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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껍질 속의 우주 까치글방 187
스티븐 호킹 지음, 김동광 옮김 / 까치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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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세기 말까지 인류 과학의 발전을 기술하고 인류가 몸담고 있는 우주 전체의 모습이 "표면이 울퉁불퉁한 호두껍질 속에 10차원 이상의 브레인이 담겨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설명한다. 호킹박사의 이론은 현재 ’초끈이론’의 부분을 구성하는 M-브레인을 말하는 것이다.


 
호킹박사는 처음 아인슈타인 박사의 ’상대성이론’이 전개되어온 역사를 되집어 본 후, 시간의 형태와 방향에 대한 최신 연구결과, 양자역학의 성과, 다중 우주역사론, 빅뱅과 인플레이션 우주론, 블랙홀과 미래예측, 벌레구멍과 타임머신, 브레인 우주론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흥미롭게 처음 접한 것은 우리가 현재까지 알고 있는 우주의 역사가 단 하나가 아니라는 이론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진실이라면, 우주의 역사와 전개과정 역시 ’확률’로서만 존재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우주는 가능한 모든 역사를 가지며, 각각의 역사는 저마다 고유한 확률을 가진다.’ 리차드 파인만 교수가 이에 대해 공식화했다는 것인데, 우울하게도 나는 파인만 교수의 저서를 몇 권 읽었음에도 그 부분을 파악하지 못했다. 


 
<시간의 역사 A History of Time>에서도 그랬지만, 호킹박사는 자신의 책이 지루하고 난해한 물리학과 우주론으로 인하여 독자들에게 외면당하지 않도록 책 속에 많은 그림과 도식, 그리고 재미있는 설명과 사례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인류의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미래상을 이야기할 때, 호킹박사는 세계적으로 널리 방영된 바 있는 [스타트렉 Startreck]을 미래의 모습으로 예시한다. 이 책 제6장 ’우리의 미래’ 편에서 인류의 뛰어난 과학의 발달에 따라 생물학적 생명체와 전자적 생명체는 점차 빠른 속도로 복잡성이 증가하면서 어떻게 변화해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제시한 후, 결론으로 ’스타트렉’과 같은 모습은 불가능함을 주장한다. 물론 호킹박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인류의 지적인 발달과 인공지능의 발달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인정하지만, 대신 인류와 비슷하거나 인류보다 진보한 종족이 존재할 가능성을 부정하고 인류가 독자적으로 미래를 개척해 나갈 것이기 때문에 [스타트렉]이 그리는 미래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날 것이라고 애기하는 것이다.
 
호킹박사는 이 책에서 제네바의 LHC(Large Hardron Collider 대형하드론입자충돌기)가 완성되면 M-브레인 이론이 실험으로 입증될 것이라고 예측하였으나 2011년 현재까지 M-브레인 이론을 입증할만한 관측 or 실험결과는 발표되지 않았다. 호킹박사처럼 천재라 인정받는 과학자들의 대통일이론에 대한 ’희망사항’도 여전히 충족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그만큼 인류의 지식과 지능은 장엄하고 무궁무진한 자연과 우주의 진리를 터득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어쩌면 인류는 100년 또는 1000년 후 어느 순간에 ’인류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호킹박사가 과학자들과 지식인들로부터, 그리고 일반인들로부터 천재로서, 뛰어난 과학자이자 저술가로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책 속에서 호킹박사의 인간적인 부족함, 과학자로서의 인류에 대한 책임감 부족을 느끼기도 했다. 그것은 그가 향후 1000년 동안 과학자들이 인간의 DNA를 완전히 재설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하면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유전자 조작의 금지’에 대해 제3자적 관점과 태도로 대하는 부분 때문이다. 그는 "전 세계가 전체주의 체제가 되지 않는 한, 지구 어디에선가는 누군가가 향상된 인간을 설계하게 될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실험과 조작의 비윤리성과 잠재적인 엄청난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과학자들이 그러한 시도와 실험에 대해 어떤 태도와 자세를 가져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한 호킹박사 자신의 입장이 없다는 것에 나는 매우 실망했다. 
 
