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오베린(Russell Oberlin)이나 파울 아벨 도 나씨멘토(Paulo Abel do Nascimento) 혹은 지미 스캇(Jimmy Scott)과 같이 Falsetto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옛날 카스트라토의 목소리를 내는 경우(매우 드문 경우고, 이름하여 endocrinological castrato라고 함. Kallmann's syndrome이라고 불리움)는 호르몬 분비의 이상으로 인하여 변성이 되지 않은 경우인데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 카운터테너는 아주 특별한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 특별한 교육이라 함은 첫째, 가성발성의 특수한 발성법과 둘째, 이들 카운터테너들이 주로 부르게 되는 바로크 오페라 및 이들을 위해 특별히 쓰여진 레파토리의 연구이다.

보통 카스트라토와 카운터 테너를 음악용어에서 엄격히 구별하는데 이는 소리내는 방법이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카스트라토는 변성기를 겪지 않은 남성이 소프라노 파트를 담당한 경우이고 카운터 테너는 변성기를 이미 거친 남성이 가성에 의해 여성의 알토 파트에 상당하는 음역을 담당하는 경우를 말한다. 가성에 의한 발성은 그 음역에 한계가 있어 카스트라토 만큼 높은 음역을 구사하기 힘든데 이로 인해 그들은 알투스(Altus)라고도 불린다. 모든 성악이 그렇듯이 음역은 개인마다 차이를 보이는데 일부 카운터테너들은 옛날 카스트라토 못지 않게 넓은 음역을 노래하는 테크닉을 구사한다. 유럽의 일부 성당 합창단과 궁중에서는 옛날 가성 발성을 남자 어린이들에게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교회음악에 필요한 높은 성부를 담당하게 하였다.

내용출처 : [인터넷] http://my.netian.com/~bjaehoon/second.htm, 재훈이의 classic park, 카운트테너와 카스트라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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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터 테너의 역사는 유럽 음악사와 전통 아랍 음악의 종교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전서 14장 34절에서 "...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 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어 볼 찌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라고 한것에 의해서 중세의 교회에서는 여자들의 교회 안에서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모하메드도 어느 날 한 남자가 노래하는 것을 듣고 젊은 여자들을 현혹시킬 위험이 있으니 크게 노래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여러 상황이 남성이 남성들 앞에서 혹은 여성이 여성들 앞에서 노래하는 경우를 제하고는 지금까지도 일부에서는 성별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연주를 제한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아마도 8세기경부터 가성(Falsetto)의 사용이 일반화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연주상에서 남녀의 구별을 뛰어 넘는 유일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서기 822년 술탄(회교도의 군주를 칭하는 말) 하룬 아르 라쉬드 시대에 당시의 유명한 가수 Ziryab이 당시 술탄의 지배하에 있었던 코로바도 (현 스페인 도시)에 와서 그 유명한 가성발성을 전하였고 이 기술은 트르바도르(당시의 방랑시인들)에 의해 다시 널리 퍼져 급기야는 로마 교황청에 근무하는 성악가들에게도 전해졌다.

당시 여성들의 교회 내의 음악활동을 금했던 상황에서는 이 발성법으로 인해 교회 내에서도 양질의 변화있는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600년 까지 가성이 거의 모든 성악 부문에서 압도적인 추세를 이루다가 사회의 구조와 상황의 변화에 의하여 그 역할은 카스트라토(Castrator, 남성 호르몬을 억제시켜 변성기 전의 소리를 낼 수 있도록 거세된 가수)에 넘겨졌다.

Farinelli가 이에 속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 훈련을 받아 음악이 영글은 데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남성의 신체적 특징(넓은 가슴, 단단한 성대등)에 힘입어 여자들이 흉내내기 힘든 예술의 경지에 이른 그들의 발성법은 그 이후 오페라 혹은 오라토리오에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였다.

카스트라토가 비인간적인 방법에 만들어 진다는것 때문에 그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19세기에는 거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유럽의 일부 성당 합창단과 궁중에서는 옛날 가성 발성을 남자 어린이에거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교회 음악에 필요한 높은 성부를 담당하게 되었다.

1922년 마지막 카스트라토였던 알레산드로 모레스키(Alessandro Moreschi)가 죽자 성인 남자 가수가 여성과 비슷한 소리를 내는 그 어떠한 발성법도 그와 함께 사라진 것으로 여겨 졌으나 1940년대에 알프레드 델러(Alfred Deller)와 80년대의 아리스 크리스토 펠리스(Aris christofellis)등에 의해 가성 발성은 다시 그 아름다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독일 등의 유럽 각국에서 일어난 바로크 오페라의 부흥은 이들 새로운 기성 가수들인 카운터 테너들에 의해 그 깊이를 더해갔다.

