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엔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가 평소 그의 영화를 좋아해 볼 마음을 먹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영화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기에 보려고 했던 거다. 그런데 웬걸 그의 영화가 아니었다. 아마도 감독의 이름과 영화 제목이 어딘가 모르게 닮았다고 생각해 착각을 불러일으켰나 보다. 그렇게 멋모르고 보기 시작한 영화가 완전 빠져들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토니 타키타니. 하지만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마다 그람은 잘 그리지만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그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성인이 되어 어느 여인의 가슴을 그리는데 정교하지만 느낌이 없다. 그냥 인형의 가슴을 그리는 것만 같다. 그런 것을 보면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는 악단의 연주자로 그의 곁에 있지 않았던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까. 고독은 그의 친구다. 늘 조용하고 표정 없는 얼굴이다. 결국 그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우연찮게 한 여인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고독이 그의 친구였기 때문에 이런 것은 그의 생애 없을 줄 알았다. 그는 너무 많이 외로웠기 때문에 이젠 아내가 없으면 불안하다.


아내는 너무 사랑스럽다. 하지만 사랑스럽다는 건 사랑하기에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다. 아내에게 한 가지 흠이 있었으니 그건 옷을 사랑해도 너무 사랑하는 쇼퍼홀릭이라는 것. 화구 외에는 살 것이 없는 토니와 옷이 자신의 빈 영혼을 채워준다고 믿는 아내 에이코와의 결혼은 처음엔 완벽해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사는 옷과 신발은 집에 그득하다 못해 포화상태다. 결국 그는 가볍게 아내에게 옷 사는 것을 자제해 줄 것을 부탁하고, 아내는 노력해 보겠다고 답한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의 말에 허물어지고 극단적 선택인지 아니면 우발적 사고인지도 모를 사고로 죽고 만다.


        

다시 홀로 남게 된 토니는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며 그 흔적을 지워야 하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아내를 처음 만났던 방법 그대로 자신의 일을 도와줄 비서를 구하는데, 아내와 똑같은 사이즈와 발 크기를 가진 여자를 구한다. 그는 새로 온 비서에게 유니폼 삼아 아내의 옷을 입고 일해 주길 바란다. 그것을 통해 아내를 잃어버린 자신의 마음을 위로받고 싶은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 정말 빠져들게 만든다. 무엇보다 미장센이 갑이다. 영화는 처음 시작부터 어떤 공간을 보여주기보단 큰 창을 자주 보여준다. 어린 토니의 집 주방 창문, 성인이 돼서 그가 일하는 사무실 창문, 결혼한 후 신혼집 주방, 침실도 온통 큰 창문이 보인다. 시점은 (거의 대부분)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듯한 구도다. 관객의 관음증을 최대한 만족시키겠다는 전략인 걸까. 그게 또 호퍼의 도회적이면서도 쓸쓸한 이면을 보여주는 그림을 연상케도 한다. 입체적인 공간감을 일부러 배제하고 회화적 느낌을 극대화 시켰다. 또한 주요 등장인물이 등장할 때는 멀리서 슬로모션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와 등장한다. 그리고 간간히 보여주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숲. 일단 그런 것만 유심히 봐도 감독이 뛰어난 미술적 감각이 느껴진다. 


일반적으로 영화엔 가급적 내레이션을 안 쓰는 것이 좋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는데, 이 영화는 굳이 그걸 지킬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내레이션은 보통 등장인물의 생각이나 감정을 설명할 때 또는 낯설게 보기를 유도할 때 사용되겠지만, 이 영화는 연극에서의 방백처럼 등장인물이 직접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말하기도 한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쇼핑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아내가 토니의 말 한마디에 허물어지는 것을 보면서, 또 그런 아내를 사랑하는 토니를 보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린 어쩌면 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할 줄 모르고 그 사람의 옷이라고 하는 빈껍데기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죽어야 비로소 부재에서 오는 고독과 공허를 통해 그 사람의 영혼을 깨닫게 되는 인간의 비극성. 무엇보다 토니는 아내와 같은 사이즈의 여인을 구해 옷을 입게 하므로 위로를 넘어 광적으로 변해 가려고 하는 자신을 자각한다. 그런데 비해 졸지에 고급스러운 옷과 신발을 입게 된 토니의 새로운 비서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왜 울었을까? 뭔가 압도된 듯하다. 이 화려하고 멋진 옷을 두고 간 나오코는 어떤 여자였을까?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런 것처럼 감독은 현대인의 물질만능주의를 꼬집으려 했던 건 아닌지. 또 그것은 영화 초반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 토니의 여자의 가슴을 그린 것과 뭔가 연관성이 있어 보이기도 하다.


