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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4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4
EBS 지식채널ⓔ 지음 / 북하우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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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카롭다. 서둘러 지식e 시즌 4를 펴고 읽어가면서 가장 처음 받은 느낌이다. 날선 검 하나가 비수가 되어 이 시대를 살피고 쪼개고 고발한다. 왠만한 시사 프로그램보다 더 시사적이고, 보수적인 언론들의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을 철저하게 까발린다. 그래서 나는 시종일관 이 책을 경건한 마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사라져 버리고 오직 이 책과 나 만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 가운데에서 마음을 활짝 열고 세상을 바라 볼 수 있었다.  

  책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상의 테두리 밖에서”, “세상의 결을 따라”, “다시 삶의 테두리 속으로”라는 제목을 달고 구분된 각 부분을 따라가본다.  

  “일상의 테두리 밖에서”에서는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 세상이 이해해 주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흑인 운동가, 사회적인 지위가 아니라 스스로의 존엄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앨런 튜링”, 서구 중심의 이데올로기로 충만한 세상을 벗어나 자신만의 기도를 그린 “아르노 페터스”, 1%의 미적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90%의 생존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가진 재능을 디자인에 올인하는 디자이너들, 명예가 아니라 삶의 존재 의미를 설명하기 위하여 무술을 택한 이소룡, 정치풍자의 달인 샤를 필리봉 이들은 시대의 이단아들이다. 자신이 가진 재능들을 자신의 삶을 위해 사용했다면, 현실에 순응했다면 평탄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았겠지만 이들은 그편을 택하지 않았다. 무모하게도 사회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프레임을 깨는 도전을 했다. 일상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들은 스스로 시대의 돈키호테가 되었다. 그리고 무익하고 쓸데없는 상상력이라 평가를 받았지만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나비의 날개짓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솔직했다.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첫 발걸음이 아닐까? 우리는 너무나 일상적인 습관에 젖어 산다. 혹은 세상의 불의를 목격하지만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다고 판단하고 순응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지식e 제작팀은 말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이런 무모함이라고 말이다. 온갖 정쟁과 말도 안되는 복잡하고 기인한 현상이 일어나는 2009년 대한민국에서 필요한 것은 돈키호테의 무모함이라는 말이 아닐까?  

  “세상의 결을 따라”라는 부분에서는 세상의 논리와 프레임을 따라 가면서 그 모순들을 고발한다. 제주 해녀의 삶, 소통 부재의 모습들, 정권에 의해 이용당하고 강제로 불임 수술까지 당한 한센인들,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해 가는 독일과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 일본, 온갖 토론이 난무했던 민주주의의 산실 아고라, 부자가 아닌 경제적으로 소외당한 패배자들을 위한 뉴딜정책, 공포를 매개 삼아 걷잡을 수 없이 비대해지는 금융자본들, 다른 이들의 위기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거대 자본들, 아무데나 갖다 붙이는 프레임 신봉자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 뒤에 달려 있는 해설들은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다. 2008년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수없이 많은 정책과 이슈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마치 세상의 결을 한켜한켜 벗겨내겠다는 것처럼 하나씩 하나씩 벗겨나간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되는가? 무엇을 바라보고,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혹시 나는 프레임 신봉자가 되어서 이것이 삶이고, 진실이요, 불가항력이라고 나를 설득시키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이 책은 그것을 묻고 있다. 세상을 바꾸는 돈키호테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이 무엇이냐? 찬성도 반대도 아니다. 지지도 모욕도 아니다. 무관심이다. 돈키호테의 행동이 이슈가 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의지를 꺾게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마치 오늘날 한국 사회처럼 말이다. 한국 사회는 지나치게 획일화 되어 있다.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경로의존성을 버리지 못한다. 반공, 경제, 학력 등 이 시대에 걸맞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의존성을 버리지 못한다. 세상은 이미 그것들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돈키호테가 생존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여건을 만드는데 나도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삶의 테두리 속으로”는 우리를 삶의 자리로 초대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 초대된 우리는 과거와 같을 수 없다. 세상에서 한걸음 물러나서 세상을 바라본 우리들이기 때문에 다시 삶의 한복판으로 초대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나는 과거의 내가 될 수 없다. 이미 나는 세상 밖을 경험했다. 돈키호테가 되어 보았고, 세상이 나에게 던져주는 경쟁의 논리와 효율성의 논리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진화론을 주문처럼 외우고 신봉하며 받아들일 것을 강요받던 나였지만 그것의 허구를 깨닫는 순간 나를 골리앗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다윗이 된다. 기륭전자의 복직 투쟁자들이 된다. 감자굴의 상학이가 되고, 494,011개의 꿈을 키워가는 공고생이 된다. 세상에 가장 싼 가격에 밥을 나눌 수 있는 사장님이 된다. 세상에서 자유로워진 사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만이 무모한 도전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밥을 나눌 수 있다. 부당하게 쌀직불금을 받아가는 이들이 아니라, 녹색 산업이라는 미명하에 토목 건설을 주도하는 이들이 아니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직업을 나누자면서 신입사원들의 월급을 깎는 집단 이기주의자가 아니라 진정 내가 가진 밥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내가 이런 사람이 될 때 세상은 밝아질 것이다.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다.  