내용출처 : [인터넷] http://my.netian.com/~bjaehoon/second.htm, 재훈이의 classic park, 카운트테너와 카스트라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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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7-23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운터테너를 좋아하시나보군요. 저도요. 누굴 제일 좋아하세요?

stella.K 2004-07-23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세훈, 글구 임주혁(?)이던가? 그 정도 밖에 몰라요. 근데 제가 글을 쓰는데 필요할 것 같아 올려 본 거예요.^^
음악 하나 들었으면 좋겠는데, 누가 링크 좀 안 걸어주나요?^^
 

영화 ‘파리넬리’에서 등장하는 여성의 음역을 노래하는 남성 가수는 바로 ‘카스트라토’입니다.

이들은 16∼18세기 유럽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던 성악가로, 사춘이 이전에 거세하여 음질적으로도 소년이나 성인 여성에 비해 씩씩하고 순수하며 또 음역도 훨씬 넓습니다..

그래서 16세기 이후 가톨릭성당에서 많이 쓰였으며 17∼18세기의 이탈리아오페라에서도 많이 쓰였습니다.

그 후 성당에서는 이와 같은 비인간적인 행위를 금지시켰으며 오페라에서도 19세기 이후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죠.

20세기 후반 카스트라토가 사라지자 수술이 아닌 피나는 성악훈련을 통해 여성음역을 정복하려는 남성 가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영국 성악가 알프레드 델러(1912∼1979)를 기원으로 하여 현재 많은 카운터테너들이 활동하고 있다.

오늘날의 카운터테너는 카스트라토와는 다르며 가성(팔세토)을 구사하는 남성가수를 가리킵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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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95 2004-07-23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렇군요.. 옛날 대학다닐때 < 파리넬리 > 를 봤는데 남자 선배들이랑 봐서 낯 뜨거웠던 기억이 나네요....

stella.K 2004-07-23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기 낮 뜨거운 장면이 있었나요? 아, 저는 TV로 봐서 중요한 장면은 다 짤렸겠군요. 흐흐.

비로그인 2004-07-23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이 무더운 날, 영화 <파리넬리> 중, "울게 하소서"가 떠오르는 날...

stella.K 2004-07-23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러주세요, 냉열사님의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전출처 : mannerist > [조광화 희곡집] 悲劇精神의 復活(下)

 21/  96. 11. 11.

연극을 통해 관객과 대화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연극에서 실지로 이루어지는 것은 관객과의 교감이다.


작가들은 보통 세상에 할 말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쓰고,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다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다 더 본질적이고 강력한 현상은 정서의 나눔이다. 생각은 정서의 교감이 발생한 후에야 정리된다.


지식인 시대의 작가들은 일종의 사상가들이었고, 작품을 통해 생각을 나누는 것이 일반론이었다. 주제라는 것도 작가의 세계관이 반영되는 문장들이었다. 정서는 그 주제나 생각을 다루는 데서 파생되는 부수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관객을 실지로 압도하고 있는 것은 무엇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무엇으로 환기되는 정서인 것이다. 정서 그 자체가 주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공연장에서 커뮤니케이션 통로는 정서다. 그리고 나의 정서의 핵은 열정과 열정의 상실이다. 나의 주제는 열정 자체와, 그 열정을 상실함으로 일어 나는 복잡한 심경이다.




22/ 96. 11. 12.

생의 열정과 강력함을 억누르는 것들은 무엇인가? 도덕과 정의의 기만성이다. 이른바 합리적 사고라 하는 진리들의 폐단. 그것들은 연극에 치명적이다.


도덕과 정의를 폐기하면 이 사회의 혼란을 무엇으로 막느냐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은 이데올로기들이 강화될수록 혼란은 더욱 늘어만 왔었다. 마치, 법조문이 하나 늘어 갈수록 범죄가 늘어 가듯이. 상식과 금기와 권위의 부정어법은 개인에게 니힐리즘에 빠지도록 유혹한다. 사회를 위하여 개인의 생명력을 희생하였다. 이제는 생이 보상받아야 한다.


니체에 의지하여, 니힐리즘을 이기는 길은 권력(강함)에의 의지다. 역시 니체에 의지하여, 예술의 존재 이유는 우리가 진리로 망가뜨려지지 않기 위해서다. 이 기만의 세상을 희생시키는 길은, 최소한 멸망의 속도를 늦추는 강력한 제어 수단은, 활동적 생명의 힘이다.