[ 2011년 3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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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시장 흐름 읽는 법
김광수경제연구소 부동산경제팀 지음 / 더팩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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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거품은 이미 커버렸고 경제 시스템을 너무 왜곡시켜서 문제야."
"그건 그래...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부동산 가격을 떨어뜨려야지..."
"야! 그래도 우리집은 안돼!  지난 4년 동안 얼마나 올랐는데...ㅎ"
"형은 그 집을 가지고 무덤 속으로 가져갈거야? 애들이 결혼할 때가 되면 어떻게 할건데? 지금 집값으로 애들이 전세라도 들어갈 수 있겠어? 그동안 대출이자와 세금, 관리비는 어쩔거고?"
"그래도.................."
한 달 전쯤에 선배와 나눈 이야기다. 

자본주의가 신봉해왔고 사회주의도 부정하지 않았던 시장경제는 18세기에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의해 근대경제학의 핵심 개념으로 처음 사람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무려 250여년 간 개인, 집단, 국가가 자본의 욕망을 위해 질주해왔다. 세계 전체 221~224개 국 중에서 국제적인 시장경제에 편입되지 않은 나라는 북한을 비롯하여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자본주의는 시장경제라는 포장으로 온 지구 표면을 덮어버린 것이다.
 
경제학자들이 이론적으로 수립해 온 시장경제는 ’완전경쟁’과 ’정보의 투명성’을 전제로 모든 사람들과 경제 전체로 최고의 선, 즉 ’경제적 정의’를 실현시켜주는 가장 이상적이고 유일한 시스템으로 신봉한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라 함은 시장에 맡겨두면 시장경제 원리에 의해 최선의 결과가 도출된다는 것이다. 모든 제도가 다 그렇듯이 시장경제 역시 장점과 단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완전경쟁’과 ’정보의 투명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마라톤 출발점은 다르며, 정보 격차 역시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시장경제는 적절한 규칙과 질서를 제도화 시켜야 제대로 작동할 수 있게 되며,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문제가 가장 크게 대두된다.
 
[김광수경제연구소]는 한국의 부동산 시장이야말로 시장경제의 단점이 가장 두드러지며, ’사람’의 문제가 심각한 경우라고 주장한다. 특히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관료든 사람을 잘 뽑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사람’의 문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부동산 시장의 거품이 최악의 상태까지 도달했으며 거품이 붕괴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진단한다.
 
부동산 거품의 붕괴는 단지 부동산에 투기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거품이 해소되고 그 후유증이 완치될 때까지 한국 경제 전체와 자식세대의 장래를 망칠 것으로 내다본다. 그 기간은 최소 10년 이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본경제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부동산 문제는 부동산 그 자체 뿐 만 아니라 그 뒤에 엄청난 빚과 권력형 부정부패, 자원왜곡, 계층 간 갈등, 건설업계와 언론의 선동과 조작 등의 사기극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부동산은 한국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총체적 모순의 집합체인 것이다. 이런 희대의 사기극에 지난 10년 동안 한국 경제 전체와 대다수의 국민들이 놀아난 것이다.
 
이 책은 일반인들이 주택 구입이나 부동산 거래와 관련하여 잘못된 정보를 걸러내고 선동과 조작 정보로부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부동산 관련 지표 및 자료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설명한다.
 
부동산 주요 지표로는 왜곡된 집값 통계의 비밀을 알 수 있는 ’가격지수’와 집값의 향배를 결정하는 지표인 ’거래량’, 건설업계에게 퍼주는데 악용되는 ’주택보급율’의 허와 실, 실질적으로 부동산 정책에 반영해야 하는 ’자가소유율’과 투기와 실수요를 구별해주는 대표 지표 ’아파트 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 등이 있다.
 
필요한 부동산 지표는 온나라부동산포털, 국토해양통계누리, 국토해양부 아파트 실거래가, 국민은행, 한국은행 경제시스템, 한국주택금융공사, 통계청, 대한 건설협회, 금융결제원 주택청약서비스, 대법원 경매정보 등에서 찾을 수 있으며, 책 속에는 찾아낸 정보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한다.
 
그리고 연구소측은 부동산 시장과 관련된 경제원리와 정책에 대해서도 정리해 놓았다. 주택시장의 수요와 공급, 기준금리와 주택담보대출 금리, 부동산 버블의 일등공신인 신용과 가계부채, 인플레이션 및 디플레이션과 집값의 상관관계, 부동사 세금과 거래비용, 경기회복과 주택가격, 주택 수요층을 파악하기 위한 인구와 가구, 공공임대주택과 전세주택 정책, 건설업의 부양과 구조조정, 국토균형발전과 수도권 집중 등...
 