그런데 묘하게도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렇다.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다. 하루키 마니아라면 영화 제목에서부터 알아봤을 것이다. 하지만 난 하루키를 딱히 싫어하는 것도 아주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개인적으로 하루키 원작의 영화를 본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언젠가 <상실의 시대>을 본 적이 있는데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봐서 그런지 꽤 괜찮았다. 그땐 꽤 괜찮다는 표현을 썼지만 이 작품은 가히 좀 놀랍다 싶다. 보통은 원작을 영화화하면 잘해야 본전이란 선입견이 있기도 하지만, 내가 볼 때 이 영화는 하루키의 원작을 200% 끌어올린 작품은 아닐까 한다.


누구는 하루키는 장편에 강한 작가라고 하는데 그것에 반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오히려 단편에서 감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치즈 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이란 단편은 정말 도시에서의 가난을 위트 있게 그린 작품으로 그 이미지가 잊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루키의 단편집 <렉싱턴의 유령> 중에 나오는 이 작품은 어디서 영감을 얻었을까? 소소하게도 한 장의 티셔츠라고 한다. 마우리 섬에서 '토니'라는 서양식 이름에 '타키타니'라는 성이 붙은 기묘한 이름이 쓰인 1달러짜리 티셔츠를 구입한 하루키는 그 셔츠를 입을 때마다 토니 타키타니라는 인물이 자신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에 착안해서 이 이야기를 완성했다고 한다.  


감독은 또 그 작품을 보면서 머릿속에서 하나하나의 영상적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게다가 전편에 흐르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은 뭔가 고독하면서도 불안해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잘도 표현해 주었다. 이쯤 되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모든 예술인들의 뮤즈는 아닐까? 이제 마니아뿐만 아니라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필히 하루키를 알아야 하는 하나의 문예 사조를 이룬 것만 같다. 하긴, 그는 언젠가 오리지널리티를 얘기했었다.    


사람들은 인간은 어차피 고독한 존재니 고독을 벗 삼으라고 한다. 고독은 스스로 있는 존재임을 확증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의 고독은 늘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만들고 누군가를 향하게 되어 있다. 고독한가? 당신의 고독 끝에 누가 있는지를 직시해 보라. 그렇다면 그가 자신이 사랑해야 할 존재인지도 모른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랬다고 그 영혼은 바스러지기 쉬운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아무리 사랑해도 꽉 끌어안으면 쉽게 깨지는 크리스털 술잔 같은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하기보다 차라리 고독하기를 선택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어쩌면 하루키를 읽으며 자신의 고독을 위로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오랜만에 하루키의 소설이 읽고 싶어 졌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02-28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0-02-28 18:1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같이 있으면 외롭지 않아 좋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기도 하죠.
그게 인간인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페크pek0501 2020-02-29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작품을 상실의 시대를 비롯해 네다섯 권 읽었는데 썩 좋다할 것은 없었는데
신간이 나오면 또 사고 싶은 묘한 작가예요. 가끔 반짝이는 문장을 쓸 줄 아는 작가라서
그런지... 작가의 명성도 한몫 하겠지요.

stella.K 2020-02-29 15:15   좋아요 0 | URL
저랑 같으시네요. 이 작품 때문에 <렉싱턴의 유령>을 보고 싶기도 한데
영화가 훨씬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그럼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 읽고 싶단 말이죠.ㅋ
 

요즘 영화를 드문드문 보고 있어 별 기대 없이 봤는데 의외로 몰입도가 좋다.

나 역시 IMF를 거쳐 왔지만 그것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것을 영화는 상당히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치 다큐멘터리 극영화를 보는 듯하다. 영화는 그 시절 매스컴은 IMF를 어떻게 보도하고 있는지 편집해 보여주기도 하는데, 문득 그것을 보도한 당시의 공중파 앵커와 아나운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궁금하다.