연극은 위기라는 절망감의 유행. 무엇보다 연극에서 생명을 되살리는 일이 시급하다. 그래야 관객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뤄진다. 배우들의 표출하는 강력한 생의 힘으로 관객들을 충격시켜 그들의 억눌린 생명을 해방시킨다. 그것이 연극의 효용이다.




23/

웃음의 유행.


이제 무거움의 연극은, 비극은 외면당하는가? 외면당하는 것은 칙칙한, 기운 빠지는, 죽은, 관념의, 껍데기 등등의 연극이다. 무거움의 묘사가, 추함의 묘사가 강력하다면 외면당할 이유가 없다. 생명의 힘을 가진 비극은 여전히 관객을 사로 잡을 것이다.




24/ 96. 11. 15.

다가오는 가상의 세계. 그럴수록 절실한 생체의 역동성.




25/ 96. 11. 18.

내가 신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곳에 정열에 가득 찬 원형적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26/

비극은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비극은 생명으로 가득 찬 정열의 불러 일으킨다.


비극의 마력은 그곳에 숭고한 정열이 꿈틀 댐으로써 가능하다. 셰익스피어 비극은 무엇으로 가치있는가? 그곳에는 일찍이 보기 힘들던, 이후에는 더욱 사라져 간, 정열적 인간들만이 가득하다.


반면에 희극은 약함을 숨기고 위선과 기만에 찬 정열들을 비웃는 것이다.




27/

비극의 부활. 즉, 비극정신의 부활.


전형적 허리우드 영화에서 보듯이, 스펙터클로 위장된, 요란한 갑옷으로 위장시킨 가짜 영웅들은 정열을 타락시켰다. 진정한 비극은 인간의지의 숭고함, 섬세함, 강력함으로 우뚝 선 정열적 인간의 등장으로 부활할 것이다.




28/

정열이란 의지가 농염해져 감지할 수 있는 형태로 발산된 것이다.




29/

정렬의 효용.


진정한 정열의 인간은 만인에게 잠자던 정열을 촉발시킨다. 마치 태양이 만물을 자극시켜 생명을 일으키듯이. 그리하여 만인은 그 정열로 인해 생의 환희를 경험하게 된다. 비극은 우리가 잊어가고 있는 정열을 환기시키는 일이다. 비극의 정열은 병든 의지를 회복시킨다.




30/

정열이 갖춰야 할 덕목. 균형과 자제.


이상적인 정열은 만인에 폭력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타 정열의 희생을 담보로 하지 않는다. 그 스스로 정열적일 그때에야 위대하다. 그러니, 니체의 초인은 일면 뻔뻔스럽다.




31/

정열의 종류.


a. 생명 자체의 정열 - 스스로의 의지로 가득 찬 정열. 삶을 고양시키고 숭고해진다.


b. 파괴적 정열 - 정치적 권력 지향이 일으키는 잔인함.


c. 흡혈귀적 정열 - 옛 정열들이 이룩한 형식이나 조직에 숨어 자신의 약한 정열을 위장하는 자들. 일종의 죽은 이데올로기들. 무너진 가부장들의 생존방식. 권위적 지도자들의 위선. 말하자면 가짜 정열. 약한 정열이 택하는 비열한 실현 방법.


d. 소비적 정열 - 욕망, 충동, 감각에 자극된 격정 등. 정열을 가다듬어 숭고해지기는 커녕, 있는 정열마저 탕진하는 퇴폐.


e. 기만당한 정열 - 가짜 영웅에 자극받은 헛된 노력.


현대인의 정열은 d나 e가 대부분이다.




32/

정열을 기만하는 자본주의, 또는 상업주의의 전략.

a. 가짜영웅 - 허리우드 영화에서 미화된 폭력, 사회적 명사들, 정치권력자들, 재력가들. 무엇보다 그들의 입장에서 적용되는 ‘정의’라는 외침. 정열이 타락한 결과물.


b. 정열의 탄압 - 조직과 자본을 위한 희생. 희생을 합리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의 도덕. 건전한 사회유지라는 명목으로 억압당하여 이윽고 왜곡되고 마는 개개의 정열들.


c. 정열의 상품화 - 가상현실. 정열은 수많은 가상 물질들에 소비된다. 결국, 재투자 없는 자원은 탕진된다. 자신의 생명감을 상실한 채 허상에 탐닉하는 퇴폐.




33/

정열을 기만하는 연출 중심의 연극.


