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즐겨 찾는 작품이 있습니다.  오쿠다 히데오나 리 차일드, 때로는 빌 브라이슨의 작품이 그것입니다.  감 잡으셨겠지만 오쿠다 히데오나 빌 브라이슨은 자신의 작품 속에 위트와 유머를 적절히 사용하는 작가이고 리 차일드는 한 편의 액션 영화를 보는 듯 박진감있고 스릴 넘치는 스토리 전개로 유명한 작가죠.  그들의 작품을 읽으면 웃을 일 없는 현실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느낌이 들곤 합니다.  일종의 기분전환용이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이 이들 작가의 책에서 읽는 재미와 함께 생각할 거리도 제공받기 때문입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꿈의 도시>는 작가 본인의 성향과는 배치되는 그런 작품입니다.  위트와 유머를 걷어낸, 간결한 스토리에 문학적 수사를 배제한, 오직 작중 인물들을 통하여 현실의 민낯을 보여주고자 시도하는, 다소 엉뚱하고도 지루한, 그러면서도 600쪽이 넘는 긴 이야기를 담은 소설입니다.  이런 종류의 소설을 읽는다는 건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나라고 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만 읽을까 몇 번이나 고민했습니다.  읽은 게 아까워서 그만둘 수 없었다는 게 솔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3개 읍이 합병한 인구 12만의 지방 신도시 ‘유메노’시 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통합시라는 게 여간 문제가 많은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통합시라며 거창하게 출발했던 창원시도 얼마 전 회의석상에서 시장이 계란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까?  통합을 통하여 지역의 이익을 획득하려는 얄팍한 잇속을 버리고  통합을 거부한 채 자신들만의 생활리듬을 유지하며 조용히 살았더라면 그런 불상사는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소설의 배경이 되는 '유메노'시는 시의 탄생과 함께 많은 변화를 겪게 됩니다.  외부 인구의 유입과 상권의 변화, 그에 따른 범죄의 증가와 빈부 격차 등 긍정적 변화보다는 부정적 변화가 더 많아 보입니다.  그런 변화 속에서 나이, 직업, 주변 환경, 가치관 등이 전혀 다른 다섯 주인공의 생존을 위한 고군분투가 펼쳐집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을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시청 생활보호과에서 생활보조비 수급 대상자를 상대로 일하는 공무원 아이하라 도모노리는 아내의 외도로 이혼을 한 후 현청으로 옮겨갈 날만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적당히 보내는 인물입니다.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 어떻게든 유메노를 떠나고 싶은 여고 2학년생 구보 후미에는 어느 날 갑자기 게임에 빠진 은둔형 외톨이에게 납치됩니다.  폭주족 출신으로, 노인들만 사는 집을 골라 누전차단기를 교체해주고 엄청난 돈을 받아 사기를 치는 세일즈맨 가토 유야는 선배가 벌인 살인 사건에 본의 아니게 깊숙이 개입하게 되고, 소매치기를 잡아내는 보안 요원이자 이상한 종교에 빠져 있는 중년의 이혼녀 호리베 다에코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큰 무대에 진출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는 유메노 시의원 야마모토 준이치는 그의 조력자로 친분이 있었던 야쿠자 조직에 의해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됩니다.

 

사실 이 소설에서 전체적인 스토리는 무의미한 듯 보입니다.  소설의 끝부분에 발생하는 고통사고에 대부분의 인물들이 함께 등장하는 것도 조금 황당해 보이구요.  작가는 소설의 구성이나 문학적 완성도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듯합니다.  작가는 오직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불균형적인 경제 발전으로 인해 쇠락해가는 지방 도시의 문제점은 물론, 가정 폭력, 은둔형 외톨이, 사이비 신흥 종교, 정치권의 세습, 사기 세일즈,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 유부녀의 원조 교제 등 현대의 부조리한 사회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있을 뿐입니다.  후미에를 납치했던 노부히코는 학창시절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여 은둔형 외톨이가 되었고, 게임 속의 가상현실을 사는 인물입니다.  자신이 당했던 폭력을 그의 부모에게 행사하면서 말입니다.  그가 한 말은 가슴이 아픕니다.