                            

 

영화는 국가 부도의 날 네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한시현(김혜수 분)을 중심으로 어떻게든 국가의 부도를 막아 보려고 노력하는 부류다. 또 하나는 부도가 날 것을 예상하고 한몫 단단히 챙기는 즉 위기는 기회라는 걸 몸소 보여주는 윤정학(유아인 분). 그런 위기의 순간에도 어떻게든 성실하게 일하면 잘 살 수 있을 거란 막연한 희망을 품고 살다 희망에 배신당하는 갑수(허준호 분). 그런 국가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관료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는 재정국 차관(조우진 분)과 그에 편승하는 일파들. 그들은 그 시대가 그랬던 것만큼 한시현을 향해서도 여성 비하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갑수를 보면서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IMF가 있기 훨씬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내가 중학교 땐가, 전날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들어오셔서 다음 날 술병이 나서 출근을 못하셨다. 뭔가 일이 일어나도 크게 일어난 모양인데 어리다는 핑계로 차마 여쭤 보지 못했다. 하지만 가장의 무게, 조그만 사업체지만 대표로서의 무게가 얼마만 한 건지 조금이나마 알 것도 같았다. 갑수를 보면서 IMF 그 시절에도 살아계셨다면 똑같이 힘들어하셨겠지 짠한 마음이 들었다. 착하고 성실함만으로는 살 수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게 또한 서글펐다. 국민의 대다수가 갑수 같은 삶을 살지 않을까?         


하지만 반대로 갑수 같은 부류가 잘 살게 되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원래 자기네들이 목표한 것이 그것인 양 산다. 즉 남한테 피해 안 주고, 가장으로 가정을 건사 잘하고, 자녀들이 성장할 때까지 아프지 않고 잘 살아주는 것. 경제에 관해선 그다지 아는 바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한시현이 보여주는 캐릭터도 나쁘지 않다. 어떻게든 최악의 사태는 막으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정의의 사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번번이 관료적인 재정국 차관과 그 일파들과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똑똑하고 지혜로운 부류는 단연 아무도 믿지 않겠다던 윤정학이다. 경제라는 것, 자본이라는 건 언제나 그냥 있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여러 모양으로 그 모습을 바꾸는 도깨비 같은 것이다. 그것의 흐름을 알고 그것 위에 군림했을 때 엄청난 국가적 재앙에서 살아남았다.


국가 부도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IMF 구제 금융은 신청하지 않을 거라고 언론을 하나 같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 같이 실천되었다. 언론과 정치를 믿으면 안 된다. 그래 놓고 국민들의 금 모으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국민의 저력이라며 한껏 띄워 주기도 한다. 물론 그건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겠지만, 왜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 국민과 백성은 호구가 되어야 하는가. 뭐 그것까지도 좋다고 치자. 정치지도자들 눈에 우리는 개 돼지로 비치기까지 하지 않는가? 솔직히 영화를 보면서 좀 화가 났다. 영화는 영화로 보는 게 좋은데 그때를 너무 리얼하게 다루고 있으니 그냥은 봐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가 보여주는 대로 관료주의자들에 대하여 분노만 하면 안 된다. 


나아가 어떻게 애국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게 나라가 어려울 때 금이나 털컥 내주는 것만으로 애국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애국은 좀 더 공동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관객들은 영화가 보여주는 네 부류의 사람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수가 윤정학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물론 나쁘지 않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윤정학 같은 사람이 된다면 관료주의자들만큼이나 위험하다. 이 세상엔 갑수 같은 사람이 훨씬 많고, 갑수의 삶이 꼭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근면 성실하게 사는 게 뭐가 잘못인가. 하지만 그들 역시도 등 따습고 배 부르면 나태해질지 모른다. 그리고 관료주의자들은 비로 이런 점을 들어 개 돼지라고 표현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저 네 부류의 사람은 역사적으로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항상 있어왔다. 그렇다면 그들은 상호 작용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사실 관료들도 정신만 차리면 나라에 큰 일을 할 사람들 아닌가? 


분명한 건 국가 운영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린 분명 지나간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보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영화 보기를 좋아하지만 가끔 우연히 본 영화가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다. 이 영화가 그렇다. 한국전쟁이 있던 그해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재구성한 영화다. 그동안 들어보긴 했지만 구체적으로는 몰랐다. 영화를 보면서 부끄러웠다. 우리나라에 이런 역사적 사건을 왜 난 여태 몰랐을까.