  지식e 시즌 4를 읽으면서 돈키호테를 떠올린다. 어릴 적 내 기억에 그는 우스꽝스러운 기사였다. 세상 모르는 철부지였고, 시대의 반항아였으며, 시대의 발전에 뒤떨어진 구닥다리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과연 그럴까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확신했다. 그는 구닥다리가 아니다. 세상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시대의 선구자이다. 세월이 흐른다고 할지라도 진정 가치 있는 것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구닥다리로 보이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 구닥다리가 한없이 소중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한 부분을 적어 본다. 내 마음 속에 남은 가장 구닥다리이지만 간직해야할 이 한말을 말이다.  

“스킨 스쿠버? 그게 있으면 한 사람이 백 명 일도 할 수 있다며? 근데 그렇게 하면 나머지 아흔 아홉은 어떻게 되나?”<물이 되는 꿈 139p>  

  기업과 정부의 Job sharing이라는 말보다 더 가슴에 깊숙이 박히는 말이다.  

후기 

1. 날카롭다. 그 날카로움이 좋다.  그러나 지난 권들에서 보여주었던 넉넉한 푸근함이 그립기도 하다.  

2. 각 장의 말미에 참고 도서 목록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 도서 목록을 보고 몇 권 사봤던 기억이 있었는데. 다시 목록이 추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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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 - 생각하는 인간에서 놀이하는 인간으로 창조와 상상력의 원천으로서의 놀이 탐구
스티븐 나흐마노비치 지음, 이상원 옮김 / 에코의서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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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장을 넘기기 전에 내 눈을 확 잡아끄는 것은 조금은 민망한 표지이다. 개인적인 민감함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 모르겠지만 누드모델의 뒷모습을 찍은 책표지를 대하면서 가장 처음 느끼는 것은 민망함이다. 하고 많은 것들 중에서 하필이면 왜 이런 민망한 표지일까? 무엇인가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구성이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가지만 여전히 책을 읽기 위해서 책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민망함이 몰려오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아직까지 나는 이 책에 마음을 열지 못했나 보다.

  표지 디자이너가 하고 많은 그림 중에 왜 하필 누드모델 그것도 여성의 뒷모습을 턱하니 첫 페이지에 올려놓은 것일까? 그것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상상하게 만드는 뒷모습을 말이다. 아마도 표지 디자이너는 책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이 사진을 통하여 이 책이 말하는 놀이의 진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먼저 이 책을 접하고 당혹해 할 나 같은 사람에게 자신이 얼마나 사회적인 시스템에 길들여져 있는지 돌아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다. 결코 당혹스러울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혹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사회적인 통념에 내가 얼마나 길들여졌는지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책을 읽어가면서 이것이 창조력에 얼마나 치명적인 독이 되는지 알게 된다.