공연성을 주장하는 당대 연출 중심의 연극들이 도달한 곳에서 정열은 기만당한다. 그들의 초라하지만 마취시키는 변명들은 웃음, 재밌음, 볼 거리, 탈언어, 무대적 역동성 등이다. 그러나 소홀히 다룬 것이 있었다. 배우의 정열이 제거된 것이다. 그 빈 자리는 기고만장한 연출자의 정열로 채워졌다. 무대는 그럴 듯한 포장들로 가득 찬다. 그럴수록 배우는 왜소해진다. 배우들은 연출가가 고안한 갖가지 아이디어, 장식들에 의지해 간신히 서있다.


자신감에 찬 연출들은, 배우의 정열을 외면하고, 자신의 위대성을 증명하기 위해 갖가지 껍데기들로 무대를 채운다. 곧 이어 연극은 쇼로 타락하였다.




34/

정열의 확인.


강한 정열은 단지 스스로를 높일 뿐이다. 약한 정열은 고난을 통해 그 반발력으로 감지된다.


35/

의지 대 폭력. 정열 대 완력. 의지는 생명 자체다. 폭력은 생명을 위협한다. 정열은 감화시킨다. 완력은 강요한다.


위선적 인간은 위장되고 미화된 폭력에 감동한다. 미화된 폭력은 사실 약한 정열의 증거다. 약한 정열은 폭력을 통해 자신을 강요하고 합법화한다. 그러나 위장을 벗기면 비열한 의도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연약한 정열을 볼 수 있다. 그럴 경우, 위선자들은 폭력적이라고 돌팔매질을 한다. 미화된 폭력에의 감동은 비굴하다. 권력에 아부하는 것이다. 위장 제거에 경악함은 그들의 비굴을 들켰기 때문이다. 구역질이 난다.




36/

작가는 그 모든 정열들을 관찰하여, 위장된 신화를 걷어 내서, 정열의 원형들을 정직하게 드러 낸다. 배우는 그 정열을 만끽한다. 연출은 배우를 돕는다. 그때에야 비극은 부활한다. 숭고하도록!




37/ 96. 11. 19

고전적 비극이 정열을 환기시키는 방법. 성격적 결함을 가진 영웅이 강력한 고난을 당한다. 그 힘겨운 짐을 지느라 정열이 불려나온다. 이때 고난은 측량되지 않는 정열을 알아볼 수 있게 도와주는 계측기가 된다. 즉, 고귀한 성품과 고난은 정열을 가리키는 지시문이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후세들은 비극의 본질이 성격과 고난인 줄 알았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보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하여 가짜영웅이라는 괴물을 조제하였다. 이윽고 정열을 보는 감각이 무뎌져 간 관객들은 비극이 따분한 것으로만 여기게 되었다.


비극정신의 삶의 열정 자체에 고양되는 것이다.




38/ 96. 11. 21.

연극이 실험을 거듭하여 발전할수록 기개를 잃어 간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비록 세련되었다 해도 사로 잡지 못하는 연극이 늘어 난 것 아닌가. 조급해진 연극은 기개를 대신한 마취적 감각으로 관객에 아부하는 것 아닌가.




39/ 96. 12. 11.

문학적 연극은 시대에 뒤떨어졌는가?


아니다. 단지, 껍데기의 연극이 도태할 뿐이다. 비언어적 연극들도 쇼로 타락한다면 껍데기가 된다. 문제는 생동감으로 살아 있는 공연이냐 아니냐다. 진정한 연극은 인간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작가는 이상을 제시하고, 연출은 현실과 타협하고, 배우는 하루하루성실하게 살아 가는 생활인이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때 연극은 풍요로워진다. 그러나, 작가에 충실한 작가이기 어려운 시대다. 바로 이 시점의 대학로는, 포장만 남은, 그래서 허탈한 볼거리만 가득 찬,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오한 주제인 양 위장한, 우리들을 기만하는 연극이 주류다.


그러한 연극들은 진정한 극작가를 거부한다. 아니, 거추장스럽게 여긴다. 그들의 기만술이 들통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젊은 작가들이 수난을 당한다. 수난이라니? 우리 연극의 희망에게?




40/

갓 등단한 작가들은 기만의 연극으로부터 대학로 오리엔테이션을 받는다. ‘연극은 문학이 아니다’고. 그리하여 성공하고픈 신인작가들은, 공연이 되는 텍스트를 쓰고픈 신인작가들은, 구세대 작가들의 고리타분에서 벗어 나고픈 패기 찬 작가들은, 뭔가 새로운, 뭔가 연극적인 텍스트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작가정신이 아닌 연희적 테크닉을 나열하는 데 그치고 만다. 연희적 테크닉은 작가의 진정한 몫이 아닌데도 말이다. 작가가 텍스트에서부터 문학성을 포기한다면 작가는 없다. 대본작가가 있을 뿐이다.