마지막으로 연구소는 한국 부동산 시장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2009년부터 시작된 전국의 아파트 거래량 감소는 2010년 들어 더 심해졌다. 거래량 침체가 현재와 같이 이어질 경우(이어질 수 밖에 없고...) MB 정부와 보수언론이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매매가 하락은 계속될 것이다. 정부는 부동산 대출과 PF 부실의 뇌관이 터질까 두려워 은행 금리를 붙잡았지만 물가 인상 속도와 인플레이션 우려 때문에 올해 들어 벌써 두 차례나 금리를 올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고 DTI 규제도 원상태로 복귀되어 매매가 하락과 버블 붕괴는 시간 문제가 되었다. 주택 보급율 역시 단순 보급율은 2009년 말 현재 100% 수준에 이르렀고 실제로 주택을 구매할 능력이 있는 구매자를 기준으로 할 때 주택공급은 엄청난 초과된 상태다. 이 또한 주택 매매가를 더욱 하락시킬 것이고 현재 주춤한 전세가 역시 하락하는 것이 대세일 수 밖에 없다. 물론, 최근 10여년 동안 단독 가구와 소규모 주택 공급이 부족했기 때문에 소규모 주택에 대한 전세와 임대수요는 꾸준히 이어져 전세가 하락의 버팀목이 되지겠지만 전세가는 몰라도 오피스텔이나 다가구 주택의 임대료는 지난 몇 년동안 크게 변동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나는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486세대이고 따라서 내 주변의 지인들 대부분은 486세대들이다. 486세대들은 7할~8할 이상이 자기 집을 소유하고 있으며 실업율도 낮고 거의가 자가용을 굴린다. 2채 이상의 주택을 소유한 사람도 종종 발견할 수 있으며, 상당수가 가구당 월 소득이 ’가구원수 X 일인당 GDP’에 근접한다. 그 정도면 여유있는 중산층에 속한다. 다소 진보적 관점에서 정치와 국제분쟁, 재벌들의 행태를 비판하지만 어울려서 술 한잔 먹으면서 호기를 부릴 뿐이다. 가정과 직장이 안정된 상태에서 미래에 대한 큰 걱정이 없으면 보통 사람들은 보수화된다. 그래서 조국 교수는 <진보집권플랜>에서 486세대를 ’정치진보, 생활보수’로 칭한 것 같다.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주택이 한 채 밖에 없다면, 장차 자식들이 결혼할 때 세대간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이미 주택가격이 엄청나게 올라버렸고 대신 취업율이나 임금상승률은 호전되지 않기 때문이다. 10년 전에 비해 비정규직만 더 늘어났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주택가격 등락에 대해 물어보면 그들은 (매달 대출이자와 제세공과금에 시달리면서도) 집값이 내려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MB 집권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도와준 486세대들은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특정 후보가 "주택값을 2002년 이전 수준으로 낮추겠다"라고 공약을 발표하면 무더기로 반대후보를 지지하거나 기권할 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울하다...
 
지난 10~20년 동안 경제에 대해 잘못 생각해왔고 말과는 달리 ’혼자만의 미래’를 꿈꾼 것이야말로 잘못한 것이리라...
 
[ 2011년 3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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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 시공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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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일반 가정에서 ’쇠고기’라 함은 매우 특별한 식품일 것이다. 지난 40년 넘게 내가 자라온 환경에서 쇠고기는 ’명절 음식’이었다. 우리집에서는 설과 추석 때가 되어야 가끔 쇠고기를, 그것도 갈비찜으로 먹는 연례 행사였다. 그것은 우리 집과 친척들에게도 공통적인 음식문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참고로, 우리 집과 친척은 현재 자기 집 한 채 정도 있고 부모들은 모두 일선에서 은퇴하고 자식들의 용돈으로 생활하는 정도이다. 지난 40년 동안 대부분의 친척들은 빠르면 1980년대에 늦으면 1990년대에 자기 집을 마련한 세대였다.(그렇다고 돼지고기와 닭고기를 늘 풍성하게 먹은 것도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나이가 들어서도 쇠고기는 지금도 그다지 ’좋다’던가, ’맛있다’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쇠고기(등심, 갈비, 육회 등)는 특별한 행사나 접대, 중요한 모임에서 서로 대접하는 경우에 식당에서 올라오는 음식이다. 내 기억에 회사의 법인카드로 결제하거나, 업무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개인적인 필요나 기호로 인해 쇠고기를 먹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실제 먹어본 적도 거의 없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일반 중산층이나 서민들은 나와 비슷한 처지이고 생각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가정하고 산다.
 