  한 아이가 자라서 자유분방한 시절을 보내다가 학교라는 곳에 들어가고 거기에서 사회화 과정을 밟게 된다. 사회화 과정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창조력을 죽이는 대신 사회가 원하는 관념 체계로 무장된 인간을 대량생산하는 공정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학교라는 곳을 다니고, 친구들을 만나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습득하게 된다. “친구와 싸우면 안 된다, 교통법규를 어기면 안 된다,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는 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게 되어 가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 시스템에 잘 적응하면 모범생이라는 딱지를 붙여준다. 마치 숙제를 잘 해온 아이에게 “참 잘 했어요.”라는 도장을 찍어 주듯이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 내 학창 시절을 생각해 본다. 나는 그래도 비교적 깨어 있는 선생님들을 많이 만난 편이다. 전교조인 중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전래 동요와 쟁가를 가르쳐 주셨다. 지금이야 사계라든지,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같은 민중가요들이 힙합 버전으로 리메이크 되어 불린다지만 당시에는 접하기 힘든 문화였으며, 왠지 붉은 색으로 매도되는 문화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14살의 나이에 노찾사를 접하고 노래마을을 접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은 우리에게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역사는 돈이라는 강력한 동인에 의하여 움직인다는 간단하면서도 직설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대학생이 되고 마르크시즘을 접하고 난 뒤에 그것이 유물론이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고등학생 시절, 그것도 대학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고3 시절에 유물론을 접했다는 것은 큰 매력이었다. 그분들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의식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딱딱한 사유체계도 아니었다. 그저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순수하게 배우는 즐거움에 빠져보라는 것이었다. 그런 영향일까,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하여 역사를 좋아했고, 국문을 좋아했고, 남들이 잘 안 외우던 서경별곡, 청산 별곡 같은 고전문학을 좋아해 외우고 다녔다. 내가 즐기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유가 없었다. 그저 좋았던 것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가장 큰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즐기라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놀이를 즐기는 호모 루덴스라는 말이다. 딱딱한 호이징거의 이론을 생각하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자기의 어린 시절을 떠 올리는 것만으로 충분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창조력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사교육으로 대변되는 교육 시스템의 횡포 때문에 아이들이 노는 즐거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참 놀 줄 모른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저 노는 것은 컴퓨터 게임이다. 가수 콘서트를 따라다니며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농구 축구를 열심히 하지도 못한다. 역사와 인문학을 즐기지도 못한다. 오직 그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실용이다. 시험에 출제 되는가 출제되지 않는가, 대입에 유리한가 아닌가, 취직에 도움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모든 일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냥 즐겁고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창조력이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준화가 진리가 된 시기에 예측 불가능한 창조력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이 책의 표지가 함축하고 있는 두 번째 의미는 상상하라는 것이다. 표지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드는 민망함이라는 감정의 뒤를 이어 오는 감정은 호기심이다. 뒷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앞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본능이다. 본능에 충실 하라는 것이다. 호기심은 인간의 본능이다. 제우스신이 에피메테우스에게 판도라를 보내면서 상자를 하나 주었다.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단서와 함께. 그러나 어디 신화에서 절대 금기가 지켜지던가? 판도라는 넘치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해서 상자를 열었고 그 상자에서부터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질병을 비롯하여 온갖 악들과 고난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단순히 악인가? 아니다. 인생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창조를 위한 파괴를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그것들을 접하고 그것들을 뛰어 넘고 있는 그대로 포용할 때 비로소 인간은 예술이라는 경지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상상하라. 호기심을 가져라.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어려움들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포용하라. 그 단계를 넘으면 당신의 지평은 더 넓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의 표지를 보고 느끼는 것은 가식을 벗어 버리라는 것이다. 옷이라는 가식을 벗어버리고 날 것 그대로 서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날 것 그대로 직면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가면을 쓰는 방법을 배운다. 그러나 가면은 우리의 본성을 죽이는 첩경이다. 모든 가식을 벗어버리고, 페르조나를 벗어버리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직면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놀이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놀이는 가식이 아니다. 직면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창조적인 능력에 대해서,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인생을 움직여가는 가장 강력한 동인에 대해서 말이다. 인간은 즐기는 존재이다. 유희의 인간이다. 내가 서평 쓰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면 이 시간은 피하고 싶은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것이 거의 유일한 취미가 되어버린 지금, 서평을 작성하는 시간은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놀이가 된다. 즐겨라. 자기의 모습을 날 것 그대로 직면하라. 거기에 진실한 당신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당신은 결코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호모 루덴스! 이 보다 더 인간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 어디 있을 것인가?