대학로에 들어선 신진작가들은 인간에 대한 통찰과 세계관을 키울 의지를 제거당한다. 기만의 연극들은 당장 아쉬운 값싼 볼 거리 만들기를 부추긴다. 대본쟁이로의 강요. 이것이 우리 젊은 작가들의 운명이다.


아니 젊은 극작가는 없다. 사실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지 못하거나 공인받지 못한 작가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기만의 연극은 작가가 그의 세계를 세울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설혹 그 씨앗을 품었더라도, 애써 가능성을 발견해 주고 키워 주는 일이 없다. 실망한 작가는 대본쟁이가 되거나, 대학로를 떠난다.




41/

그러나, 작가들이여, 오만해지라. 연극적 氣의 바탕을 마련하는 극작가들은 그가 품은 기개와 이상만큼 오만할 필요가 있다. 힘찬 기운이 있다면, 아무리 문학적이고 말로 가득 찬 텍스트일지라도, 연극 창조자들을 자극시켜 창작욕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작가들이여, 기만의 연극을 누치 보지 말라. 눈치를 살피는 일은 연출이 할 일이다. 귿르은 극단 재정과, 관객의 기호와, 배우의 능력과, 기술적 한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연출의 엄살과 충고와 엄포에 귀를 닫아라. 눈치를 볼 사람은 연출이지 작가가 아니다. 우린 당당하게 자신의 세계를 주장하고, 연출은 현실의 제약 때문에 눈치를 준다. 그것이 각자의 역할이다.


부디, 연극이여, 작가의 오만을 관용으로 받아 주기 바란다. 그들의 오만은 천성이다. 큰 고기라야 다양한 요리를 내놓을 수 있다. 자신의 세계를 보이고픈 극작가들이여, 마음껏 오만해지십시오.


42/ 98. 1. 13.

무엇보다도 이 시대를! 이 시대의 관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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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annerist > [조광화 희곡집] 悲劇精神의 復活(上)

 

서문에 대신하여 - 悲劇精神의 復活




1/

연극창조는 나의 열정과 표현의지에 의해 행해진다.




2/

의지는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를 돌아 보면 쓸쓸하다. 나의 연극은 인간의 의지와 존재를 깨닫고 체험하고 싶은 수행의 과정이다.




3/

극작가들은, 연출가들은, 그리고 배우들은 시대의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4/

어떤 이들은 연극을 통해 부를 얻고자 하고, 이름을 얻고자 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 연극 자체를 위하여 사는 자는 얼마나 있을까. 아니면 연극함으로써 존재하는 자는 있는가. 그저 그의 호흡이 연극인 자는 있는가? 연극은 연극하는 사람의 삶에 어떠한 기여를 해야 하는가?




5/

연극은 심장에서 머리로 그리고 이제는 눈으로 옮겨 갔다. 나는 머리의 연극도 감각의 연극도 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연극을 가슴으로 되돌리고 싶다. 그 방법론은 신화시대에 숨어 있는 원형에 대한 탐구다.


이 시대의 연극은 브레히트와 사실적 심리주의에 병들어 있다. 그들에 의해 연극을 보면서 이해하고 생각하려 드는 관성이 생겼다. 모든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야 속이 편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감성으로 연극을 감상하는 것이 힘겨워졌다.


혹자는 감각으로 연극을 만드는 것을 감성적 작업과 혼동한다. 감각적 연극은 우리의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열정과 유리되게 만든다. 감각적 연극의 효과는 쓸쓸함의 확인이다.


원형적 연극은 우리가 진실로 바라는 욕망과 열정을 드러 내고 자극하는 연극이다. 너의 열정이 시키는 대로 터뜨리라. 원형적 연극의 감상에는 논리나 감각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니,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진다. 뛰는 심장의 박력에 온몸을 맡겨야 한다. 그 태도가 감성적 접근이다.


6/

카리스마 CHARISMA


ㄱ.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傳導上의 기능. 불가사의한 일을 하고 병을 고치며 예언하는 능력 등을 가리키는 말.

ㄴ. 사회의 지배자나 지도자의 선성불가침한 神威的 권위.


동아출판사의 국어사전에 나오는 해석이다.


7/

카리스마는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 연출의 카리스마와 배우의 카리스마는 어떻게 다른가?


연출은……. 끊임없는 정열, 스테미너, 샘솟는 창조력, 자유분방한 상상력, 강력한 추진력, 치밀한 조직력, 그리고 사람을 끌어당기고 휘어 잡는 지도력…….