영화는 러닝타임이 비교적 짧다. 한 시간 반이 채 안 되는데 구성도 좋고 잘 만들었는데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난 6.25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그때를 생각하면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고향을 버리고 다 피난했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특히 남쪽 지방일수록 피난의 필요성은 별로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설혹 피난을 염두했더라도 그전에 전쟁이 빨리 끝나 주길 바랐을 것이다. 또 그런 만큼 피난엔 시간차가 있었다.


전쟁이 나던 그해 7월만 해도 충청도의 노근리 마을은 정말 전쟁이 일어났나 싶게 평화로웠다. 어느 날 마을에 인민군이 쳐들어 올 것이니 주민들은 빨리 피난을 하라는 통고를 받는다. 긴가민가하는 마음으로 마을 사람들은 피난길에 오르지만 피난을 도와주겠다던 미군은 노근리 사람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마을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죽음을 당한다는 내용이다. 영화는 그때의 마을 사람들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묘사한다.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순박했는지, 얼마나 평화로웠는지, 정말 피난을 가야 하는지 가지 말아야 하는지 갈등하다 결국 다수의 뜻에 따라 너도 나도 피난을 떠나는 형국을 실감 나게 그린다. 언제나 그렇듯 그 가운데 반드시 대열에서 이탈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과연 그 가족들은 학살을 피해 살아남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대열에서 이탈했다고 해도 그들에게도 복불복의 상황은 마찬가지 아닐까.


그것을 보니 문득 영화 <타이타닉>이 생각나기도 했다. 침몰하는 배 속에서 우왕좌왕 살려고 바둥거리는 가운데서도 처절하게 살아남으려고 하느니 우아하게 죽겠다고 선실 자신의 방에서 평안히 두 손을 맞잡은 노부부 말이다. 물론 어차피 죽음을 맞이하지만 이렇게 사람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마음이 있다는 게 새삼 놀랍다. 그런 것처럼 그 피난 대열에서 이탈한 그 가족도 그런 마음 아니었을까? 살면 다행이고 이탈한 대가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러라지 하는 마음. 그 장면은 아주 짧게 보여주고 지나가지만 저런 순간에 나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 본다. 그때그때 달라요가 되지 않을까? 순간 살고자 원하면 나도 이리저리 뛰고 구를 테고, 사람이 살고 주는 건 전적인 하늘의 뜻이라면 끝까지 우아하려 하지 않을까.   


영화가 인상적인 건 양민학살도 학살이지만 사람들이 얼마나 순박한지, 이들의 일상이 얼마나 평온했는지를 충청도 특유의 사투리를 듣는 청각적 효과와 함께 어느 국민(초등) 학교 어린이 합창에서 극대화시켰다는 것이다. 또 그와 대비되게 이들이 얼마나 살고자 했는지는 철길에서의 아수라장과 굴다리에서 스스로 미쳐가는 상황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해 가을 그렇게 한바탕 폭풍을 치르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 싶게 하나둘씩 마을로 돌아오지만 역시 옛날의 그 풍경은 아니라는 것.


(내가 영화를 잘못 봐서일까) 영화는 이 양민학살이 왜 일어났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좀 얼떨떨했는데 찾아봤더니 미군이 북괴군이 잠입한 줄 오인하고 학살했다는 것이란다. 그럴 수도 있을까 싶다가도 좀 어처구니가 없다. 어떻게 양민을 북괴군으로 오인할 수 있단 말인가? 미군이 북괴군인지 양민인지 식별도 없이 작전을 펼쳤단 말인가? 이 영화가 아쉬운 건 마을 사람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에서 끝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영화는 나름 노근리 사건에 관심 끌기에 성공한 듯도 하지만, 그 후 이 사건을 두고 어떤 진상 규명과 재판 과정이 있었는지 자막으로만 간단히 보여주고 말아 궁금하다. 예상하긴 했지만 미군은 그 사건에 대해 함구했고 지금도 해결이 안 되고 있다고. 과연 아직도 역사 속에 묻힌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가 얼마나 많은 건지 알 수가 없다.   