그래서 2008년 PD수첩에서 광우병을 중요하게 다루고 언론에서 광우병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때도 쇠고기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 역시 수 차례 서울 도심에서 벌어지는 촛불시위에 참석하였지만, 그것은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대한 분노보다 국민적,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문제에 대한 이명박 정권의 태도와 대응이 컸다.(물론, 이명박 정부와 그 똘만이들의 작태는 3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지만...)
 
이 책 <육식의 종말>이 처음 내 머리 속에 들어온 것은 광우병 사태가 벌어진 2008년이었다. 당시 광우병과 소고기에 대해 인터넷을 뒤지다가 저자의 책을 처음 알게 되었지만 구하거나 읽지는 않았다. 그 뒤로 시간이 흐른 뒤, 2009년 노무현 전대통령이 돌아가실 즈음 그 분이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유러피안 드림>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육식의 종말>과 같은 저자라는 책 소개를 보면서 두 번째로 각인된 것이다. 저자의 책을 여러 권 준비했다가 벼르고 별러 작년(2010년) 초부터 <노동의 종말>과 <소유의 종말>, <유러피안 드림>과 <엔트로피>, 그리고 공부모임 교재로 <공감의 시대>를 읽었다. 책 내용 마다 이 책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간략하게 필요한 내용이 들어있어서 읽지 않고 넘어가도 되지 않겠냐라고 생각했다.(이 책의 최초 발간년도는 1992년이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한 이야기는 저자의 저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육식의 종말>은 법정스님의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에서도 다루어졌고 남미에 대한 이야기에도, 아프리카와 아시아 빈국의 식량난과 관련한 책과 글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저자의 책 속에서 자주 거론되는 사례를 보면서 결국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은 육식을 중심으로 한 현대인의 식생활에 비판을 가한다. 급속도로 증가하는 육식 문화, 특히 쇠고기에 집중되는 음식 문화와 이로 인해 파괴되는 환경과 생태계의 위기에 대해 논한다. 저자는 생태계를 보호하고 생존권을 위한 식량의 공급, 지구를 공유하는 다른 생명체들의 안녕을 위해서 현대사회가 육식 문화를 넘어야만 지구의 미래에 희망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책은 서양 문명과 소에 대한 관계를 다루면서 시작한다. 내가 보기에도 육식이 흔치 않았던 동양과 달리 서양(특히 유럽과 미국)에서는 기원 전부터 신화와 벽화에서 소가 등장하는 문화였다. 대지가 척박했던 것도 영향을 미친 듯 하다. 책은 이어서 소와 소고기 산업으로 유럽과 미국의 경제가 변화하는 모습, 목축산업을 위해 미국 내 버팔로를 몰살시키고 인디언을 학살하는 과정, 쇠고기의 본격적인 산업화를 이야기한다.(여기까지가 1~3부) 4부에서는 유럽, 미국 뿐 아니라 제3세계와 빈국에서 대규모 경작지가 쇠고기를 위한 곡물재배지로 탈바꿈하면서 ’배부른 소 떼와 굶주린 사람들’로 양분된 세계의 모습을, 5부에서는 지구의 환경을 위협하는 쇠고기 산업, 6부에서는 ’차가운 악(cold evil)’이 되어버린 쇠고기 문화를 다룬다. 물론, 책 속에는 육류를 많이 섭취하는 서양과 그들을 모방한 몇몇 나라의 식생활과 건강이 심각하게 취약해진 상황도 묘사한다.
 
<소유의 종말>과 <노동의 종말>에서도 느꼈지만, 저자는 매우 독창적인 사유체계를 지닌 사람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보여지는 ’소유’나 ’노동에서, 그리고 이번에는 ’육식’에서 저자는 그 단어들이 함축하는 정의와 개념을 끌어내고 그것을 사회적, 역사적, 경제적인 관점에서 풀어내는 재능이 탁월하다. 또한 그 과정에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폭 넓은 연구와 학식, 그리고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들어 있다.
 
