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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뱅이 언덕 - 권정생 산문집
권정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평점 :
책을 읽을 때마다 리뷰를 남기는 것은 아니지만 리뷰를 써야한다는 막연한 의무감이 드는 책이 있다. 그것도 책에서 느꼈던 감동이 일상에 희석되지 않도록 서둘러 써야겠다고 말이다. 그런 느낌은 책을 공짜로 제공받았으므로 정해진 기한내에 써야 하는 의무감과는 다른 것이다. 채 쓰기도 전에 책에서 느꼈던 진한 감동이 사그라들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이 스스로를 재촉하는지도 모른다.
내게 <빌뱅이 언덕>은 그런 책이었다.
권정생 선생의 산문집이다. <강아지똥>과 <몽실언니>의 작가라고 하면 '아, 그 분!'하고 무릎을 칠 사람들이 대다수일 듯싶다. 그만큼 선생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이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아이가 있는 집에서 선생의 책 한두 권쯤 갖고 있지 않은 집도 드물 것이다. 우리집에도 아들녀석이 어릴 적에 읽었던 선생의 작품이 족히 서너 권은 넘을 듯싶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선생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잘 나가는 동화작가려니 생각했었다. 그게 다였다.
빈약한 정보이지만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후에야 선생의 삶을 조금 알게 되었다.
선생의 삶을 몇 마디 단어로 집약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느꼈던 선생의 삶은 가난과 질병, 지구 환경에 대한 염려와 조국 통일의 염원, 그리고 유년기에 만난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물론 선생으로부터 동화를 떼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죽음도 그렇지만 가난이나 질병도 매한가지로 보편적 가난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닝 커피를 마시면서 가벼운 대홧거리로 나눌 수 있는 보편적 가난은 실존에서는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가볍게 치부할 수 있는 대화의 소재도 아니다. 오히려 개별적 가난은 질긴 목숨을 원망해야 하는 천형이자 오직 생명으로만 집중되는 삶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유년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던 나는 일본에서 가난한 청소부의 아들로 태어나 경북 안동 조탑리 빌뱅이 언덕 토담집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독한 가난과 질병을 안고 살았던 선생의 실존에 목이 메었다.
자신의 병이 동생의 혼인에 방해될까봐 행려병자로 떠돌던 한 때, 교회 문간방에서 종지기로 살던 시절,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소문과 추측으로만 헤아릴 수 있었던 둘째 형님에 대한 그리움 등 이 책의 1부에 실린 자전적 산문을 읽노라면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아려왔다.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 선생이 겪었던 두 번의 전쟁을 전후세대인 나는 알 길이 없다. 절대적 궁핍을 벗어나던 시기에 태어났으니 나의 가난은 선생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겠지만 책을 읽는 내내 저리도록 아팠다.
어릴 적 신었던 짝짝이 장화 때문에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은 일로 장화만 보면 사고 싶었다던, 이름값만으로도 춥고 배고프지 않아도 될 때도 스스로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던 선생에게 당신의 하느님은 언제나 깨끗하고 넓은 예배당에서 대접받는 하느님이 아닌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머무는 하느님이었다. 당산나무와 조화롭게 사는 그런 하느님이었다.
선생에게 통일은 이념과 이데올로기의 통합이 아니다. 비록 나라는 작고 가난해도 평화롭게 한마음이 되어 사이좋게 사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소망했다. 한마음으로 뭉쳐 살면서 보고 싶은 사람을 언제든 볼 수 있는 나라, 나라가 갈라졌기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수많은 겨레가 고통없이 살 수 있는 그런 조국을 꿈꾸었다. 자연이 아닌 인간에 의해 우리 겨레가 남북으로 갈라졌듯 문화생활이라는 도시적 삶은 자연을 병들게 하고 결국 인간의 생명마저 파괴한다고 선생은 말한다.
어린이의 시선으로 보면 지극히 단순하고 부드러워지는 삶이 등나무 덩굴처럼 억세고 복잡하게 변한 까닭은 분명 우리의 욕심이 사납게 자란 탓일 게다. 내가 바라는 삶은, 내가 희망하는 삶의 모습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나는 누군가의 생명을 취하여 내 삶을 윤택하게 하려 하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되짚어 본다. 선생이 가신 지 이제 5년, 내가 죽어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꽃은 피고 새가 지저귈 것이라고 어찌 믿을 수 있을까?
"우리의 무기는 괭이와 호미와 낫이지 장갑차나 미사일, 핵폭탄이 절대 아닙니다. 가난하고 어질고, 큰 것보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겼던 우리였습니다. 너무 순해서 어리석어 보일 때도 있지만 분명 자기 주인만은 알아볼 수 있는 우리였습니다. 김 목사님, 제가 거듭 부탁하고 싶은 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리석고 순하기만 하면서도 제 주인의 모습을 똑똑히 구분해서 따라갈 줄 아는 똥개는 될지라도 들쥐 같은 백성은 절대 되지 말라고 가르치자는 것입니다." (P.306)
세상의 가난을 모두 모아 인구수 대로 나눈다 한들 그것을 보편적 가난이라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 그런 가난이나 아픔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개별적 아픔과 실존을 살아갈 뿐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사랑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