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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 마스다 미리 산문집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평점 :
며칠 전 이혼한 친구의 재혼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이혼한 전 부인에 비하면 미모나 교양이 형편없다는 둥 나은 게 있다면 젊다는 것뿐이라는 둥 당사자도 없는 자리에서 한참을 찧고 까불다가 다들 제풀에 지쳐 스러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재혼한 친구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요즘 재혼한 커플이 한두 쌍일까마는 그렇게 말했다가는 나 또한 이상한 놈으로 몰릴 분위기였다.
남자에게 있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수태능력을 끝없이 확인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젊어서는 지극히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도 나이가 들면 순간순간 확인해 봐야 안심이 되는 법이다. 그래서인지 웬만큼 나이가 든 남자에게는 미모나 능력보다는 상대방의 젊음, 즉 생명력이 먼저 눈에 띄는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나는 재혼한 그 친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속으로만.
한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나이 든다는 것은 '풍화된 자만심이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질료로 화(化)하는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했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자만심이 강했었다. 내세울 것 하나 없어도 자만심만은 굽히지 않았다. 그 절정은 아마도 대학시절이었겠지. 나이가 들면서 내가 의도하는 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되자 산처럼 솟았던 자만심은 하루가 다르게 깎여나갔었다. 그리고 나 이외의 타인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마스다 미리의 산문집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는 가볍고 유쾌한 책이지만 남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다. 사실 남자들은 나이가 들어도 잔뜩 무게를 잡고 뭔가 거창한 것을 얘기하게 마련이지 작가처럼 소소하고 아기자기한 일들로 시간을 보내거나 친구들을 만나 하루 종일 수다를 떨며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남자들의 삶이라는 게 문득 불쌍하게 보였다. 단순하고 경직된, 그러면서도 변화가 없고 늘 비슷한 모습의 삶. 그게 남자들의 삶이라고 말한다면 비약이 너무 심한 것일까?
"그중에는 젊은 여성들에게만 나눠주는 휴대용 티슈나 전단도 있다. 광고 대상이 그렇게 한정된 것이리라. 나눠주는 사람은 대부분 젊은 남성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인파 속에 서서 '이 사람, 줘야 할 사람, 저 사람 주지 않아도 될 사람'을 판단한다. 그들 앞을 지날 때, 나는 매번 시험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주지 않아도 될 사람'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불과 3,4년 전까지는 떠맡기듯이 해서 받았던 티슈였는데 지금은 거들떠봐주지도 않는다. 내 마흔두 살의 외모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p.52~p,53)
이따금 미소를 지으며 읽다가도 어느 순간 짠해지는 느낌이 든다. 동병상련의 마음이란 게 이런 걸까. 누구나 나이가 들고 그렇게 늙어가는 것이지만 깊이 생각할수록 우울한 느낌만 울컥울컥 솟는다. 사랑은 언제나 좋은 것이라고 믿다가도 어느 날 길거리에서 거침없이 뽀뽀를 하는 연인이라도 만날라치면 '저게 뭐하는 짓거리야. 버릇없는 것들.'하고 괜한 심술에 욕부터 나오는 걸 보면 나도 웬간히 나이를 먹었나 보다 느낀다.
"대화에 꼭 노후를 소재로 넣는 것은 웃어넘기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누구도 장래희망이 뭐냐고 묻지 않지만, 어른이 되어도 장래는 있다. 연금은 얼마 받을 수 있을까, 소비세도 오를 것 같은데. 병에 걸리면 어쩌지...... 이것저것 불안하다. 그렇지만 마지막 전철을 앞두고 가까운 역에서 헤어질 때는 다음달 열리는 불꽃놀이 대회 일정을 서로 확인하는 우리였다." (p.197~p.198)
언젠가 나는 공원 벤치에 옹기종기 앉아 무언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어르신들을 본 적이 있다. 대화 내용이 궁금하여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별로 신통치도 않은 옛날 이야기를 마치 엊그제 일어난 일처럼 말하고 그 얘기를 또 골똘히 듣고 있었다. 그분들이 서로 자주 만나는 사이라면 아마도 수도 없이 들었을지도 모를 그 얘기를 마치 처음 듣는 얘기처럼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말하거나 들을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나도 언젠가는 그분들처럼 먼 과거를 현재처럼 살게 되는 게 아닐까?
"자신이 하는 말을 상대가 묵묵히 들어주고 있다는 그 두려움, 민망함, 미안함, 고마움, 기쁨, 과분함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늙었다는 증거다." (p.181)
즐겁게 나이든다는 것(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은 작가처럼 나이를 잊고 사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따금씩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면 되는 게 아닐까. 피에르 상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읽으며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기에는 인생은 너무도 짧기 때문이다. 심각하지 않게, 즐거운 마음으로, 철없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하루하루즐 즐기며 사는 게 잘 사는 것이리라. 작가 마스다 미리처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