영화는 특별히 누가 주연이랄 것도 없이 출연 배우들 모두가 주연이라면 주연이고 조연이라면 다 조연이다. 그 밖에도 알만한 배우들이 카메오로 출연했다. 특별히 박광정 배우가 눈에 띄어 좀 놀랐다. 이미 고인이 된 줄로 아는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했다. 그만큼 필름 상태가 좋았다. 알고 봤더니 상영 연도가 2010년이다. 그가 죽은 건 2009년이고. 그러니까 이 영화는 그의 마지막 유작이었다. 아까운 배우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태우스 2019-09-30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근리, 아주 오래 전 진보 언론들이 집중 조명했던 주제지요. 그게 영화로 나왔군요. 가슴아픈 비극이긴 한데, 그 어느 매체에서도 왜 그런 비극이 일어났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던 것 같네요. 무슨 이유를 대긴 댔지만 납득하지 못헀던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인종차별이 없었다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stella.K 2019-10-01 20:25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그래도 오래 전 방송에서 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때 관심있게 보지 못한 게 후회되더군요.
아시겠지만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암울한 게 많잖아요. 보면 막 화나고 그래서...
근데 제가 아주 잘못 보지는 않았네요.
영화를 보면서 내내 미군은 우리나라를 도와주러 왔다면서
왜 저렇게 무차별로 죽였을까 그랬거든요.
이 페이퍼에 넣진 못했지만 노근리를 다룬 책이 몇권있긴 하더군요.

그나저나 지난 주일 tv에서 뵙고 반가웠습니다.ㅎㅎ

2019-10-02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프리쿠키 2019-10-04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리카 돼지열병의 바이러스 매개체를 박멸하기 위해 그 지역의 돼지 전체를 도살하듯이, 암의 환부를 정상세포까지 폭넓게 잘라내듯이..
그 당시엔 누구나 노근리 주민이 될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반대로 압록강까지 연합군이 밀고 올라갔다가 38선까지 후퇴했을 때 북한지역에서도 엄청난 양민학살이 있었다합니다. 슬픈 일이네요.

stella.K 2019-10-04 16:10   좋아요 1 | URL
헉,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전혀 몰랐네요.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모르는 한국전쟁이 얼마나 많을까요?
우린 또 얼마나 피상적으로 한국전쟁을 알고 있으며...ㅠ
 

지금까지 영화 <만추>는 세 번 만들어졌다. 

최초의 <만추>는 1966년 이만희 감독이 고 강신성일과 문정숙을 주인공으로 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필름이 유실되어 볼 수가 없다. 그보다 더 오랜 필름도 보존되어 있는데 왜 이 작품은 유실이 되었던 걸까? 복구는 불가능한 걸까? 그나마 1981년도에 김수용 감독이 김혜자와 정동환을 주인공으로 해서 만든 두 번째 필름은 아직 건제하다.


        

                      


현빈과 탕웨이가 나온 <만추>를 언젠가 본 적이 있다. 감독이 워낙에 영화를 잘 만들기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현빈과 탕웨이 그리고 미국의 어느 안개 낀 도시를 보는 것만으로도 눈 호강하기엔 충분한 작품이다. 더구나 멜로 아닌가? 이번에 김수용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번 보았더니 비교해서 보는 재미가 꽤 남달랐다. 

  

이야기의 기본 틀은 같다. 우발적으로 남편을 살해한 여자가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시한부 석방으로 풀려난다. 우연히 기차 또는 버스 정류장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다시 교도소로 돌아간다. 돌아가면서 2년 후 석방되면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는 것이 기본 틀이다. 하지만 영화로서 보여주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보여주는 방식이 얼마나 다르냐에 따라 감독의 역량도 다를 것이다. 또한 그때마다 감독은 선배 감독에게 경의를 표했을 것이다.


왜 감독들은 세대를 달리하면서 <만추>를 만들까? 가끔 그런 영화가 있다. 유명한 건 아닌데 오래도록 기억에 남고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보석 같은 영화. 이를테면 <길>이나 <파이란> 같은 영화 말이다. 그런 것처럼 감독들 사이에서도 나라면 이 영화를 어떻게 만들까 오감을 간질이는 영화가 있을 것이다. 그게 김수용, 김태용 감독에겐 이 영화였는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영화감독이라면 생애 한 번쯤은 정말 괜찮은 멜로 영화 만드는 게 로망 아닐까? 그런데 <만추>만 한 작품이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해 아래 새것은 없으니.  


분명 김수용 감독의 작품도 당시로선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태용 버전을 보니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마치 똑같은 작품을 소설과 영화로 보는 것만큼이나 다르다. 김수용 버전은 인물 보단 이야기 구조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규모 있게 전달해 줄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면, 김태용은 캐릭터에 더 많은 초점을 맞춘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각각의 캐릭터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의 최대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앞의 작품은 다소 평면적인 느낌인데 반해, 김태용 버전은 상당히 입체적이란 느낌이 든다. 보여줄 것도 많고.    