ps. 호이징거의 호모 루덴스를 같이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나도 다시 읽고 서평을 쓰련다. 그 시간을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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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3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3
EBS 지식채널ⓔ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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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벽 틈에 난 잡초, 출처:http://photohistory.tistory.com/3398)

  지식 e가 나올 때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누를 길이 없다. 이번에는 과연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 것인가? 어떤 내용으로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해줄 것인가 기대를 품게 된다. 그리고 그 기대는 항상 충족되었다. 노란색의 1권, 빨간색의 2권, 파란색의 3권을 접하면서 편집부의 말 대로 지식이란 암기가 아니라 가슴으로 읽는 것임을 다시한번 느끼게 된다. 마음이 따뜻해 짐을 느끼면서 한권의 책을 서재에 꽂고 바라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빨강과, 노랑과 파랑은 세상의 기본 색이다. 거기에다가 세 가지 색은 신호들에 사용되기도 한다. 물론 파란색이 아니라 초록색이 사용되지만 우리는 그런 구분 없이 파란불이라 부르곤 한다. 세권의 책으로 나온 지식e가 세상의 신호등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의 지식의 기본 요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두근대는 기대감을 품고 책을 열었다. 첫장을 열고 에필로그를 보는 순간 활칵 눈물이 났다. 다음의 글을 보았기 때문이다.

화성탐사로봇 스피릿과 오퍼튜니티는 태양 전지판에 먼지가 쌓여 3개월 후면 수명을

 
 

다할 것이다.

로봇 팔의 관절 이상, 복구 불능

망가진 몸으로 고산 등반, 소프트웨어 이상

생존을 위해 이틀 동안 66번 재부팅

화성탐사로봇 스피릿과 오퍼튜니티는 160'C의 일교차 속에서 16만장을 전송하며

2008년 6월 현재

 
  아직 살아 있다. (에필로그 중에서)

  "아직 살아 있다." 이 말은 스피릿과 오퍼튜니티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지식 e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지금까지 지식 채널은 세월의 많은 부침을 겪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 속에서도 여전히 지식 채널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존재해 왔었고 이들의 목소리는 "17년 후"라는 방송을 통하여 무한대로 증폭되기 시작하였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는데 그 중에 하나가 언론을 장악하려는 모습들이다. 여전히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지만 자기 주위에 있는 인사들을 방송계에 낙하산을 태워 언론사 사장으로 꾸준히 내려보내고 있다. 얼마전 YTN의 날치기 주주총회와 KBS 정연주 사장 퇴진을 목소리 높여 이야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급기야는 KBS를 좌파 방송이라고, 빨갱이 방송이라고 몰아 붙이는 코메디를 연출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지식채널은 이명박 정부에게 눈엣 가시 같은 존재일 것이다. 정부가 진행하고 있는 정책들을 정책이 아닌 사람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난 "17년 후"라는 방송이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생각한다. 이것 때문에 지식채널은 사상 초유의 일을 경험한다. 외압에 의한 방송금지라는 아픔이다. 만일 김진혁 PD가 게시판에 글을 올리지 않았더라면, 침묵했더라면 아무것도 모른채 그렇게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당하게 외쳤고, "17년 후"는 방송되었다. 그리고 그는 징계성 인사라는 시비 가운데 지식채널 PD를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지식 e 시즌 3은 김진혁 PD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작품을 내 놓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직접적인 거론은 없지만 "아직 살아 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하고 많은 것 중에서 왜 하필 사형선고 받은 화성 탐사 로봇의 이야기를 에필로그로 선택했을까? 어떤 이들은 음악이 좋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가운데 "아직 살아 있다."는 절규를 발견했다.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속삭이는 세상이 사실은 디스토피아라는 진실을 말하면서 위협당하지만 오늘도 살아 있다는 그들의 외침이, 그리고 절규가 내 마음에 저릿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소망한다. 지식 채널이 몇 년 후에도 "아직 살아 있다."고 당당하게 외출 수 있기를 말이다. 물론 그 길이 수십번씩 재부팅을 하는 아픔을 겪어야 하고 열사의 사막을 고장난 다리로 올라가야 하는 순례자의 고행의 길이라고 할지라도, 아픈 몸 하나 추스리지도 못하면서도 세상에 사람 중심, 진실이라는 사진을 계속적으로 전송하기를 소망한다.