 

"학교라는 데는 공부 잘하는 놈 아니면 싸움 잘하는 깡패 같은 놈의 전용 놀이터야.  그 밖의 학생들에게는 교도소하고 전혀 다를 게 없어.  날마다 학교에 갇혀서 듣기도 싫은 수업을 듣는 게 무슨 얼어죽을 의무교육이야?  난 이 학교 진짜 죽도록 싫었어.  수학여행 때는 어땠는 줄 알아?  나를 깡패새끼들하고 한 팀에 몰아넣었지.  여행하는 사흘 내내 짐꾼 노릇만 했어.  애초에 수학여행 같은 거 가고 싶지도 않았어.  일주일 전부터 배탈이 났었다고.  왜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느냔 말이야."    (p.590)

 

기분전환 삼아 자신있게 선택했던 책들도 간혹 원래의 목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책으로 귀결될 때가 있습니다.  오쿠다 히데의 책이라면 무조건 읽는 재미를 선사할 것이라고 내가 굳게 믿었다가 낭패를 본 것처럼 말입니다.  뭐, 그럴 때도 있는 거죠.  현실에서는 그보다 더한 낭패도 경험하면서 살게 마련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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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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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르는 기준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가령 베스트셀러라거나, 추천도서라거나, 제목이 맘에 들었다거나, 한 작가를 유독 좋아한다거나, 누군가의 리뷰를 읽고 갑자기 그 책이 읽고 싶어졌다거나 뭐 그런 것이겠지요.  나는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책을 선택하는지라 내가 과연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기는 한건가 가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기준이나 원칙을 워낙 싫어해야지요.  나의 그런 성격이 독서에도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럽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다고 매번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따금 나는 남들이 보면 까탈스런 성격이겠거니 오해할 정도로 책 선택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것이죠.  내가 생각해도 웃기는 일입니다.  나는 저자가 아닌 역자(譯者)가 누구냐에 따라 책을 고르기도 하고 미련없이 내던지기도 합니다.  참으로 한심지요?  그렇다고 내가 알고 있는 역자가 많은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윤기 작가와 김화영 작가가 고작입니다.  프랑스 문학은 김화영 작가가 번역한 책이라면 무조건 고르고, 영미권 문학은 이윤기 작가의 번역서를 고르곤 했습니다.

 

일종의 강박증과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번역가라면 적어도 작품을 보는 안목과 한국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현지 언어에 능통하다고 하여 그 사람이 반드시 좋은 번역서를 내놓는다고 믿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요.  그렇게 읽게 된 책이 파트릭 모디아노가 쓴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였습니다.  번역은 물론 김화영 작가가 했습니다.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말할 것도 없이 몇 년 뒤에 이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으리라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역자의 이름에 김.화.영. 세 글자만 눈에 띄었을 뿐이니까요. 나는 모디아노가 노벨상을 받은 지금에 이르러서야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에 이른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합니다만 작품의 첫 문장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p.7)

 

멋진 문장이지요?  프랑스 소설이 대개 그렇듯 열린 결말과 스토리 전개가 상당히 복잡하여 한 권을 읽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약간의 지루함을 견뎌야 하는 일이지만 저는 이 아름다운 문장에 매료되어 지루한 줄 모르고 읽었던 것 같습니다.  모디아노는 소설의 곳곳에 멋진 문장을 배치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소설 속 이야기와 더불어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문구를 선물하고 있는 셈입니다.  프랑스어라고는 철자만 겨우 아는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물론 그 공이 순전히 좋은 번역 덕분이었지만 말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퇴역 탐정입니다.  그의 곁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태어나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약간의 힌트라도 줄 만한 어떤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주언진 유일한 실마리는 한 장의 귀 떨어진 사진과 부고(訃告)뿐이었습니다.  그것을 단서로 바의 피아니스트, 정원사, 사진사 등 자신과 관련된 기억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만나면서 점점 자신의 과거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자신이 그동안 잃어버린 채 지냈던 시간과 대면하게 되는 셈이지요.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무(無)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美)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한다."    (p.71)

 

2차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태어나 모든 과거를 상실한 세대로 자란 모디아노는 이 책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어두운 기억의 거리를 헤매는 한 남자의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정을 밀도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서, 새로 보태기도 하고 빠뜨리기도 하면서 자신을 구축한다.  우리의 삶이라는 건 읽은 지 오래된 소설처럼 기억의 총체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던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내가 나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살아온 기억의 총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겠지요.

 

"과연 이것은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속에 미끄러져 들어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    (p.241)

 

작중화자는 묻고 있습니다.  기억을 상실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진배없다고 믿었던 게 아닐까요.  나이만 들었지 그동안의 기억, 그가 살아온 삶의 축적을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면 그 얼마나 참담하고 막막할지 공감하게 됩니다. 