                                         

                                   

 

사실 지난 세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사는 사람이 옛날 영화를 보기란 쉽지 않다. 그때 당시에는 꽤 세련된 연출을 구가한다고 해도 지나면 빛을 바라고 어딘지 모르게 촌스럽고 어색하다. 그건 요즘의 세련된 영화도 같은 운명을 지니게 될 것이다. 앞으로 10년만 지나도 어떤 평가를 받을지 알 수가 없다. 좀 미안한 말인데, 김수용 감독이 영화를 만들었을 그러니까 30년 전만 해도 영화에서 시나리오의 중요도가 얼마였을까 의문 스스러워졌다. (이미 했던 말이긴 한데) 영화판에선, 잘 쓴 시나리오를 연출에서 말아먹는 일은 있어도, 못 쓴 시나리오를 연출에서 살려내는 법은 없다는 것이 정설로 되었는데 왠지 이 말이 그 당시엔 별로 신빙성이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감독을 위한 예술이었던 만큼 제왕처럼 군림하고 시나리오가 연출보다 앞서는 것을 경계했던 것은 아닐까. 그랬다면 작품 자체로선 불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옛날 영화의 평점이 높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왜 관객들은 제작자의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낮은 평가를 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그건 확실히 퀄리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투자를 해야겠지만 투자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다.


현빈과 탕웨이가 나오는 <만추>는 확실히 시야가 깊고 넓다. 한마디로 <만추>의 글로벌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중 배우가 나온다는 것부터도 그렇고, 장소 역시 한국을 넘어 미국이란 나라다. 시나리오를 누가 썼는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잘 썼다. 언어의 유희를 극대화했다. 솔직히 어떻게 보면 영화는 여자 주인공 애나가 복역수이고 72시간 후면 교도소로 돌아간다는 사실 외에 진실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영화 속 거짓말은 의도되거나 일부러 가공된 것이기도 하다. 더구나 남녀 주인공은 영어란 공통어가 아니면 상대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언어는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데 방해되고 오해하게 만드는 것 같은데 오히려 사랑을 완성시켜 준다. 물론 영화니까 가능하겠지.


또한 등장인물이 구사하는 대사를 보면 뭔가 불온하고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사실 요즘 드라마 작가들 어떻게 하면 시청자의 귀에 걸릴까 고민을 참 많이 하는데, 사각의 브라운관을 앞에 놓고 그렇게 귀에 걸리는 대사를 듣는 맛이 없다면 우리가 왜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보겠는가. 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 뭐하나 딱 떨어지는 것이 없고 이건가 싶으면 저것 같고, 저것 같으면 이것 같다. 내가 내뱉고도 이것이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다. 바로 그런 불완전성을 잘도 포착해 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나리오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어느 부분은 친절해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넘어가 나중에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다. 예를 들면, 남자 주인공 훈이 애나와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에 내연녀를 살해한 피의자라는 것이 드러나는데 영화를 되돌려 봐도 훈이가 내연녀를 살해했다는 단서가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내연녀의 남편이 내 아내를 죽인 피의자 아니냐고 하는데 그렇게 우겨서 될 일은 아닌데 좀 불친절해 보인다.

 

사실 <만추>는 김지헌 작가가 1966년에 쓴 작품이다. 그는 평안남도 출신으로 해방이전에 서울로 이주해 경동중학교를 다니면서  영화 예술에 눈을 떴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 시나리오들을 탐독하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고 하는데 좀 놀랐다. 솔직히 우리나라 작가들은 소설 아니면 시를 탐독하면서 작가의 꿈을 키우지 않는가?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으며 꿈을 키웠다니. 게다가 얼핏 그 시기가 3,40년대였을 텐데 그 시절에 읽을 시나리오가 있었을까? 우리나라 영화판은 얼마나 척박했을까? 꿈꾸기 어려운 시대에도 꿈을 꿨다. 그런 걸 보면 이제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며 우린 너무나 쉽게 꿈을 접는 것은 아닐까 반성해 본다. 