  지식 e 3은 아직 살아 있다는 절규로 시작하여 우리가 간직해야 하는 그러나 지금은 사라져 가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이야기를 마치고 있다. 아직 살아 있는 이유가 이 아름다운 세상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지식 e의 정신을 지키겠다는 굳건한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그래서 일까 다른 책보다 더 사회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인다. 성매매 여성, 뉴타운에서 소외된 원주민, 그라바비차의 아이들, 떡볶이 아저씨 등등 우리가 무심코 지나가지만 그렇게 가볍게 치부되어서는 안되는 것들에 대한 주의를 환기 시킨다. 그러나 무슨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묻고 있을 뿐이다. 특정한 색깔을 지니고 있지도 않고 법적인 태도를 가지고 정죄하거나 강제하지도 않고 그저 인간 양심에, 인간적의 도의에 호소하고 있을 뿐이다. 당신이 인간이라면 어떻게 할 것이냐 묻고 잇을 따름이다. 그런데 새로운 오른손잡이들은 빨간 왼손이라고 맹공격을 퍼붓고 있다. 참 웃기는 짜장이다.

  이 책의 마지막을 행동하는 사람으로 한 것 또한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에필로그가 난 아직 살아 있다는 절규하면 행동하는 사람은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각오라고 생각이 든다. 이 각오는 직식 채널 편집부의 각오이고, 기진혁 PD의 각오이고, 우리의 각오이고 인간의 각오이어야 할 것이다.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상실해가는 인간성 회복에 대한 각오가 정말로 필요한 시기에 이 책을 만나 마음이 따뜻하다. 내가 아는 모든 이들과 이 따뜻함을 공유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국제 기구의 첫 한국인 의장(반기문이 아니다. 이상하게 우리나라 사람들은 덩치가 큰 기구라면 사족을 못쓴다. UN이라면 사족을 못쓴다.)이었던 이종욱 WHO 사무총장의 말을 인용해본다.

  "우리는 옳은 일을 해야 합니다.

   올바른 장소에서 해야 하며

   올바른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故 이종욱

 

PS. 벽에 뿌리를 내리고 오늘 하루도 버티는 끈질김이 지식 채널팀에게 있기를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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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08-08-06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빠가 어떻게 이런 글을 쓸수있는지..참..^^ 새로보임..(소라)

김이진 2008-08-13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많은 힘을 얻고 갑니다

saint236 2008-08-13 10:02   좋아요 0 | URL
님에게 힘이 되었다니 감사하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박노자의 만감일기 -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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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거의 다 읽어가면서 그런 생각을 해봤다. 도대체 이 사람의 생각은 무엇일까? 만감일기라는 말 그대로 극히 개인적인 생각들을 기록한 블로그의 이야기들을 모았다. 그 개인적인 생각들이 단순히 "저 사람은 그래."라고 말하고 넘어갈 수 없는 심도 있는 이야기임은 사실인데, 도대체가 이렇게 ㅈ버렇게 써 놓은 글들의 논점을 모르겠단 말이다. 분명 지평을 넘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개인의 실존, 우리라는 집단주의, 국가와 민족이라는 민족주의적 권력, 그리고 자본주의와 모든 권력과 파쇼로부터 넘어가자는 말을 하고 있는데 왠지 이 소리가 술먹고 주정하는 소리 비슷하게 들리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가?