배우는……. 범접 못할 분위기, 영적 신비로움, 그 앞에 무너질 것 같은 기운, 보여지는 것 이상의 어떤 존재, 다의미의 표정, 단호하고 범상찮은 움직임들, 한편 지극히 평범하여 친근한 인간미 등등…….


8/

대중성과 예술성, 그 미묘한 화해.


고도의 예술적 경지를 이룩하여 존경받고자 하는 욕망,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친근하고 쉬운 이야기로 가능한 많은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동시에 존재하여 연극인들을 괴롭힌다.


9/

연극은 시대를 역행하는가?


이 시대는 영상과 정보의 시대다. 그리고 조직이 무너지고 있다.


전세계는 상업주의로 통일된다. 첨단의 이데올로기는 생명론적 세계관이다. 비경제적이고 소비적인 인간관계로 끈적거리는 연극단체들은 깔끔한 문화에서 점점 소외되고 있다. 보수적이다 못해 후진의 혐의까지 받고 있다. 연극은 새로움과는 멀다. 연극이 보여 주고 말하는 것들은 거의가 구태의연하다.


유일한 희망은 생명론적 우주관이다. 연극은 가장 생명에 충실할 수 있다. 그러나 연출 중심의 연극은 얼마나 생명으로부터 멀어졌었던가. 기호에 가까운 연출미학의 범람은 기계적 배우들을 양산시킨다.


작가는 더 이상 미래지향의 세계관을 제시하지 못한다. 소설의 작가는? 영화작가는? 이 시대는 무엇이건 절대적인 것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분위기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주장은 불온하고 위험스럽게 보여지는 것이 아닌가? 보통 말하는 권위의 실종이고 권위에의 거부다. 인터넷의 작가들은 표면적으로 절대적이지 않다. 사용자들의 자의적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10억이 사용자라면, 인터넷은 10억을 사로잡는 이데올로기다. 컴퓨터와 영상정보는 가장 자율적임을 위장하는 가장 강력한 절대다.


연극은 무엇을 주장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위기를 맞았다. 주장하면 관객은 거부감을 일으킨다. 주장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 흥미를 일으킬 수 없다.




10/

무거움이 모멸당하고 있는 이 시대에 남은 두 가지 무거운 주제.


1. 대중과 개인의 대립.

2. 남자와 여자의 대립.




11/

연극은, 특히 드라마는 무거움의 대표였다. 전통적으로 드라마의 주류는 비극이다. 드라마를 통해 인생의 심각한 문제들을 생각했었다.


연희적 연극들은 인생의 의미보다 볼 거리 제공이 주목적이었다. 극장주의적 연극은 좀더 발랄해지는 경향으로 간다. 그러나 가벼움의 영역은 연극 고유의 것이 아니다. 수많은 경쟁자들은 가벼움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한편, 심각한 연극을 거부하는 이때에, 이 시대의 마지막 무거움들을 가볍게 다뤄 낼 수 없을까? 아니 역으로 철저히 무거워 그 특이성을 무기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무엇이 관객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 될까?


가벼움에 대한 선호요, 나만의 스타일을 가지려는 경향, 그러면서도 보수적인 지금의 관객들과 어떻게 만나야 할까? 어려운 과제다.




12/ 96. 7. 8

집단이 표출하는 에너지. 개인으로 보자면, 늑대인간처럼, 시대와 동떨어진 어느 개인이 보여 주는 경이와 충격은 집단의 경우에도 가능하다. 스즈끼는 이질적 집단과의 충돌로 인한 연극적 경험을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이질적인 문화의 충돌만 얘기한다면, 늑대인간처럼, 신기함만을 쫓을 우려가 보인다. 문제는 그 집단만의 문화적 파워와 대중의 보편적 의사소통 체계와의 조화다. 그래서 스즈끼는 가부끼 집단의 기호화된 연극언어를 언급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집단은, 어떤 집단성으로, 어떤 연극언어를 만들어 낼 것인가?


13/ 96. 10. 30

신화는 일정한 문화집단을 유지시키는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신화는 그 성운들의 무의식이 구현된 것이라기보다 성원들의 무의식을 의식화시키기 위한 교묘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성원들은 신화를 통해 집단의 바라는 바를 자신이 바라는 바로 믿게 된다.

나는 신화에 매혹당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실상은 원형에 매혹당하고 있었다. 신화는 역사 이후의 체제유지에 필요한 일종의 이데올로기라면, 원형은 역사 이전의, 조직 이전의 생명체로서의 개인이 갖는 동물적 욕구와 의지다. 어떤 ‘조작된 신화’는 집단의 유지를 위해 원형의 바라는 바를 왜곡 변형한다. 원형은 신화의 힘에 의해 억압당한다.