 

 더구나 그의 시작은 1956년 미당 서정주의 격찬을 받으며 시로 등단을 했다고 한다. 195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종점에 피는 미소>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시작이 이러다 보니 유럽 예술영화의 시적 리얼리즘을 국내에 토착화시키면서 한국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고양시켰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각 시대 감독들마다 작업에 탐낼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만추>가 지금까지 세 명의 감독에 의해 세 번에 걸쳐 만들어졌다. 다음은 또 어느 감독이 똑같은 제목의 작품을 만들겠다고 나올지 모르겠다. 그런 감독이 있다면 미리 박수로 응원을 보내주고 싶다. 나는 기꺼이 봐줄 마음이 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알벨루치 2019-09-13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추>현빈과 탕웨이 영화 봤는데 기억이 가물가물~명절 입니다 건강하게 보내소서!

stella.K 2019-09-14 13:27   좋아요 1 | URL
ㅎㅎ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좋았고
김태용 감독이 확실히 영화를 잘 만드는구나 싶더군요.
고맙습니다. 카알님도 남은 연휴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blanca 2019-09-14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만추가 이렇게 세 번이나 만들어졌는지 몰랐어요.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stella.K 2019-09-14 13:28   좋아요 0 | URL
이만희 감독이 만든 영화를 볼 수 없어 아쉽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수용 감독의 <안개>를 보았다. 1967년 작이고, 한국의 알랑 들롱이라는 고 강신성일과 1200대 1이란 어마 무시한 경쟁을 뚫고 화려한 은막에 데뷔한 윤정희가 주인공을 맡았다. 오래된 필름인 만큼 이들의 리즈 시절을 볼 수가 있다. 특히 배우 윤정희는 문희와 남정임과 함께 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영화 속 윤정희 배우를 보면 정말 미인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연기력은 그다지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다. 아무래도 이 영화는 그녀가 배우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출연한 작품이나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아직도 어색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공교롭게도 19금이다. 하지만 그다지 수위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두 장면 정도 정사 장면이 나오는데 직접 촬영이 아닌 간접 촬영이다. 놀라운 건 야한 장면을 연출하기 보단 정사할 때 둘이 흘리는 땀에 집중했다는 것.이것만으로도 정사씬의 효과는 충분 이상이었을 것이다.     

 

문득, 그때만 해도 여자의 정조 관념이 강해 감독이 여배우에게 조금만 노출 장면을 주문해도 영화를 찍네 마네,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란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과연 저런 정사 장면은 어떻게 찍었을까 싶기도 하다. 여배우의 노출 장면은 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아는데, 한간의 소문에 의하면 그 노출 장면에 대역을 썼다고도 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과연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 영화는 소설가 김승옥의 유명한 소설 <무진기행>을 스크린에 옮긴 것으로 각색에도 직접 참여했다. 이 영화의 자료를 찾느라 검색을 해 봤는데, 영화 제목에 안개라는 단어가 들어간 작품이 의외로 꽤 많다는 걸 알고 좀 놀랐다. 하긴 영화에서 안개는 꽤 유용한 효과를 낼 것이다. 뭔가 신비하고, 이것과 저것의 명확한 구분을 할 수 없거나 지연시킬 때 안개만큼 유용한 도구도 없을 것이다. 특히 영화는 염세적이기도 하고, 약간의 미스터리적인 요소도 있는데 그럴 때 안개는 적절하게 잘 사용됐다. 그리고 그것을 작품에 활용할 생각을 했다는 건 당시론 좀 앞선 측면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감독의 연출력이 뛰어나다. 저 시대에 저런 연출을 하다니 놀라울 정도다. 흑백이라는 점이 좀 아쉽기도 했는데, 현대에 일부러 흑백 필름을 사용하는 감독도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어색할 것은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영화 중 남녀 주인공의 첫 데이트 때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그 유명한 정훈희의 <안개>를 부른다. 물론 립싱크겠지만) 반주를 제대로 넣어 노래를 부른다. 아마 그 장면에서만큼은 감독이 뮤지컬 기법을 살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지금이야 별스러운 게 아닐지 모르지만 당시로는 쉽지 않은 작업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스토리는 새삼 진부해 보이기도 하다. 소설 <무진기행>은 워낙에 유명한 작품이라 지금도 문학도는 물론이고 일반 독자들에게 회자되는 작품이다. 나도 읽은 기억은 나는데 내용은 기억에 없다. 영화를 보니 남녀의 속물적인 심리를 대사에서 드러내기도 하는데, 처음엔 이 작품도 권위적인 남성주의 영화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영화의 흐름상 그건 좀 의도된 것 같다. 예를 들면 남자 주인공 집에 고용된 운전기사가 딸 쌍둥이를 낳았다며 은근 자랑을 하지만, 겸손의 의미긴 하지만 축하를 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딸 쌍둥이를 낳은 걸 가지고 무슨 축하냐며. 주인공 역시 거절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요즘으로선 있을 법한 일은 아니다. 쌍둥이가 어디 흔한 일인가? 그걸 어떻게 별것 아닌 일인 양 하겠는가. 또한 남자 주인공의 친구 세무서장(이낙훈 분) 은 여자 주인공(윤정희 분)에게 마음이 있으면서도 출신 성분이 별 볼 일없으면서 까장을 떤다고 흉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을 가감 없이 다룬 것을 보면 당시의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에 뭔가 비판을 가하고 싶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영화는 뻔하게 흘러가는 인생의 허무함과 나른함을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보여며 일탈의 욕망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도 만족을 모르는 인간이 다시 무진을 떠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보는 나의 입장에선 뭔가 석연치 않다. 그렇다면 여자란 뭐란 말인가. 남자는 잠깐의 휴가를 얻어 고향인 무진으로 돌아온 거고, 거기서 짧은 기간 동안 여자를 만나 욕정을 채우고 떠나지만 남자를 이용해 무진을 떠나고 싶어 했던 여자는 그대로 남겨진다. 과연 후에라도 남자에 의해 여자는 뜻을 이룰까? 그건 누가 봐도 부정적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작품은 여전히 남성주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긴 60년 대면 아직 우리나라에 여성 문제가 뭔지 제대로 논의되지도 않았던 때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와 원작은 다시 만들어지고 써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김승옥은 남자의 관점에서 <무진기행>을 썼다면, 누군가는 여자의 관점에서 다시 써야 하지 않을까. 