 

"오히려 나는 어떤 거리감을, 풍경에서 오는 어떤 정밀한 슬픔을 느꼈다.  그런데 그 풍경 속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들 몸짓과 우리들 생명의 메아리가, 우리들 주위의 성당 지붕 위에, 스케이트장과 묘지 위에, 골짜기를 뚫고 뻗은 긋고 있는 더 어두운 윤곽 위에 가벼운 송이로 떨어지는 저 솜 같은 눈에 의해 질식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p.228~p.229)

 

과거에 내가 살았고, 여전히 존재하는 어떤 장소이건만 기억 속에서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걷고 있는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과거를 하나하나 더듬어 가는 작중화자의 모습에서 진한 슬픔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기억하고 있는 타자를 찾는 노력, 언젠가 우리도 그 길 위에 서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내 삶의 기억들이 하나둘 지워지고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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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7 08: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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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8 14: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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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하와이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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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나는 일본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와 에쿠니 가오리를 늘 헷갈리곤 한다.  애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름이 비슷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실 내가 아는 일본 여류 작가라야 손으로 꼽을 정도인지라 굳이 헷갈릴 일도 아닌데 두 사람만큼은 이 사람이 저 사람 같고 저 사람이 이사람 같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다고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묘하게도 그들은 태어난 해가 1964년으로 같다.  굳이 공통점을 만들자면 말이다.  물론 에쿠니 가오리가 약 4개월 언니이기는 하지만.

 

요시모토 바나나의 <꿈꾸는 하와이>를 읽으며 잠시 딴생각을 했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열혈 팬은 아니지만 얼마 전에 <도토리 자매>에서 읽었던 한국에 대한 묘사는 웬만한 한국 작가의 그것보다 더 세밀하고 생생했다.  아무튼 나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직설적이면서도 통통 튀는 문체가 맘에 들었다.  한국에 대한 그녀의 애정도 느껴졌고.  실제로 그녀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그녀의 공식 트위터를 통해 "한국 독자 여러분께.  안타깝고 애절한 이번 사고 소식에 제 마음이 아픕니다.  실종자 가족분들 중에 제 독자분도 계신다고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책을 통해서 또 개인적으로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꿈꾸는 하와이>는 작가가 하와이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이국땅에서 보낸 달달한 여행담을 펼쳐 보이는 책이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솔직 담백한 글이 함께 실은 사진과 잘 어우러지는 느낌이다.  와이키키, 사우스포인트, 카이마나힐라 등 하와이 명소에서 받은 그녀의 느낌과 이국땅에서의 신기한 체험들, 그리고 하와이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과 친구와의 우정.  훌라를 배우면서 실력이 늘지 않는 자신이 조금 약오르기도 했을 텐데 그녀의 생각은 조금 특별했다.

 

"역시 이 세상에 편한 것은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인생은 멋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톱인 장소에서는(그게 일이든 가족이든 친구이든 연인이든 남편이든 아이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다 똑같이 힘은 들어도 보기에는 근사하니까.  똑같이 꾹꾹 참고,  할 말을 삼키고, 내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하면서, 그런 매일을 쌓아 간다."    (p.100~p.101)

 

작가의 초긍정적인 마음과 아이처럼 생생한 느낌은 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에 그대로 전달되는 듯하다.  그러면서 나는 어느새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낀다.  이런 느낌은 뭘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 한켠이 가볍게 데워지는 느낌.

 

"수많은 곳을 찾아다니고, 앞으로만 나아가고, 이게 끝나면 다음은 이거, 네, 맞아요.  그렇게 아무 미련 없이 말해 버려야지, 안 그러면 자기 인생을 실현할 수 없다고요.  그런 목소리를 싹 쓸어버리고 우리를 지금 이 시간에 머무르게 한다.  그것이 하와이의 바람, 영원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한없이 이어지는 해변, 한없이 밀려오는 파도.  나와는 인연이 없으니까,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언젠가 신혼여행으로 가지 뭐, 평생 한 번 정도의 추억으로 만들고 싶으니까......  그렇게 말하지 말고, 만약 가고 싶다면 비행기 티켓을 사서 다음 날 아침에는 그 섬에 있어 보자.  정작 해 보면 의외로 간단한 일이다."    (p.160)

 

언젠가 나도 하와이 해변에 서서 요시모토 바나나를 생각하며 가볍게 미소짓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꿈꾸는 하와이>에 나오는 한 구절을 생각하면서.  정말 모를 일이다.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서든 작가는 우리를 꿈꾸게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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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장맛비처럼 내리던 비가 저만치 물러가고 맑은 하늘이 드러났다. 비가 지나간 후의 대기는 얼마나 투명한가! 나는 허공을 향해 종주먹을 들이대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조용히 참는다. 절제된 욕망은 실상 자신도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제 영역을 넓혀갈 뿐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 자가증식하는 세포처럼. 그것은 마치 파괴의 순간만을 기다리며 조용히 에너지를 응축하는 지진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알 수 없으리만치 조금씩조금씩, 그러다 어는 순간 '꽝' 하고 폭발하여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처럼.