한국 사회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저자의 저작들은 상당히 앞선 연구들이다. 서구사회나 동양의 경우 일본 정도에서 저자의 연구 주제가 일반화되는 과정이 진행 중일 뿐이고 한국의 경우에는 <소유의 종말>과 <노동의 종말>, 그리고 이 책 <육식의 종말>의 경우에도 거리감을 느낀다. 그리고 한국 뿐 아니라 동양사회의 경우 일찍부터 농경사회가 자리잡았고 신화나 음식문화에서도 육식보다 채식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육식의 종말>을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이유는 2008년 촛불시위 당시의 상황에서도 깨달았듯이 서구, 특히 미국의 쇠고기 산업이 예속적인 친미정권을 등에 엎고 무차별적이고 강제적으로 이 땅을 침범하기 때문이다. 우선, 최근 구제역 파동에서도 보여지듯이 한국의 낙농산업이 취약하기 때문이고 먹거리는 산업과 무역으로만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책 속에서 드러나듯이 미국의 쇠고기 산업의 정육체계가 부실할 뿐더러 산업으로서의 육우는 정상적인 동물의 생육과 성장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소의 체중을 늘리기 위해 자행되는 부당하고도 비도덕적인 업체들의 행위는 우리가 미국산 소고기를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셋째, 쇠고기 산업은 단지 낙농 산업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옥수수와 콩 등 세계적인 곡물과 사료의 수급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식량과 곡물 등의 상당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가정경제에까지 좌지우지될 수 있다. 넷째, 저자의 표현대로 현재의 세계 식량위기는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소위 ’선진국’이 과도하게 식량을 섭취하고 낭비하기 때문이고 더 중요하게는 사람이 먹을 식량을 소와 돼지 등 산업용 동물들이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책을 통해 ’채식 위주’의 음식문화에 대한 계기가 마련될 지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는데 막상 다 읽고나니 내 기대와는 조금 다르게 전개된 느낌이다. 그렇더라도 [육식의 종말]에 이바지해야 하겠다는 의지가 생겨날 정도는 된다.
 
* 책 속의 문장
- 지방많은 소고기를 원하는 영국인들, 평원의 황소를 구입할 돈줄이 필요한 서부목축업자들, 잉여 옥수수를 먹어치울 비육우를 원하는 중서부 옥수수 재배 농부들, 새로운 식민지 투기적 시장을 이용하려는 영국 재정가들의 관심사가 한 덩어리가 되어 미국의 ’축산단지’가 창출되었다.(p.118)
 
- 오늘날 소와 다른 가축들은 일반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멀찍이 떨어져 있다. 사람들은 지역 슈퍼마켓에서 미리 포장된 형태의 쇠고기 부위를 구입한다. 목축업자들은 전국의 고기 생산용 소들을 많은 공업단지들처럼 사람들의 시야에서 차단된 고립된 장소에 격리시켰다. 현재 비육장은 고도로 자동화되어 있기 때문에 ’관리인’과 짐승들 간에 직접적인 접촉은 아주 뜸한 편이다. 심지어 일상적인 사료 공급도 컴퓨터로 관리되곤 한다. 제임스 서펠은 이 정도의 거리감에서 동물들은 단순히 더 많은 생산량을 위해 추상화된 존재인 생산의 숫자나 단위가 될 뿐이다라고 말한다.(p.336) 
 
[ 2011년 2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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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3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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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저자의 작품은 <우리는 사랑일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일의 기쁨과 슬픔>, <여행의 기술>,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에 이어 이 챆이 여섯 번째다. 저자는 사랑이나 일, 여행 등 일상적인 소재를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기술하면서 동시에 철학과 인문학적 해석을 덧붙여 나가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작가다. 지난번 공부모임에서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과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공중그네>를 통해 트라우마와 자살의 사회적 성격, 심리학 치료 등에 대해 읽고나서 그 연장선 상에서 이 책을 읽은 것이다.
 
이 책은 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안'해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지위로 인한 불안]으로 규정하고 그 개별적인 원인을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으로부터 끌어낸다. 그러면서 '불안'에 대한 해법으로 철학과 예술, 정치와 기독교(공동체), 보헤미아(초현실주의, 자유주의, 히피등)를 제시한다.  

다시 말해 늘 다른 사람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아주 사소한 일에도 상처를 받는, 현대인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불안'의 정체를 밝힌 작품이다. 우리는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라는 작가의 말에 동감할까? 작가에 따르면 삶은 하나의 욕망을 또 다른 욕망으로, 하나의 불안을 또 다른 불안으로 바꿔가는 과정이다.  
 