나는 그렇게 억압당하여 고통받고 있는 동물적 원형에 주목한다. 그 동물적 원형들은 때로 신화적 세계를 위협하고 파괴시킬 수도 있다. 때문에 어떠한 집단의 신화를 위협하는 동물적 충동을 되살리려 했을 때, 그 집단의 방어적인 공격은 충분히 예상된다. 나는, 이미 그 신화의 방어벽을 호되게 당하고 있다.


내 작품들에서, [꽃뱀…….], [오필리어], [여자의 적들(가마)], [남자충동], 가족의 신성함을 해치는 설정들, 특히 친족을 살인하는 설정들은 가족신화에 거부감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교육받은 신화를 한 꺼풀 벗겨보면, 생명력으로 가득 찬 인간의 참모습이 있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나는 신화에서 출발하였지만 사실 ‘조작된 신화’와 정면으로 싸워야 할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자, 이 신화의 벽을 어쩔 것인가?




14/ 96. 11. 1.

문화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형식이 치밀해지고 기교가 세련되어진다. 그러나 그럴수록 형식과 기교를 있게 한 에너지와 정서가 가려진다.


문화가 발전한다는 것은 두 가지 방법으로서다. 하나는 고도로 세련된 방법론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좀더 많은 사람들에 공유되도록 공통의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늘려 간다는 것이다. 전자는 일반 대중이 향수하기에 어려워지고, 후자는 대중 취향에 아첨하게 된다. 어느 것이든 문화를 촉발시켰던 그 무엇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이다.


서구의 연극이 그러한 길을 걸어 한계에 부딪쳤다. 잘 만들어지고, 세련된 공연이지만 에너지를 상실해 간다. 연극은 더 이상 개발해 내야 할 새로운 방법이 별로 남아 있질 않아 보인다.


그럴 때에 해답의 한 방법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연극의지를 촉발시켰던 그 무엇으로. 그것은 생의 의지다. 진정한 연극의 가치는 배우가 발산하는 ‘생체 에너지’를 호흡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문화를 의심하고, 신화의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순수했던 몸의 바라는 바를, 영혼의 저 깊은 속에 감금되었던 원형들에 주목할 필요가 절실하다.




15/

내 연극의 주인공들은, 이상주의의 억압 속에 사그라지는 ‘생의 의지’로 고통받은 자들이다.


역사상 존경받는 문화작가들은 거의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나 싶다. 그들이 페시미즘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조차도. 왜? 작가들은 나름으로 이 세상을 파악하여, 희망을 보면 본 대로, 부족함을 느끼면 그것을 메꿔 줄 이상향을 꿈꾸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작가란 기실 꿈꾸는 자가 아닌가.


또한 그 문화의 수요층인 독자들로서도 고단한 현실을 이겨 나가게 할 가치있는 수단은, 작품 속의 이상향들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 이상주의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우리의 문학유산은 긍정적이고 온건하고 인간의 비전을 옹호해 온 것이다. 참으로 비관주의적인 작가에서조차 이 비관적인 삶에서 탈출하고자 의자하고 지혜를 짜내는 가련한 노력들을 보아 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강한 의지를 가진 주인공이 등장할수록 독자들은 열광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참으로 그러나, 이상주의자가 제시한 비전은 항상 우리를 약간씩 앞질러 간다. 아, 맛볼 수 없는 이상향이여! 그들은 변명하기를, 꿈을 꾸고 있는 인간이 아름답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망각하고 있다. 저 멀리 이상향을 바라보느라 여기 이곳에 있는 누추하고 추악한 실존을 망각하고 외면하고 있다. 이상주의의 극은 페시미즘에 다름 아닌가.


꿈꾸는 일은 소중함에 틀림없다. 그러나 미래의 달콤함에 마취되어 실존의 나를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의 추악함 비열함을 정면으로 응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모습이기에. 바로 나이기 때문에.


이상주의의 달콤함에 젖어 버린 이 시대도 때로 실존을 그려 내기는 한다. 그러나, 그들이 수용하는 실존이란 고작, 왜소하고 소극적인 인물들이다. 만약, 실존의 가장 강렬한 특징인 ‘생에의 의지’를 위선적 신화로 위장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 낸다면, 이상주의자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게 될 것이다. 순수한 생의 의지는 이상주의자들의 비전을 일시에 무너뜨릴 수도 있는 파괴적 열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으로 그러나, 우리에게 ‘생에의 의지’가 이다지도 약화되어 가는 것을 방관한다면 삶은 얼마나 허탈한 것이 되고 말 것인가. 아무튼 지금 이 시대처럼 실존이 푸대접받던 때는 없었을 것이다.