  이런저런 리뷰들을 살펴보면서 역시 박노자라 말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그다지 큰 울림이 다가오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이미 NL과 PD라는 개념조차 사라져 버렸는데 NL을 말하고 비판적인 사회주의를 이야기하고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 만민 평등주의를 말하는데, 그리고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는 말은 때려치우라는 말들은 하는데 솔직히 무슨 말인지 알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다지 현실성은 없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물론 현실적이지 않다는 생각으로 나아가야 할 질을 포기한다는 것은 무책임하고 비겁한 일인 것을 알고 있지만 도대체 이건 계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득 이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들을 하고 살아가고 있구나, 삶에서 나타나는 것들을 쉽게 포기하거나 지나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부끄럽게 만드는 저자의 삶의 방식이다. 사회에 민감한 지식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민감하기만 하다. 딱 거기까지다. 파워가 없다. 선동도 없고 뭔가 빠졌다고 할까? 카산드라의 예언이라 할까? 마치 예전에 한 선배가 했던 말들이 생각이 난다. 이 선배는 참 똑똑했다. 말도 잘하고, 생각도 깨어 있고, 사회를 향한 뛰어난 열정도 있고, 남자인 내가 봐도 참 멋있는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선배와 이야기를 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 선배에게 빠져들곤 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이다. 빠져들긴 하는데 행동이 안된다. 왜냐하면 이 선배가 가장 진지하게 이야기할 때는 술먹고서 이야기할 때였기 때문이다. 내용은 진실이지만 주절거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를 뛰어 넘고, 우리를 뛰어 넘고, 국가와 민족을 뛰어 넘고, 모든 경계를 뛰어 넘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나도 동감한다. 나뿐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감할 것이다. 그러나 왜 안 뛰어넘을까? 왜 자신들만의 테두리를 만들어 가는 것일까? 현실은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비빌 언덕, 즉 안전을 위해서 자신들만의 틀과 구획을 만들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동안 이렇게 만들어 온 시스템이 과연 포기될 것인가? 아닐 것이다. 지구촌이라는 이상을 믿고 있는 것일까? 이상은 이상이다. 차라리 이상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보완하는 것이 더 바랍직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이 힘들다는 것은 아다. 저자도 분명히 지적하였다. 자칫 정신을 잃으면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고.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 생각한다. 물론 현실성 있는 대안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나의 생각을 포기할 것이다.

  저자도 벗어나지 못한 경계를 우리에게 벗어나라 하는 것은 기만이다. 자신은 한국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있지 않다 말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의 경계를 넘어서 지구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상, 진정한 사회주의하는 잣대 도한 하나의 틀일 것이다. 그의 지난 삶의 경험들 또한 하나의 틀이다. 이런 것들을 뛰어넘지 못하는 한(생각이 멈추지 않는한, 죽지 않는한) 여전히 우리는 나도 모르게 어떤 틀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틀이 덜 비관적이냐의 차이만 있겠지만 말이다.

  이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만감이 교차한다. 무슨 물인가 끄집어 내야하는데 잘 안풀리는 기분이랄까?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았다. 나는 아직까지도 나의 틀을 고수하고 있구나. 다른 사람의 틀은 너무나 쉽게 거절하고 있구나.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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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팔다 - 우상파괴자 히친스의 마더 테레사 비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정환 옮김 / 모멘토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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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민의 어머니 테레사, 인도의 어머니 테레사 등 테레사에 관한 별명들은 참 많이 있다. 대다수의 이야기들은 테레사를 높이고 숭배하는 이야기들이다. 히친스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자비를 팔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그의 책에 다시 제목을 붙이자면 나는 당당히 "테레사를 팔다."라는 제목을 붙일 것이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그의 집요함에 경탄을 했다. 이 정도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조사를 할 수 있으며, 이 정도로 비판을 가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말에 선뜻 동의를 구하기 어렵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스기 전에 많은 서평들을 읽어 보았다. 거의 대다수의 서평들이 "대단하다, 뛰어나다, 존경스럽다."라는 내용들이다. 물론 그 내용의 밑바탕에 갈린 이야기가 무엇인지 안다. 나는 이 책을 단순하게 기독교 때리기라는 의미로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다. 물로 ㄴ내가 기독교인이기에 거부감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느 정도의 사감은 들어갔겠으나(그러나 어쩌랴 책으로 나오고 난 다음 그것에 대한 비판은 작가의 몫이 아니라 독자의 몫인 것을) 최대한 사감을 배제하려고 노력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시중 서점의 베스트셀러에 꼭 기독교 비판에 관한 책들이 이름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만들어진 신(리처드 도킨스)" "추락하는 교회(이상성)" "신은 위대하지 않다.(히친스)" 등등 요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책들이다.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 기독교 서점에서는 이러한 서적들을 비판하는 책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왜 기독교를 대리지 못해서 안달이고, 기독교는 왜 이것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대응하고 있는까? 그것도 논리적인 모습이 아니라 결국은 서로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방향으로.