 

오후가 되자 하늘은 다시 어두워졌다. 바람이 불고 힘없는 낙엽이 소리도 없이 흩날렸다.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는다. 그의 작품은 리얼리즘을 철저히 배제한 한 권의 판타지 소설일 뿐이다. 나는 이 작품이 오직 그의 머릿속에서만 창작되었다고 믿는다. 누군가의 삶으로부터 축출된 그 어떤 것도 섞이지 않은. 그의 내면에 꾹꾹 잠재되었던 욕망이 어는 순간 틈새를 비집고 나와 한 편의 소설이 되기까지 그는 무척이나 오래 견디었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배설행위이다.

 

잠재된 욕망을 누군가에게 쏟아냄으로써 작가는 쾌감을 느낀다. 절정의 쾌감. 나는 오르가슴으로 치닫는 작가를 상상한다. 작가는 결국 죽음을 생각한다. 명멸하는 욕망의 찌꺼기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삶이 죽음의 이면인지, 죽음이 삶의 이면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얼굴이 비칠 듯 반짝이는 승강기의 전면과 어둠 속에서 비밀스럽게 존재하는 승강기의 뒷면처럼 삶과 죽음은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작가는 어쩌면 죽음의 뒷면이 삶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둡고, 습하고, 더럽고, 어느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은 승강기의 뒷면처럼.

 

"퍼포먼스는 달라요. 저는 직접 만나죠.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동자 속에서 죽음과 애욕을 보죠. 제가 그날 그들의 눈 속에서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제 작업은 즉석에서 바뀌곤 하죠. 예술의 목적이 결국 아름다움을, 그것도 살아 있는 아름다움을 대면하고자 하는 욕구라면, 퍼포먼스가 아닌 다른 모든 예술은 가짜이고 타협이고 부질없는 불멸에의 욕망, 그 찌꺼기들이지 않아요? 퍼포먼스에 대한 모든 공격은 참된 아름다움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거예요. 인간들은 불멸에 대한 강박 때문에 참된 아름다움을 박제하죠. 그들은 죽은 예술에 길들여진 노예들이에요." (p.113)

 

저녁이 되자 다시 잠깐 맑은 하늘이 드러나는가 싶더니 이내 오렌지빛 석양과 함께 사라졌다. 루이 다비드의 그림 <마라의 죽음>으로 시작된 소설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유디트>에 이를 때까지 아름다우면서도 몽환적이었다. 그러나 3부 <에비앙>에서부터 작가의 의식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다. 현실을 의식하는 것일 수도 있고, 타인(또는 독자)을 의식한 것일 수도 있다. 마치 수음을 하던 소년이 그 장면을 제 어미에게 들킨 것처럼. 작가가 꿈에서 깨어났을 때, 또는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했을 때의 소설은 이미 아름다움과는 멀어지게 된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처음은 섹스와 죽음을 도발적이면서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작가의 의식이 꿈의 저변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어둠이 깔린 하늘은 목화솜처럼 넓게 펼쳐진 구름으로 뒤덮였다. 오늘 밤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부터 별은 현실 속에서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언젠가 읽었던 허구 속에서 존재했던 것처럼. 소설은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소설 속에서 죽음을 택한 세연과 그녀와 관계를 가졌던 C와 그의 동생 K, 행위 예술가 미미,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나. 나는 고민 상담을 하며 의뢰인의 자살을 도와주는 죽음 안내인이며, 동시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작가이다. 이를테면 나는 들라크루아의 작품<사르다나팔의 죽음>에 등장하는 사르다나팔인 셈이다. 팔베개를 한 채 죽음의 향연을 바라보는 바빌로니아의 왕 사르다나팔. 나는 유디트(세연)와 미미의 이야기를 글로 옮겼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 모두 일생에 한 번쯤은 유디트와 미미처럼 마로니에 공원이나 한적한 길 모퉁이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어볼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 오라. 그럴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 일이다.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그대들 갈 길을 가라. 나는 너무 많은 의뢰인을 원하지는 않는다." (p.140)

 

밤이 깊었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삶의 이면을, 죽음과 같은 또는 꿈과 같은 아름다움과 대면하는 일이다. 비록 그것이 잉여적 삶이라 할지라도 그럴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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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이 소설에서 기억할 만한 문장들을 기록해 둔다. 단지 참고용으로.

 "건조하고 냉정할 것, 이것은 예술의 지상 덕목이다." (p.8)

"압축의 미학을 모르는 자들은 삶의 비의를 결코 알지 못하고 죽는다." (p.10)

"이 시대에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단 두 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다. 창작을 하거나 아니면 살인을 하는 길." (p.16)

"가끔 허구는 실제 사건보다 더 쉽게 이해된다. 실제 사건들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다 보면 구차해질 때가 많다. 그때그때 대화에 필요한 예화들을 만들어 쓰는 게 편리하다는 것을 아주 어릴 적에 배웠다. 나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을 즐긴다. 어차피 허구로 가득한 세상이다."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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