구체적으로, 불안은 불황, 실업, 승진, 퇴직, 업계 동료와의 대화, 성공을 거둔 걸출한 친구에 관한 신문기사와 같은 물질적인 자극과 더불어 사랑 결핍이나 애인과의 결별, 이혼과 같은 정식적인 것에서도 유발된다. 작가는 어떤 상황에서 당신이 얼만큼 불안한지 파악할 증거는 흔치 않지만, 당신이 어디에 몰두한 듯한 표정을 짓거나, 부서질 것 같은 미소를 보이거나 다른 사람의 성공 소식을 들은 뒤 유난히 긴 침묵을 지킨다면 증세는 명백하다고 한다. 우리는 어떤가?

그리고 작가는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도 취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의 에고가 지닌 불안"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 아담스미스의 <국부론>,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메르세데스 벤츠의 광고 사진, 1902년 열린 하인츠 케첩 영업자들의 회합 등 철학과 예술, 일상의 위대한 유산들 사이를 꺼내어 놓고 비교한다. 특히 18~19세기부터 서구에서 시작된 사회경제체제와 세계관의 급격하고 엄청난 변화가 사람들 사이에 물질적, 정신적 불안을 가져왔음을 이야기한다.(작가 자신이 그렇게 해석한 것은 아니지만, 불안이 급속히 확대된 시점을 19세기 중반부터 세계관이 변화된 것을 기본적인 이유로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중세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사람들의 지위는 "신의 자손들'로서 서로 공통되었고 부의 축적은 죄악시되었으나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부와 지위와 같은 물질적인 것들이 지위를 규정하게 되어버린 것을 말한다. 자본주의 문화는 가난이 수치가 되게끔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불안은 욕망의 하녀'라고 규정한다.
 
이런 불안에 대한 해법으로 작가는 철학과 예술, 정치와 기독교, 보헤미아를 제시한다.
- 철학 : 올바른 세계관을 형성하여 비판적으로 현대사회와 문화를 해석하고 스스로 물질이나 지위, 부와 욕망을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 예술 : 회화와 희극, 문학과 만화, 시와 영화 등 예술작품을 통해 물질과 지위를 누르고 세상을 더 진실하고 현명하게 해석할 수 있음을 말한다.
- 정치 : 적절한 정치적 감각을 갖추어 지배적인 부와 지위개념을 이데올로기(중립적으로 말하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어떤 편파적인 노선을 밀어붙이는 전술)로 규정하고 사회의 이상을 바꾸거나 그것과 씨름하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 : 기독교적 공동체를 통하여 모든 인간이 귀중하다는 공간과 태도를 조성하여 지배관념을 피하는 것을 말한다.
보헤미아 : 초현실주의, 자유주의, 히피 등 기존 관념과 문화를 비난, 거부하고 자유롭게 삶과 문화를 즐기는 것을 말한다.

작가는 이 책 속에서 "돈과 권력이 우리가 원하는 사랑과 인정을 보장해주는가?", "많은 부를 소유한 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바라던 성취의 모든 것인가 아니면 그 대체물일 뿐인가", "발전된 기술과 편리한 기기들은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하는가 혹은 우리의 불안을 사육하는가" 등의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작가 특유의 간결함과 유머, 독창적인 해석들이 잘 어우러져 있어 읽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작가가 불안의 원인과 욕망의 근원, 그 해법을 제시하는 방법은 그럴 듯해 보였다. 하지만, 불안의 원인과 해법을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것으로만 다루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본다. 우선,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불안과 같은 문제 역시 사회적, 역사적으로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작가 자신도 불안의 원인을 찾는 중에 언듯 다루기도 했지만, 현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 정신적 불안이 대폭 증가한 것은 사회경제체제와 세계관 및 문화가 변했기 때문이다.(그것이 지배자들의 지배관념이든 아니든 간에..) 특히, 20세기 후반 이후 전세계적으로 불어오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가 모든 분야의 사람들을 최악의 '불안' 상태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따라서 그 해법도 역시 사회적으로, 정치경제와 사회문화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은 다분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것이기에 사회적, 집단적으로 다가가지 않고서는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개인은 얼마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가 제시한 여러 해법 요소들은 그것이 사회적, 문화적으로 풀어나간다면 최상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생각한다. 
 