16/

꿈을 실현시켜 주는 드라마 주인공들은 보통 영웅적 인간형들이다. 온갖 역경을 뚫고 초인적 의지를 관철시킨다. 나는 영웅을 탄생시키기 위한 희생들에 주목한다. 영웅 스스로의 희생이 아니라, 영웅 주변의 희생을…….


신화의 주인공들은 영웅들이다. 그들은 한 민족이나 국가를 탄생시키고 인류를 구원하기도 한다. 마땅히 존경받을 인물상들이다. 지금까지도 이야기거리의 주인공들은 거개 영웅의 변형이다. 지극히 평범한 인물을 내세울지라도 무언가 훌륭한 면모를 통해 감동시킨다. 영웅이 이야기의 주인공임은 고대나 현대나 별 변화가 없다.


그러나 영웅은 극소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웅에 의해 희생당하거나, ‘영웅 지향’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산다. ‘짐’이라니!


‘햄릿’, 그는 가족의 불화를 가족 내에서 끝내지 못하고, 그 영웅적 성격으로, 플로니어스 일가를 몰살시킨다. 난 레어티즈와 함께 분노한다. 레어티즈가 햄릿보다 비열하고 못난 행동으로 스스로의 죽음을 재촉했다고 아무리 웅변해도, 햄릿의 딱한 비극적 처지보다는 레어티즈의 비열한 분노에 더욱 공감한다.


보라! 영웅, 그 선한 자들의 횡포를! 나는 분노한다. 그가 아무리 긍정적 가치를 지녔더라도, 그의 힘으로 나의 가치가 위협받는다면.




17/

우리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가치들은 정말 타당한가. 혹시, 우리들의 생명을 죽여 가고 있는 것은 아니가. 신화처럼 자리잡은 건전한 시민의식은 우리 대다수를 위한 것인가? 혹시, 소수의 영웅이나, 그 영웅에 빌붙어 사는 무리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18/ 96. 11. 9.

정의는 없다. 권력은 있다. 정의는 권력자들의 체제 유지적 이데올로기다. 정의를 주장하는 모든 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권력에 봉사한다. 이것이 세계다.


선악은 없다. 미추는 있다. 악은 불쾌함을 일으키는 모든 것들이다. 관객들은, 미학적 묘사에 성공한다면, 무대의 인물이 아무리 악마일지라도 매료당한다. 이것이 예술이다.


세계나 예술이나 그 얼마나 허위로 가득 찼는가. 온통 허영 덩어리들이다. 신화만큼이나 조작의 냄새가 농후하다. 심지어, 나 또한 세계와 예술에 많은 부분 봉사한다. 구역질이 난다.


어떻게 해야 나의 참 생명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19/

연극에서 문학성과 공연성의 싸움. 무엇이 더 연극의 본질인가 하는 논쟁이라 할 수도 있다. 텔레비전, 영화, 멀티미디어의 공격에서 살아 남고자 하는 연극인들의 악전고투가 연극만의 것을 찾으려는 노력의 배경이다.


지금 이 시점, 그러한 노력들은 연출가 중심의 다양한 퍼포먼스적 성과물들로 해결점을 찾아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지나친 공연성 추구는 너무나 많은 자리를 연출가들에게 양보함으로써, 쇼가 되어 간다. 연출가들은 기본적으로 방법론자들이다.


연극의 본령은 인간이다. 특히, 인간의 본질, 깊은 곳의 열정, 생명력이 나의 관심사다. 생명이 껍데기들과의 싸움으로 인해 지쳐 쓰러진 모습도 나의 묘사 대상이다. 연극의 논쟁들은 인간을 보이기 위한 이념이요, 장치요, 기교요, 아이디어이고, 심지어 잔재주일 뿐이다.


결국, 연극의 본질에 가까운 영역은 배우다. 배우를 통해 인간의 열정을 되살려 내는 일, 그것이 연극의 본질이다. 그에 비하면 공연성도 문학성도 하위개념이다. 문학성의 지나친 사변도, 공연성의 지나친 쇼도 모두 경계해야 할 일이다. 인간의 본질이 아닌 다른 무엇에 집착하면 할수록, 이미 그것은 연극 아닌 다른 어떤 장르로 향하는 것이다.


연출도 작가도, 배우를 돕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배우는 마땅히 자신의 생명을 찬양할 줄 알 만큼 정열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생명이 방해받을 때 분노하거나 좌절할 줄도 아는 예민함을 지녀야 한다.




20/

生 그 자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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