  기독교에 문제가 있음을 본인은 인정한다. 기독교의 정치화, 케케묵은 반공 이데올로기, 주먹 구구식의 선교 정책, 무지를 조장하는 믿음의 선포 등등 기독교에서 아직도 고쳐야 할 부분들이 많음을 인정한다. 지난 역사 가운데에서 회개하고 참회해야 할 부분들이 수두룩 함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들이 아직가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한 명의 기독교인으로서 상당히 안타깝고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가지고 기독교는 위선이다, 거짓이다라고 말하는 히친스 식의 논리를 위험하지 않을가? 마치 생각하기 싫고 생각하기를 멈춘 사람만이 기독교를 옹호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너무 편협한 생각이 아닐까? 그렇게도 편협한 구원론을 비판하는 이들의 모습이 자신들이 비판하는 편협함과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을 왜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지난 역사의 과오 때문에 기독교의 긍정적인 역할들마저 부정되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한없이 답답할 따름이다. 자비를 팔아, 빈민을 팔아 개인적인 선교에 몰두했다 비판받는 테레사의 모습에는 분명 잘못이 있다. 히친스의 비판은 여기에서 큰 설득력을 얻는다. 정치에 개입하고, 자신의 논리에 갇혀서 다른 이들에게도 동일한 논리를 강제 주입하는 테레사, 기회를 이 대라 생각하면서 테레사를 선전 도구로 사용하는 가톨릭과 정치인들, 경제인들 이들은 모두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들을 가지고 모든 것들이 다 위선이라 말하는 히친스의 주장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허물이 있음으로 인하여 공적이 모두 사라진다는 식의 이야기는 비판이 아닌 비난이 아닐까?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막대한 부담감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나에게 쏟아질 비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 적어도 인터넷 상에서 기독교에 대한 생각을 개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외국에서 무신론자임을 선언하는 것 만큼이나.

  만일 테레사 수녀가 이만큼 유명하지 않았다면 히친스의 공격을 받았을가? 그냥 적당하게 유명해서 세계적인 명사가 아니었다면 히친스가 비판을 했을가? 결코 아닐 것이다. 히친스의 비판이 왠지 공허게 들릴 때도 있는 것은 그가 비판한 사람들이 굵직한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굵직한 사람들을 비판함으로 인해 그가 얻는 반대급부 때문일 것이다. 우상 파괴자, 이 시대의 진정한 석학.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그러한 모습을 통하여 당신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그렇게 비탙하는 테레사만큼이라도 빈민들에게 다가갔었는가? 역사상 많은 지식인들의 이야기들이 현실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이 아닐까?

ps. 책을 사고 아깝다는 생각은 잘 안한다. 만일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해도 대개 내용 때문이다. 그런데 이책을 사고서는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내용 때문이 아니라 책의 부실함 때문이다. 글자가 쓸데없이 크다. 노인들을 위해 만들어낸 책인가? 아니면 지면을 늘려 돈을 더 벌기 위함인가? 만약 일반 책의 글씨 포인트에 촘촘함을 더했다라면 최소한 책값이 1천원에서 2천원은 더 낮게 책정되지 않았을까? 왠지 해리포터 쪼개 팔기식의 상업주의 냄새가 나서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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