* 책 속의 문장

- 불편은 모욕을 동반하지만 않으면 오랜 기간이라도 불평 없이 견딜 수 있다. 병사나 탐험가들이 그런 예다. 그들은 사회의 극빈층이 겪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궁핍을 기꺼이 견디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버텨낸다.(p.17)

- 우리가 실패에 대한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성공을 해야만 세상이 우리에게 호의를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족의 유대, 우정, 성적인 매력 때문에 가끔 물질적인 동기가 부차적인 것이 되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이 자신의 요구를 온전히 총족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무모함 낙관주의자일 것이다. 인간은 웃어줄 만한 확실한 이유가 없으면 좀처럼 웃어주지 않는 법이다.(p.137}

-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언제나 동포의 도움을 얻을 일이 있다. (그러나)동포의 자비로운 마음에만 기대서는 도움을 얻을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자기애를 자극하면 설득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저녁을 먹게 되는 것은 정육점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이나 빵가게 주인이 자비로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해야 한다."(p.138}

- 이반 일리치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아무도 그에게 그가 바라는 동정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랜 고통 끝에 이제 병든 아이처럼 동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인정하기는 부끄러웠지만)순간들이 있었다. 어린 아이를 위로하고 달래주듯 누가 안아주고, 입맞추어주고, 울어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는 턱수염이 허연 중요한 관리였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갈망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p.294)   
 
[ 3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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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떠나기 법정 스님 전집 2
법정(法頂) 스님 지음 / 샘터사 / 2001년 8월
평점 :
절판


<아름다운 마무리>와 <산방한담>,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오두막 편지>, <산에는 꽃이 피네>, <서있는 사람들>, <무소유>에 이어 여덟 번째 법정스님의 저서를 읽었다. 이 책은 1992년 초판이 발행되었고 법정스님이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쓴 글을 모은 것이다. 1992년은 스님이 홀연히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오두막에 기거하시기 시작한 때이다.
 
이 책에는 눈을 뜰 때마다 새롭게 다가서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비롯해 명예와 편안함을 버리고 혼자서 살아가는 구도자의 청빈한 삶이 잘 드러나 있다. 시종일관 욕심을 버리고 떠나라는 가르침과 사람은 혼자일 때 자기 내면의 목소리와 진실되게 만날 수 있다는 스님의 참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특히 강원도 오두막에서 나무, 새, 바람, 달, 들짐승을 벗삼아 사는 구도자의 속깊은 대화를 엿들을 수 있다.  
 
스님의 생애는 책의 제목처럼 몇 차례의 [버리고 떠나기]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출가()다. 외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책 읽고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던 청년은 1954년 싸락눈이 내리던 날 홀연히 집을 나서 머리를 깎았다. 평소 흠모했던 등대지기의 꿈을 접고 ‘진리의 빛’을 찾아 나선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과 세속적 욕망을 버리는 대신 그는 진리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었다.
 
두 번째는 1975년 10월 1일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전남 순천 조계산 자락 불일암()으로 들어간 일이다. 글 잘 쓰고 의식 있는 40대 초반의 촉망받는 중진 스님이었던 그는 “시국 비판이나 하며 글재주만 부리다가는 중노릇 제대로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모든 것을 내던지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한 칸 암자에서 혼자 밥 짓고 밭을 매며 17년을 지내면서 <무소유>, <산방한담()>, <텅 빈 충만> 등 10여 권의 산문집을 펴냈다. 승속()의 명예를 과감히 떨쳐 버린 덕분에 사색의 자유와 자연과의 교감을 얻게 된 것이다.

세 번째는 1992년 4월 19일 강원도 산골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오두막으로 다시 거처를 옮긴 일이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산중 암자에 방문객이 늘어나고 글 빚도 지게 되면서 수행에 지장을 받게 되자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지인들은 물론 몇 안 되는 상좌조차 아직 스님의 거처를 몰랐다. 스님이 “누군가 내 거처를 알게 되면 나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큰스님’으로 불리며 절 집의 높은 자리에 앉는 대신 자신만의 수행 공간과 절대 고독의 희열을 얻게 된 것이다.