영화에서 고 강신성일이나 윤정희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작품 활동이나 이런저런 활동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려왔지만, 영화에서 남자의 친구 역으로 나왔던 세무서장의 이낙훈 배우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그가 미국 H대 유학파라는 게 알려지고, 외모에서 풍기듯 선 굵은 연기를 하다가 어느 날 브라운관에서 사라진 배우다. 70년 대 한창 반공의 시대에 <추적>이란 반공 드라마를 기억한다. 남파된 간첩을 잡아내는 수사물로 거기서 그는 수사반장 역을 맡았다. 지금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 M본부에서 <수사반장>이 한창 인기를 구가하고, K본부에선 나시찬이란 배우를 앞세워 <전우>란 드라마를 내보내고 있을 때, 아직 통폐합으로 사라지기 전 TBC에선 대항마로 이 드라마가 방영했을 것이다. 그 드라마 이후 난 TV에서 본 기억이 없고,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의 생몰연도가 1998년이다. 분명 이른 타계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생각 보단 길다. 타계할 때까지 작품 활동도 꽤 했다.  

                                           영화 <배덕자(1976년)>의 한 장면

 

그를 이 영화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다시 보니 많이 그립다. 배우는 꼭 잘 생긴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며 진정한 연기력으로 하는 것임을 몸소 보여줬던 배우는 아닌가 싶다. (또 그래서 상대적으로 잘 생긴 배우는 연기를 못한다는 속설이 있기도 했다. 요즘엔 별로 통하는 얘기도 아니지만.)   


오래된 유럽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한데 감독의 저력이 대단하다 싶다. 나중에 다시 한번 봐야 할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9-09-03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또 한편의 레전드 영화를 보셨군요.
이낙훈, 당연히 기억하지요.
나중에 이분이 외화 번역도 하셨다는 것을 알고 놀랐는데 해외유학파였군요.
<추적>이라는 반공드라마도 저는 생각나는데 전 수사반장을 더 좋아했지요 ㅋㅋ

stella.K 2019-09-03 14:51   좋아요 0 | URL
아, 번역할 수도 있었겠네요.
제가 듣기론 하버드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어려운 시절 하버드 유학파라면 대단한 거죠.
어려운 공부해서 왜 하필 배우를 할까 싶은데
옛날엔 딴따라라고 낮게 봤잖아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아무나 연기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영화 강추합니다.
옛날 배우들라 좀 뻣뻣하긴한데 연출력은 요즘 감독들 못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김수용 감독이 요즘 감독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