네 번째는 2003년 12월 21일 한 여신도가 오랜 간청 끝에 스님에게 시주한 서울 성북동 길상사의 창건 6주년 기념 법회에서 회주(·절의 원로 스님) 자리를 미련 없이 내놓은 일이다. 주지 한 번 맡지 않았던 스님이 떠밀리다시피 맡았던 자리였다. 하지만 차츰 틀이 잡혀 가자 “수행에는 정년이 없으나 직위에는 반드시 정년이 있어야 한다”는 평소의 소신을 주저 없이 실천한 것이다. 많은 이가 아쉬워했지만 스님은 큰 짐을 벗어던진 듯 편안한 모습이었다. 스님은 이날 법회 후 차 한 잔을 따라 주며 “때가 되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육신을 벗어버리고 싶다”고 지나치듯 말했다. 법정 스님이라면 능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님은 이후 봄가을 두 차례만 길상사에서 공식 법회를 열 뿐이었다.
 
이 책 속에는 중생들의 삶과 애환을 달래지 못하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발언이 몇 가지 들어있다.
[화전민의 오두막에서]는 19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병'에 걸리지 않은 부드럽고 국민들에게 웃음을 선사할 수 있는 정치인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나의 휴식 시간]에서는 어려서부터 책벌레였던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휴식 시간은 좋은 책을 읽는 시간임을 이야기한다. 그 중에는 다이호우잉의 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 <닥터 노먼 베쑨>,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 리처드 바크의 <소울 메이트>, 장 그르니에의 <지중해의 영감> 등을 소개한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괴테의 <파우스트>의 주인공 메피스토텔레스의 말을 통해 책의 함정을 경계한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생명의 나무는 푸르다."
 
그리고, [개울가에서]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서로가 창조적인 노력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오고가며 만나는 친구관계에 대해 충고한다. 무가치한 일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소중한 삶을 쓰레기더미에 내던져버리는 거나 다름이 없다고...
[입시에 낙방당한 부모님들에게]는 교육히 참으로 해야 할 일은 그럴듯한 직업을 얻도록 준비싴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과정을 이해하도록 도와 무엇인 진리이고 삶의 진실인지 스스로 찾아내도록 거드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무엇이 전쟁을 일으키는가]에서는 1991년 걸프전쟁을 바라보면서 종교간의 갈등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다.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신들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들의 종류가 그렇게 많은 것이다. (중략) 종교가 생기고 나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람이 있고 나서 그 사람이 만들어놓은 여러 가지 문화현상 중의 하나가 종교임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통일을 생각하며]에서는 조금 의외의 이야기도 나와 있다. 1989년 평양을 방문한 전대협 임수경씨가 평양에서 개최한 기자회견 석상에서 "김일성 1인 독재의 우상화와 남조선 해방의 허구적 논리를 위대한 주체사상이라고 떠받"들었다는 것. 생소한 이야기라 인터넷을 한참 뒤져보았는데도 평양에서 진행된 2차례의 기자회견 관련 기사에서는 비슷한 내용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정부측 인사나 보수 언론 등에서 확대 포장한 내용을 들은 것인지, 아니면 내가 관련 내용을 못찾은 것인지...
 
[아직 끝나지 않은 출가]에서는 1975년 인혁당 사건 이야기가 나온다. 스님은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자가 인혁당 관련자 8명을 사형은 선고한 다음 날에 죽여버린 사건이 반정부 인사들이 인혁당 사건을 정치적인 조작극이라고 몰아붙인 것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크게 자책하셨다고... 스님은 이 사건을 계기로 출가 수행자가 마음 속에 적개심과 증오심을 품는 것에 대해 되돌아보고 자신이 무엇 때문에 출가하였는지 다시 헤아리기 위해 불일암에 들어가셨다.
 
* 책 속의 문장 : 
- 세상에 거저 되는 일도 없지만 공것 또한 절대로 없다. 그만한 보상을 치르지 않고는 그 어떤 결과도 가져올 수 없다. 안이한 직업적인 중 노릇이 편한 것 같지만, 거기에는 곰팡이균처럼 부패와 타락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니 편하고 한가함을 즐길 게 아니라 독사를 피하듯 멀리 해야 한다. 특히 수행자를 병들게 하는 것은 이 편하고 한가한 안일임을 명심하고 명심할 일이다.
 
-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그러므로 차지하고 채우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침체되고 묵은 과거의 늪에 갇히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차지하고 채웠다가도 한 생각 돌이켜 미련없이 선뜻 버리고 비우는 것은 새로운 삶으로 열리는 통로다
  
[ 2011년 2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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